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진
1.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1
曹眞
(? ~ 231)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장수. 자는 자단(子丹). 조조의 조카뻘. 형제자매로 조빈과 덕양향주 조씨가 있다.
1.1. 정사
1.1.1. 아버지의 죽음
위략에 따르면 조진의 원래 성은 조씨가 아니고 진씨였다고 한다. 위략에는 이 부분을 '일설'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조진의 부친 진백남은 조조와 친하게 지냈었는데, 조조가 원술과 싸우려고 출병하였다가 도적에게 쫓겨 진백남에게로 달아났고 진백남이 문을 열고 조조를 받아들였다. 도적이 조조가 있는 곳을 묻자 "내가 여기 있다."고 대답하여 (조조 대신) 죽임을 당했다. 이에 조조가 그 공적을 기려 성씨를 바꾸었다.
위서에는 "소(邵)는 충성하고 도타우며 재지가 있음으로써, 태조(조조)의 사랑과 믿음을 받았다. 초평 중, 태조가 의병을 일으키자, 소는 무리를 모아 태조를 좇아 떠돌았다. 당시 예주자사 황완이 태조를 죽이려 하였고, 태조는 이를 피하고 소만 해를 받았다."라고 적혔다. 조소가 본디 진씨라는 말은 없다.
위략과 위서의 말을 비교해 보면 조진의 부친이 죽은 시점이나 조소를 죽인 사람이 서로 다르다. 조진전에서 조진의 부친이 주·군(곧 지방 정부)에 죽임을 당했다는 말과 비교해 보면 조소를 죽인 자로 조정의 예주자사인 황완을 지목하는 위서의 설이 더 그럴 듯한데, 그러면 조소가 진백남이라고 하는 설 자체도 위략에 있으므로 신빙성이 떨어진다. 그러나 삼국지 팬덤에서는 위략의 설에 배송지가 이의를 안 달아서 조진은 본디 진씨였다고 생각하는 편.
1.1.2. 위나라의 중진
조조는 조진이 어려서 고아가 된 것을 불쌍히 여겨 거두어서 여러 자식들과 함께 길렀는데 조비와 함께 하도록 했다. 그는 호방하여 자주 사냥을 다녔는데, 호랑이에게 쫓기게 되자 뒤돌아 활을 쏘아 호랑이를 쓰러뜨린 일이 있었다. 조조가 조진의 용맹함을 장하게 여겨 최정예기병인 호표기를 이끌게 했다.
영구(靈丘)의 도적을 토벌하여 영수정후에 봉해졌다. 그리고 편장군으로 군사들을 지휘해 유비의 별장(別將)을 하변(下辯)에서 공격해 깨뜨리고 중견장군에 임명되었다. 하후연의 사후에는 정촉호군으로 임명되어 한중 공방전에서 서황 등을 지휘해 양평관의 유비군의 장수 고상을 격파했다.
조비 즉위 후, 장진(張進)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소칙이 토벌하는 것을 비요를 보내 도왔다. 황초 3년(222년)에는 상군대장군(上軍大將軍)이었던 조진을 도독중외제군사(都督中外諸軍事), 가황월(假黃鉞)로 삼아 내외의 제군을 총통하게 하였다. 후에 하후상과 함께 조비의 남정에 참여해 손권군을 격파했다.
1.1.3. 비만
조진은 정사에 따르면 비만이었다고 전하며 오질이 이를 놀렸던 일화도 있다.
224년, 조비가 연 연회에서 조비가 총애하는 오질은 광대로 하여금 조진이 뚱뚱하고 주삭은 빼빼하다고 놀리게 하였다. 조진이 수치스러워
라며 화를 내자 조홍과 왕충마저 오질이 조진의 건강을 걱정해서 살을 빼라고 말한 것이라며(...) 은근히 오질 편을 들었다.[2]"공은 나를 부곡장[1]
으로 대우하려는가?"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조진이 칼을 빼 들고 욕하며 광대를 죽이겠다고 하였다.[3] 오질도 칼을 어루만지며
라고 말했다."조자단 이 푸줏간 돼지고기 같은 놈아. 너는 상 위의 고기도 썰지 못한다. 나는 너를 삼켜도 목구멍도 안 떨리고 씹어도 이 하나 흔들리지 않는다. 감히 권세를 믿고 교만하게 구느냐?"[4]
보다 못한 주삭이
라고 외쳤다."폐하께서는 우리더러 경을 즐겁게 하길 바랐을 뿐인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하시오?!"
오질이 되려 주삭까지 꾸짖으니, 주삭 역시 분노를 참지 못하고 칼을 자리에 찍고 돌아갔다. 결국 연회는 결딴나고 말았다고 한다.
