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니스트 섀클턴

 



'''Sir Ernest Shackleton
CVO OBE FRGS
'''
'''본명'''
어니스트 헨리 섀클턴
(Ernest Henry Shackleton)
'''국적'''
'''영국''' [image]
'''출생'''
1874년 2월 15일,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킬데어 주 킬케아[1]
'''사망'''
1922년 1월 5일 (향년 47세), 포클랜드 제도 사우스조지아 섬
'''배우자'''
에밀리 도먼
'''자녀'''
레이먼드, 세실리, 에드워드
'''직업'''
탐험가
'''서명'''
[image]
1. 개요
2. 생애
2.1. 소년 시절
2.2. 디스커버리 호의 탐험
2.3. 님로드 호의 탐험
2.3.1. 성과
2.3.2. 죽은 사자보다 산 당나귀가 낫다
2.4. 위대한 실패
2.4.1. 인듀어런스 호, 무너지다
2.4.2. 불가능에 도전한 섀클턴
2.4.3. 귀환
2.4.4. 한편, 엘리펀트 섬에서는...
2.4.5. 빌햐울뮈르 스테파운손과의 비교
2.5. 탐험 이후
3. 기타
4. 바깥고리
4.1. 관련 서적
4.2. 관련 영상
4.3. 관련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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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죽은 사자보다는 산 당나귀가 낫다.”'''[2]

영국탐험가.

2. 생애



2.1. 소년 시절


섀클턴은 2남 8녀의 둘째(장남)로 태어났다. 농부였던 섀클턴의 아버지는 의사가 되기 위해 고향을 떠나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의 트리니티 대학에 진학하게 되고, 섀클턴은 어머니와 형제자매들과 대부분의 소년 시절을 보내게 된다.
이후 1884년 섀클턴은 런던의 시든햄으로 이주했고, 1887년 덜위치 학교에 진학한다.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는 혼자 책을 읽기 좋아했다고 한다.

2.2. 디스커버리 호의 탐험


섀클턴이 남극과 처음으로 인연을 맺은 시기는 1901년이다. 영국은 디스커버리호를 보내 남극을 탐험하도록 했는데, 이때 섀클턴도 참가했다.
제국주의 시대 남극 정복은 나라의 자존심을 건 대결인지라 이 탐험대의 대장은 영국 해군 중령 로버트 스콧이었고, 전문 연구원들을 제외한 일반 탐험대원들은 영국 해군들로 대부분 구성 되었는데 영국 상선대 사관인 섀클턴도 해군 소속인 만큼 이 탐험대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스콧은 섀클턴과 에드워드 윌슨을 데리고 남쪽으로 향하지만 얼마 못 가서 실패를 맛보게 된다. 데리고 간 개 22마리를 모조리 잃고 세 명 모두 설맹동상괴혈병에 허덕이게 된 것이다. 특히나 섀클턴의 병세가 심각했고, 결국 그는 기지로 돌아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스콧에 의해 강제로 본국으로 송환당한다. 나중에 스콧이 쓴 '디스커버리 호 여행기'에서 섀클턴은 변변치 못한 인물로 그려졌다. 과연 평가가 합당한지는 스콧과 섀클턴의 행적을 보고 판단하면 된다.[3]
첨언하자면 에드워드 윌슨은 나중에 스콧과 함께 남극점 탐험을 떠났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같이 죽게 된다.

2.3. 님로드 호의 탐험


1907년, 섀클턴은 다시금 남극을 방문한다. 이번에는 탐험대의 대장 자격이었으며, 이 탐험은 1909년까지 계속된다.
다만, 영국 탐험대임에도 불구하고 스콧이 "맥머도 만은 나에게 우선권이 있다"는 딴지를 거는 바람에 웨일스 만과 에드워드 7세 랜드에 잇달아 상륙을 시도하지만 얼음 때문에 실패로 돌아간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맥머도 만에 기지를 세우게 됐다.[4]
그러나 그가 거둔 성과는 눈부신 것이었다.

2.3.1. 성과


  • 제임스 에덤스가 지휘한 등반대는 남극 최대의 화산인 에러버스 산의 정상에 올랐다. 이 산의 높이는 3734m이며, 현재도 활동하는 활화산이다.
  • 앨리스테어 F. 멕케이가 지휘한 분견대는 남위 72도 25분, 동경 155도 16분에 위치한 자남극점을 정복했다.
  • 과학적인 성과도 컸다. 섀클턴은 남극에서 석탄 조각을 발견했는데, 석탄이란 식물이 땅속에 묻혀서 생기는 것이라, 식물이 자랄 수 없는 극지 기후에서는 생성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지질학의 패러다임을 대륙 이동설로 바꾸어준 증거가 된다. 발견 당시에는 오파츠 취급됐지만...
  • 섀클턴이 이끈 본대는 남극점에서 156km 떨어진 지점인 남위 88도 23분까지 도달했다. 이는 당시로서는 최고 기록이었다.

2.3.2. 죽은 사자보다 산 당나귀가 낫다


성과도 컸지만, 섀클턴의 탐험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만주산 조랑말과 스노모빌을 투입했는데, 그걸 본 노르웨이프리드쇼프 난센(1861~1930)은 기겁하면서 그를 말리며 "조랑말은 위험하다! 가 낫다. 그리고 저 설상차는 과연 극지방에서 제대로 움직이기나 할 수 있나? 개썰매가 낫다"며 충고[5]를 해줬지만 섀클턴은 조랑말을 가지고 남극 탐험을 떠났다. 이렇게 한 이유는 섀클턴이 바보라서가 아니라 이렇게 계산했기 때문이다.

조랑말은 1마리가 하루에 무려 800킬로그램을 끌고갈 수 있다. 그런데 하루에 5킬로그램의 먹이만 주면 된다. 그러면 그 짐으로 먹이도 가져가고 두둑한 먹을 거리와 연료와 의료품이나 생필품을 끌고 가게 하면 된다. 스노모빌이 고장나도 문제 없다.

하지만 는 1마리가 무리를 해도 하루에 겨우 50킬로그램밖에 못 끌어간다. 그러고도 하루에 750그램의 먹이가 필요하다. 따라서 짐을 운반하는 데 개보다는 조랑말, 그것도 추위에 강한 만주 지역 말이 안성맞춤이다.

얼핏 보면 섀클턴의 판단은 맞는 것처럼 보인다. 지구 대부분의 지역에서 이 교통수단의 대세가 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섀클턴의 탐험대가 가는 곳은 단지 좀 썰렁한 한랭지역이 아니고 '''지구 최대의 혹한지'''인 '''남극'''이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남극만큼은 아니더라도 상당히 추운 지역인 북쪽에서는 말이 아니라 개썰매를 이용하는 것도 이런 까닭 때문이다. 몽골 제국의 그 유명한 역참 제도도 최북단에서는 말이 아니라 개를 이용했다. 극지대에서 개가 말보다 더 유용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 개는 을 흘리지 않고 말은 땀을 흘린다. 땀은 극지방의 맹추위 속에서 순식간에 얼어 버리므로 동상의 위험이 크다.
  • 개는 털이 무성하지만 말은 갈기를 제외하고는 털이 없는 거나 다름없을 정도로 매우 짧다. 따라서 털이 두둑한 개썰매용 개들은 영하 40도에서도 휴식을 취할 수 있지만, 말은 담요를 씌워주는 등 조치가 필요하다.
  • 조랑말은 200kg이 넘기 때문에 크레바스에 빠지면 구출하기가 불가능하지만, 20 ~ 30kg 정도의 개는 한두 마리가 빠지면 한두 명의 인원으로도 충분히 구해낼 수 있다.
  • 개는 잡식이라 먹이를 사람과 공유할 수 있지만, 말은 사람이 먹지 못하는 건초를 따로 준비해야 한다.
  • 건초를 먹인 말에게는 얼음녹인 물을 충분히 급여해야 한다.
결국 말들은 거의 모두가 얼어 죽었고, 설상차도 죄다 작동이 멈춰버렸으며, 최후까지 살아남았던 한 마리의 조랑말도 훗날 비어드모어 빙하라 불리는[6] 험준한 빙하를 넘다가 크레바스에 빠져 죽었기에 탐험대원들은 생필품을 실은 썰매를 직접 끌어야 했다. 그렇게 빙하를 넘어 남극점으로 향했지만, 결국에는 식량 부족이 그들의 발목을 잡았다.[7] 이 때 섀클턴의 탐험대가 도달했던 지점은 남위 88도 23분 지점으로 조금만 더 갔다면 남극점에 도달할 수 있었지만 식량이 바닥났기 때문에 탐험을 강행했다면 굶어죽을 게 뻔했다.
이에 섀클턴은 포기하고 발길을 돌린다. 식량 부족과 추위로 온갖 고생을 다했지만, 그래도 섀클턴의 탐험대는 한 명도 죽지 않고 모두 무사히 돌아왔고, 이는 극지탐험에서 실로 드문 일이었기에 영국에서 기사 작위와 훈장을 받게 된다.

