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암리 학살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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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전개
4. 파장
5. 뒷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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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자: 提巖里 虐殺事件
일본어: 提岩里教会事件(ていがんりきょうかいじけん), 提岩里事件(ていがんりじけん)
1919년 4월 15일,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교회[1]에서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 일본 육군 헌병 중위의 주도로 발생한 양민학살 사건. 제암·고주리 학살사건으로도 불린다. 수십년후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퓌턴 급습사건[2]·알제리 학살에 비견되는 참상을 빚어냈다.

2. 배경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난 가운데 제암리 인근의 개신교와 천도교, 유학자 지도자들이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여 3월 30일(혹은 4월 5일)에 제암리 인근 주민 천여 명이 제암리 발안 장터에서 만세시위운동을 일으켰다.
시위대가 일본제국 경찰 주재소로 다가오자 일본군 헌병들이 출동해 경고 사격 후 칼을 마구 휘둘러 유학자 이정근과 그의 제자 2명이 칼에 맞아 사망했고 시위를 주도했다는 혐의로 천도교인과 기독교인 몇 명이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고 석방되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흥분한 주민들이 인근의 일본인 주택, 학교에 불을 질러 정미업자 사사키를 비롯한 수십 명의 일본인들이 대피했다. 사사키는 이에 앙심을 품고 스스로 자원하여 일본군 헌병의 길잡이 노릇을 하게 된다.
이에 일본은 철저한 초강경 진압 작전을 시작했다. 4월 2일 발안 장터 시위에 참여한 마을 주민들을 색출 검거하기 위해 일본군 헌병일본제국 경찰 등으로 구성된 부대를 파병해 마을들을 습격하여 불태우고 주민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다. 일본 군경의 폭압에 제암리 인근 주민들은 더욱 격앙되었고 인근 화수리와 수촌리의 천도교와 기독교 지도자인 백낙열(白樂烈, 186512월 20일 ~ 1937년 1월 4일)과 김교철(金敎哲, 1880년 7월 27일 ~ ?), 그리고 주민들이 주축이 되어 4월 3일, 2차로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가와바타 도요타 순사가 귀가 잘리고 치아가 뽑히고 척추가 꺾일 정도로 곤봉을 두들겨 맞아 사망하였다. 일본인 남성 9명이 마을에 남기로 결정하고 40여명의 여성과 노인과 아이들이 산계리(三渓里)마을로 대피하였다.

3. 전개


4월 5일, 일본 육군은 수촌리에 들이닥쳐 만세시위 주동자를 색출한다면서 주민들을 마구 학살하고 마을 가옥 42호 중에 38호를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수촌리에서 교회당이 불타고 사람들이 죽거나 체포되었다는 소문을 들은 개신교 선교사들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수촌리를 찾았다. 이들 중에는 영국캐나다인 선교사,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1889년3월 15일 ~ 1970년 4월 16일, 한국명 석호필)도 있었다.
이런 가운데 4월 5일 발안 장날이 되자 만세시위운동이 다시 일어났다. 이러자 일본 육군은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 육군 헌병중위가 지휘하는 부대를 4월 13일 제암리로 보내 만세시위운동 주모자들을 색출하도록 지시했다. 이 과정에서 아리타 중위는 15세 이상의 남자들을 모두 교회당으로 모이게 했는데 "만세시위 진압 과정에서 너무 심한 매질을 한 걸 사과하러 왔다." 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이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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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아리타는 사사키 등을 통하여 제암리 개신교인들의 명단을 확보한 상황이었고, 아리타가 교회당을 나서는 것을 신호로 일본군은 교회당에 사격을 시작하는 동시에 짚더미와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렀다. 불을 지른 과정에서 민가 28채가 소실되었다. 바람이 거세 교회당 아래의 민가로 불이 번졌고 교회당 위쪽으로는 일본군들이 불을 질렀다. 당초 알려지기로는 일본군이 교회당 안에 있던 사람들을 못 나오게 하려고 문에 못질을 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공식적인 기록은 문을 잠근 것으로만 되어 있다. 탈출하다가 사망한 사람들은 벽을 부수고 탈출했다고 한다.[3]
19명이 교회당 안에서 사망했으며, 3명이 교회당에서 탈출하던 중 2명은 사망하고, 1명은 산으로 피신하여 겨우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가족을 찾아 교회로 달려오는 부인 2명이 죽기도 했다.[4] 다음날 일부 군인들은 고주리로 가서 화성지역의 천도교 지도자였던 김홍렬 일가족 6명도 살해했다. 불 탄 집에 들어갔을 땐 '''"...이게 니 뼉다구인지 내 뼉다구인지도 모르겄고..."'''[5]의 상태로, '''말 그대로 참혹 그 자체였다.''' 양일간 제암리 교회에서 23명, 고주리에서 6명이 학살당하였다.
