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김근태의 역임 직위 '''
[ 펼치기 · 접기 ]






'''대한민국 국회의원 (서울 도봉구 갑)'''
제14대
유인태

제15~17대
''' 김근태 '''

제18대
신지호


'''대한민국 제43대 보건복지부 장관
김근태
金槿泰 | Kim Geun-tae
'''
<colbgcolor=#003764><colcolor=#ffffff> '''출생'''
1947년 2월 14일
경기도 부천군 오정면
(現 경기도 부천시 오정동)
'''사망'''
2011년 12월 30일 (향년 64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본관'''
경주 김씨[1]#
'''재임기간'''
제43대 보건복지부 장관
2004년 7월 1일 ~ 2006년 2월 10일
[ 펼치기 · 접기 ]
<colbgcolor=#003764><colcolor=#ffffff> '''배우자'''
인재근
'''자녀'''
슬하 1남 1녀
'''학력'''
경기고등학교 (졸업 / 61회)
서울대학교 (경제학 / 학사)
'''병역'''
육군 병장 만기전역
'''종교'''
천주교 (세례명: 즈카르야)[18]
'''의원 선수'''
'''3'''
'''의원 대수'''
'''15''', '''16''', '''17'''
'''약력'''
15, 16, 17대 국회의원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열린우리당 의장
제43대 보건복지부장관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민주화운동청년연대 의장

1. 개요
2. 활동
2.1. 민주화 운동
2.2. 정계 입문
2.3. 국회의원 퇴임 이후
3. 사건사고
4. 여담
4.1. 라이카 카메라 수증
4.2. 그를 소재로 한 작품들
5. 선거 이력
6. 소속 정당
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정치인. 종교는 원래는 무종교였으나, 2011년에 가톨릭에 귀의하였고, 세례명은 즈카리야이다. 본관은 경주 김씨. 경기도 부천시 출생.[2] 경기고등학교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였다.
서울특별시 도봉구 15, 16, 17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열린우리당 의장(2006년 6월 9일-2007년 2월 14일로 8개월 5일에 걸쳐 재임, 단명한 의장이 대부분이었던 열린우리당 의장 중에서는 가장 길게 재임했다[3]), 원내대표(2003년 10월 27일~2004년 5월 11일로 6개월 보름을 재임) 및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보건복지부 장관(2004년 7월 1일-2006년 2월 10일, 1년 7개월 5일)을 지냈다.
언론에서는 그의 마지막 직책이었던 '고문' 으로 호칭하는 경우가 많지만, 민청련 의장과 열린우리당 의장을 지낸 사람인 만큼 운동권 출신 쪽에서는 전(前) 의장 등으로 표현되는 경우도 많다.[4] 장관은 확실히 흔하고 상임고문은 사실 큰 의미는 없는 직위라.