죽은 사자보다는 산 당나귀가 낫다(Better a live donkey than a dead lion).[8]

이 말은 돌아오면서 했다고 알려졌으나 정확히는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하던 말이었다.
한편, 스콧은 섀클턴이 영웅 대접을 받는 것을 보면서 열폭했는데 앞서 맥머도 만의 우선권 약속을 지키지 않은 섀클턴을 비난하고 싶었지만 이미 섀클턴이 영웅이 된터라 언급도 못하고 섀클턴의 다음 도전은 반드시 성공할 거란 생각에 초조해져 이번에야말로 남극점을 자신이 정복하겠다며 남극으로 떠나지만 그 탐험에서 사망하고 만다. 자세한 과정은 로버트 스콧, 아문센 vs 스콧 참조. 우습게도 BBC 선정 위대한 영국인 100명 선정에 섀클턴과 같이 스콧이 들어가 있는데....섀클턴에게 모독이 아닐까?
그러나 섀클턴에게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게 된 탐험은 따로 있었으니...

2.4. 위대한 실패


로알 아문센이 남극점을 정복한 후, 섀클턴은 1914년 3월에 영국 남극횡단 탐험대의 대장이 되어 인듀어런스 호를 타고 남극으로 떠난다. 인듀어런스(Endurance)는 인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후 극한 상황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의지로 인내하며 버텼을 탐험대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묘한 인연이다.[9]
총인원은 27+1명이었다. +1은 퍼스 블랙보로(Perce Blackborow)라는 이름의 '''밀항자'''로 당시 18세의 소년이었다. 탐험대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머물 당시 주방 보조로 잠시 와 있었는데 퍼스의 친구인 선원 윌리엄 베이크웰이 다른 선원들과 짜고 퍼스를 몰래 태운 것이다. 이를 안 섀클턴은 노발대발했다. 작정하고 도로 내려놓으려면 할 수 있었고, 실제로 스콧 일행도 예정에 없던 한 사람이 더 가는 바람에 모두 죽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내려놓고 가야 한다고 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섀클턴은 '''"식량이 떨어지면 제일 먼저 널 잡아먹을 테다!"'''라고 으름장을 놓으면서도 그를 일행에 동행시키고, 주방 보조 일을 주었다. 이 대목은 섀클턴의 위대한 항해 초반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섀클턴이 퍼스에게 '이런 항해에서 우리는 배고파질 때가 많고, 그럴 때면 제일 먼저 밀항자를 잡아먹는다는 걸 알고 있나?'라고 질문하자 퍼스는 '저보다야 댁이 더 먹을 게 많을 것 같습니다.'라고 받아쳤다는 이야기도 있다.(Huntford, R. "Shackleton", p. 384. Carroll & Graf,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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섀클턴이 당시 탐험대원을 모집하기 위해 신문에 낸 광고.[10] 90년대에 <삶과 꿈>이라는 월간지에서 광고 전문가가 '''가장 역사적인 광고'''로서 이 광고를 거론한 바 있다. 너무나도 솔직하고 그 어떤 과장도 없음에도 지원자들이 넘치게 왔다고 하면서.

'''탐험가 구함.'''

'''어렵고, 보수도 적고, 혹한의 추위, 몇 달간 지속되는 어둠,'''

'''계속되는 위험과 안전한 귀환을 보장하지 못하는 모험.'''

'''성공할 시 영광과 명예를 얻을 수 있음.'''

'''- 어니스트 섀클턴, 벌링턴 가 4번지.'''

고생길이 열리고 죽을 수도 있다며 솔직하게 광고했지만 놀랍게도 5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원하여 무려 197:1이란 엄청난 경쟁률을 기록하였고, 그 중에서 고르고 골라 27명을 뽑게 된 것이었다.[11]그리고 이 27명은 저 광고대로, 아니 '''광고와는 달리 목표 달성에 실패했지만, 차라리 죽는 게 편하지 않을까 생각되었던 지옥같은 고난을 이겨내고 귀환했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유명세를 얻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 때가 1914년이라 준비 도중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전쟁이 나면 선박 등이 징집당하기도 하고 인력과 물자도 전쟁에 우선 동원되기 마련이라서, 섀클턴의 탐험대는 출발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당시 해군장관이었던 '''윈스턴 처칠'''이 출발을 명령함으로써 탐험은 시작될 수 있었다. 1차대전 초기만 해도 영국 입장에서는 총력전 개념은 아니었고 본격적인 국민총동원령이 내려지는 건 2차대전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2.4.1. 인듀어런스 호, 무너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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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들 해에 진입해서 상륙을 시도하던 섀클턴 탐험대는 얼음이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음을 알았다. 계절상으로는 분명히 한여름이었지만, 바다가 꽁꽁 얼어붙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인듀어런스 호는 1915년 1월 20일부터 10월 27일까지 얼음에 갇힌 채 남극해를 표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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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이때까지는 비교적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주위에 널린 바다표범펭귄을 잡아먹을 수 있었기에 식량도 비교적 풍부했다. 이때까지가 섀클턴 탐험대의 호시절이었지만, 봄이 되자 얼음이 녹으면서 지옥이 시작되었다. 겨울 동안 선체를 둘러싼 얼음이 인듀어런스 호를 박살내 버린 것이다. 운명의 10월 27일, 섀클턴은 명령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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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포기하라!"'''

섀클턴 탐험대는 개인소지품 대부분을 버리고 쓸모 있는 물건들만 건져낸 후, 부서진 배 근처에 임시캠프를 설치했다.[12]
하나라도 생필품을 더 챙겨야 하고 급박한 상황임에도 불과하고 이런 사진들이 왜 남아 있는가 하면, 스콧과 달리 재정적으론 궁핍했던 섀클턴은 투자자에게 융자받는 대신에 모험 도중 찍은 사진들에 대한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계약을 맺었다. 그 때문에 팀원 중 하나인 레너드 허쉬가 사진을 찍어야만 했고, 배를 포기하는 과정에서 사진기필름이 물에 빠지자 물에 뛰어들어 필름을 건져내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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섀클턴 탐험대는 얼음 바다에서 빠져나가 육지로 가기 위해 행군을 시작하지만, 집채만한 얼음덩이가 언덕을 이룬 바다 위에서 보트를 끌고 전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 결과 출발한 날에 그들이 전진한 거리는 불과 1.6km. (인간의 평지에서의 평균 시속이 4~6km 정도) 이렇게 되자 섀클턴은 비교적 안전한 부빙 위에 '오션 캠프'라는 이름의 새로운 캠프를 설치한 후, 2.4km 떨어진 곳에 있는 인듀어런스 호의 잔해에서 쓸 만한 물건을 모조리 꺼내왔다.
11월 21일, 인듀어런스 호의 잔해도 물속으로 가라앉았고, 이후 섀클턴은 폴렛 섬으로 진로를 잡았다. 과거에 다른 탐험대가 물자를 비축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12월 22일, 그들은 가져갈 수 없는 물건 전부를 크리스마스 만찬에 소비한다.
그러나 섀클턴 탐험대는 또다시 정지당하고 만다. 부빙이 점점 얇아지면서 자꾸 갈라졌고, 바다 위를 떠다니는 얼음들은 그들을 멈추게 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결국 섀클턴 탐험대는 다시 전진을 멈추고 페이션스[13] 캠프를 설치한 후, 오션 캠프에 남아 있던 짐과 조각배 한 척을 그곳에 끌고 온다.
문제는 섀클턴 탐험대의 목표는 이미 사라지고 있었다는 것. 그들이 올라탄 유빙은 폴렛 섬에서 동쪽으로 100km 이상 떨어져 있었고, 그 거리는 계속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섀클턴은 결단을 내린다.

