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 중의 두 가지 노선

 


1. 소개
2. 배경
2.1. 문화대혁명의 시작
2.2. 홍위병 내 혈통론의 제기
3. 연설 전문
3.1. 형세는 아주 좋다
3.2. 두가지 노선 투쟁의 지속
3.3. 몇가지 '두려움'을 던져 버리고, 대담하게 대중을 일으키자
3.4. 마오 주석이 제출한 계급노선을 견지해 대다수를 단결시키자
4. 왜 이런 연설을 했나?
5. 여파
6. 참고 문헌
7. 관련 문서


1. 소개


1966년 10월 16일에 발표된 중앙문혁소조장 천보다의 연설. 문혁 초기 류사오치 등이 주도한 공작조의 활동과 공산당 내부의 암묵적 지지를 받던 혈통론에 대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10월 24일 오후 11시, 연설문의 초고를 받은 마오쩌둥은 이 연설에 대해 "바로 보다 동지에게 전달할 것. 수정 원고를 모두 읽었음. 아주 훌륭함. '혁명을 수행하면서 생산을 촉진한다' 두 구절을 어디에 끼워 넣을 것인지 고려해 보기 바람. 다량 인쇄하되, 소책자로 만들어 각 지부, 각 홍위병 소대에 적어도 한부씩 배포할 것'이라고 지시했다.
문화대혁명의 방향을 보수파, 보황파 중심의 반달리즘에서 조반파들의 당내 주류 세력 공격으로 뒤트는 지대한 영향을 남겼으며 이때부터 그전에 반동의 자손들이라고 핍박당하던 흑오류, 회오류 중심의 조반파 홍위병들이 문화대혁명의 실세로 급부상하게 된다.

2. 배경



2.1. 문화대혁명의 시작


대약진 운동의 참혹한 실패 이후, 중국 도처에서는 중국 공산당의 리더십에 대한 불만과 의문이 터져나오고 있었고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실패에 의기소침해진 중국 공산당의 사회 통제 역시 약해져서 공산당 입장에서 '유교적, 미신적, 봉건적, 비합리적, 외설적'이라 할만한 풍조가 곳곳에서 만연했다. 공산당이 극도로 탄압했던 불교나 기독교 등은 대약진으로 충격받은 신세대를 흡수하면서 크게 교세를 확장하고 있었고 곳곳에서 미신이나 구습, 유교에 대한 중시 경향이 되살아났다. 대도시의 학생 세력들은 대놓고 티토흐루쇼프를 자처하면서 지도부를 비난했고 홍콩에 대한 망명도 줄을 이었다.
결국 느슨해진 사회의 나사를 조이고, 또한 자기 자신이 마오쩌둥의 뒤를 이을 지도자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국가주석 류사오치가 나섰다. 류사오치는 사회주의 교육 운동이라는 것을 내세웠고 전국에 공작대를 파견하여 '수정주의자'와 '계급의 적'들을 축출하여 사회를 바로잡겠다고 하였다. 이들 공작대는 전국 곳곳에 파견되어 많은 관료와 당원들을 가혹하게 고문하여 수많은 사람을 숙청했다. 모든 성이 고발당하고 자본주의 정책을 채택했다고 고발당했고 구이저우성은 아예 작은 타이완으로 규정되었다. 이 과정에서 7만 7천명이 사망하고 500만명이 처벌되었다. 한편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의심하면서 그들이 중국의 흐루쇼프가 되어 자신을 중국의 스탈린으로 만들어 격하시킬 것을 두려워하던 마오쩌둥이 개입했다. 그는 류사오치의 조치에 반대하고 나서면서 1965년 1월 사회주의 교육 운동이 당 내부의 '주자파'를 잡아야 한다고 규정했다. 이 주자파란 당연히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말하는 것이었다.
또한 마오쩌둥은 봉건적인 경향이 많다는 이유로 문화 부문에 대한 숙청을 감행하고 젊은 학생들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이들 학생들이 홍위병이 된다. 그리고 해서파관 사건과 함께 펑전, 뤄루이칭, 루딩이, 양상쿤이 반당파벌로 몰려 숙청되었고 마오쩌둥은 당, 정, 군에 스며든 부르주아 대변인과 흐루쇼프같은 자들을 숙청하라는 메시지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펑전이 이끈 오인소조가 해체되고 이를 대체하기 위해 중앙문화혁명소조가 탄생했다. 이 중앙문화혁명소조의 수장이 바로 천보다였다. 1966년 6월 1일 천보다가 인민일보에 논설을 발표, 모든 악마와 괴물들을 척결하라고 촉구하면서 본격적인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었다. 대학들이 고발되고 교사들이 반동파로 몰려 조리돌림당하고 고문당하고 처형되었다. 이 시기에 각 지방의 공작대는 중앙과 당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학생들을 우경분자로 몰아 숙청했다. 베이징에서만 1만명의 학생들이 처벌되었다. 이는 류사오치, 왕광메이, 보이보 등의 실력자들이 마오쩌둥의 의도를 백화제방운동 때처럼 당을 비판하는 세력들을 색출하여 처벌하기 위한 것임으로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오쩌둥의 목표는 바로 류사오치 등이었다.
1966년 7월 19일 마오쩌둥은 학생운동이 탄압되고 있다면서 류사오치를 비판했다. 천보다, 장칭 등 중앙문화혁명소조가 나서서 류사오치에게 핍박받던 학생들을 옹호하고 마오가 학생들로부터 배우라고 했다면서 공작대를 비난했다. 7월 24일 마오쩌둥은 국빈관에서 당 지도층 인사들이 대중을 두려워하고 학생들을 탄압한다며 비판하며 공작대 해산을 요구했다. 공작대는 사과 성명 이후 해체되었고 학생들은 당연히 류사오치에게 적의를, 마오쩌둥에게 감사와 존경을 품게 되었다. 1966년 7월 29일 인민 대회당에서는 류사오치에게 숙청된 학생들이 복권되어 영웅으로 선포되었고 류사오치는 자신이 새로운 문제에 직면한 늙은 혁명가라고 자아비판해야 했다. 마오쩌둥은 류사오치는 늙은 혁명가가 아니라 늙은 반동이라고 비웃으면서 자신의 권위를 재확립했고 8월 8일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에 관한 결정문>을 발표했다.

