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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郝昭
(? ~ ?)
1. 개요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자는 백도(伯道). 병주 태원군 사람.
2. 정사
사람됨이 웅장해 젊었을 때부터 부곡독이 되었으며,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워 잡호장군에 임명되어 10년 동안 하서를 지키니 그 지역 백성들 뿐만 아니라 이민족들도 복종했다고 한다. 220년에 조조가 죽자 국연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항복했지만 다시 반란을 일으킬 때 장진, 황화 등이 호응해 세력이 점점 커지자 무위 태수 관구흥이 원군을 요청하면서 조서를 받고 위평과 함께 금성에 있었다.
적의 세력이 너무 왕성해 황하를 건너지 못하고 있는데[1] 소칙의 설득으로 황하를 건너 무위를 공격해 소칙이 국연을 유인해 죽이자 학소 또한 장액에서 승리를 거둬 장진을 참수해 황화는 겁먹고 항복하면서 무위의 반란이 진압되었다.
228년에 조진이 마속 등을 격파하고 나서 제갈량이 이번에는 기산에서 고생했으니 다음에는 분명히 진창으로 올 것이라고 여겨 학소에게 진창성의 수비를 맡게 한다. 그해 12월 제갈량은 진창성을 공격했지만 학소의 대비가 잘 되어 이길 수가 없자 같은 고향 사람 근상을 보내 학소를 설득하게 한다.
그러나 학소는
근상에게 이 말을 들은 제갈량은 다시 학소를 설득해 보라고 하여 근상은위나라의 법률은 경도 이미 잘 알 것이며 나의 사람됨도 경은 잘 알것이오. 내가 나라로부터 받은 은혜는 많고 우리 집안이 중하니 경이 말할 것이 없이 나는 반드시 죽음으로 이 진창성을 지킬 것이오. 제갈량에게 돌아가 감사하다는 말을 전해 빨리 공격하라고 하시오.
이에 학소는그대의 병사와 사람들로 우리를 대적할 수는 없이 스스로 파멸 될 것이오. 계속 버텨서 무엇하겠소?
제갈량은 수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천명의 학소군이 지키는 진창성을 공격하지만 운제로 공격하자 불화살로 태웠으며, 충차를 끌고 오자 돌절구에 밧줄을 묶어 휘둘러 충차를 깨부쉈다. 제갈량이 다시 정란에서 화살을 쏘고 흙으로 산을 쌓아 참호를 메우고 성을 오르려고 하자 학소는 성 안에 두 겹으로 된 담장을 쌓아 그것을 막아냈으며, 제갈량이 이번에는 땅굴로 급습을 하려고 하자 성 안에 가로로 땅을 파 이를 막았다.[2]앞에서 한 말에서 이미 확정했소. 이제 보니 나만 경을 알고 있었지 경은 나를 모르고 있었구려!
이렇게 서로 20여 일을 싸우다가 몇 배나 많은 제갈량의 군대를 잘 막아내어 조진이 곧바로 보낸 위나라의 비요를 시작으로 형주에서 중앙군을 이끌고 밤낮으로 달려나온 장합, 왕쌍의 원군이 도착해 제갈량이 퇴각하자 학소는 이 공으로 관내후에 봉해졌다. 수도로 돌아가서는 조예가 접견해 노고를 위로하면서 학소와 같은 고향 사람 중서령 손자에게 그대들이 있으니 내가 무엇이 걱정이겠는가! 라고 외치면서 그를 중용하겠다고 약속했지만 학소는 곧 병들어 죽었다.
죽으면서 그는 아들 학개에게 유언을 남기는데 그 유언 또한 걸작.
무덤 부분이 문제가 되어 '삼국지 최악의 조합'에 기재되었다.(...)나는 장수로 일생을 살았으나 그게 그리 좋은 일은 아니었던 듯 싶다. 내가 싸울 때 여러 번 남의 무덤을 파헤쳐 돌과 나무를 취해 싸움도구로 썼었기에 후장하는 것이 죽은 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너는 반드시 나를 평소 입던 옷으로 염하거라. 사람이 살아있을 때 처소가 있을 뿐 죽은 이가 따로 어디에 있으리? 내 묘는 동서남북 어디든 네가 마음대로 정하도록 하거라.