'''"다른 섬으로 가자!"'''

이를 위해 섀클턴 탐험대는 남극 탐험을 위해 데려왔던 54마리의 개를 전부 죽이고 식량으로 삼았다. 참고로 처음 데려올 때는 총 69마리였으나 인듀어런스에서 지내면서 일부가 병으로 죽었고, 중간에 새로 태어난 개가 몇마리 있었으나 이 개들도 마지막엔 식량으로 삼았다. 개들까지 보트에 태울 여력은 이미 없었던 것이다. 섀클턴 탐험대 입장에선 최후의 선택에 가까웠지만, 이 행동 때문에 여러 동물 애호 단체로부터 오랜 시간 비난을 받았다. 펭귄이나 바다표범의 과도한 남획 또한 잘못이기 때문에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비난을 피할 수는 없었겠지만.
4월 8일, 페이션스 캠프가 있던 부빙이 갈라졌고, 거기에 있던 섀클턴 탐험대는 세 척의 조각배를 바다에 띄웠다. 대원들은 "이제 자유다!"를 외쳤는데, 그동안 자신들을 가두었던 얼음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맑은 날은 오지 않았다. 날씨는 닥치고 흐렸고, 물의 흐름은 실로 거셌으며, 얼음 덩어리가 사방에 돌아다니고, 좀 큰 얼음 덩어리 위에서 휴식을 취하려고 올라갔더니 갑자기 부빙이 갈라지면서 대원 하나가 침낭에 든 채로 바다에 빠지기도 했던 것이다. 다행히도 그 대원은 얼음이 다시 붙어 버리기 전에 구조되었지만, 이래서는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4월 15일, 섀클턴 탐험대는 난관을 이겨내고 엘리펀트 섬 발렌타인 곶에 상륙한다. 497일 만에 처음 보는 육지였다. 나중에 그들은 좀 더 안전한 와일드 곶으로 캠프를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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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곧 그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깨달았다. 그들이 상륙한 엘리펀트 섬은 무인도였고, 먹을 거라고는 섬에 있던 바다표범과 펭귄 조금, 그리고 홍차밖에 없었던 것이다.[14] 더욱 고약하게도 그들이 자리 잡은 와일드 곶은 구아노라고 불리는 새 똥[15]으로 뒤덮여 있었고, 잠을 청할 자리는 그 똥무더기밖에 없었다. 게다가 연료는 부족했고,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으며, 구조선이 올 가망은 전혀 없었다.

2.4.2. 불가능에 도전한 섀클턴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섀클턴은 4월 20일 중대발표를 한다. '''"사우스조지아 섬에 가서 구조대를 불러오겠다."'''는 것.

"우리는 이제껏 최고의 모험을 해 왔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의 모험은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위대하겠죠. 우리는 이기면 살 것이고 패배하면 죽을 것입니다. 마치 동화 속의 주인공들처럼."

어니스트 섀클턴

섀클턴이 자인한 것처럼 그의 계획은 무모했다. 실현 불가능한 이유는 많지만 몇 가지만 들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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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임스 커드 호, '''이 조각배 한 척 가지고 남극해를 건너겠다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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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임스 커드 호가 이동한 자취는 파란색이다. 저 파란 선의 길이는 무려 '''1300 km'''를 넘어 서울-부산('''412 km''') 육로의 '''3배''' 이상이다.''' 서울에서 오키나와'''까지 저 작은 거룻배를 타고 갔다는 것이다!
  • 사우스조지아 섬까지 타고 가기 위해 탐험의 스폰서인 수학자이자 기업가인 커드(James Key Caird, 1837-1916)의 이름을 따서 제임스 커드 호라 이름붙여진 배는 남아있던 세 척 중에서는 큰 편이었지만, 10 m도 안되는 조각배였다. 이 배에는 갑판도 없고, 동력원도 없었다. 그나마 대가 하나 있었고, 다른 조각배에서 떼어낸 돛대를 하나 더 설치했다. 하지만 원하는 바람이 불지 않으면 노를 저어야만 했다.
  • 배를 타고 1300 km를 항해해야 하는데, 중간에는 섬이 하나도 없다. 오직 육분의[16]와 크로노미터[17]만으로 방향을 잡아야 하는데, 조금만 삐끗하면 사우스조지아 섬을 지나쳐 버릴 수도 있다. 더 안습인 것은 북반구와 다르게 남반구에는 밝은 별이 드물다는 사실이다. 이 말은 곧 길잡이 별로 사용할 밝은 별이 없다는 말이고 자기가 구한 위도, 경도 등이 정확한 값인지 하다못해 비슷하기라도 한지조차도 확인할 수 없다는 의미다. 꿈도 희망도 없이 1300 km 거리를 통통배미만의 조각배로 돌파해야한다는 소리다.
  • 통과해야 하는 드레이크 해협은 세계에서 가장 사나운 바다이며, 시속 100 km짜리 바람과 20 m짜리 파도가 밤낮으로 몰아친다. 여기에서 드레이크 해협의 실시간 풍속과 풍향을 볼 수 있다. 시속 100 km 바람은 초속 28 m에 해당되는데, 이 정도면 중형 태풍급이다. 20 m 높이가 감이 안 온다면 이 영상을 보자. 현대 거대 상선도 삼킬 수준의 파도다. 사우스조지아 섬보다 가까운 포클랜드 제도를 선택하지 않은 이유가 이것이다. 그리고 사우스조지아 섬에는 유인 포경기지가 있다. 잘하면 구조선을 구할 수도 있는 셈.
  • 식량도 변변찮았다. 영국인의 필수품인 홍차 외에 바다표범고기와 펭귄고기가 전부였다. 식수는 바다에서 건져낸 얼음 덩어리로 해결해야 한다.[18]
그러나 대원들은 앞다투어 지원하고 나섰고, 선장 프랭크 워슬리, 이등 항해사 톰 크린[19], 갑판장 존 빈센트, 선원 티모시 메카시, 목수 해리 맥니쉬가 자원해서 '무모한 바보' 5명이 섀클턴과 같이 가기로 했다. 사실 무모하다고 보기에도 좀 그런게, 열악한 엘리펀트 섬에서 무한정 구조대를 기다리는 것도 딱히 좋을게 없었기에 모두들 기꺼이 자원하겠다는 분위기였다. 물론 위험천만한 임무이다보니 섀클턴은 처음부터 누구랑 같이 갈 것인지가를 와일드와 신중하게 고민했고 그대로 결정되었다. 즉 자원 여부와는 크게 상관없는 결정이었다. 당연히 임무에 도움되는 부분도 함께 고려되었다. 예를 들어 워슬리는 육분의로 위도, 경도를 측정할 수 있고 톰 크린은 대원들 중 가장 힘이 세고 체력이 뛰어났으며 목수인 맥니쉬는 항해 도중 응급수리를 해야할 가능성때문이다. 반면 빈센트는 다른 대원들과 사이가 안좋아 떼놓기 위해 데려갔다. 이렇게 해서 4월 22일, '바보들의 보트'는 엘리펀트 섬을 떠나 바다로 향한다. 섬에 남는 대원들에게 섀클턴이 마지막으로 전한 명령은 "한 달 후에도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날 기다리지 말고 탈출해라"였지만, 그들이 갈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그리고 그후 16일 동안, 제임스 커드 호는 불가능에 도전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된다. '''날씨는 닥치고 폭풍밖에 없었다. '''맑은 날이 딱 하루 있기는 했지만, 반나절 만에 폭풍으로 복귀했다. 그 다음에도 맑은 날이 한 번 더 오기는 했는데, 드디어 하늘을 보게 되었다고 기뻐하던 섀클턴 일행은 곧 자신들이 착각을 했음을 깨달았다. '''맑은 하늘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그들이 평생 처음 보는 어마어마하게 큰 파도였던 것이다.'''[20]

구름 사이 사이로 틈이 보이자 날씨가 맑아진 줄 알고 선원들에게 큰 소리 쳤다. '''하지만 알고 보니 저건 구름이 아니라 집채만 한 파도의 하얀 물마루였다.''' 지난 26년 동안 바다에서 별 일을 다 겪었지만 이렇게 거대한 파도는 본 적이 없었다. 남극해의 어마어마한 변덕은 지난 며칠 동안 끈질기게 우리를 괴롭힌 바다에서 보던 파도들과 차원이 달랐다. 그 파도를 보자마자 "제길, 꽉 잡아! 여기로 온다!"고 외쳤다.