2.2. 홍위병 내 혈통론의 제기


공산주의 동맹과 소년 선봉단 등을 제외한 모든 시민단체를 인정하지 않던 공작대가 해체되자 홍위병들이 등장했다. 이 시기의 홍위병은 고급 간부들의 자제로 구성된 홍오류 중심의 보수파 홍위병이었다. 이 시기에 '아버지가 영웅이면 그 아들도 영웅이다. 아버지가 반동이면 그 아들도 잡종이다.' 등의 대구가 유행하는 등 혈통론이 우세했고 흑오류, 회오류 등은 홍오류 홍위병들의 핍박을 받았다. 홍오류 홍위병들은 '네가지 낡은 것 타파'를 내세우며 홍위병 가입 기준을 출신 성분으로 삼았으며 비판 기준 역시 출신 성분으로 정했다. 그리고 혈통에 따라 계급의 적을 규정, 홍색테러를 자행했다. 그리고 홍위병이 막 결성되기 시작한 시점은 공작조의 기세가 등등하여 운동이 통제되던 시점으로, 자연스레 고위 간부의 자제들처럼 어느 정도 빽이 있는 홍위병들만 활동할 수 있는 것 또한 노홍위병, 보수파, 보황파를 구성하는 홍오류 출신 홍위병들의 득세에 한몫했다. 이들 보수파 홍위병들은 문화혁명 주비위원회, 문화혁명위원회 등을 장악하고 홍위병 운동을 독점하여 혈통론을 주류로 내세웠다. 여기에 탄리푸 등의 논객들이 이러한 움직임을 부추겼다.
이들 보수파 홍위병은 흑오류들에게 마오쩌둥 저작과 마오주석 어록 학습을 금지하고 자전거, 손목시계 등을 압수했으며, 목숨을 유지하는 것 이상의 생활을 금지하고, 옥수수 떡 이외의 식사도 금지하며, 감금노동을 시키는 것 등을 처분하며 가혹히 탄압함으로 자연스레 혈통론에 대한 비판을 불러 일으켰다. 이들 보수파 홍위병은 계급의 적을 없앴다는 구실로 대량 파괴와 학살을 자행했다. 베이징에선 8월에 하루에 100명씩 학살당했다. 공안부장 셰푸즈가 홍위병을 지지하고 나서면서 공안도 이들을 막지 못했다. 유명한 문화재 반달리즘이 이 시기에 행해졌다. 이들의 기세가 어찌나 당당했는지 1966년 8월 국무원 부비서장 쉬밍이 조직한 홍위병 접견 좌담회에서 천보다가 혈통론을 부정하자 흥분한 보수파 홍위병들이 드잡이를 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날 천보다는 비서 왕바오춘과 중앙문혁소조 사무조 조장 왕광위의 도움으로 겨우 빠져나갈 수 있었다.
이러한 폭력 사태는 8월 말에서 9월이 되어야 진정추세를 보였고 이후 홍위병 자격을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기존의 홍위병들은 혈통론을 내세웠지만 흑오류 출신 홍위병 조직이 곳곳에서 결성되면서 이에 맞섰고 이들을 조반파 홍위병이라 한다. 10월에 들어서 조반파 홍위병들의 힘이 세지기 시작했다. 워뤄커 등의 논객이 출신론을 내세우며 혈통론을 배격했고 10월 3일 천보다가 당 기관지인 <홍기(紅旗:붉은 깃발)>에 논설을 발표, 주자파를 비난했고 그리고 2주 가까이 지난 10월 16일 그 주자파가 인지를 명시하고, 또한 혈통론을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연설을 하게 되었다.

3. 연설 전문



3.1. 형세는 아주 좋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노선은 대대적으로 승리하였고, 부르주아지의 혁명 반대 노선은 실패를 선고받았다.

형세가 아주 좋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본 특징은 광대한 대중이 진정으로 떨쳐 일어났다는 것이다. 8월 18일 마오 주석린뱌오 동지에게 "이 운동은 아주 규모가 크고, 실로 대중을 일으켜 세웠으며, 전국 인민의 사상 혁명화에 아주 큰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마오 주석이 천안문에서 세 차례 대중을 접견했고 국경절에 열병식을 거행했는데, 여기서 드러난 대중의 거대한 규모와 장대한 기세는 중국이나 세계에 전례없던 일이다. 마오 주석이 그렇게 많은 대중을 접견하고, 친히 대중 속으로 나아가 대중과 함께한 것은, 그가 얼마나 대중을 신뢰하며 대중과 함께 호흡하고 운명을 같이하려는지를 설명해 주는 일로, 참으로 전 당의 동지들에게 눈부신 모범을 세운 것이다. 동지들은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혁명가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위대한 프롤레타리아 혁명가인 마오 주석이 우리 곁에 있으니, 우리는 그에게서 배우고, 배우고 또 배워야 한다.

2개월 정도, 즉 당의 8기 11중 전회에서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에 관한 결정이 발표된 이래[1]

, 광대한 대중은 전투의 사상 무기를 획득하여,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에 대한 마오 주석의 사상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고, 투지는 더 앙양되고, 운동은 더욱 심도 깊고 광할하고 건강하게 발전하였다. 문화대혁명은 마오 주석 저작을 학습하는 대중운동을 새롭게 고조시켰다. 위대한 홍위병 운동이 전 사회와 전 세계를 뒤흔들었다. 홍위병 운동이 거둔 전과는 찬란하다. 전체 문화혁명 운동이 파리코뮌, 10월 혁명, 중국의 여러 차례 대혁명 대중운동에 비해 훨씬 더 심오하고, 더 거센 물결을 이루었다고 부끄러움 없이 말할 수 있다. 이는 국제적으로 더 높은 단계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운동이다. 이 운동은 전 세계 혁명인민의 환호와 지지를 불러일으켰고, 동시에 전 세계 제국주의자와 현대 수정주의자의 두려움, 통한, 우려를 촉발시켰으며, 평범한 자들은 그저 아연실색하고 있을 뿐이다.


3.2. 두가지 노선 투쟁의 지속


이렇게 아주 좋은 형세에서 부르주아지 혁명 반대 노선이 저절로 사라지겠는가? 아니다. 그 노선은 결코 자연스럽게 사라지지 않는다. 마오 주석은 이미 11중 전회의 폐막식에서 우리에게 경고했다.

"결코 결정문이 발표되면 당위원회 모든 동지들이 바로 실행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일부 사람들은 결국 실행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의 전개는 마오 주석의 예견을 증명하였다.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에 대해 당이 결정한 <16조>는 앞선 단계의 오류노선, 즉 부르주아 노선을 바로잡았다. 그러나 오류노선은 아직도 다른 형식으로 출현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노선과 혁명에 반대하는 부르주아 노선 사이의 투쟁은 아직도 첨예하고 매우 복잡하다. 우리 당이 창립된 이래 정확한 프롤레타리아 노선은 마오쩌둥 동지를 대표로 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 노선이다. 이는 상이한 시기에 우와 좌의 기회주의[2]

에 대해 마오쩌둥 동지가 전개한 투쟁 중에 부단히 발전하고 부단히 풍부해져서, 쭌이 회의 이후 전체 당에서 통치 지위를 획득한 노선이다. 이 줄기가 우리 당의 전체 역사를 관통하고 있다. 그러나 마오 주석이 늘 말하듯, 계급모순, 계급투쟁은 결국 우리 당내에 반영될 수 있다. 이 때문에, "당내에서 서로 다른 사상의 대립과 투쟁은 늘 발생"한다. 부르주아 사상, 다종다양한 비플로레타리아 사상이 여전히 마오 주석의 올바른 노선을 방해하려 하고 있다.

투쟁은 줄곧 대중의 문제를 둘러싸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당의 노선, 프롤레타리아 노선, 혁명의 노선, 즉 마오 주석의 노선을 집행하기를 바라지 않는데, 마오 주석의 대중노선이 일부 동지들이 아직 개조하지 못한 부르주아 세계관과 서로 철저하게 섞일 수 없기 때문이다. 마오 주석이 제출한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 노선은 대중으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을 교육하고 스스로 자기를 해방하도록 하는 노선이다. 그러나 오류노선을 제출한 대표자들은 오히려 대중으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을 교육하고 스스로 자기를 해방하도록 하는 것에 반대한다. 그들은 인간의 영혼을 울리는 대혁명 중에 국민당의 '훈정'을 옮겨다 놓고 있다. 그들은 대중을 무지렁이로 여기고 스스로를 제갈량으로 여긴다. 이 오류노선은 프롤레타리아 문화혁명을 상반된 길로 이끌어,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지에 반대하는 것을 반대로 부르주아지가 프롤레타리아트에 반대하는 것으로 바꾸어 놓는다.