현재도 남아 있는 제암리 교회에선, 영상물과 교육자료 등을 통해 이 외에 제암리 학살사건 당시의 내용을 자세히 알아볼 수 있다. 가끔 시간만 잘 맞추면 당시 생존자의 후손들도 종종 만나볼 수 있다.

4. 파장


묻힐 뻔한 이 사건은 수촌리에서 벌어진 학살 사건을 파악하기 위해 수촌리로 가던 스코필드가 "제암리에서도 학살 사건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제암리로 달려가 상황을 파악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스코필드는 유골을 수습하는 한편 제암리 학살의 증거들을 사진으로 찍고 《꺼지지 않는 불꽃(Unquenchable Fire)》이라는 보고서를 저술해 전 세계에 제암리에서 일어난 학살 사건을 폭로했다.
제암리 학살 사건이 알려져 국제적 여론이 악화되자, 일본은 제암리 학살을 지휘한 아리타 중위에게 30일의 중근신 처분만 내리고 사태를 덮으려 했다. 그러나 제암리 학살 사건이 전 세계적으로 알려져, 일본에 대한 세계의 여론은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일본은 "아리타 중위가 미숙하고 주민들이 저항하여 우발적으로 사건이 발생했다"고 주장했으며, 후일 김완섭은 '''"당시 조선 땅에 일본군이 없었는데 어떤 일본군이 학살을 하나?"'''라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지껄이며 일본측을 옹호하는 천인공노할 촌극을 벌이기도 했다. 사실 김완섭을 제외하더라도, 일부 일뽕이나 일본의 극우 네티즌들은 이것 역시 "법을 어기고 불법집회를 열다 경찰을 살해했으니 당연히 폭동"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혹은 이 사건을 경찰관을 죽인 범죄자를 진압한 사건 쯤으로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 조선 주둔 일본 육군이 "조선군" 이라는 이름으로 주둔해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이 중 헌병 병력 일부는 일반 치안 임무를 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김완섭은 "이들은 치안 업무에 종사했으니 군인이 아니라 경찰"이라고 우겼지만, 이들은 경찰 업무 뿐만 아니라 헌병 업무까지 하고 있었던 것도 분명하며, 엄연히 이들의 법적 신분은 군인이다. 더욱이 당시 조선 주둔군 사령관인 우쓰노미야 다로 장군의 일기가 발견되면서 일본이 제암리에서 벌어진 학살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하려 한 사실이 드러났다. 그리고 관여한 군인들은 30일간 근신처분을 받았고, 나중에 군법회의 결과 살인, 방화에 대해 '''무죄''' 처분을 받았다.[6][7]

5. 뒷이야기


해방이 되기 전까지 제암리 사건은 언급조차 못했고, 1959년이 되어서야 추모비를 세울 수 있었다. 1969년에는 일본의 기독교인들이 사죄의 의미로 제암리 교회당을 재건하여 1970년 9월 22일에 완공되었는데, 현재의 기독교대한감리회 제암교회가 일본 기독교인들에 의해 재건된 예배당이다. 그렇게 일본 기독교인들은 이미 사건 직후부터 현장을 찾아 사건의 전모를 확인하고 일본 내 기독교신문에 고발 기사나 추도시를 실었었다. 50년 동안 나 몰라라 한 건 아니다. 이 교회당은 2002년 제암리 3.1 운동 순국기념관을 지으면서 헐렸는데[8], 상공에서 바라보면 3자와 1자가 보였다고 한다.