『섀클턴의 일지』 中 (출처: 『살아 남은 자들의 용기』, 베어 그릴스 저.)

그 즉시 모두는 배를 꽉 붙들었고, 그 뒤는 처참했다. 파도가 칠 때마다 배는 푹 젖었으며, 안 젖은 것은 구석에 있던 성냥밖에 없었다. 침낭 역시 확실하게 젖었다. 이 침낭은 밤이 되자 얼어붙었고, 결국 섀클턴 일행은 침낭 6개 중 2개를 버리고 교대로 수면을 취해야 했다. 얼어붙은 침낭의 무게는 얼음까지 더해 무려 30 kg에 달했기 때문에 그냥 두면 배를 가라앉힐 판이었던 것이다. 노 4개 중 2개도 같은 이유로 버려졌다.[21] 또한 세찬 파도에 배가 한 번 흔들릴 때마다 균형을 잡기 위해 돌을 끌고 앞뒤로 기어다녀야 했고, 어두컴컴한 배 안에서 무거운 돌을 끌고 다녀야 했기에 움직일 때마다 큰 소리로 방향을 말해야 했으며, 이 과정에서 대원들이 상처투성이가 된 건 말할 나위도 없다. 게다가 물통이 찌그러지면서 뚜껑과 물통 사이로 바닷물이 들어가는 바람에 식수가 부족해졌으며, 마지막 날인 5월 9일에는 어마어마한 폭풍을 만나게 된다. 이 폭풍으로 사우스조지아 섬 인근에 있던 500톤짜리 '''기선'''이 침몰했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그들은 해냈다.'''
5월 10일, 엘리펀트 섬을 출발한 지 16일 만에 그들은 살아서 사우스조지아 섬에 상륙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상륙한 킹 하콘 만은 목적지인 스트롬니스 만과는 정반대편에 있었고, 배를 타고 사람이 사는 마을로 가는 것은 너무 위험했다. 해류를 잘못 타면 망망대해로 나가 영원히 돌아올 수 없게 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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섀클턴 일행의 횡단 루트
결국 이들은 킹 하콘 만을 떠나 보트로 갈 수 있는 곳까지 간 후, '''섬을 횡단하여''' 스트롬니스 만으로 가기로 결정한다. 그들이 최종적으로 상륙한 지점에는 페고니 캠프가 세워진다. 그러나 대원들은 이미 기진맥진해 있었기에 섀클턴은 대원 세 명을 페고니 캠프에 남기기로 한다. 보트를 뒤집어서 만든 캠프에서 기다리기로 한 것이다.
5월 12일, 섀클턴과 워슬리, 크린은 3일분 식량을 갖고 목적지로 출발한다. 그러나 성공 가능성은 여전히 '''0에 가까웠다.'''
  • 그들은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먹을 것도 펭귄고기와 홍차 정도밖에 없었다.
  • 등반도구라고는 나사못을 박아둔 신발 세 켤레와 도끼 한 자루밖에 없었다.
  • 그들은 사우스조지아 섬의 지리에 무지했다. 등반로도 없는 산악 지대에서 방향을 잃으면 어떻게 될까? 구글 지도를 통해 살펴보면 이들이 상륙한 킹 하콘 만에서 스트롬니스 만까지 가려면 동서로 길죽한 섬을 최단거리로 넘는 게 아니라 서에서 동으로 산맥을 따라 고산준봉 5~6개를 넘어야 한다.직선거리만 해도 33 km가량인데, 높은 산을 여러개 오르내리면 실제 거리는 더 늘어난다. 참고로 사우스조지아 섬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그곳 또한 남극권이며 따라서 고산지대에는 빙하가 있다.
  • 결정적으로 이 때까지 사우스조지아 섬을 횡단하는 데 성공한 인간은 하나도 없었다.
슬슬 ''''작작하고 이쯤에서 죽어라.\''''고 말하고 있는 악의적인 초월적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운 상황. 그러나 섀클턴 일행은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나아갔으니

'''이 산이 아닌가 봐'''

그들은 몇 번이나 산을 올랐지만, 그들 앞에는 수직의 절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짓을 몇 번이나 반복하고, 간신히 산을 넘었더니 또다시 산이 기다리는 경험을 수 차례나 반복한 끝에, 그들은 결국 이름 모를 바위 옆에서 잠에 빠지고 만다.

'''30분 지났다. 일어나.'''

겨우 5분을 잔 대원들에게 섀클턴이 던진 말은 그것이었고, 덕분에 대원들은 얼어 죽지 않았다. 극한의 추위에 노출된 상태에서 잠에 빠졌다간 저체온증으로 동사하는 건 시간 문제다. 섀클턴도 잠에 들려던 찰나, 저 생각이 들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대원들을 깨웠다. 그렇게 그들은 산길을 걸어갔고, 마침내 산마루에 도달했는데, 경사가 너무나 급해서 바닥에 걸터앉으면 두 다리가 허공에 매달릴 정도였다! 안개는 자욱하고, 남극의 긴 밤은 어둡고, 후퇴는 생각할 수도 없고, 얼음으로 뒤덮인 산비탈에 피켈로 한 발씩 발 디딜 자리를 파며 내려가자니 어느 세월에 내려갈 수 있을지 알 수 있기는커녕 탈진으로 모두 쓰러질테고, 그렇다고 해서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조만간 얼어죽을 판이었다. 이 상황에서 섀클턴이 내린 결론은

'''여기서 미끄럼을 타고 내려가자.'''

당연히 경악한 워슬리와 크린은 그에게 제정신이냐고 물었지만 섀클턴은 반문했다. "'''여기서 더 버틸 수 있어?'''" 결국 대원들은 각자 자기 몫의 로프를 깔아 깔개를 만들었다. 섀클턴이 맨 앞에 앉고, 대원들은 서로의 목을 뒤에서 껴안고 찰싹 붙어 한 덩어리로 단단하게 엮였다. 이제는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 수밖에 없는 상황, 섀클턴이 땅을 박차자 모두들 미친 듯이 산마루를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치 허공에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머리털이 모두 곤두서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내 몸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고 내가 웃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나는 미끄럼타기를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경사가 급한 산허리를 분당 1.6 km 정도의 속도로 내리꽂히고 있었다. 나는 흥분해서 고함을 질렀다.''' - 프랭크 워슬리 -

점차 그들의 속도가 줄어들었다. 마침내 섀클턴 일행의 미끄럼은 어느 눈언덕 밑에서 멎었다.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엄숙한 기분으로 서로 돌아가며 악수를 나누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불가능한 일에 목숨을 걸고 도전해, 마침내 짜릿한 성취를 이룬 사나이들만이 나눌 수 있는 악수였다.
그들은 드디어 스트롬니스 만의 후스빅 항에 도착한 것이다. 산을 내려온 그들을 포경기지 선원들은 괴물 취급했다. 이제껏 내륙 쪽에서 나타난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포경기지 책임자가, 누구냐고 묻자 산에서 나타난 사람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섀클턴입니다."'''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어서 오십시오."

"전쟁은 끝났겠죠?"[22]

"천만에요. 전 유럽이 전화에 뒤덮혔습니다. 수백만 명이 죽었어요. 유럽은 광기에 휩싸였습니다."

노르웨이 출신 기지 대장과 나눈 대화

포경기지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섀클턴 일행에게 최대한의 경의를 표했다. '''평생 동안 거친 바다와 싸우며 살아온 그들이 보기에도 불가능한 일을 해냈기 때문이다.''' 그 중에는 '''40년간''' 남극해에서 배를 탔다는 사람도 있었다. 식사를 마친 섀클턴 일행은 곧바로 배 한 척을 빌렸고, 위슬리는 그 배에 타고 킹 하콘 만에 남은 세 사람을 데리러 갔다. 이 소식을 들은 영국 국왕은 곧바로 섀클턴에게 축하전보를 쳤고, 신문은 섀클턴의 이야기를 대서특필했다.
글로만 써 놓으면 읽기에는 간단해 보일지 몰라도 이들 셋이 겪은 여정은 험난했다. 워슬리는 나중에 회고하길

그땐 정말이지 다 귀찮고 그냥 드러누워 영원히 자고 싶었다. 하지만 섀클턴 대장은 발길질을 하면서 우리 따귀를 때리며 "포기하여 잠잘 바에는 마지막까지 기어서라도 움직여!"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얼음물을 마시고 펭귄고기를 날로 억지로 씹어 삼켜가면서 추위와 피로로 주저앉고 싶었던 우리에게 그나마 조금씩 마시던 홍차는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아니, 지금까지 태어나서 그때 마신 홍차만큼 인생에서 가장 맛 좋은 홍차를 마신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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섀클턴 횡단 기념 우표
그 산을 두 번째로 넘은 사람은 30년 뒤에야 나왔는데, 당연히 충분한 장비를 갖추고 완벽한 준비를 마치고서 만체 상태에서 산을 넘은 그 등정가는 섀클턴이 해낸 일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기적'이라고 평한 바 있다. 섀클턴은 실로 불가능한 일을 해낸 것이다.