공작조는 일종의 조직 형식일 따름이다. 이런 조직 형식은 어떤 운동에서 적절하게 사용된다면 문제가 없고 필요하기도 하다. 그러나 이번 문화대혁명 중에 오류노선을 제기한 대표자들은 공작조라는 이런 조직 형식을 억지로 대중들의 머리 위에 씌웠으며, 그 목적은 그런 오류노선을 추진하기 위한 것이었을 따름이다. 공작조가 철수했지만, 마오 주석의 노선에 찬성하지 않는 사람들은 여전히 직권을 사용할 수 있어 다른 형식으로 공작조를 대체하였다. 예를 들면, 일부 학교와 기관에서 어떤 자들은 중앙이 지시한 파리코뮌 원칙을 완전히 위배하여, 사전에 지시하고 뒤에 숨어 조종하면서 이른바 '문혁준비위원회', '문혁소조', '문혁회'나 기타 조직을 설립하였다. 심지어 각 지역에서 대량의 혁명 교사와 학생들이 수도를 찾아와 마오 주석을 접견하는 상황에서, 어떤 곳에서는 일부 사람들을 조직해 먼저 와서, 자신들이 중앙 16조의 결정에 반대한다고 선전하면서 베이징에 온 혁명 교사와 학생들을 타격하려 하였다.

나는 중앙문혁소조의 동지들과 함께 9월 25일에 각지에서 온 일군의 학생들을 맞이했을 때, 이렇게 건의한 적이 있다.

"만일 고급간부의 자녀들이 각 학교와 각 단위의 문화대혁명에서 지도하는 직무를 맡고 있다면, 노동자, 농민, 병사와 보통 간부의 자녀들이 담당하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일부 학교 일부 단위에서 고급간부 자녀들이 꼭 지도지위를 장악해야 한다고 하는 생각은 좋은 점이 없고, 우리 장래의 혁명사업에 불리하며, 그들 자신에게도 좋을 게 없다. 고급간부 자녀들이 확실히 매우 훌륭하다면 대중이 분명히 그들을 옹호하고, 그들을 선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나도 여기에는 반대하지 않는다. 이런 내 제안이 합당한지에 대해 논의해 보고 숙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조사한 자료를 보면, 어떤 사람들은 곧바로 대응 조치를 취했다. 그들은 "중앙에서 이미 고급간부 자녀들이 홍위병 지도부를 맡으면 안된다고 지시했는데, 아직 대중이 모를 때 주동적으로 움직이자."라고 말한다. 그래서 허물을 벗는 꾀를 내어 직무에서 사퇴하고, 자신들 보기에 입장이 "가장 단호한" 사람을 내세워 자리를 바꾼다. 프롤레타리아 문화혁명 노선에 단호히 반대하는 술수는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일부 동지들은 이런 술수에 대해 그저 흥미로워할 뿐이다. 이는 매우 잘못된 일이다.

마오 주석은 8월 5일 <사령부를 포격하라>는 대자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전국 최초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대자보와 <인민일보> 평론원의 평론은 얼마나 잘 썼는가! 동지들은 이 대자보와 이 평론을 다시 한번 읽어보기 바란다. 그러나 50여일 동안 중앙에서 지방까지 일부 지도급 동지들은 오히려 길을 역주행하여, 반동적 부르주아지의 입장에 서서 부르주아 독재를 시행하였다. 또 프롤레타리아트의 기세등등한 문화대혁명 운동을 공격하고, 옳고 그름을 뒤집고, 흑과 백을 뒤섞으며, 혁명대중을 포위공격하고 상이한 의견을 억압하였으며, 백색테러를 실행하고, 스스로 득의에 차서, 부르주아지의 위풍을 장려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기개를 소멸시켰다. 이 어찌 해독이 크지 않겠는가!"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아직도 완고하여 변화하려 하지 않고, 마오 주석의 비평을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으며,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하겠다고 한다.이 부르주아지의 본능이 그들의 머리와 행동에 작동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마오 주석은 전국이 해방되기 전야에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이런 일부 공산당원들은 총을 든 적에게 정복되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적 앞에서는 영웅의 칭호도 마다하지 않지만, 적들이 사용하는 설탕으로 감싼 포탄의 공격은 버텨 내지 못한다."

역사상 계급투쟁은 정확히 그러하여, 본래 혁명 편에 서 있던 일부 사람들은 적의 위협과 유혹에 굴복하여 소리 없이 혁명과 대립하는 쪽으로 이동해 가게 된다. 선진적이던 것이 낙후되게 변하고 낙후된 것이 선진적인 것으로 변한다. 이런 상황은 우리 문화대혁명 중에 심각하게 표출되어 나온다.

소수이긴 하지만, 우리 중 어떤 동지들은 옛 혁명에 만족하여 해방 후에 고관대작이 되어 심지어 자신의 혁명의 역사를 완전히 잊어버렸다. 그들은 마오 주석이 여러 해 동안 비판한 "관료주의와 교만함"을 모두 가지고 있지만, 문화대혁명 중에 대중이 도전하지 못하도록 하고, 마오 주석과 당이 대중 사이에 보유한 높고 무한한 위신을 이용하여 사태를 잘 모르는 대중을 동원해 자신을 보호할 생각만 하고 있다. 이 회의에서 쓰촨 난충의 억압당한 한 여성이 자료를 인쇄하여 배포하였는데, 모두가 자세히 일독하여 교훈을 얻을 것을 건의한다. 나는 여기서 단 두마디만 인용해보겠다! 난충의 그 여성은 두명의 가도 간부에게 "만일 이 2천여명의 학생이 반혁명 공작을 벌였다면, 이는 지역위원회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이 학생들은 모두 학교에서 당의 교육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많은 '반혁명'이 나왔다면, 나는 지역위원회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모두 들어보라! 이 보통 여성의 말이 얼마나 정곡을 찌르고, 얼마나 예리하고, 얼마나 선명한가!

같은 자료에는 또 다음과 같은 퇴직 노동자의 말이 기록되어 있다.

"혁명적 지역위원회라면 우리가 가서 보호할 것인데, 이는 국민당의 지역위원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혁명적 지역위원회가 왜 대중을 두려워하는가? 낡은 정부도 아닌데. 국민당의 800만 군대모두 보호받지 못했다."[3]

모두 들어보라! 이 보통 노동자가 얼마나 명명백백하게 문제를 분석하고 있는지를. 그는 마오쩌둥 사상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다. 우리 일부 간부들과 비교해 그가 얼마나 더 뛰어난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드러난 사실은, 두가지 노선의 투쟁이 아직 계속되고 있고, 여러 차례 반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의지로 이 계급투쟁의 법칙을 바꿀 수 없다. 8월 8일 중앙이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에 관한 결정>을 통과시킨 지 12일 만에 어떤 대학의 '문혁주비위원회 위원'이라는 자[4]

[5]가 튀어나와 중앙이 결정한 <16조>에 대항하는 연설 한 편을 발표하고 인쇄하여 매우 광범위하게 배포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마오 주석이 친히 주재하여 제정한 중앙의 결정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지만, 중앙 결정에 대항하는 그 연설을 매우 고귀하게 여겨, 인쇄하고 방송해 대기에 즐겁기 그지없었다. 또 어떤 이른바 고급간부 자녀는 놀랍게도 그것을 찬양하며 딱 잘라서 그 연설이 "특히 우리의 상황에 적합하고, 우리에게 유리하다.", "우리 고급간부 자제들이 정권을 잡자."고 선포했다.

