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 킬미, 힐미의 등장인물인 석호필(킬미, 힐미)
[clearfix]'''나는 강하고(石) 굳센 호랑이(虎)의 마음으로 한국인에게 필요한(必) 사람이 되겠다.'''
역사채널e - The history channel e_34번째 민족대표, 석호필
1. 개요
영국 태생의 캐나다의 장로교 선교사이며, 수의사로서 세균학과 위생학을 강의한 교수, 외국인 최초로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대한민국 독립유공자'''이다.
일제강점기의 조선과 독립 후의 대한민국에서 활동하였으며, 제암리 학살사건의 참상을 보도한 그의 활동을 기념하는 뜻에서 “3·1 운동의 제34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가 만든 한국식 이름 석호필(石虎弼)은 오늘날 Schofield, Scofield 또는 이와 비슷한 이름을 쓰는 외국인의 별칭이 되었다.[1] 한국의 개신교인들이 존경하는 대표적 개신교인중 한분이다.
2. 생애
2.1. 출생과 성장
1889년 3월 15일 영국 워릭셔(Warwickshire) 주 럭비(Rugby)시에서 태어났다.[2]
1897년 아홉 살 때 여름, 아버지가 근무한 클리프 대학교(Cliffe College)의 조선인 유학생 여병현(呂炳鉉)을 처음 만났으며 이날 그는 처음으로 코리아(Korea)라는 동방의 나라에 관하여 알게 되었다.
1905년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으나 성적은 좋지 못하였고 집안이 여의치 않아 진학을 하지 못했다. 그는 체셔 주(Cheshire)의 어느 농장에서 세 끼를 먹여주는 조건으로 노동에 종사하였고, 노동자의 비참한 생활과 그들의 앞날에 관하여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저임금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의 곤궁한 생활을 목격하고 더욱 그들의 편에 서게 되었다.
1907년 그는 결국 자유와 일할 자리, 그리고 공부할 곳을 찾아 캐나다로 이민하여 한 농장에서 반년을 일하자 대학에 들어갈 만큼의 돈을 벌게 되었다. 가축을 다루면서 수의학(獸醫學)에 큰 관심을 갖게 되어 토론토 대학교 온타리오 수의과대학에 입학한다.
1910년 대학 2학년 때 소아마비를 앓아 지팡이를 짚게 되었음에도 졸업할 때에는 전과목 A의 수석 우등생이 되었다.
1911년 논문 <토론토 시내에서 판매되고 있는 우유의 세균학적 검토>로 토론토 대학교에서 수의대 졸업장을 받았다.[3]
1913년 9월에 앨리스 스코필드(Alice Schofield)와 결혼한다.
2.2. 한국 생활
1916년 봄에 한국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장 애비슨 박사(O.R. Avison; 한국 이름 ‘어비신(魚丕信)’)로부터 일제강점기의 한국으로 와 달라는 권유 서신을 받았다. 스코필드 박사는 가을에 아내와 함께 한국으로 왔으며, 어렸을 때 만난 여병현(呂炳鉉)을 다시 만난다.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 세균학과 위생학(衛生學)을 담당했으며, 근무 계약은 4년이었다. 그는 영어를 하는 목원홍(睦源洪)으로부터 한국말을 배워 한국말로 강의하였다.
1917년 그는 한국에 온 지 1년 만에 ‘선교사 자격 획득 한국어 시험’에 합격한다. 또한 자신의 한국식 이름도 만들었는데, 바로 ‘석호필(石虎弼)’이다. 그의 성인 ‘石’은 그의 굳은 종교적 의지를 의미하고, ‘虎’는 호랑이, ‘弼’은 돕는다는 뜻으로, 한국인을 돕겠다는 마음을 나타낸 이름이다. 스코필드는 한국의 여러 지명인사와 교제를 넓혔다. 그중에서 특히 기독교적인 사회운동을 YMCA 총무직으로 실천하던 이상재(李商在) 선생, 김정혜(金貞蕙) 여사를 존경하였고, 뒷날 김정혜 여사를 수양 어머니로 섬겼다.