후일담 아닌 후일담에서는 조비가 조홍이 자기에게 돈을 안 빌려준 것에 대한 앙갚음으로(정작 조비는 이미 몇 차례 돈 빌리고 안 갚은 적이 대부분이다.) 조홍의 빈객이 잘못을 저지르자 이를 트집잡아 조홍을 죽이려고 들었는데, 하필 조진이 같이 있을 때 이러다보니 조진은 "조홍을 주살하면 내가 참소했다고 착각한다."라고 말렸지만 조비는 "내가 직접 벌을 주는데 왜 니가 걱정해."라고 무시하며 진짜로 조홍을 죽이려고 했으나 황태후인 무선황후가 이를 알고 처음으로 정치에 관여하여 조비를 질책하면서, 황태후가 곽여왕까지 압박해 곽여왕이 필사적으로 조비를 말려서 조홍이 처형당하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5] 그나마 미수로 끝났으니까 그런 거지 진짜로 처형했으면 역사에 조비가 희대의 병신으로 남을 만했던 일이다.
1.1.4. 제갈량의 1차 북벌
조비가 나이 마흔에 죽자, 진군과 사마의 등과 함께 고명대신으로 불려가 조예의 보좌를 부탁받았고 조예가 즉위하자 그는 대장군이 되었다. 자치통감, 위서 명제기에 따르면 226년이다.
제갈량의 1차 북벌이 시작되고 조운과 등지가 미현을 노리는 척 하고 기곡에 주둔하자 조진은 무리를 일으켜 대군을 보내 이를 당적케 했다. 이 사이 제갈량이 곧 기산을 포위하자 남안, 천수, 안정 3군이 모반하여 호응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자 조예는 조진에게는 관우(關右, 관중)의 군대를 도독하게 맡겨 병력을 일제히 진군시켰고 조운과 등지의 의군을 상대로 미현(郿縣)에 주둔케 했다. 이는 기곡의 조운과 등지가 위나라의 대군 상대로 그때까지도 버티고 있었다는 증거로, 원래대로라면 조진은 대장군으로서 곽회와 더불어 최일선에서 적을 저지했어야 하는 역할이었다. 결국 조진은 미현에서 관중의 군사들을 추가로 인솔하여 기곡(箕谷)에서 조운/등지와 대치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기곡에서 조운과 대치하는 사이 기산을 점거한 제갈량이 미의 북쪽인 가정을 점거하기 위해 선봉으로 마속을 보냈다. 그러나 조예에 의해 제갈량을 막기 위해 파견된 장합이 가정에서 마속을 깨트렸고 제갈량은 물러났다. 마속이 격파된 이후, 조진은 안정군의 월지성에 직접 가서 항복을 받아냈고 촉나라에 호응한 3군을 직접 쳐서 항복을 받아내었다. 그러나 이후 논공행상에선 제외되었다.
1.1.5. 제갈량의 2차 북벌
조진은 기산 루트가 공고해졌으니 제갈량이 다음에는 반드시 진창 쪽으로 올 것이라 여기고 전략적 요충지인 진창에 학소와 왕생을 남겨두어 방비하게 하고 제갈량이 침공하자 비요를 보내 구원하게 하는 등 228년 말부터 229년 초까지 있었던 제갈량의 2차 북벌을 지연시켜 막는 데 공헌했다. 제갈량은 구원군이 오고, 또 미리 준비한 식량이 떨어져 퇴각했다.(명제기 주석 위략) (제갈량전) (장합전) 조진은 이 공으로 식읍을 받아 아울러 2,900호가 되었다.
1.1.6. 제갈량의 3차 북벌
229년, 진창전 직후 연이어 전개된 북벌에서 제갈량이 진식을 보내 무도와 음평을 공격했다. 옹주자사 곽회가 진식을 막았으나 제갈량이 직접 본군을 이끌자 곽회가 회군하였다.[6] (제갈량전)
1.1.7. 조진의 서정, 제갈량의 역격
230년에 대사마로 승진하고 검리상전, 입조불추의 특전을 받았고 황제에게 촉한을 칠 것을 권하였다. 8월, 장안을 출발하여 각 군을 무위, 야곡으로 출병시키고. 조진 본인은 자오도를 따라 들어가나 여름에 장마가 쏟아져 잔도가 끊기고 보급에 문제가 발생하자 조진, 장합, 사마의의 군대는 별 소득 없이 철수한다.
정사 왕기전 주석 사마표 전략에서 왕기가 설명하는 바에 따르면 "옛날 자오의 전투(子午之役)에서, 병사가 수백 리를 행군하여 긴 비를 만나, 교각이 파괴되고, 뒤의 군량은 썩어, 전군이 결핍됐다(前軍縣乏)'고 하여 왕기가 이를 강유의 단곡전투나 제갈탄의 난에서 오나라 군과 같이 적진에 깊숙히 들어왔다가 큰 피해를 받은 사례와 비교하며 위나라가 본 손해로서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이 출정으로 인해 자오도에 고립되어 식량이 고갈된 상황에서 위나라군의 피해가 건조하게 기록된 내용에 비해서는 좀 더 컸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장 하후연전 하후패의 기록에 따르면 황초 연간에 하후패가 편장군이 되었고 자오의 역(子午之役)에서 참전했는데 이때 하후패는 선봉이 되어, 흥세의 위에 당도해, 굽은 골짜기에 영채를 안돈했으며 촉한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고, 병사를 내어 공격했고 하후패는 녹각 사이에서 몸소 싸웠고, 구원에 힘입어 풀려났다는 기록이 하후연전 하후패의 기록에 있다.[7] 즉 선봉대가 싸우고 선봉자인 하후패가 구원군에 힘입어 물러나야 했을 정도로의 전투는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이상의 전투가 있었는지는 추측하기 어렵다.
