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쇼프 난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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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tjof Wedel-Jarlsberg Nansen
프리드쇼프 난센
'''
'''본명'''
프리티오프 베델얄스베르그 난센
'''출생'''
1861년 10월 10일 스웨덴-노르웨이 연합 왕국 스토레 프뢰엔
'''사망'''
1930년 5월 30일 노르웨이 뤼사케르
'''국적'''
노르웨이 [image]
'''직업'''
탐험가·과학자·외교관
1. 소개
2. 탐험 활동
2.2. 북극 탐험
3. 과학 활동
4. 정치 활동
5. 기타


1. 소개


1861년 10월 10일 ~ 1930년 5월 13일
노르웨이탐험가, 정치가, 과학자이자 범국민적인 영웅.
노르웨이어 이름인 Fridtjof는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집에는 '프리드쇼프'로 규정되어 있으나 실제 노르웨이어 발음은 '[ˈfɾɪ̂tːjɔf](프리티오프 혹은 프리트요프)'에 가깝다.
탐험, 과학, 정치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업적을 쌓은 노르웨이엄친아로, 그의 이름이 노르웨이 해군의 첫 이지스함이름으로 쓰였다는 사실이 그의 노르웨이 내 지위를 보여준다. 특이하게 노벨과학상 외의 노벨상만을 수상한 과학자이기도 하다.[1]

2. 탐험 활동



2.1. 그린란드 횡단


1888년 난센은 그린란드 빙원을 동에서 서로 횡단하였다.

2.2. 북극 탐험


1893년, 자신이 설계한 '프람 호'[2]를 타고 북극점 정복을 시도했다.[3] 하지만 북극점 도달이 프람 호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자, 동료 얄마르 요한센(Hjalmar Johansen)과 함께 걸어서 북쪽으로 향했다.
1895년 4월 북위 86° 14´ 지점에 도달했다. 이는 이때까지 인간이 도달한 지점 중 가장 북쪽에 간 것이다. 그러나 식량 부족으로 북극점을 밟지는 못하고 귀환을 선택, 바다코끼리북극곰을 잡아 연명하면서 남쪽으로 향하다가 영국 탐험대에게 구조되었다.
북극에서 돌아온 뒤에는 새로 독립한 조국 노르웨이의 정치 관련 일이 바빠지면서 탐험가로서는 은퇴하고, 후배 탐험가인 로알 아문센의 후원자가 되었다. 난센은 아문센에게 '프람 호'를 물려주었고, 자신의 동료 얄마르 요한센도 데려가게 했다. 이것이 요한센에게는 오히려 불행이 되었지만…
그 외에도 남극 탐험에 나서는 영국의 어니스트 섀클턴에게도 여러가지 조언을 해주었다. 그러나 새클턴은 조랑말과 설상차(스노모빌) 대신, 썰매개를 권한 난센의 조언을 무시했다가 결국 남극 탐험에 실패했다.[4] 그래도 새클턴은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실패를 인정하고 대원들을 살려서 귀환했다. 그러나 로버트 스콧은 섀클턴의 실패를 무시하고 난센과 아문센의 조언도 무시하며 고집을 부렸다가 비참하게 사망했다. 아문센 vs 스콧 항목에서 나오듯이 난센은 스콧을 무모하다고 비난했는데[5] 난센의 비난과 지적은 확실히 들어맞았다.

3. 과학 활동


난센은 프람호를 이용한 북극 탐험에서 유빙을 따라 떠다니며 탐험을 진행하기도 했는데, 이 과정에서 바람 방향과 유빙의 방향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는 이 연구 자료를 해양학자 에크만에게 전달하였고, 이 자료를 바탕으로 에크만은 후일 취송류 이론을 확립하게 된다.

4. 정치 활동


난센은 본래 공화파였으나, 외교관이자 작가였던 왕정파 시구르 입센(Sigurd Ibsen)[6]의 주장에 감화를 받아 당시 노르웨이와 동군연합을 이루던 스웨덴 왕국의 오스카르 2세로 하여금, 덴마크 프레데리크 8세의 차남인 칼 왕자가 노르웨이 왕위를 받을 수 있도록 설득하는 데에 큰 공헌을 하였다. 국민투표 결과 왕정론이 우세하여, 칼 왕자가 "호콘 7세(Haakon VII)"로 즉위하고 1905년 6월 7일 노르웨이는 스웨덴으로 부터 독립하였다. 만약 당시 노르웨이가 왕국이 아닌 공화국으로 독립했다면 난센이 대통령이나 총리가 되는 것이 유력했다고 한다.[7]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연맹의 고등판무관으로서 난센은 국적이 없는 난민들에게 발행하는 "난센 여권" 사업을 시작해했고 난센 여권은 지속되어 42년까지 45만명의 난민을 구제하기에 이른다 그 공로로 그가 사망한 후인 38년에는 난센 국제 난민 사무소가 평화상을 받게 된다.
그 외에도 전쟁포로의 환송이나 전쟁의 피해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왔는데 특히 1921~1922년에 러시아 내전으로 발생한 러시아 대기근으로 인해 수백만명이 굶어죽고 살아남은 사람도 가족을 서로 잡아먹는 참상이 벌어지자 있는돈 없는돈 죄다 털어서 구호소를 설립, 이미 참혹한 피해를 입었지만 그나마 피해를 줄일수 있었다. 이 공로로 1922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게 된다

5. 기타


노르웨이 해군의 이지스 호위함의 1번함은 이 사람의 이름을 따 프리드요프 난센함이라 명명되었다.
노르웨이의 대표 매국노이자 파시스트비드쿤 크비슬링이 난센의 조수로 일한 적이 있다.
급격히 도래한 빙하기로 절멸하기 직전의 인류 문명을 다룬 게임 프로스트펑크에서도 간접적으로 등장한다. 국가가 멸망하고 그나마 덜 추운 북극 근방에 최후의 도시가 건설되자 본인의 목숨까지 내놓으면서 수많은 피난민들을 이끌어 주인공 도시까지 인도하는데 성공한 영웅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1] 후보 추천을 받은 사람 중에는 파브르 곤충기를 써서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천된 장 앙리 파브르도 있다.[2] 배의 바닥이 둥글린 형상이였는데. 이는 유빙이 압박을 가하면 자연스럽게 위로 미끄러져 나오도록 하기 위함이었다.[3] 이때 난센은 "몇 년간 표류하다보면 알아서 북극점에 도달하겠지."라는 비범한 생각으로 8년치 연료와 6년치 식량을 싣고 갔다.[4] 물론, 섀클턴이 스콧처럼 무작정 무시한 건 아니고, 나름의 계산으로 조랑말을 택했던 것이다. 문제라면, 남극이 섀클턴의 예상 이상으로 극한지대였다는 것.[5] 앞서 탐험가들이 극지방 탐험에서 사용한 개썰매를 두고 "'''잔인한 동물학대'''"라고 비난하는 스콧의 면전에서 "'''그러면 사람이 썰매를 끌게 하는 건 어떻게 생각하는데요?'''"라고 받아쳤다.[6] 그 유명한 헨리크 입센의 아들이다.[7] 실제로 공화국인 유럽 국가들은 의원내각제나 이원집정부제 체제를 택한 나라들이 대부분이어서 대통령보다 총리의 권한이 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