2.4.3. 귀환


섀클턴은 곧바로 구조선을 수배했지만, 세 차례나 이어진 시도에도 불구하고 엘리펀트 섬에 상륙하지는 못한다. 남반구는 이 시기가 한겨울이었고, 남빙양의 얼음과 풍랑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첫 번째 구조선은 얼음에 막혀 되돌아왔고, 두 번째 구조선은 심하게 망가졌으며, 세 번째 구조선은 침몰 직전까지 가고 말았다. 영국 역시 전쟁 중이라 배를 구하기가 힘들었고, 이 과정에서 무려 4개월의 시간이 흘러가고 만다.[23]
마침내 섀클턴은 칠레 정부로부터 증기예인선 '엘코 호'를 빌리는 데 성공한다. 얼음이 없는 바다에서만 항해하라는 조건이 붙었지만, 어쨌든 배를 손에 넣은 섀클턴은 바다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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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30일.
그날도 여전히 조개잡이를 하러 나갔던 엘리펀트 섬의 대원들은 배 한 척을 발견한다. 드디어 그들을 구할 배가 왔던 것이다. 배가 왔다는 말에 모든 대원들은 캠프 밖으로 뛰쳐나갔고, 문이 좁아서 못 나간 대원들은 '''벽을 부수고''' 나갔다. 섀클턴이 뱃머리에 서서 모두 무사하냐고 묻자...

'''전원 무사합니다!'''

정말 놀랍게도, 이들 중 죽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남극 반대편으로 파견된 오로라 호에서는 3명의 사망자가 나왔지만, 섀클턴이 직접 지휘한 인듀어런스 호에서는 단 한 명의 사망자도 없었다. 섀클턴은 엘리펀트 섬의 대원들을 구조한 후 오로라 호의 사망자를 찾으러 남극에 돌아갔지만, 아쉽게도 그 수색은 실패하고 말았다. 사망자들이 남극해에 가라앉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탐험대의 오두막집에 조기가 게양되어서 죽은 사람이 생긴 줄 알고 가슴이 철렁했다고. 실제로는 구조선을 발견한 탐험대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들의 위치를 알리려고 온갖 방법으로 신호를 보냈는데, 깃발신호를 보낸답시고 옷을 벗어서 걸...려고 하는건 좋았는데 키가 높은데까진 안 닿고 높게 올릴 힘도 없어서 대충 매달아놨던게 조기처럼 보인 것뿐이었다.
섀클턴 탐험대 대원들은 8월 30일을 '기적의 날'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평생 이날을 기념하자고 다짐했다고 한다.

2.4.4. 한편, 엘리펀트 섬에서는...


섀클턴이 제임스 커드 호를 타고 사우스조지아 섬으로 떠난 후, 섬에 남은 대원들은 바다표범과 펭귄고기로 연명했다. 그들은 식량이 고갈될 경우에 대비해 남는 고기를 저장하려고 했지만, 모두 상하는 바람에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24] 그나마 해변에 있는 조개와 해초를 채집하는 방법을 생각해낸 덕에 조금은 배를 채울 수 있었지만, 그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고 모자라는 양은 먹다 남은 뼈를 파내 끓여 먹는 방법으로 채워야 했다. 이런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8월 30일에 남은 식량의 양은 펭귄고기 4일치 정도였다고 한다.
섬에 남은 대원들은 2척의 보트를 뒤집어서 캠프를 만들었으며, 거주환경을 조금씩 개선시켰다. 보트 지붕에 작은 창을 만들어서 햇빛이 들어오게 했고, 깡통을 이어 만든 굴뚝을 달았다. 이 굴뚝은 연기를 밖으로 뽑아냄으로서, 밀폐된 캠프 안에서 불을 피워 요리를 할 수 있게 해주었다. 또한 이들은 동상에 시달리던 대원 한 명[25]의 발가락을 잘라내는 수술을 시행하기도 했다. 이 수술은 다리 전체가 썩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으며, 구출된 후 그것을 본 의사는 대단히 성공적인 수술이었다고 평가했다.
엘리펀트 섬에 남게 된 대원들을 통솔하는 임무를 맡은 사람은 부대장 프랭크 와일드인데 그는 섀클턴이 반드시 8월쯤에 구출하러 온다는 낙관론을 갖고 있었고 날씨가 좋아질 때마다 "오늘 대장님이 오실지 모르니 짐을 싸놔라"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그 덕에 섀클턴이 정말로 구조선을 이끌고 왔을 때, 탐험대는 한 시간 안에 구조선에 탑승할 수 있었다. 그 짐 중에는 위에서 서술한 대로 사진들도 있었고 그 덕에 섀클턴 탐험대의 이야기를 다룬 책에는 그들의 생생한 사진이 수록될 수 있었다. '''인간이 가장 살기 힘든 환경에 준비도 되지 않은 채 내던져졌음에도 대원들을 통솔해서 모두를 생존시킨 이 사람 역시 매우 대단한 능력자라고 할 수 있다.''' 로알 아문센조차도 이 기사를 접하자 섀클턴을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고 한다. 자신이라면 거의 포기할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이었을텐데도 섀클턴은 포기하지 않고 대원들을 모두 살린 것에 대한 찬사를 보냈다. 물론, 당시 스콧과 아문센 때문에 영국과 노르웨이의 국가감정은 좋지않았지만 섀클턴은 영국인들 가운데 아문센이 남극점을 정복한 것에 찬사를 보낸 인물일 정도로 개인적으로 둘의 사이는 무척 좋았다고 한다.

2.4.5. 빌햐울뮈르 스테파운손과의 비교


섀클턴과 자주 비교되는 인물로 빌햐울뮈르 스테파운손(Vilhjálmur Stefánsson)[26]이라는 탐험가가 있다. 그는 1913년에 캐나다 탐험대를 이끌고 북극 탐험에 나섰는데, 그가 탄 카를루크 호가 얼음 바다에 갇혀서 고립되었다.
여기까지는 섀클턴과 유사하지만, 그는 순록 사냥으로 식량을 조달하겠다는 거짓말을 쓴 편지를 남기고 식량과 탄약을 휴대한채 4명과 함께 떠나갔고 그 이후 본인들은 북극 탐험을 끝까지 마치고 살아서 돌아왔지만, 남아 있던 대원들 중 11명은 상대방을 헐뜯고 속이고 싸우다가 고통과 절망 속에서 죽었고 나머지는 간신히 구조되었다. 당연히 스테파운손은 욕만 직살나게 먹었다.
영문 위키피디아의 카를루크 호 문서를 비롯한 많은 곳에서 그의 저주받을 리더쉽을 비판하고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실패자이긴 해도 스테파운손은 83살 장수를 누리며 살다가 갔고 섀클턴은 48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스테파운손은 당시만 해도 캐나다 정부의 지원을 받은 탐험인지라 캐나다 정부의 비호 아래 그다지 어렵지 않게 살아갔고, 이후에도 탐험가 클럽에 초청되어 회장직도 받고 다시 모험도 떠나곤 했었다. 현재의 저평가는 처음엔 그다지 높지 않았으나 시간이 갈수록 더 심해진 것. 1920년대까지만 해도 인권 개념이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시절이기도 하다.(영국 해군에서도 프래깅이 자행되던 시절) 스테파운손은 브랑겔 섬을 캐나다 땅으로 만들고자 노력하다가 소련 정부에게 내쫓겼고[27] 1940년대까지 주된 탐험지였던 옛 소련 지역을 옹호하다가 전후 냉전이 심화되면서 사람들에게 공산주의자로 몰려 배척받으면서 늘그막은 쓸쓸하게 죽었다.