고급간부 자제 다수는 훌륭하거나 비교적 훌륭하며, 대중의 거대한 파도 속에서 단련되어 프롤레타리아 혁명사업의 후계자가 될 수 있다. 일부는 그다지 좋지 못하거나 아주 나쁘고, 심지어 수정주의의 길을 걷는다. 계급분석을 하지 않고, 사물을 '하나가 둘로 나뉜다'고 보지 않고, "고급간부 자제가 정권을 잡자."는 말에 도취되는 것으 완전히 프롤레타리아트의 길을 벗어나는 것이고, 완전히 마오쩌둥 사상에 위배되는 것이다. 우리는 마오 주석이 제출한 다섯 가지 표준에 따라 프롤레타리아 혁명사업의 후계자를 배양해야 한다. 왜 고급간부 자녀라고 꼭 정권을 잡아야 하는가? 설마 그들의 혈통이 고귀해서일까?

얼마 전 한 동지가 내게 편지를 보내 아주 예리하게 문제를 지적했다.

"전국적으로 <16조> 이전에 공작조를 파견한 곳은 모두 노선투쟁을 범했다고 보아야 합니까? 11중전회 이후 각지에서 모두 경험대교류와 다수소수 관계 등을 다루면서 이런저런 오류를 범했는데, 모두 '반동적 오류노선'을 계속 집행했다고 승인해야 합니까?"

내 생각에는 이 동지가 제기한 문제는 사실 오류노선의 인식과 추측 문제이고, 오류노선의 영향을 제거하는 문제이다. 나는 잠시 여기서 이 문제에 대해 몇가지 생각을 알리고 싶다.

첫째, 노선 문제는 구분해 살펴보아야 한다. 노선을 제출하는 것과 노선을 집행하는 것은 다르다. 오류노선을 제출한 것은 오류노선의 대표자, 즉 '''류사오치덩샤오핑 두 사람이 주로 책임을 져야 한다.'''

둘째, 당내 노선투쟁은 사회 계급투쟁의 반영이다. 류, 덩의 오류노선은 그 사회기초에 있으며, 이 사회기초는 주로 부르주아지이다. 오류노선은 당내에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데, 왜냐하면 당내에 한줌의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실권파가 있고[6]

또 세계관을 개조하지 않았거나 아직 개조가 끝나지 않은 일부 혼란한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7]

셋째, 공작조를 대거 파견하여 혁명적 학생을 진압한 것은 노선 오류를 범한 것이다. 공작조를 많이 파견하지 않은 지방이나 공작조를 전혀 파견하지 않은 지방도 혁명적 학생을 진압하였다면 마찬가지로 노선 오류를 범한 것이다. 다연히 그 내에서 알면서 집행한 경우와 모르고 집행한 경우의 구분, 경중의 구분, 제때 오류를 바로잡았는지 아니면 오류를 고집하는지의 구분이 있다.

넷째, 오류를 바로잡았는지 아니면 오류를 고집하는지를 구분하는 표지는 대중에 대한 태도이다.즉, 대중에게 오류노선을 집행했음을 공개적으로 인정했는지, '반혁명'으로 규정받은 대중을 성실히 복권시켰는지, 또 대중의 혁명행동을 지지하는지를 보아야 한다.

다섯째, 오류노선을 철저히 비판하는데 동의하지 않으면, 당중앙의 정확한 노선, 즉 마오 주석의 노선을 진정하게 집행할 수 없다.

여섯째, 이 때문에 일부 지방, 일부 동지들이 11중전회 이후 여전히 여러가지 형식, 여러가지 문제에서 계속 노선 오류를 범하고 있다. 예를 들면, 경험대교류나 이른바 소수와 다수를 다룰 떄, 이른바 공농대중, 기관간부와 학생의 충돌을 다룰 때 등에서 그들은 결국에는 대중을 동원해 대중과 싸우게 하고, 학생을 동원해 학생과 싸우게 하는 문제를 일으킨다.

일곱째, 대중을 억압하고 혁명 적극분자를 타격한 오류노선은 부르주아 반동노선이다. 당연히, 그렇다고 이런 부르주아 반동노선을 집행하는 사람이 모두 반당, 반사회주의, 반마오쩌둥 사상의 부르주아 우파분자라는 말은 아니다. 스스로 오류를 바로잡고 정확한 입장으로 돌아와 당의 정확한 노선을 집행할 수 있다면, 두번째, 세번째 범주의 간부 뿐 아니라 첫번째 범주의 간부로 발전할 수도 있다.[8]

본래 첫번째 범주의 간부라고 해도 이런 성질의 오류를 범했으면, 반드시 오류노선을 범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설명해야 한다.

여덟째, 일반적으로 노선 오류를 범한 동지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들의 오류는 인민내부의 모순의 성질에 속하며, 적아간의 모순은 아니다. 이런 동지에 대해서는 마오 동지가 늘 주장하듯이 "과거를 징계하여 미래를 경계하고, 병을 치료해 사람을 구한다"는 방침에 근거해, "사상을 분명히 하고 동지와 다결하도록 하는 이 두가지 목적을 달성"하여야 한다. 그러나 모두들 고도로 스스로 경계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건, 과거 공적이 얼마나 많건, 오류노선을 고집하면 당과 대중에 대한 그들의 모순의 성질이 변화하여, 반당, 반사회주의의 길로 미끄러져 들어갈 수 있다.

아홉째, 오류노선에 기만당해 영향받은 대중, 혹은 잠시 오류노선의 통제와 영향을 받은 일부 대중 조직은 오류노선의 책임을 지지 않는다. 모두 그들을 차별해서는 안되며, 그들에게 어떤 모자도 씌워선 안된다. 그들과 문제를 잘 논의하고 그들과 의견을 잘 교환해, 그들을 획득하고, 그들이 오류노선의 위험을 인식하도록 돕고, 그들의 막후에서 그들을 통제하고 조종하는 사람들이 오류임을 그들이 인식하도록 도와야 한다.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은 엄준한 시험이다. 우리 각자는 모두 이 시험을 겪고 있다. 현재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시험하고 있으며, 이후 오랜 기간에 걸쳐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시험할 것이다.


3.3. 몇가지 '두려움'을 던져 버리고, 대담하게 대중을 일으키자


마오 주석은 늘 우리에게 공산당 사람들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당중앙은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에 관한 결정>[9]

에서 문화대혁명 중에 각급 당 책임자는 "감히"를 우선시 해야 하고, "두렵다"를 우선시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일부 동지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두렵다'는 글자를 우선시한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너무나 두려워하고 기괴할만큼 두려워한다. 그리고 운동이 전개될수록 두려워하는 양태도 더욱 많아진다.

두려움파와 대중이 난동을 피우면 도리도 규율도 없이 난장판을 만든다고 말한다.

두려움파는 자기들의 습관인 질서를 대중이 파괴하여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한다.

두려움파는 문화혁명이 생산을 방해하며, 일단 문화혁명이 일어나면 생산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생산계획을 보증할 수 없다고 말한다.