2. 활동



2.1. 민주화 운동


제4공화국제5공화국 당시 민주화운동의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65학번으로, 대학 초년생 시절부터 경기고등학교 동문이자 대학동기인 조영래, 손학규[5]와 더불어 서울대 65학번 삼총사로 불리며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운동, 삼성그룹 사카린 밀수 규탄 시위 등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러다가 박정희가 학생운동을 하는 대학생들(미필자들 한정)을 강제적으로 군대병사로 보내 강제로 군 복무를 시키게 했고, 결국 김근태는 군대에 가게 된다. 대한민국 육군 병장 만기전역하였다.[6]
군대에 갔다 온 이후에도 1971년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 1974년 민청학련 사건, 긴급조치 9호 위반 등의 사건에 관여되어 고난의 청년기를 보냈다. 1983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약칭 민청련) 초대 의장[7]이 된 김근태는 이른바 깃발 사건이라 불리는 1985년 서울대 민추위 사건[8]으로 구속되어 풀려나는 도중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이근안과 김수현 등 경찰관 5명에게 22일 동안 고문을 당했다. 이로 인해 받은 피해는 이근안 문서로. 그리고 이날 사건을 통해 소문만 무성하던 고문의 실체가 드러나며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당시 고문 증언.
군부독재정권 시절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모두 갖은 고초를 겪었지만, 김근태는 그중 가장 심하게 당했으며, 그러면서도 며칠간 계속 버텨냈던 인물이다. 그 유명한 안 재우기, 날개꺾기,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겪으면서 버티었다는 사실만 봐도, 이 사람의 정신력이 보통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에 대한 진중권의 증언. 앞서 말했듯, 이 과정에서 버틸 뿐만 아니라 고문의 실체까지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은 보통 사람으로선 하기 힘든 일이다. 결국 모진 고문에 버티지 못하고 살려 달라는 애원을 하며 저들이 원하는 조서를 써줄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고문의 기억과 함께 고인의 가장 큰 트라우마가 되었다.
전기고문, 물고문 후유증으로 발병한 파킨슨병과 뇌정맥혈전증 등으로 건강에 큰 손상을 입었고, 고문으로 생긴 PTSD 때문에 병원에도 제대로 가지 못했다. 전신 마취를 위해 눕거나 치과 치료용 드릴 돌아가는 소리만으로도[9] 고문에 대한 기억이 다시 살아날 정도로 지독하게 당했기 때문이다. 폐기종까지 걸릴 뻔했으니 볼 건 다 본 셈.[10] 고문당한 후에는 큰 소리로 연설하지도 못했다고 한다. 고문으로 몸이 망가져 연설을 할때면 콧물이 쏟아져서 항상 손수건을 가지고 다녔을 정도였다.
결국 그는 1986년 9월, 그는 징역 5년과 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아 옥살이를 했다가 1988년 형 집행정지로 가석방되었다. 이후 그는 1989년 전민련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며 정책실장 등을 맡다가 1990년에 또다시 구속되어 2년을 영어의 몸이 되어야 했다.