이 사건을 폭로한 스코필드 교수는 후에도 한국인을 돕다가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 출국 당했지만, 1968년 건국공로훈장을 수여받았고 외국인으로써는 최초로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도쿄대학 영문과 교수와 도쿄여자대학 학장으로 재직한 영문학자 사이토 이사무(斎藤勇, 1887년 2월 3일 ~ 1982년 7월 4일)는 자국 군인이 저지른 잔인함에 대한 비판과 처참하게 살해당한 조선 백성들에게 조의를 담은 〈어떤 살육사건(或る殺戮事件)〉이라는 작품을 1919년 5월 22일, 《복음신보(福音新報)》지에 발표하기도 하였다.
일본어
한국어 번역
それはトルコ領アルメニアの蛮行ではない。
300年前ピエドモントにあった殺戮ではない。
アジア大陸の東端に行なわれた惨事である。
永遠の平和を期する会議中の出来事である。
그것은 터키령 아르메니아의 만행이 아니다.
300년 전 피에몬테에서 있었던 살육이 아니다.[9]
아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서 행해진 참사다.
영원의 평화를 기약하는 회의 중의 사건이다.
我らの愛する祖国においては、
人種差別を撤退すべしと、
いわゆる志士がいきまきどよめいた時、
五大列強の一と誇る君子国の方伯(つかさ)は、
その託された領土の民が結束して起ち、
君子国圧制を非とし、
一個の人として与えられるべき自由と権利を
要求するため示威運動を行なった時、
これ畢竟邪教の迷わすところと、
剣を按じて、布令をまわした、
某月某日某会堂に集まるべしと。
우리가 사랑하는 조국에서는
인종 차별을 철폐해야 한다고
소위 지사들이 떠들고 있을 때이다.
5대 열강의 하나인 군자국방백(方伯)은
맡은바 영토의 백성(民)이 결속하여 일어나
군자국 관헌의 압제를 주장하고
한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자유와 권리를
요구하기 위해서 시위 운동을 했을 때
필경 서양에서 온 종교가 미혹한 것이라고
검을 차고 포령(布令)을 돌렸다.
아무 달 아무 날 아무 교회당에 모이라고.
そこは都を離れたさびしいひな里(ざと)、
木造りの粗末な魂のほこらが立っている。
白い着物をつけた土地の人々、
或る者は大病の老いたる父をはなれて、
或る者は産褥に入りし妻を残して、
或る者は辛くもその日を過すたづきをやめて、
今日(きょう)は日曜でもないのになぜ集まるのか。
お布令のためだ、いかめしい憲兵のためだ。
集まる者二十、三十。中には未信者もいた。
官憲は詰(なじ)った、「なぜ暴動に加わったか」と。
ああ己れの母国が滅びて不平なきを得ようか。
거기는 서울을 멀리 떠난 외딴 외딴 시골,
목조의 초라한 교회당이 서 있다.
하얀 옷을 입은 동네 사람들
어떤 이는 큰 병에 걸린 늙은 아버지를 떠나서,
어떤 이는 애기를 낳은 아내를 두고
어떤 이는 겨우 그날을 지낼 양식을 떠나서,
오늘은 일요일도 아닌데 왜 모이는가.
포령(布令) 때문이요, 엄격한 헌병 때문이요.
모인 자 이삼십, 그 중에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자도 있었다.
관헌은 따졌다. 왜 폭동에 가담했는가고.