두려움파는 문화혁명을 일으키는 자들, 특히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는 자들은 모두 불만세력, '야심가', '개입세력', '폭도', '야만인' 등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혁명 교사와 학생들, 혁명간부에게 적지 않은 죄명과 칭호를 붙인다.

그래서 그들이 혁명대중 만나기를 두려워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들이 프롤레타리아 독재 하의 대 민주를 두려워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들이 길거리에 대자보가 나붙는 것을 두려워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들이 경험교류, 특히 경험대교류를 두려워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들이 대중 속에 분열을 일으키고 대중을 동원해 대중과 싸우게 한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들이 비판과 자아비판을 두려워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들 두려움파 동지들은 천가지를 두려워하고 만가지를 두려워하는데, 한마디로 말하면, 대중을 두려워하고 혁명을 두려워한다. 좋게 생각해보면, 일부 동지들은 현상유지를 도모하는 파이다. 그러나 갈수록 더 멀어져서, 조성된 조건들을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서 붕괴시키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동지들은 반드시 아주 경계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어떤 사람들은 대중을 두려워하여 대중을 진압하는 데로 나아갔고, 혁명을 두려워하여 혁명을 반대하는 데로 나아갔다. 우리는 이들 동지들이 이런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란다.

당연히, 어떤 동지들은 본래 입으로는 대중운동에 반대하지 않고 대중을 일으키는 데 반대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마오 주석이 말한, 용을 좋아한 섭공의 고사에 주의해야 한다. 섭공은 용을 좋아하여, 어디 가나 많은 용을 그렸다. 그러나 진짜 용이 나타나자, 완전히 넋이 나가 얼굴이 잿빛이 되어버렸다. 마오 주석이 이 고사를 말한 것은 이미 40여 년전 이지만, 우리가 이것을 경계로 삼을 필요가 없어졌겠는가?

독일의 저명한 시인 하이네는 진보적 인물로 마르크스의 친구였다. 그는 자기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라 여겼지만, 공산주의 혁명은 두려워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미래의 시대가 공산주의자들에게 속함을 인정한다. 나는 심한 우려와 두려움의 어조로 이렇게 말한다. 아! 이는 위장이 아니다. 참으로, 내가 그 시대, 무지한 우상파괴자들이 정권을 잡을 시대를 생각하면, 나는 질겁한다."

하이네가 보기에, 공산주의 혁명이 도래하면, 프롤레타리아트가 정권을 잡으면, 그가 좋아하는 예술품은 파괴될 것이고, 그의 시집도 훼멸될 것이다. 그는 "나는 이 모든 것을 예견하지만, 승리한 프롤레타리아트가 위협적으로 내 시가를 훼멸하려는 상황을 생각할 때마다, 어쩔 수 없이 내 시가가 모든 낡은 낭만적 세계와 함께 몰락하는 것을 느끼는, 말할 수 없는 비감함에 빠져든다."고 말한다. 하이네는 비록 자신이 공산주의를 찬성한다고 하고, 낡은 세계가 붕괴되기를 바라고, 순결함이 상실되고 이익이 판치고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는 낡은 사회가 철저하게 파괴되기를 바랐지만, 그는 프롤레타리아트를 '무지'하다 여겼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두려워하여, 프롤레타리아 혁명가라고 할 수는 없다. 레닌은 자신이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해서, 공산주의 혁명에 대해서 무지자라고 말했다. 그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한편에서는 낡은 사회의 착취계급이 물려준 부패사상, 부패문화, 부패풍속, 부패습관을 파괴할 것이지만, 다른 한편에서 역대 인민들이 창조한 문화의 정수를 유지하고, 또 과거 모든 시대가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빛나는 문화를 창조할 것임을 알지 못했다.

여기 앉아 있는 동지들은 대개 문학가는 아닐 것이고, 시집이 훼멸될 것을 걱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외람되게 말한다면, "소인의 마음으로 군자의 심중을 헤아린다"는 것이 될 터인데, 어떤 동지들이 걱정하는 것은 아마도 하이네보다 훨씬 더 최악일 것이다. 어떤 이는 벼슬자리를 잃을까 걱정할 것이고, 어떤 이들은 '존엄'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등등일 것이다. 이런 온갖 종류의 걱정들 때문에 어떤 동지는 위대한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과 충돌하고, 혁명대중과 충돌하고, 온갖 고심을 다하여, 강경하건, 부드럽건 각종 수단을 동원해 혁명대중과 대결할 것이다. 어떤 이는 심지어 진상을 잘 모르는 노동자, 농민과 기관간부를 동원하고, 아직 시비가 불분명한 학생들을 편가름하여, 다수 대중이 자신을 옹호한다고 표방하고, 자기가 주도하는 기관이 무슨 '프롤레타리아 사령부'임을 표방하여, 자신을 건드리는 자는 바로 숙청하고 '반혁명'으로 몰아 붙이기에 이르러, 조금도 아쉬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것이 변론일 따름이며 집중공격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어떤 동지는 변론과 집중공격의 경계가 무엇인지, 어떤 것이 변론이고 어떤 것이 집중공격인지 묻는다. 사실, 우리가 엉덩이를 혁명대중 쪽에 놓고 앉고, 진정하게 대중 속으로 나아가 선다면, 이 문제를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혁명대중의 반대편에 선다면, 혁명대중을 어떻게 대할까 하는 문제에서 어떤 주장을 펴더라도, 어느 누구도 그들을 대신해서 이 문제에 대답해줄 수 없을 것이다. 경험교류 문제를 다루는 것 또한 대중을 대하는 것, 혁명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이다. 혁명학생들이 서로 경험교류를 하도록 하는 것은 학생들 스스로가 스스로를 교육하도록 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이다. 그들은 경험교류라는 혁명의 대용광로 속에서 각종 단련을 받고, 경험교류 중에 큰 시비를 분별하게 되고, 경험교류 중에 사회를 알고, 대중을 알고, 계급투쟁을 알게 되니, 그 의의는 매우 심원하다. 이 경험교류는 전국 문화대혁명의 경험을 서로 교류시켜 전국 문화대혁명을 한 조각으로 잇게 되며, 동시에 사람들로 하여금 누가 진정한 혁명을 하는지, 누가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혁명가인지, 누가 진정한 마오 주석의 학생인지 식별할 수 있게 해주고, 또 사람들로 하여금 무엇이 프롤레타리아 사령부인지 식별할 수 있게 해준다. 그 반대는 아니다. 경험교류는 학생들의 가장 크고 가장 훌륭한 학교이다.

경험교류를 하는 학생들이 걸어서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장정을 연습하도로 제안해 볼 수 있다. 마오 주석이 말하기를, "장정은 선언서이고, 장정은 선전대이고, 장정은 파종기이다."라고 했다. 다롄에서 베이징까지 걸어서 온 학생들은 마오 주석의 이런 사상에 따랐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유용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자기 집 대문을 나서 학교 교문까지 갔다가, 그 다음에는 기껏 기관 문턱을 넘은 게 다인 그런 사람들이 설마 프롤레타리아 혁명사업의 믿을만한 후계자가 될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들은 경험교류가 생산을 방해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생생한 사실은 올해의 공농생산이 아주 좋아, 공업은 빠른 속도로 성장했고, 양식과 면화도 작년보다 증산되었음을 증명해준다. 현재 중앙은 경험교류하는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기를, 그리고 가능하다면 기차, 자동차, 선박을 타지 않기를 제안한다. 아마 많은 학생들이 그렇게 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공농업 생산품의 운송은 훨씬 더 잘 처리될 수 있지 않겠는가?