2.2. 정계 입문


1995년 초에 들어 자신을 따르는 재야인사들과 함께 민주당에 입당하여 부총재를 맡으면서 제도권 정치를 시작하였다. 그해 연말에는 특별사면에 따라 복권되고 김대중이 전격적으로 정계복귀를 선언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민주당을 탈당하고 국민회의에 합류하였다. 다음해인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도봉(갑) 지역구에서 당선되었다.
1998년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당 주류인 동교동계를 겨냥해 호된 비판을 퍼부었다. 특히 권노갑이 주 타깃이었다. 물론 권노갑은 김근태 외에도 당내 소장파 인사들이 주된 타깃으로 삼던 정치인이긴 했지만. 동교동계가 그를 견제하면서 결과적으로 이 시기 정치적 성장을 그다지 하지 못한다. 기자들이 뽑은 대통령 후보로서는 조선일보부고논평에서 인정할 정도로 항상 1위를 도맡아 했던 인물이지만, 당내 세력과 권력욕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고 평가 받는다. 그가 선종한 후 아내인 인재근 의원을 중심으로 그와 교류한 정치인들이 결집한 것을 보면 아이러니. 비슷한 목소리를 내고도 차세대 정치인으로 주목받으며 중진으로 자리매김 했던 천정배, 신기남, 정동영과 비교되는 대목. 아예 그쪽 편이던 이인제는 차치하고라도 명분과 실리 사이에서 결국 대통령 자리를 차지한 노무현과 비교해도 안타까운 점이다. 2000년 후반에서 2001년 연말까지는 이인제에 맞설 이른바 비주류 대표인사로 두 사람의 동정과 대권전략이 정가의 주요화제이기도 했다.
2002년에는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하였으나, 제주와 울산 2번의 개표결과 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하자 운명의 광주경선을 앞두고 중도 사퇴하였다. 경선 과정에서 자신이 권노갑에게 불법 정치자금을 받았다고 '양심선언'한 뒤, 경선 주자들에게(특히 권노갑이 지원하고 있던 이인제를 겨냥해) 정치자금 문제를 다 까보자고 말했다가 역풍이 분 것이(...) 치명타였다. 이인제 대세론을 흔드는 노풍이 분 것은 덤. 여담으로 이 사건은 당시 한국/정치가 정치자금 문제에서 얼마나 골때리는 상황이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종종 언급된다. 존경 받던 재야 운동가이자, 정계에서 가장 깨끗한 정치인으로 꼽히던 김근태마저 불법 정치자금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훗날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의 상징색이라 할 수 있는 노란색은 원래 김근태 경선캠프의 상징인 노란 손수건에서 일부 차용 혹은 의미를 이어받은 것이기도 하다.
참여정부에서는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입각하였는데 노무현 대통령이 대선공약 중 하나였던 주택 분양원가 공개 방침을 번복하자 "'''계급장 떼고 제대로 논쟁하자'''" 라고 요구하는 등 대통령 당선 후 신자유주의 친화적으로 변한 노무현 대통령의 경제 정책에 가장 강하게 브레이크를 걸었던 인사 중 하나였다. 때문에 당시 온라인상에서 고문 후유증 드립치는 안티에게 인신공격을 당하기도 했다. 또한 2007년 한미자유무역협정에 대해서도 "FTA를 통과시키려거든 나를 밟고 가라"라고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이 점 때문에 재야 출신으로 정치권에 들어가 몇 안 되게 자기 목소리를 낸 인물이라고 평가받는다.
그 때문인지 친노, 특히 그 후계를 자처하는 친문 지지자들은 김근태의 뜻을 이어받는 비노비문 그룹 중 하나인 민평련을 크게 견제 하는 모습을 보인다.[11] 아니, 견제하는 정도가 아니라 대놓고 싫어한다. 그나마 우호적인 시선이란게 '민주화 운동가의 공적은 존경하나 정치인으로서는 존경하지 못한다'라는 수준이고 아예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주장이 김근태가 사망한 이후에도 많이 나왔다. 김근태가 대선후보로서 2% 지지율이 나오고 18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조차 되지 못한 것은 친노 시민들이 투표장에 안 갔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을 정도다.
장관으로 재임하면서 국개론스러운 발언을 했다가 사과하는 등 말도 많았고, 2006년 열린우리당이 쇠퇴 일로를 걷는 와중에 당 의장 직에 올라 당시 당정에 대한 여론의 뭇매를 집중적으로 받기도 했다. 다만 다른 정당들이라면 단명 소리를 들었을 그의 재임기간 8개월은, 열린우리당에서는 최장기이다. 또한 여러 나름대로 의미 있는 법들을 조율해서 통과시키기도 했다. 보건복지부 장관을 재임한 기간도 1년 7개월로 다른 장관들보다는 비교적 긴 편이었다.[12]
3회에 걸쳐 국회의원을 지낸 다선의원이었지만 인생 마지막으로 도전한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는 한나라당 신지호 후보에게 1,000여 표 차이로 석패했다. 사실 경기동부연합 계열 민주노동당 후보도 이 지역에 출마해서 대략 1,000여표를 차지했다는 걸 감안하면, 꽤나 아까운 패배였다.

2.3. 국회의원 퇴임 이후


2008년 17대 국회의원 퇴임 후에는 한양대에서 강의를 맡기도 하고,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으로 활동하면서 한반도재단을 설립하여 연구 활동도 병행하였다. 예전부터 지원 유세를 하러 가는 일이 많았다고 하는데, 생애 마지막으로 유세를 지원한 것은 2011년 서울특별시장 보궐선거였다. 개인적으로는 다음해 치러질 총선도 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끝난 직후인 2011년 연말, 지병인 뇌정맥혈전증이 악화되어 서울시 종로구 연건동에 있는 서울대학교병원에 입원해 투병 생활을 한다. 그리고 딸의 결혼을 전해들은 후[13], 2011년 12월 30일 새벽 5시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끝내 선종하고 말았다. 향년 65세.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모란공원 내에 민주 열사 묘역에 있다.[14]
2011년 10월 18일, 자신의 블로그에 '2012년을 점령하라' 는 제목으로 글을 남겼는데 이것은 그의 마지막 논평으로 남게 되었다. 자세한 것은 링크 참고.
말아톤의 정윤철 감독이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 촬영한 영상은, 그가 미디어에 등장한 마지막 모습이다. 자세한 것은 링크 참고.
2001년 딴지일보가 했던 고인과의 인터뷰.