2.5. 탐험 이후


1922년 섀클턴은 로웨스와 같이 남극 탐험대를 이뤄 퀘스트 호를 타고 원정을 떠났지만 사우스조지아의 그리트비컨(Grytviken)에서 쓰러져 앓다가 죽었다. 여행경비를 만들기 위하여 고생하며 얻은 스트레스와 여러 가지로 인한 과로가 큰 원인이라고 한다.
그가 사망하자 영국 남극 탐험대의 베테랑이었던 레너드 허시(Leonard Hussey)[28]가 섀클턴의 시신을 영국으로 가져가는 데 자원했고, 영국을 향해 가던 중 우루과이의 수도 몬테비데오에 머물렀다. 이 때 섀클턴을 사우스 조지아에 묻어달라는 새클턴의 부인 에밀리의 전보가 왔고, 허시는 섀클턴의 시신을 가지고 사우스조지아 섬으로 돌아와 간단히 예배를 치른 후 그리트비컨의 묘지에 시신을 안장했다. 어니스트 섀클턴의 묘지. 향년 만 47세였다.
사망했을 때 4만 파운드[29]를 남겼지만, 그의 생애를 다룬 책 '어니스트 섀클턴 경의 삶(The Life of Sir Ernest Shackleton)'이 출판되고 섀클턴 기념 기금이 조성되어 부인과 자녀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섀클턴의 실패담은 탐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실패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는 상황에서 모든 대원을 살렸기 때문이다. 비록 당대에는 로버트 스콧의 명성에 가려진 감이 없지 않지만, 20세기 말 그의 위대함은 재발견되었으며 현재는 매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1999년에 영국 BBC 설문조사에서는 가장 위대했던 탐험가 순위 5위를 기록했다고 한다. 물론 이 순위는 스콧보다 위다.[30]
2011년 8월 30일, 섀클턴이 갖고 있던 비스킷이 230만 원에 팔렸다. 관련 링크를 보면 이 비스킷이 왜 고가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족으로 비스킷이 왜 썩지 않았는가 의문이 들 수도 있는데, 자세한 것은 하드택 문서를 볼 것.

3. 기타


  • 인듀어런스 호의 침몰은 예정에 없던 일이었기에, 섀클턴 탐험대는 질 좋은 침낭을 충분히 확보할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은 제비뽑기로 침낭을 분배했는데, 일반 대원들은 침낭을 뽑고나서 섀클턴이 제비뽑기에 사기를 쳤음을 눈치챘다. 일반 대원들은 전원 질 좋은 침낭을 뽑았고, 섀클턴과 간부들은 전부 질 나쁜 침낭을 뽑았다는 것이다.
  • 섀클턴 일행이 사우스조지아 섬의 산을 넘어갈 때, 그들 전원은 우리 옆에 누군가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이는 나중에 수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준다.
  • 섀클턴은 탐험에 챙겨간 책인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불쏘시개로는 최고였다고. 물론 섀클턴은 읽는 책으로서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매우 아꼈다. 그 아끼는 책을 한낱 불쏘시개로 써야 했으니 대단히 기분이 묘했을 듯 하다. 물론 상기했듯 죽은 사자가 되느니 당나귀가 되더라도 사는게 중요하다고 판단할 정도였으므로 어쩔 수 없었겠지만.
  • 팀의 기상학자인 레너드 허시[31]밴조를 가지고 왔는데, 인듀어런스 호의 침몰 이후 그것을 버려야 했다. 그러나 그 악기를 섀클턴이 회수해서 전해주었고, 허시는 구조될 때까지 이 악기로 대원들에게 음악을 연주해줘서 사기 앙양에 큰 도움이 되었다.
사실 탐험대는 축음기도 가지고 갔지만, 축음기용 바늘을 주문할 때 업자가 실수를 하는 바람에 1상자를 제외하고 모두 뜨개질용 바늘이 잘못 와버렸다고(...). 이때 당시의 축음기는 원통형이 아닌 원반형 음반인 SP 음반이었는데 이 음반은 한면을 듣고 바늘을 교체해야 하는 일회용품이었다. 덕분에 정말 중요한 날에나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어찌되었든 허시의 악기와 더불어 사기 진작에 도움이 된건 사실.
허시는 섀클턴의 마지막 탐험에도 참가하였고, 섀클턴의 장례식 때도 밴조로 브람스자장가를 연주해 애도를 표했다.
  • 위대한 극지 탐험가 로알 아문센은 "나는 섀클턴이 그런 보잘 것 없는 장비로 그런 일을 해냈다는 것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내가 그런 상황이었다면 탐험을 포기했거나,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용기와 결단력과 리더십은 위대하다. 조금만 더 경험이 있었더라면 그는 남극점 정복과 남극대륙 횡단을 이뤄내고도 남았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섀클턴을 극찬했다.[32]
섀클턴도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한 아문센의 업적을 칭송했다. 당시 영국은 아문센의 업적을 깎아내리며 죽은 스콧을 치켜올리고 아문센을 흉보고 있었는데, 당시 영국에서 아문센을 칭송한 자는 섀클턴이 거의 유일했다.
이 때문에 스콧의 아내는 화를 내며 자신은 그 자를 파멸시키는데 앞장설 거라 했지만 파멸은 커녕 잘 나갔고, 오히려 스콧의 아내는 스콧 사후 보험금을 챙기려다 다툼이 일어나는 등 여러가지 일로 스콧 가와 사이가 안 좋아졌다. 게다가 아문센의 업적과 별개로 스콧이 아문센뿐만 아니라 같은 영국인인 섀클턴도 부당하게 험담했던 걸 생각하면 섀클턴이 스콧에게 호의적일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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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침몰하고 먹을 것이 부족한 상황에서 고양이를 버려야 했지만 그대로 굶겨 죽이거나 춥게 죽일 수 없다고 하여[34] 섀클턴이 손수 죽였다고 한다.
최대한 고통없이 죽인다고 했지만 배에 탄 목수이자 치피 여사를 매우 아끼던 해리 맥니시(1874 ~ 1930)는[35] 이 일로 섀클턴에 불만을 가졌다. 물론 어쩔 수 없었음을 알았기에 공식적으로는 비난하지 않았지만. 맥니시는 구조 뒤에 뉴질랜드이민가서 목수로 살아가다가 죽었는데 죽기 전에 미리 무덤 곁에 세워둘 실물 크기의 치피 여사 동상을 만들었으며 동상 밑에 이런 글귀를 새기게 했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나는 잊을 수 없는 고양이 치피 여사를 기리며. 인듀어런스 호 승무원으로서 귀중한 식량을 지켜낸 공로를 거뒀음에도 치피 여사는 어니스트 섀클턴이란 영웅화에 고양이라는 이유로 알려지지 못했다.[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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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니 맥니시
맥니시 무덤에 있는 고양이 치피 여사 동상
2011년 뉴질랜드에서 발행된 치피 여사 기념 우표
  • 치피 여사의 모습을 본뜬 인형도 출시되었다.[37]
  • 위에 치피 여사랑 사진을 찍은 밀항자 퍼스 블랙보로는 다른 대원들과 마찬가지로 브론즈 폴라 메달을 받았다. 밀항 당시 18세였던 그는 선원들의 도움을 받아 선장의 승인 없이 승선했다가 사흘 후 발각됐다. 당연히 섀클턴은 크게 화를 냈지만[38] 퍼스는 낙천적인 성격에 붙임성도 좋아서 금방 섀클턴의 신뢰를 얻었고 조난 중 동상에 걸렸어도 시종일관 쾌활한 모습을 보였다.[40] 후일 구출되었을 때는 승선명부에만 없을 뿐 섀클턴과 동료들로부터 탐험대의 일원으로 인정 받고 있던 상태라 그도 당당히 메달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이후 평범하게 살다가 1949년 53살로 세상을 떠났다.
  • 엘리펀트 섬에서 사우스조지아 섬까지 가는데 쓰인 배 제임스 커드 호는 1919년에 영국으로 보내졌고 섀클턴의 모교인 덜위치 칼리지[41]에 소장 보관되고 있다.
  • 산악인 엄홍길은 섀클턴의 위대한 실패를 다룬 책인 '살아있는 한 우리는 절망하지 않는다'가 자신의 칸첸중가 등정에 도움을 주었다고 언급했다.
  • 1956년 영국 지질학자인 레이먼드 프리슬리(1886~1974)는 자신이 극지 탐험에서 절망적인 상황에 놓였다면 무릎을 꿇고 섀클턴을 보내달라고 기도하겠다고 말했다. 참고로 그는 로알 아문센, 로버트 스콧, 섀클턴 모두와 같이 일해본 사람이다. 아래가 바로 그 발언이다. 다른 둘(아문센, 섀클턴)에 비해 스콧은 탐험대 대장으로썬 확실히 영 좋지 않은 인물이긴 했지만 [42] 그래도 어려운 상황 속에서 대원들을 의도적으로 낙오시키는 짓까진 하지 않았다. 대신 본인 때문에 대원들과 함께 다 죽었지만...