아아, 자기 모국이 멸망했는데 불평이 없을 수 있겠는가.
しかも当局が善政をもって慕わせなければ、
誰が喜んで屈辱と侮蔑とを忍べよう。
しかももし、武断と暴力とを用いて、
民の慴(しょう)服をこれ計る為政者ありとすれば・・・。
信仰ある者は、官憲に対(むか)って
魂の自由を求めたかも知れない。
その言激越の調を帯びたとしても、
偶像礼拝をしいられる者に、
それはいけない、不柔順だと、
どうして我らは言えよう。
더욱이 당국자가 선정(善政)으로 따르게 하지 않으니
누가 기꺼이 굴욕과 모욕을 참겠는가.
더욱이 만일, 무기와 폭력을 사용하여,
백성의 복종을 꾀하는 위정자가 있다고 한다면…
그리스도인은 관헌에게
신교의 자유를 요구했는지도 모른다.
그 말투가 격했더라도
우상 예배를 강요하는 자에게,
그것은 나쁘다, 불순종이라고
어찌 말할 수 있으리요.
忽ち砲声、五発、十発・・・。
見るまに会堂は死骸(むくろ)の堂宇(ほこら)。
尚あきたらずして火をもって見舞う者があった。
赤い炎の舌は壁を嘗めたが、
官憲の毒手に撃たれた亡国の民を――
「西洋邪教」を信ずる者を――
憚る如く、恐るる如く、守る如く、
彼等の死骸(むくろ)を焼き払わない。
それと見て、風上の民家にも火をつけた
燃える、燃える。四十軒の部落は、
一軒も焼き尽くされざるはない。
君は茅屋の焼跡に立って、
まだいぶり立つ臭気が鼻につかないか。
乳呑み児をだいたままの若い母親、
逃げまどうて倒れた年よりなどの
黒焦げになった惨状が見えないか。
何、「ヘロデの子殺しよりもひどくない」というのか。
「ピエドモントやアルメニアのより人数が少ない」というのか。
「島原や長崎あたりの昔の事もあった」というのか。
「君子国にはそんな例が珍しくはない」というのか。

갑자기 총성이 한 발, 두 발…
순간 회당은 사체의 사당.
그것도 모자라서 불을 지르는 자가 있었다.
빨간 불길은 벽을 핥았으나,
관헌의 독수(毒手)에 넘어진 망국의 백성을
―서양 종교를 믿는 자를―
내외하듯, 두려워하듯, 지키는 듯,
그들의 사체는 불태우지 않는다.
그것을 보고 바람은 윗쪽의 민가에도 불을 붙였다.
탄다, 탄다, 사십 호의 부락은
하나도 남은 것이 없이 탔다.
초가집의 불탄 자리에 서서
아직도 스며오르는 취기(臭氣)가 코에 맡아지지 않는가.
젖먹이를 안은 채인 젊은 어머니,
도망가다 넘어진 늙은이 등의
까맣게 탄 참상(慘狀)이 보이지 않는가.
저, 헤로데어린이 살해보다 비참하지 않다고 말하는가.
피에몬테나 아르메니아보다 인원수가 적다고 말하는가.
시마바라(島原)나 나가사키(長崎) 등지의 옛날 일도 있었다고 하는가.
군자국에서는 그런 예가 드문 것이 아니라고 하는가.
もしこれをも恥とすることなければ、
呪われたるかな、東海の君子国。
或る新聞は簡単に伝えていう。
併合国土のキリスト教徒は、
群り集まって騒擾を起こし、
解散を命じた官憲にていこうしたため、
暴徒の死者二十、焼失家屋十数戸と。
また或る新聞は一言半句これを記(しる)さない、
さながら春風に吹き散る花を見るよう。
만일 이것도 수치로 삼지 않는다면,
저주받을진저, 동방 군자의 나라.
어떤 신문은 간단히 전해서 말한다.