3. 사건사고


  • 2006년 당시 북한 핵실험에 따른 안보위기로 국내외적인 혼란 상황일 때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개성공단에 들어갔는데, 여기서 북한 여종업원과 춤을 춘 일이 있다고 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본인의 해명에 따르면 북측이 권해서 마지못해 했다고는 하나, 북측의 미사일 발사 실험 등 국가적으로 뒤숭숭한 때 북한에서 여종업원과 춤을 췄다는 사실은 부적절했다는 평가가 있다.

4. 여담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김대중 지지선언을 발표해 통일민주당 당원들이 분열되어 단일화가 무산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당시 김근태는 통일민주당 당원이 아닌 재야 민주화운동가였으며, 재야 민주화운동 진영이 YS보다 DJ에게 좀 더 비판적 지지를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걸 떠나서 그는 '''1985년부터 1988년 6월까지 감옥에 있었다'''.
가족으로 아내 인재근과 두 자녀가 있다. 참고로 민주화운동가이자 여성운동가이기도 했던 인재근은 2012년 4월 11일 제19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고인이 된 김근태의 지역구였던 도봉구 갑에 출마하여 60%라는 높은 지지율로 당선되었다.[15] 이 때 개표방송 카메라를 통해 눈물바다가 된 인재근 후보 캠프가 전파를 타며 새삼 고인이 재조명받기도 했다. 인재근 의원은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도 도봉구 갑에서 지지율 60.1%로 재선에 성공하였다. 이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54.0%의 특표율로 3선에 성공. 김근태 의원이 한나라당 신지호 의원에게 패한 제18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제외하면 15~17, 19~21대까지 부부 6선이라는 진기록.
드라마 육남매에서 등장인물로, 주인공의 집에 하숙을 하는 대학생 '김종철'은 김근태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다. 배우는 김정현이 연기했다.
메이리다오 사건을 주동한 스밍더라는 대만의 민주화 운동가가 있는데, 중화권에서 '대만의 김근태'로 소개된 적이 있다. 다만 공통점이라고 분석한게 민주화 운동 경력과 정치력이 꼭 비례하지는 않는다는(=민주운동 시절에 비해 정치적으로 크게 성공하진 못했다) 점이라 묘하긴 하다.
석호필 박사의 제자이기도 했다. 중학교 시절 가난한 학생이던 소년 김근태는 무료 영어강의 봉사를 하던 석호필 교수의 클래스에서 수업을 듣게 되며 그의 제자가 되었다. 같이 공부를 한 정운찬 서울대 전 총장과는 경기고와 서울대 경제학과 동문이다.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인 손혜원의 남편과 서울대 경제학과 동기로 절친한 친구였으며 손혜원의 남편은 '근우회'(槿友會·김근태의 친구 모임)'라는 모임의 후원회 회장까지 맡았었다고 한다.
생전에 축구를 굉장히 좋아한 축빠였다. 어렸을 때부터 새끼끈을 뭉쳐 만든 공이나 돼지 방광을 부풀려 만든 공을 이용해 동네 친구들과 노는 것을 시작으로 장성한 이후에도 틈만 나면 조기축구를 즐겼다고 한다. 현역 의원이던 시절엔 국회의원들끼리 하던 축구 모임에서도 정봉주와 같이 스트라이커로 이름을 날렸다.
오죽하면 파킨슨병 진단을 받고 18대 총선에서 낙선한 이후에도 조기축구 등을 통해 축구를 꾸준히 즐겼을 정도다. 고문에 의한 후유증으로 몸은 매우 허약했지만, 축구를 즐길 때는 건강한 모습을 보였기에, 많은 사람들은 그가 병상에 누웠을 때 "다시 금방 일어나서 공 차러 갈 것"이라 생각했다고. 덧붙여 그와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서 동문수학한 후배인 이준구 교수의 증언에 따르면 농구도 잘 했다는 모양으로, 한마디로 구기종목 매니아. 이준구 교수가 홈페이지에 쓴 김근태 선배를 추억하는 글.
하지만 말년에는 고문 후유증으로 그렇게 즐겨 마지 않았던 축구마저도 못하게 된 것을 보면, 고문이란 것이 그에게 얼마나 큰 상흔을 주었는지 알게 해준다.
이명박 집권 시절 선종했는데, 이명박 대통령의 형인 이상득이 김근태와의 과거 인연을 언급하며 조문오기도 했었다.
그가 선종한 이후 인재근 의원과 천주교 서울대교구 함세웅 아우구스티노 신부, 내과 전문의 이화영 박사 등의 주도로 인권의학연구소와 김근태와 같은 고문피해자 및 국가폭력에 몸과 마음을 다친 이들을 치료하는 김근태기념치유센터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그의 유지를 계승하기 위해 김근태재단이 설립되었다.
그의 보좌관을 지냈던 허영이 정치적 스승으로 여기는 사람이다. 그는 본디 유학을 가려고 대학 선배에게 인사를 했는데 그가 난데없이 어디론가 허영을 데리고 간 곳이 바로 김근태의 사무실. 김근태는 보좌관을 구하고 있었고, 면접을 보더니 당장 다음날부터 나오라고 했고 허영은 그대로 정계에 입문했다. 김근태는 그에게 수도권보다는 고향인 강원도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편이 좋다고 충고했고, 허영은 이를 받들어 고향 양구군과 가까운 춘천시를 기반으로 활동하기 시작해 2020년 드디어 춘천을 민주당계 정당의 품에 안겨주었다.