3.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농서(濃西) 사람으로 바뀌었고, 9척 장신에 팔이 원숭이처럼 길어 활을 잘 쏘았다고 하며, 무엇보다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을 완벽하게 패배시킨 유일한 인물'''로[3] 공성전에서는 공격하는 쪽이 페널티를 가지게 마련이지만 연의에서는 스스로가 공성전을 포함한 모든 전술, 전법에 능하다고 말했으며[4] , 실제로도 계책으로 적의 성을 어렵잖게 함락시킨 제갈량이 이끄는 군대를 훨씬 적은 병력으로 완벽하게 막아내는 학소의 모습은 정말로 대단하다.
제갈량보다 오히려 불리한 상태에서 제갈량의 공격을 완벽하게 막아냈다는 것이 독자들에게 너무나 충격[5] 적이었기에 삼국지 후반부에 짧게 활약한 인물치고는 꽤 인지도가 있는 인물.
연의에서는 사마의가 파견한 것으로 변경되어 있으며, 선봉 위연의 공격을 막거나 제갈량의 책략을 완벽하게 막아내는 모습을 보여 수많은 촉빠들에게는 미움의 대상이다. 또 제갈량이 학소를 회유하기 위해 나타난 장면이 달라졌는데, 근상이 학소의 지인 은상이라는 인물로 변경되어 두 번째로 갔을 때는 그에게 활을 겨누면서까지 거절한다.
진창성 공략에 실패한 제갈량이 몇 년 후에 진창성을 재차 공격했을 때 당시 병상에 있던 학소가 적이 쳐들어왔다는 소리를 듣고 놀라서 죽었다는 이야기를 포함시켰는데, 이것은 제갈량에게 설욕할 무대를 만들어 주고자 나관중이 지어낸 얘기다. 실제로는 제갈량의 진창성 재공격은 없었으며, 학소는 진창성을 지킨 공으로 열후에 오른 후 편하게 천수를 누리고 유언을 남긴 다음에 사망했다.
그렇지만 그 능력과 충의에 감탄한 제갈량이 시신을 본국으로 돌려 보냈다는 내용이 나오는 것을 보면 나관중도 학소라는 인물은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6]
4. 미디어 믹스
학소/기타 창작물 문서 참조.
[1] 고대 전쟁사에서 도하라는 것은 그렇게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적의 세력이 강대하면 대치하고 추이를 지켜보는 게 당연한 이치다. 이걸두고 학소가 겁쟁이여서 그렇다면 조조나 한신 같은 자들도 겁쟁이가 된다. 비슷한 시기에 조인도 무리하게 도하를 시도하다가 막판 커리어를 말아먹은 적이 있다.[2] 문제는 이 기술이 명제기의 주로 달린 '''위략'''에 있기 때문에 촉빠들 중에는 이 기록을 유선벤허설만큼 얼토당치도 않은 기록 취급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 일단 제갈량전에도 진창성에서 공성전을 했다는 기록은 있기 때문에 교차검증은 된다. 하지만 위략 기록처럼 정말 1천 명만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당장 정사 조진전에는 조진이 학소와 함께 왕생을 진창성에 파견했다고 기록했는데 조진 같은 장군이 특별히 신경 쓴 진창 같은 요충지를 두 명의 장군이 겨우 1천 명만 통솔하고 있었다는 점은 믿기 어렵다.[3] 판본마다 차이가 있고 보는 시각마다 차이가 있다. 강유, 사마의 등이 제갈량에게 일부 전투에서 이기기도 하였다.[4] 주유를 까내리기 위해서 한 말이긴 하다. 주유는 수전만 능하지만 자기는 다 능하다고 이야기할 때 나온 말.[5] 연의에서 다른 제갈량의 패배들은 계략으로 극복할 수 없는 병력의 차이, 부하의 삽질, 간신배의 모함 등 대부분 핑계 거리가 있다.[6] 후대의 다른 창작물에서는 제갈량이 장임처럼 정중히, 후하게 장례를 치루어줬다는 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요코야마 미쓰테루의 전략 삼국지가 이 설을 채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