과학적 리더쉽이 필요하면 스콧을 부를 것이다. 신속한 정복을 원하면 아문센을 불러라. 하지만 절망적인 상황에서 길이 보이지 않는다면 섀클턴을 보내달라고 기도할 것이다.[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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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와일드(1873~1939)
  • 2011년 11월 27일, 섀클턴 탐험대의 부대장이었던 프랭크 와일드의 재가 섀클턴의 묘 오른쪽에 묻혔다. 그의 묘비에는 섀클턴의 오른팔 (Shackleton's right-hand man)이라는 글이 새겨졌으며, 그를 기념하는 우표도 발행되었다. 와일드는 섀클턴이 죽은 뒤로 남아공으로 이민가서 농장을 하면서 살다가 거기서 죽었는데 늘그막에 누군가가 섀클턴에 대하여 질문하자 위대한 사람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 2014년 가을 개봉한 SF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은하계를 오가는 메인 우주선 이름이 인듀어런스이다. 영화에 나오는 몇몇 에피소드들도 그렇고 여러 모로 섀클턴의 인듀어런스 호 모험을 오마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톰 하디 주연으로 전기 드라마를 제작한다.
  • 2016년 12월 현대자동차에서 글로벌 브랜드 캠페인으로 양산차를 이용한 남극 횡단에 도전해 성공했는데[44] 이때 싼타페의 운전수로 참가한 패트릭 버겔은 섀클턴의 외증손주로 사실상 외증조부의 염원을 이뤄낸 셈이다.Hyundai “Shackleton's Return”- Main film[A]
  • 블렌디드 몰트 위스키 중에 이 사람의 성을 딴 "섀클턴"이 있다. 1907년 님로드 호를 몰고 간 두 번째 남극탐험에는 화이트 앤 맥케이사의 올드 스카치 위스키 25상자가 실려 있었다. 그 중 다섯 상자를 베이스 캠프까지 가지고 가서 묻어두었는데, 남극점 정복이 실패하고 철수하면서 이 위스키는 회수하지 못했다. 그렇게 이 위스키 상자는 잊혔는데, 1900년대 초중반을 지나며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 위스키 제조법은 실전되었다. (1,2차 세계대전 및 금주법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러다 섀클턴의 기록에서 베이스 캠프에 이 위스키를 묻었다는 기록이 발굴되었고, 탐사 100주년이 되는 2007년 화이트 앤 맥케이사는 남극의 얼음 속에 묻힌 이 위스키 상자를 파낸다. 놀랍게도 100년간 얼음 속에 묻혀 있던 위스키는 전부 온전했고, 화이트 앤 맥케이사는 이 위스키를 토대로 옛날의 제조법을 복원하고 어니스트 섀클턴의 이름을 따서 재출시하게 된다. #관련글