4.1. 라이카 카메라 수증


[image]
복지부 장관 재직시 독일의 카메라 메이커인 라이카에서 대한민국 광복 60주년을 기념하여 안중근 의사의 손바닥 인장과 "大韓國人" 이 각인된 카메라를 딱 60대 한정 제작했는데, 당시 1대의 가격이 무려 1천만원 상당이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카메라의 1번을 김근태 장관에게 기증했다.[16] 카메라랑 별 상관도 없어보이는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준 이유는 안중근 의사와 가장 이미지가 닮은 사람이라서라고. 다른 곳도 아닌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의 의견이다. 본인은 과찬이라며 이를 국가에 기증했다.

4.2. 그를 소재로 한 작품들


정지영 감독이 연출, 박원상, 이경영이 주연을 맡은 남영동1985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되고 2012년 11월 22일 개봉했다. 다만 비슷한 시기 개봉한 26년(영화) 때문에 관객을 뺏겨 흥행에서는 전국 관객 33만(전산망 공식집계 기준)으로 참패했다. 애초에 흥행성을 노린 영화라기보다 사회고발 성격이 강한데다 독립영화로 구분되는 작품이라 어쩔수 없기는 했다.
시사만화가이자 민중화가 박건웅이 2014년 6월 <짐승의 시간>이라는 제목으로 남영동 사건을 만화화하였는데, 5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으로 고증이 매우 잘 돼 있고, 이야기가 탄탄해 몇 시간이면 일독 가능하다. 고문 이야기와 김근태-인재근 부부의 절절한 사랑을 보고 있으면 절로 코 끝이 찡해진다.
소설가 방현석이 김근태의 삶을 소재로 소설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를 발표했다. 담담하고 깔끔한 문체지만, 다 읽고 나면 먹먹해진다. 특히 유명한 고문사건은 "이근안 개새끼"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만든다. (참고로 <고문 기술자 이근안의 고백>이라는 책을 낼 정도로 양심 따윈 없다) 한국 현대사에 관심이 많다면 읽어 보도록 하자.
독립기념관장을 보낸 김삼웅이 쓴 <김근태 평전>이 있다.

5.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도봉 갑

'''27,768 (38.85%)'''
'''당선 (1위)'''
'''초선 '''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34,233 (50.85%)'''
'''재선'''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42,583 (52.13%)'''
'''3선'''
2008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31,335 (46.16%)
낙선 (2위)


6.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95 - 1995
정계입문

1995 - 1995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을 위해 탈당

1995 - 2000
창당

2000 - 2003
당명 변경

2003 - 2003
열린우리당 창당을 위해 탈당

2003 - 2007
창당

2007 - 2007
당내 노선 차이로 탈당

2007 - 2008
입당

2008 - 2008
당명 변경

2008 - 2011
당명 변경

2011
시민통합당과의 합당
작고[17]