병합 국토(倂合國土)의 기독교인은
모여서 소요를 일으키고
여기에 해산을 명령한 관헌에게 반항했으므로,
폭도 가운데 사자(死者) 이십, 소실 가옥 십수 호라고.
또 어느 신문은 일언반구 이것을 쓰지도 않는다.
마치 봄바람에 흩날리는 꽃을 보듯이.
斎藤勇. "어떤 殺戮事件." ''한일 그리스도교 관계사자료'' (小川圭治·지명관 편 / 김윤옥·손규태 공역, 한국신학연구소), 1990년,
https://koreanchristianity.tistory.com/20
ya022978. "斎藤勇「或る殺戮事件」全文." ''http://d.hatena.ne.jp'', 2011년 04월 17일,
http://d.hatena.ne.jp/ya022978/20110417/1303000826
의역이 가미된 한국어 번역본.
2019년 2월 일본의 기독교인들이 제암리를 찾아 사죄했다. 제암리 찾은 日기독교계 17인 제암교회서 사죄의 눈물
1971년 제암리 학살사건을 다룬 영화가 촬영됐다. 제목은 '두렁바위'이다. 일제 제암리 학살사건 영화로 만들어“첫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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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도 기독교대한감리회 제암교회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2]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 문서도 참고할 것. 희생자의 대다수가 개신교도였다는 점 만큼은 이 사건이랑 더 비슷하다.[3] 한 여인이 아기를 창밖으로 내보내며 살려달라고 하자 칼로 찔러죽였다고도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제암리 학살 사건에 대한 공식기록에 의하면 교회당 안에 모인 사람들은 15세 이상의 남자들 22명이다. 교회 안에 들어갈 때에, 키를 재서 총의 길이보다 키가 큰 사람들만 들어가게 했다고 한다. 죄없는 남자들을 죽인 것은 천인공노할 일이지만, 적어도 처음에는 아이와 여자들까지 죽이려 하지는 않은 듯 하다.[4]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 뒤쪽 언덕에 이 때의 순국선열 23인의 합동묘지가 있다.[5] 제암리학살사건 당시 목격자 전동례 할머니의 증언. 참고로 제암리 학살사건의 최후의 생존자로 1992년 11월 10일에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4세[6] 近年発見された、当時の朝鮮軍司令官、宇都宮太郎の日記によれば、「事実を事実として処分すれば尤も単簡なれども」とし「虐殺、放火を自認することと為り、帝国の立場は甚しく不利益」となるという判断から、幹部と協議した結果「抵抗したるを以て殺戮したるものとして虐殺放火等は認めざることに決し、夜十二時散会す。」とある。関与した有田俊夫中尉の処分は30日間重謹慎処分とされたが、その後の軍法会議による判決(1919年8月21日付)で殺人・放火に関して無罪が確定した。- 번역 "근년 발견된 당시 조선군사령관 우츠노미야 타로의 일기에 의하면, "사실을 사실로써 처분하면 가장 간단하겠으나,"라고 하면서 "학살, 방화를 스스로 인정하는 결과가 되어 제국의 입장에 심히 불이익"이 된다는 판단하에 간부와 협의한 결과 "저항했었으니 살육도 있었던 것이라 하여 학살, 방화 등은 인정할 수 밖에 없다고 결론내리고, 밤 12시에 회의를 마쳤다."라고 되어 있다. 관여한 아리타 토시오 중위의 처벌은 30일간 엄중한 근신처분으로 결정되었으나, 그 후 군법회의에서 내린 판결(1919년 8월 21일자)에서 살인방화에 관해서 무죄 확정을 받았다.[7] 보면 알겠지만 아리타 토시오는 결국 무죄처리되었고 학살당한 피해자들에 대해서도 은근슬쩍 책임을 떠넘기는 식으로 논의가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8] 2020년 현재는 본당에서 예배를 집전하고 있다.[9] 1655년이탈리아 북서부 피에몬테 지방에서 발도파 신자들이 대량 학살당한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