2.3. 제암리 사건을 세계에 알리다
1919년 2월 5일 3·1운동 거사 준비로 이갑성(李甲成)과 몰래 만났으며, 3.1운동을 위한 해외 정세파악일을 맡게 된다. 또한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만세시위를 하는 민중들과 일본의 시위자에 대한 탄압을 이갑성씨의 의뢰에 따라 사진으로 찍고, 글로 적어 해외에 알리기도 하였으며, 4월에는 수원군 제암리에 가서[4] 일본군이 제암리 주민들을 제암리교회에 몰아넣고 학살한 제암리 학살사건으로 잿더미가 된 현장을 스코필드 자신의 표현대로 '(일본의 만행에 대한 분노로)떨리는 손'으로 촬영,〈제암리/수촌리에서의 잔학 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또한 5월 일본인이 운영하는 영자신문 'Seoul Press' 지에 서대문 형무소에 대한 글을 올리고 당시 노순경, 유관순(柳寬順), 어윤희(魚允姬), 엄영애 등이 갇혀있던 서대문 형무소(여자 감방 8호실)를 직접 방문한다. 수감자에 대한 고문 여부를 확인한 뒤 하세가와 총독과 미즈노 정무 총감 등을 방문하여 일본의 비인도적 만행의 중지를 호소하였다. 물론 그가 활발한 독립운동 기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영일동맹으로 영국계 캐나다 사람인 스코필드를 일본에서 간섭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2.4. 추방 그리고 다시 돌아온 영웅
1920년 3·1운동 견문록 원고의 제목을 《끌 수 없는 불꽃》(Unquenchable Fire)라고 붙였다. 그해 4월, 강도를 가장한 스코필드 암살미수 사건이 그의 숙소에서 일어나, 그 달 학교와의 근무 계약을 마치고 캐나다로 돌아갔지만, 여전히 캐나다에서도 한국인을 열심히 도왔고, 1926년, 한국에 일시 방문하였다.
1958년 대한민국 정부가 광복 13주 기념일 및 정부수립 10주년 경축 식전에 국빈으로 스코필드를 초빙하였다. 서울대학교 수의과 대학에서 일하기를 자원하여 수의병리학을 맡았다.
1959년 한국일보에 2·4정치파동에 관한 소견을 기고하였다. 집안일을 정리하려고 캐나다에 일시 귀국하였다가 9월에 돌아왔다. 남북미와 유럽에 있던 그의 친구들이 “스코필드 기금(The Schofield Fund)”을 설치하여 그를 도왔다. 이후로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글을 쓰거나 교육 장려 활동을 하며 지냈다 말년에는 박정희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통해 고급 아파트에서 거주하며 말년을 보내었다
1968년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훈받았다.
1970년 4월 16일 대한민국 국립중앙의료원에서 별세하였다. "자신이 사망하면, 한국 땅에 묻어주고 돌봐오던 소년소녀 가장들을 보살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후 한국의 독립운동에 기여한 업적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이 이야기는 KBS 스펀지 189회와, 2017년 11월 5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등장했다.
3. 여담
- 수의대 교수시절 가난한 학생들과 불쌍한 시민들에게 봉사를 하고 살았는데 그 일환으로 했던 영어교실에 참가했던 이들 중에 정운찬 전 총리와 김근태 의원 등이 있었다. 이들은 스코필드 박사가 만든 스코필드 장학회에서 주는 장학금으로 학비를 해결하기도 했다.링크
- 그래서인지 현충원 묘역에 박사의 마지막 유언 "내가 죽거든 한국땅에 묻어주시오.[5] 내가 도와주던 소년, 소녀들과 불쌍한 사람들을 맡아주세요."라는 문구가 비석에 새겨져 있다. 그의 헌신적인 봉사정신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 익히 알려졌듯이 석호필이 재조명을 받은때가 프리즌 브레이크였는데, 주인공의 이름이 스코필드. 그의 이름을 위트있게 부르기위해 팬들이 석호필이란 이름을 붙였고 그 덕택에 재조명 받게 되었다.
- 현재의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세브란스 병원(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의 병리생물학 연구의 초석을 닦으며 대한민국 의학사에도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 캐나다 토론토에 그의 동상이 있으며 온타리오 수의 대학[6] 건물 안에 기념관이 있다. 정부가 캐나다와의 우호증진을 위해 많이 힘쓴 덕택인듯 하다.
- 독립운동으로 가려져 있는 부분인데, 사실 수의병리학 분야에서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업적을 남긴 연구자이다. 1920년경에 캐나다로 돌아가있을 때 말이나 사슴 등의 가축이 픽픽 쓰러지는 괴질의 원인이 지혈작용을 억제하는 어떤 독초 때문이었음을 밝혀낸다. 이 독초에 들어있는 물질은 나중에 규명되어 오늘날까지 의료 현장에서 매우 중요하게 사용되는 약물인 vitamin K 억제제, 즉 와파린의 합성에 기여하게 되었다. 출처
[1] 프리즌 브레이크에서 스코필드 역할을 맡았던 웬트워스 밀러가 유명하다. 팬들이 스코필드를 애칭으로 부른건데 실제 석호필이 있는 줄은 나중에 알았다고 한다.[2] 지금 이곳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스코필드 박사를 위해 세운 기념비가 있다고 한다.[3] DVM : Doctor of Veterinary Medicine. 이 학위는 캐나다에서는 박사, 한국에서는 석사로 취급된다.[4] 일본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수원역에서 제암리까지 자전거를 타고 이동했다고 한다. 제암리를 지나가는 9802번을 타고 가면 이 거리가 상당히 만만찮은 거리임에도 불구하고(수원역에서 약 1시간은 걸린다) 자전거를 타고 간 스코필드가 실로 대단하다.[5] 호머 헐버트 역시 석호필 선생처럼 한국땅에 묻히길 원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유언대로 사후에 한국 땅에 묻혔다.[6] 현재는 궬프 대학교 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