경험대교류와 홍위병은 모두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 중 대중의 위대한 창조물이다. 모두 마오쩌둥의 학생이 되겠다고 말한다. 우리 위대한 스승 마오 주석이 어떻게 대중의 창조정신을 존중하는지 살펴보고 생각해보자.

경험대교류, 이것은 마오 주석이 줄곧 지지한 것이고 이런 대중의 혁명행동을 크게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모두 다 알고 있는 것이고, 이에 대해서는 많이 말하지 않겠다.

홍위병, 이것이 막 싹을 틔웠다가 박해받았을 때, 누가 홍위병을 지지하고 나섰는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우리 위대한 원수 마오 주석이었다. 8월 1일 그는 칭화대학 부속중학 홍위병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나는 여러분에게 열렬한 지지를 보낸다."라고 말했다.[10]

한 점의 불꽃이 들판을 태울 수 있다. 몇개월의 짧은 시간 동안 마오 주석의 선견지명 있는 지지를 받아, 일군의 홍위병들이 마침내 전국적으로 경천동지할 광대한 청소년 혁명대오로 발전하였다. 모든 온갖 잡귀신들은 그들을 보자 온몸을 덜덜 떨었다. 대중을 두려워하고 혁명을 두려워한 일부 사람들 또한 황황하고 불안하여, 제일 좋은 방법은 억누르는 것이며, 적어도 대중운동을 그들이 설계한 이른바 '올바른 궤도'로 옮겨야 한다고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홍위병은 이미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했고, 수많은 창의를 제기했다. 홍위병의 창의를 모두 중시해야 하고, 진지하게 연구해, 시행할 수 있는 일은 실시하도록 해야 한다. 각지 홍위병들이 거둔 전과는 반드시 전시회를 열어서, 온갖 공개적, 암약하는 잡귀신들을 충분히 폭로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고, 사실을 통해 혁명의 조반유리를 증명하여, 간부를 재교육하고, 대중을 교육하고 후대를 교육하도록 한다.

어떤 자본주의 국가의 통신사가 우리 홍위병 운동을 관찰한 후 다음과 같이 논단한 적이 있다.

"홍위병 조직은 지금까지 대략 2개월의 역사를 보이지만, 이미 7억 5천만명 중국인의 정치생활에 영원한 고정적 조직이 되었다. 그들은 대략 중국인의 미래의 정치생활과 개인생활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이 통신사는 이어서 또 이렇게 말한다. 서방세계나 현대 수정주의 집단이 이런 "열광"을 단지 "룸펜 운동이나 짧은 시간의 열정"으로 생각한다면, 이는 "멍청한 짓일 뿐 아니라 아주 위험하기도 하다."

적들의 관찰이 실제로는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는 일부 동지들보다 훨씬 더 분명하다. 이 점에 대해 우리 동지들이 잘 생각해 보기 바란다. 본래 우리 조국 자신의 일이다. 왜 우리를 적대시하는 외국인들이 "아주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분명한 것은 현재가 이른바 '쇄국' 시대는 아니라는 것이다. 국제 프롤레타리아 혁명 기세는 결국 상통한다. 우리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의 영향이 전 세계에 미치고 있고, 각국의 피압박 피착취 인민들을 감동시키고 있다. 분명한 것은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이 장차 우리나라 인민의 사상을 더욱 신속하게 더욱 고도로 혁명화할 것이라는 점이다. 어느 곳 어느 단위에서건 진지하며 소홀하지 않게, 엄숙하고 경망스럽지 않게 문화대혁명을 잘 장악하면, 반드시 대중의 생산 적극성을 크게 촉진하고, 공농업 생산과 과학기술의 새로운 비약을 크게 촉진하여, 우리나라는 비교적 짧은 시간에 세계 선진 수준을 따라 잡아 뛰어넘을 수 있게 되고, 더욱 힘 있게 세계 각국의 혁명투쟁을 지지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를 적대시한느 세계의 반동역량이 우리 문화대혁명이 그들에게 "아주 위험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적들이 두려워하는 일을 우리는 더욱 노력해 이루어야 한다. 우리 각 지구 각 부문 동지들, 광대한 노동자, 농민 대중, 광대한 청소년들은 모두 <문화대혁명에 관한 당의 결정>을 잘 파악하고, <결정> 중 "혁명을 수행하면서 생산을 촉진한다"는 지시에 주의해, 한편에서 적극적으로 문화대혁명에 참가하면서 다른 한편 단호히 생산과 건설의 직무를 지키고, 자신이 최대의 혁명 의무를 다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3.4. 마오 주석이 제출한 계급노선을 견지해 대다수를 단결시키자


마오 주석은 이렇게 말한다.

"누가 우리의 적인가? 누가 우리의 친구인가? 이 문제가 혁명의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의 혁명이 잘못된 길로 들어서지 않고 성공을 획득하려면, 우리의 참된 친구와 단결하여 우리의 참된 적들을 공격하지 않으면 안된다."

마오 주석은 혁명은 "반드시 진보세력을 발전시키고, 중간세력을 쟁취하고, 완고세력의 책략을 반대해야 하는데, 이것은 분리될 수 없는 세가지 고리이다."라고 말한다.

마오 주석은 혁명은 "모든 것을 연합하여 투쟁을 부정하는 것도, 모든 것과 투쟁하여 연합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연합과 투쟁 두 방향을 종합하는 정책이다."라고 말한다.

이는 마오 주석이 제출한 프롤레타리아 정치노선과 투쟁 전략이다. 각 혁명 시기 혁명의 성질과 대상은 바뀌지만, 마오 주석이 제출한 이 계급노선과 투쟁 전략의 일반 원칙은 각 시기에 모두 적용된다. 현재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 중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당은 프롤레타리아 대혁명 중 반드시 마오 주석이 제출한 이런 계급노선을 견지하여, 프롤레타리아 혁명대오, 즉 진정한 좌파대오, 결함없는 좌파대오를 발전시키고 강건히 만들어야 한다. 동시에, 계속 동요하고 좌우로 오가고 동서로 오가는 사람들을 쟁취하고, 대다수를 단결시키고, 권모술수를 부리며 프롤레타리아 문화혁명에 완고하게 저항하는 양면파를 충분히 폭로해야 한다.

최근 들어 어떤 사람들은 종파주의로 당의 계급노선을 대체하려 시도하고 있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원칙을 저 하늘 멀리 던져버리고,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 중 각종 상이한 정치입장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며, 각종 파벌들이 모두 각각의 정치성과 계급성을 지니고 또 이런저런 사회 사조를 대표한다는 점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혈통론으로 계급론을 대체하여 계급 전선에 비집고 들어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대오를 고립시키려 하고 있다.