7. 둘러보기





[1] 계림군파 24세.[2] 당시에는 부천군 오정면.[3]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직후 정동영 의장의 사퇴로 2등이었던 그가 최고위원의 자격으로 비대위 체제하에서 의장으로 추대되었으나 결과적으로 최장 재임에 유일하게 임기를 채우고 물러난 인물이 되었다. 원 임기는 1년이다.[4] 여담으로 70~80년대 민주화 운동 시절 대학생이었던 386 인사들은 대개 "김근태 선배"라고 부른다. 빈소를 취재했던 한 젊은 기자는 "빈소에 다녀간 사람들이 고인을 모두 선배로 부른다는 게 신기하다"는 기사를 쓴 적도 있다. 물론 고인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예외이다.[5] 조영래와 손학규는 경기중 시절부터의 동기동창이다. 김근태는 광신중학교를 나왔다.[6] 참고로 후술하겠지만 동명이인인 군인 김근태육군사관학교 출신 장교에 대한민국 육군 대장 만기전역하였다.[7] 부의장은 장영달이었다. 그외 집행위 간부로는 박계동, 박우섭, 연성수 등이 있었으며, 상임위원회에는 김근태를 설득해서 민청련 설립을 주도했던 최민화가 의장으로 있었다. 상임위 부의장은 이해찬과 이을호였다.[8] 참고로 이때 같이 구속된 인사 중 1명이 바로 아프리카TV 창업주 문용식이다.[9] 충치 치료를 위해 치과에 찾아갔으나, 치료용 의자에 앉아서 드릴 돌아가는 소리를 듣자마자 박차고 뛰쳐나왔다고 한다.[10] 어느 정도로 두려워 했냐면, 수술대 위에 눕는 것마저도 괴로워할 정도였다. 수술대가 고문 시 사람을 묶어놓는 일명 칠성판과 비슷하다고 한다. 이 정도로 고문 범죄를 저지른 이근안은 훗날 목사가 되어 "고문도 예술이다" 라는 망언을 날린 바 있다. 결과적으로는 고인도 고문의 압박을 견뎌내지 못해 원하는 조서를 쓰고 말았을 정도였으니.[11] 민평련에 대한 반감은 김근태 개인에 대한 반감 외에도 친문 인사 대부분이 소위 '패권주의' 논란을 의식해 극도로 조심스레 처신하는 반면 민평련은 대놓고 계파를 드러내고 단체행동을 하는 데 대한 못마땅함도 크다. 비록 김근태 사후 민평련이 당 전면에 나선 적은 없긴 하지만.[12] 전임인 김화중의 재임 기간은 1년 4개월, 후임인 유시민의 재임 기간은 1년 3개월이었다.[13] 단, 실제로 참석하지는 못하고 메세지만 보낼 정도였다고 한다. 이 메세지를 전달받은 결혼식장은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한다.[14] 전태일 열사, 문익환 목사, 박종철 열사 등 많은 분들이 모셔진 곳인데, 비교적 최근에 돌아가신 분이라 묘역 맨 바깥쪽에 있고, 올라가는 뒷길이 따로 나 있다. 꼭 그분 묘소를 위한 길은 아니지만, 안내판까지 따로 만들어 걸 정도로 예우를 하고 있다. 그런데 그곳의 다른 묘들이 그렇듯, 가 보면 묘소는 좁고 초라하다.다 그런건 아니긴 하지만.[15] 애초에 인재근의 출마를 권유하기 위해 또 그녀가 승낙할 것을 염두에 두고 당내 지역구 인사들은 예비후보 등록을 하지도 않았다. 즉, 그녀가 남편의 유지를 이어받길 원했다고 볼 수 있으며 그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엿볼 수가 있다. 49재 이후 그녀의 출마를 설득했고 당내에서도 권유했으며 그녀가 출마를 승낙하자마자 바로 1호로 전략공천했다.[16] 라이카같은 메이커들은 이런 한정판 바디에 일련번호를 붙이는데, 그 1번이라면 가격은 둘째치고 평생 한 번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영광. 물론 가격은 몇십 억을 호가한다.[17] 창당된지 2주일도 안되어서 작고하였기에 당 내부에서의 활동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