4. 바깥고리



4.1. 관련 서적



4.2. 관련 영상



4.3. 관련 사이트



[1] 출생지도 그렇고 10살때까지 아일랜드에 살았으며 모계도 아일랜드라서 아일랜드 측에서는 어째서 섀클턴이 영국인으로 기억되어야 하느냐고 불만을 보인다. 반면 부계는 영국인이고 종교적으로 영국인이다.[2] 남극점까지 156㎞를 남겨둔 시점, 돌아갈 길을 포기한다면 인류 최초의 남극점 정복자가 될 수 있는 상황에서 '식량 부족 때문에 더 이상의 전진은 불가능하다'고 순순히 인정하고는 발걸음을 돌리면서 했던 발언이다.(귀환 이후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3] 남극 정복에 직접 도전할 최후의 3인으로 친구이자 의사였던 윌슨과 함께 섀클턴을 뽑아간 걸 보면 분명 원정대 대원들 중 남들보다 뛰어난 점을 보아 선택 했을테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생각이 완전히 바뀌게 된 듯하다.[4] 재미있는 것은, 정작 스콧은 나중에 남극점을 정복하러 왔을 때 맥머도 만의 기지를 사용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얼음이 너무 많아서 배가 접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5] 이후, 난센은 스콧에게도 같은 충고를 했으며, 로알 아문센 또한 스콧에게 조랑말이나 설상차보다는 개썰매가 유용하다 충고를 했지만, 스콧은 무시했다. 문제는 섀클턴이 처절하게 실패한 걸 알았으면서도 그냥 말과 설상차를 고집했다는 것이다.[6] 섀클턴의 탐험을 후원한 사람이 비어드모어였기에, 빙하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7] 후술하는 스콧의 남극점 원정도 섀클턴의 실패와 똑같이 흘러간다. 이유도 섀클턴과 똑같이 개 대신에 말을 준비했기에.[8]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와 같은 뜻이며, 전도서 9장 4절 문구인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죽은 사자보다는 산 개가 낫기 때문이니라(For to him that is joined to all the living there is hope: for a live dog is better off than a dead lion)(개역개정/KJV)"에서 따 온 것이다. 덧붙여 서양에서 당나귀는 바보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살아서 겁쟁이 바보 취급을 당하더라도 그게 대원들을 모두 죽게 두는 것보다는 나은 선택이었다'는 말이었을 터다.[9] 그리고 이 위대한 배의 이름은 영화 인터스텔라에 나오는 우주선에도 붙는다.[10]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글꼴이라든지 Honor/Honour의 철자를 통해 벌써 알아차렸겠지만 위의 이미지는 디자이너 John Hyatt가 자신의 상상력을 더해 만든 이미지이며, 해당 광고의 원본이 아니다. 원본은 현재로선 소실되었고 혹시라도 아직까지 원본을 소유하고 있으며 제공해 줄 수 있는 사람에게 100$의 상금이 걸려있는 상태다.[11] 이 때 면접에서 노래를 불러 보라고 했는데 이는 첫째로 원정대장의 지시를 얼마나 잘 따르는지, 둘째로 극한의 상황에서 긍정적으로 임할 수 있는지를 본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멘탈을 경험만큼이나 중요시한 이 면접은 실제로도 효과를 보게 된다.[12] 먼저 섀클턴 자신이 대원들에게 시범을 보였다. 그는 금화와 시계, 은 브러시와 여행가방을 얼음 위에 버리고 탐험 시작 전에 알렉산드라 황태후가 선물한 성경에서 몇 페이지를 뜯어내고 버렸다.[13] 이것도 '인내'라는 뜻으로 번역되지만, 인듀어런스가 어떤 내구성이나 피로도를 견디는 참을성의 의미가 강하다면 페이션스는 좀 더 이를 악물고 적극적으로 견디어 내는 능동적 행위라는 뉘앙스가 있다.[14] 섀클턴 탐험대는 위에 서술했듯이 이미 모든 개를 잡아먹었다. 개고기는 못 먹겠다고 버티던 스콧과는 참으로 대조적이다. 하긴 배가 고프면 찬밥 더운밥 가리게 되지 않겠지만. 결국 훗날 스콧은 개고기를 거부하다가 결국 굶주림도 한몫하여 죽는다. 그나마 배를 타고 있었기에, 연료가 없어 홍차 이파리를 먹으며 비참하게 죽어간 스콧 일행과 달리 이들은 배 안에 있는 식탁이나 의자를 부숴 땔감으로 써 따뜻한 홍차를 끓여 마시며 겨우 버틸 수 있었다.[15] 이 똥은 농작물 비료로 딱이라서 비싸게 팔리곤 했지만(이것이 흥망성쇠를 좌우한 나라가 있다) 이 상황에선 더러운 똥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나마 이게 만일 말라있더라면 훌륭한 땔감이 되었을 테지만, 비바람과 습기로 인해 바닷가에 있는 새똥은 늘 젖어있어서 땔감으로도 쓸 수 없었다. 더군다나 말릴 곳도 없었고, 말린다고 해도 냄새가 진동할 테고, 냄새도 냄새이지만 연료로 이용하기 위해서 말리더라도 그러려면 연료를 써야 되는데, 연료를 만들기 위해 연료를 쓰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되는, 웃기지도 않는 상황이 발생할 수밖에 없으니 소용이 없었다.[16] 두 점 사이의 각도를 정밀하게 재는 광학 기계. 태양, 달, 별 등의 수평선 상의 각도를 재어 관측 지점의 위도·경도를 간단하게 구하는 데에 쓴다.[17] chronometer. 천문 관측·경위도선 관측·항해 따위에 쓰던, 정밀도가 높은 휴대용 태엽 시계. 온도, 기압, 습도 따위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다.[18] 극지의 빙산은 육지의 빙하가 바다에 떨어져나온 것이므로 녹으면 민물이다. 실제로 극지 주민들은 빙산의 작은 조각들을 녹여서 식수로 쓴다. 바닷물이 언 유빙과는 형태가 다르기 때문에 구분이 가능하다.[19] 영국 해군 복무시절 로버트 스콧의 첫번째 남극 도전에 차출되어 대원으로 참가했었다. 위에서 나오듯 당시 섀클턴 또한 대원이었다. 또한 스콧의 마지막 탐험에도 대원으로 참가해 남극점을 150마일 앞둔 지점까지 지원한 후 3인의 대원들과 복귀하면서 탈진과 괴혈병으로 쓰러진 대원들을 쉬게하고 먼저 베이스캠프로 돌아가 구조요청을 함으로써 구한 경력이 있었다. 이 때 최후로 남극점을 도전한 스콧과 대원들은 남극점 도달 후 복귀 중 사망하였다.[20] 이 에피소드는 영화 인터스텔라밀러 행성 에피소드에서 그대로 오마주된다.[21] 마찬가지의 이유 때문에 눈보라 속에서 로버트 스콧의 시체가 발견된 후에도 수색대는 스콧의 시신을 운구할 수 없었다. 몇 달에 걸쳐 시신들이 얼어붙는 바람에 무게가 늘어나 백 수십kg에 달했기 때문.[22] 당시 유럽 사람들은 1차 대전이 얼마 안가 끝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지만, 현실은 참호에서 서로 죽어나가기만 하는 참극을 4년간 지속했다.[23] 극한의 상황에서도 침착했던 섀클턴이 이 때만은 초조해 하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24] 해동과 냉동이 반복되면 고기가 상하고 만다. 식재료 보관 온도에 있어서는 최저 보관온도의 절대적 수치보다 항온 유지가 더 중요하다. -40℃와 0℃를 반복하는 저장고에 넣어두는 것보다 -10℃의 일정한 온도에 보관하는 것이 훨씬 보존력이 좋다. 게다가 -50℃ 이하의 초저온 냉동고가 아닌 이상 냉동보관 기간이 너무 길어지면 재료는 반드시 상하게 된다.[25] 위에 언급한 밀항자 퍼스 블랙보로. 퍼스는 모든 왼발가락의 1/4만 남기고 절제하는 대수술을 55분이나 겪었다. (Huntford, R. "Shackleton", p. 533. Carroll & Graf, 1998)[26]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이슬란드캐나다인이다. 과거에 아이슬란드계 이민자들이 많이 건너갔는데 주로 매니토바주에 많이 정착했다. 영어식으로 표기한 "빌헬머 스테판슨"이라는 이름으로 표기한 책도 종종 있다.[27] 노력의 일환으로 스테파운손은 1921년에 브랑겔 섬을 향해 탐험대를 파견하였지만 5명 중 4명이 사망하고 이누이트족 여인 에이다 블랙잭만 살아서 1923년 8월에 구조되었다.[28] 앞서 언급된 인듀어런스 호에서 기상학자로 승선했다.[29] 2011년의 가치로 환산하면 160만 파운드,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26억 정도[30] 당연히 당시 신생국가 노르웨이 출신인 아문센이 남극점과 북극점을 정복하고 북서항로까지 개척해서 열등감과 대영제국이라는 명성에 흠집이 갔기에 띄우긴 했으나 후대에 가면서 섀클턴이 제일 고평가를 받는다. 스콧은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섀클턴보다 아마추어에 대원들을 다 살리지 못했고 결국에는 자신도 목숨을 잃어 추운 남극 극지방에서 대원 두 명과 함께 얼어죽고 만다. 어떻게든 대원들을 살리기 위해 코 앞인 남극점을 포기하고 극한의 상황을 헤쳐나가 모든 대원들을 다 살려버린 섀클턴과 비교되는 부분.[31] 그러나 기상 예측은 번번히 빗나갔다고 한다.[32] 상술되었듯이 섀클턴은 남극점을 정복 가능한 상황에서도 모두의 생존을 위해 정복을 포기하는 결단을 내린다. 그리고 이후 스콧은 정반대의 선택을 내리며 두 사람의 명암이 극과 극으로 갈리게 된다.[33] 사진 속 남성은 위에 서술된 밀항자 퍼스 블랙보로.[34] 사실 훈련된 썰매개들보다도 통제가 어렵고 추위에 약할 고양이를 배 밖으로 데려간다고 해도, 혹한의 남극 환경 속에서 오래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일이긴 했다.[35] 섀클턴이 사우스조지아 섬으로 구조요청을 하러 갔을 때 선발한 5명의 선원 중 한 사람이었다.[36] 그렇다고 맥니시가 섀클턴이 과장된 영웅이라느니 욕한 건 절대 아니다. 섀클턴에 가려졌지만 치피 여사도 영웅이라고 강조한 것일 뿐이다. 맥니시는 뉴질랜드에서 살면서 인듀어런스 호 탐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고생이야 많았지만 알차고 보람있었다고 밝게 이야기했다. 더불어 섀클턴에 대하여 정말 대장으로서 모든 걸 갖춘 인물이라고 칭송했다고 한다. 당장 맥니시 본인부터가 섀클턴의 사우스조지아 항해에 함께 한 특공대 5인방 중 1인이다.[37] 배에 탄 고양이들(Ship's cat) 중에선 오스카와 함께 나름 잘 알려진 고양이어서 상품도 출시된듯.[38] 일차적으로 예정에 없던 인원이라 물자를 충분히 확보해두지 못하여 팀 전체의 위기로 이어질 수도 있었고, 탐험에 최적화된 인원이 아니였기 때문이다. 결국 섀클턴의 걱정대로 탐험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은 탓에 후술할 발가락 절단으로 이어졌다.[39] 먹을 것도 다른 물자도 모두 부족하고, 혹한지여서 추가로 동상에 또 걸릴지도 모를 상황[40] 다만 그는 동상 때문에 상해가는 발가락 하나를 절단할 수밖에 없어서, 결국 남극행 배(인듀리언스)에 밀항해서 남극까지 갔다가 발가락 하나를 영영 잃은 채로 돌아와야 하는 꼴이 되었다. 물론 위에서도 나왔듯이 이 발가락 절단조치는 동상 이후 진행될 괴사 상태가 발 전체로 퍼져버려서 발 전체를 절단해야 하는 상황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그 험한 남극 조난 생활[39] 와중에 퍼스가 동상을 입었다가 발가락 하나만 잃고 끝난게 오히려 다행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41] Dulwich College. 대학이 아니라 기숙사고등학교이다. 필립 말로 시리즈로 유명한 미국 소설가 레이먼드 챈들러가 영국 체류 시절에 다녔던 고등학교이기도 하다.[42] 실책에 실책을 거듭해 대원들을 다 죽게 만든 똥별이니, 리더십 부문에선 영국이 자국의 자존심을 세운다고 너무 고평가를 받았다고 볼 수 있다[43] 프리슬리가 한말은 문명 6에서 아문센-스콧 연구기지의 인용어구로 사용된다. 다만 섀클턴을 언급하는 부분은 잘렸다.[44] 이때 쓴 차량은 싼타페(2016)였다. 단 극지 환경을 고려해 살짝 개조를 가했다.[A] 원 유튜브 링크 삭제로 페이스북 동영상 링크 첨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