각 지역에서 "스스로 붉다"는 황당한 논리가 유행하고 있다. 이런 황당한 논리를 만든 사람은 과거에 각종 수단을 동원해 노동자, 농민의 자녀를 타격하고 배척한 사람이다. 그들은 노동자, 농민 출신 청소년의 계급 감정을 이용하고 일부 젊은이들이 천진하게 제기한 "아버지가 영웅이면 아들은 멋진 놈"이란 주장을 이용해 일부 학생들을 미혹시키고 있다. 사실 이는 착취계급의 반동적 혈통론이다. 봉건지주 계급은 "용은 용을 낳고, 봉황은 봉황을 낳으며, 쥐가 새끼를 낳으면 쥐구멍만 찾는다." 따위의 말을 퍼뜨린다. 이런 것이 바로 혈통론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반 마르크스-레닌주의적이고 반 마오쩌둥적 사상이며, 그야말로 철저하게 반동적인 역사유심론이고,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계급분석에 근본적으로 대립하는 것이다.

우리 혁명대오 중에 마오 주석과 우리 당은 줄곧 사람들의 계급성분, 계급출신은 특별히 중시하였지만, 동시에 '유(唯)성분론'에 반대했다. 청소년은 모두 반드시 계급투쟁 중에 장기에 걸쳐 자신을 시험하여야 하고, 자기의 세계관이 어느 계급에 속하는지, 부르주아지에 속하는지 프롤레타리아트에 속하는지 증명하여야 한다. 마오 주석이 말하듯이, "각종 사상에는 계급의 낙인이 찍히지 않은 것이 없다." 사람의 사상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존재의 반영이고, 사회 계급투쟁의 실천 중에 점차 형성되는 것이며, 이 계급을 반영하거나 저 계급을 반영하는 것이다.

우리 당은 프롤레타리아 정당이다. 우리 당은 인민대중을 지도해 건립한 것이고, 국가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이다. 우리의 목적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면모에 따라 세계를 개조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처음으로 계급 사회의 비밀, 특히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가 격렬하게 대항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비밀을 폭로했다. <마오쩌둥 선집> 첫번째 글의 제목은 <중국사회 각 계급의 분석>이며, 이 글의 결론은 공업 프롤레타리아트가 우리 혁명의 지도 역량이라는 것이다. 우리 혁명이 승리한 후, 마오쩌둥 동지는 국제, 국내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역사경험을 총괄하여, 사회주의 시기에도 계급, 계급모순, 계급투쟁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학설을 제기하였는데, 이 학설은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극히 심원한 의의를 지니는 새로운 발전이다. 마오쩌둥 동지의 이 학설의 전 당을 교육하고 대중을 교육하여, 프롤레타리아트는 절대로 계급투쟁을 잊지 않도록, 당과 군을 찬탈하고 정부를 찬탈하려는 수정주의자의 각종 음모와 위계를 절대로 막을 수 있도록, 그리고 국가의 성질이 변하는 것을 방비할 수 있도록 시시각각 고도의 경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분명히 우리는 계급부문에서 조금의 모호함도 없고, 있을 수도 없다. 우리는 단호한 역사유물론자이다. 우리의 관점은 유심론적 혈통론자와 어떤 공통점도 없다.

줄곧 마르크스주의자는 그 사회지위에 비추어 볼 때 노동자계급이 가장 혁명적이고 가장 쉽게 과학적 사회주의를 수용하며, 사회주의 혁명의 사명을 짊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은 노동자 운동이 자생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 그리고 우리의 마오쩌둥 동지, 모두 위대한 프롤레타리아 혁명가이며, 모두 위대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스승이다. 그들이 창립한 사상은 모두 대중에게서 나와서 대중에게로 들어간다. 그들은 인류 역사에서 창조된 선진사상의 성과를 총결하고, 특히 각 시기 국제노동자계급 투쟁의 모든 경험을 총괄하였으며, 그 때문에 과학적 사회주의를 창립하고 발전시켰고, 노동자계급을 부단히 전진으로 이끌어 냈다.

일부 어떤 노동자 출신 사람들이 결코 노동자계급을 대표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부르주아지의 영향을 받았고 부르주아지에 매수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영국 노동당과 각국 사회민주당의 일부 지도자들은 노동자 출신이었지만, 나중에 오히려 파업파괴자로 변신하였고, 그들의 정당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반대하는 부르주아지의 도구가 되었다. 소련과 기타 각국에서 현대 수정주의자들의 일부 또한 노동자 출신이거나 간부 자녀들이다. 지금 일부 학생들은 '저절로 붉다', '저절로 검다' 따위의 관점을 수용하고 있고, 학생들은 '다섯가지 붉은 부류'[11]

, '붉지 않은 다섯가지 부류'[12]나 '검은 몇가지 부류'[13] 따위로 분류해야 한다는 관점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런 관점을 만들어 내는 자들은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 중에 혼란을 조장해 청년의 눈을 멀게 하는 자들이다. 우리는 청년들이 이런 혈통론의 잘못된 관점을 받아들이지 말고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활용하고 마오쩌둥 사상의 계급론으로 자신의 머리를 무장하기를 권고한다. 동시에, 이런 혈통론을 만들어 배포하는 사람들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길로 돌아오고자 한다면, 반드시 오류를 바로잡고 이런 황당한 논리 배포를 중단해야 할 것이다. 사실 이런 혈통론자는 자신의 혁명의 진전 중 부단히 개조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다른 사람도 혁명운동 중에 스스로를 개조할 수 있다는 점 또한 부정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그들은 스르로 혁명을 원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혁명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계급성분과 출신계급을 중시하지 않는 것도 큰 잘못이지만, 성분만 보고 정치표현은 보지 않는 것 또한 큰 잘못이다. 이런 잘못된 관점은 반드시 비판해야 한다.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에 비추어 보면, 계급분석을 떠나서 이른바 다수와 소수의 문제를 보는 것도 완전히 잘못이다. 10월 혁명 전야에 볼세비키는 소비에트 내에서 소수였고,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원이 다수였다. 그러나 볼셰비키의 위대한 영수 레닌은 바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를 대표하고, 러시아 인민 대다수를 대표하고, 마르크스주의의 진리를 대표하였지만,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은 바로 반혁명을 대표하고, 한 줌의 착취계급을 대표하여, 그들 다수는 일시적이고 위선적이었다. 우리 당의 역사 또한 마찬가지로 이런 상황을 설명해준다. 우리의 위대한 스승 마오 주석은 쭌이 회의 이전에 당중앙에서 소수의 지위에 놓여 있었지만, 바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를 대표하고, 중국 인민의 대다수를 대표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진리를 대표하였다. 마오 주석의 노선을 반대한 대표인물들은 당 중앙에서 일시적, 표면적으로 다수였지만, 마침내 한 명씩 실패하였고, 몰락하였고, 대중의 버림을 받았다.

계급분석을 하지 않고, 스스로 '초연'한 지위에 있다고 말하고, 좌중우를 나누지 않고, 이편도 지지하지 않고 저편도 지지하지 않는 불편부당을 보이고 공명정대하다고 하지만, 결국은 형세가 사람을 몰아세워, 이쪽이 아니면 저쪽이고, 결국 어느 한 편에 서게 되어, 프롤레타리아트 편이 아니면 부르주아지 편이 되고, 좌파편이 아니면 우파편이 된다. 이른바 불편부당은 표면적이고 위선적인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역사상 최대 다수의 이익을 대표하는 가장 위대한 계급이다. 마오 주석은 8월 1일 칭화 부중 홍위병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는 여러분들을 지지하며, 우리는 여러분들이 단결 가능한 사람들을 모두 단결시키는데 주의할 것 또한 요구한다"고 지적하였다. 이어서 마오 주석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기 자신을 해방시켜야 할 뿐 아니라 전 인유를 해방해야 한다. 전 인류를 해방할 수 없다면, 프롤레타리아트 자신도 최후에 해방될 수 없다. 이 이치를 동지들은 주의하기 바란다."

마오 주석이 제기한 프롤레타리아 혁명파의 노선은 우리가 종파주의, 즉 배타주의를 방지하는 데 주의할 것을 요구한다. 그는 배타주의 전략을 고립무원의 전략이라고 부르고, 단기필마 전략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의 전략은 반대로 "광대한 사람과 말을 불러 모아 격돌을 잘 포위해 소멸시키는 것"이다.

우리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은 반드시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에 관한 당의 결정, 즉 <16조>를 따르고 마오 주석이 제기한 계급노선과 투쟁의 전략을 따라서, 좌파대오를 발전시키고, 대다수와 단결하며, 한줌의 자본주의 길을 걷는 실권파, 한줌의 반혁명 수정주의 분자를 고립시켜야 한다. 이렇게 우리 프롤레타리아 문화혁명 대오는 호탕하게 전진하여 하나씩 장애를 돌파하고, 하나씩 승리를 거둘 것이다.

"장강의 뒷 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내고, 세상의 새로운 사람들이 옛 사람을 따라잡는다."

의심할 여지없이,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 중에 프롤레타리아 신사조, 신문화, 신풍속, 신습관이 반드시 부르주아지와 기타 착취 계급의 구사상, 구문화, 구풍속, 구습관 이런 부패한 것들을 대체할 것이다. 위대한 마오쩌둥 사상으로 무장하여 떨쳐 일어선 중국 인민은 반드시 온갖 잡귀신을 쓸어버릴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 만세!

위대하고 빛나고 정확한 중국 공산당 만세!

싸우면 반드시 승리하는 마오쩌둥 사상 만세!

위대한 스승, 위대한 영수, 위대한 원수, 위대한 조타수 마오 주석 만세!


4. 왜 이런 연설을 했나?



5. 여파


이 연설의 발표로 조반파와 보수파의 위세가 바뀌었다. 보수파 홍위병들은 난데없이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추종하는 반동의 자제들이 되었고 이에 당혹한 상당수 보수파 홍위병들은 기존의 급진적 입장을 버리고 정말로 보수적 입장으로 돌아섰다. 반면 흑오류와 회오류 출신 학생들은 크게 고무되어 11월에 이르러서는 조반파 홍위병의 기세가 크게 약진했다. 이제 흑오류 홍위병은 자신이 흑오류임을 매우 당당하게 밝힐 수 있었다.
옛것들을 공격하던 보수파와 달리 조반파는 기존 당내 고급 간부들을 공격했다. 빌딩과 학교와 사무실을 점거한 조반파 홍위병들은 차량과 무기로 무장하고 보수파 홍위병과 부르주아 반동 노선을 따른다고 추정되는 당 간부들을 공격했다. 11월 1일 <마오 주석이 제시한 프롤레타리아 혁명 노선의 승리>라는 사설이 발표되어 보수파를 깎아내리고 조반파를 추켜세우며 고위 당원들을 반당 분자, 우파, 가짜 혁명가, 좌파 행세를 하는 우파로 몰아세웠다. 이에 조반파의 기세는 더욱 등등해져서 홍오류들까지 조반파에 합세, 조반파가 홍위병 운동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전국 각지에서 보황파, 부르주아 노선 추종자, 즉 주자파로 보이는 고위 당원들을 마구 공격함으로 중국은 대혼란에 빠졌다. 사태를 진정시키려던 인민해방군마저 마오쩌둥이 장칭과 천보다가 쓸모없어보이면 그들을 죽여라. 그럼 나도 물러날 것이다라고 엄포를 놓으면서 무력화되었고 마침내 왕광메이가 1967년 4월 10일 콰다이푸라는 홍위병의 주도로 조리돌림당했는데 이 콰다이푸는 과거 왕광메이가 파견한 공작대에게 우파로 몰려 조리돌림당했던 인물이었다.
기세가 오른 조반파들은 군대까지 공격하여 이들의 무기로 무장했고 마침내 류사오치도 숙청되었다. 하지만 혈통론 자체는 끝내 배격되지 않았고 이후 보수파와 조반파 홍위병들 사이의 끝없는 싸움이 벌어지며 이후 중국은 한치 앞을 가릴 수 없는 혼란의 길로 치닫게 된다.

6. 참고 문헌


  • 중국 문화대혁명과 정치의 아포리아 -중앙문혁소조장 천보다와 조반의 시대, 백승욱, 그린비.
  • 문화대혁명, 프랑크 디쾨터, 열린책들.
  • 마오쩌둥 평전, 알렉산드르 판초프, 스티븐 레빈, 민음사.

7. 관련 문서


[1] 문혁 16조가 발표된 1966년 8월 8일.[2] 좌파 기회주의는 3차 초공작전 이래 중국 공산당을 영도했던, 소위 28인의 볼셰비키로 칭해지는 보구, 뤄푸를 비롯한 임시당중앙의 유소(소련 유학)파와 코민테른 군사고문 오토 브라운 등을 말한다.[3] 첨언하자면, 국민당은 800만이나 되는 군대를 보유한 적이 없다. 중일전쟁 개전 이점 시점의 보유 군대가 200만 수준이고 중일전쟁 끝나고 최대치로 불어난 시점에도 600만은 넘지 않았다. 다만 정규군이 아니라 각 지방의 토호들이 만든 자경단이나 민병대를 합치면 어찌어찌 이 정도 숫자를 맞출 수 있긴 하다.[4] 1966년 8월 20일 <8.20 변론회에서의 발언>을 발표하여 혈통론을 옹호한 고위 공무원의 아들로 홍위병이 된 탄리푸를 말한다. 탄리푸는 홍오류가 아닌 모든 사람을 홍위병에서 축출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의 주장은 수백만부나 인쇄되어 전국의 모든 정부기관과 대학에 유포되었다.[5] 이렇게 극딜을 당한 탄리푸이지만 이때만 잠시 추웠을 뿐 이후 베이징 고궁박물관 서기가 되는 등 잘 나갔다.[6] 이른바 주자파.[7] 디쾨터는 이 부분에 대해 1960년대엔 그런 사람 없었다고 싸늘하게 논평한다.[8] 문혁 16조의 8조에서 규정하는 4부류의 간부 구분을 말한다. 첫번째 범주는 좋은 간부, 두번째 범주는 비교적 좋은 간부, 세번째 범주는 엄중한 잘못이 있지만 아직 반당, 반사회주의는 아닌 간부, 네번째 범주는 반당 반사회주의 우파 분자를 말한다.[9] 문혁 16조를 말한다.[10] 마오쩌둥이 1966년 8월 1일 칭화대학교 부속 중학교에서 결성된 홍위병들에게 친전을 보내 '저항은 정당한 행위다'라고 이들을 부추긴 일을 의미한다. 기존의 공작대는 홍위병 조직을 해산하려 했으나 마오쩌둥은 홍위병을 지지하고 나섰고 마오쩌둥의 친전 이후 공작대의 탄압으로 사그라들던 홍위병들이 전국 곳곳에서 재결성되었다.[11] 혁명간부, 혁명군인, 혁명열사, 노동자, 빈하중농 가족.[12] 구지주, 구부농, 반혁명분자, 악질분자, 반동분자 가족.[13] 소위 흑칠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