직후에 제갈량이 위연과 오의를 양계와 남안을 습격하도록 보내어 이 지역 위군이 패퇴하였다. 조진은 옹양제군사를 역임한 인물이자, 당대의 중외제군사였으므로 해당 지역은 그가 전담하던 방면이었다.
1.1.8. 죽음
조진은 어려서부터 일족인 조준, 고향 사람인 주찬과 함께 조조를 섬겼는데 조준, 주찬이 일찍 죽자 이를 불쌍히 여겨 자신의 식읍을 나누어 조준, 주찬의 자식들에게 내려 주도록 청했다.
한편으로는 정벌 때마다 사졸들과 노고를 함께 하며, 상이 부족하면 자신의 재산마저 나눠주는 덕장의 면모도 보였다.
조진이 병에 걸려 낙양으로 돌아오자 조예가 와병 중인 그를 직접 찾아 살필 정도였다. 231년 3월, 40대의 나이에 중병으로 죽고 아들 조상이 후사를 이었다. 위서 명제기에 따르면 조진이 죽고 제갈량이 침공하여 사마의가 명을 받으나 한진춘추에는 제갈량이 침공한 후 조진이 사망했다고 하여 다르게 서술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자치통감은 '(봄 2월에) 한의 승상 제갈량이 이엄에게 중도호로서 한중유수부의 일을 맡아 보도록 하였다. 이엄이 이름을 이평으로 바꾸었다. 제갈량이 여러 군대를 인솔하여 쳐들어가서 기산을 포위하였는데, 목우를 만들어 운반하였다. 이에 대사마 조진이 병이 나서 황제가 사마의에게 명령하여 서쪽으로 가서 장안에 주둔하면서 장군인 장합, 비요, 대릉, 곽회 등을 독려하여 그들을 막게 하였다. 3월에 소릉원후 조진이 죽었다.'라고 적어 한진춘추를 채택하고 있다.
하지만 아들 조상은 자신에 비하면 심각한 자질 미달의 인물이었고, 결국 고평릉 사변 때 사마의에 의해 조상을 비롯한 자신의 직계 후손은 몰살당하게 된다. 그러나 조진의 공이 참작되어 조진의 작위는 종숙인 조희가 잇게 되었다.
1.2. 평가
정사가 한국 대중에 보급되면서 실질을 넘는 과도한 재조명을 받은 케이스이기도 한데, 항간엔 '''연의에 의해 가장 큰 피해를 본 인물 중 하나'''로 여겨졌으나, 분명 객관적 피해를 본 인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군재를 출중하다고 평가할 만한 기록이 정사에 남아 있지도 않다.
연의처럼 심하게 무능하진 않으나 장합이나 사마의 같은 군재의 1류로는 보기 어려운 인물로 이는 친족인 '''조휴'''와도 공유하는 부분이다.
이 비슷하다.1) 일찍이 조조를 따라 종군하면서 경험을 쌓았으며, 조씨 혈연 덕분에 사령관의 지위를 차지했다.
2) 그러나 실속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는 점.
3) 실질적인 군재/군공 면에서 부장과 후임들[8]
이 더욱 뛰어났다는 점.
제갈량의 1차 북벌에서 조운을 격파했다고 하지만, 조운의 병력은 어디까지나 별동대로서 주공이 아니기 때문에 조운을 물리치기 위해 병력을 동원했다는 것이 촉의 전략에 말려든 것이고,[9] 실질적인 상황의 정리는 장합의 역할이 컸다. 물론 2차 북벌 때 미리 학소 등으로 하여금 준비하게 하고 진창의 수비를 강화한 것은 분명 전략적인 공이다. 이 후 자오도를 이용한 촉나라 정벌도 기후 탓에 별다른 성과 없이 황명으로 돌아와야 했다. 물론 정황상 이쪽도 장마와 촉군의 공격으로 상당한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렇다고 연의처럼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 적은 없다.
다만 어디까지나 엄청난 공을 세운 적이 없다는 것이지, 한 방면의 사령관으로 무난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조진이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 또 하나의 이유는 정치적인 부분이다. 조조란 군벌이 지방 호족들을 포섭해가며 세운 조위 정권 특성상 군부요직은 믿을 수 있는 조씨/하후씨가 철저히 장악하는 게 매우 중요했다. 조조 시절에는 헌제의 조정과 조조의 부(府)가 암암리에 견제와 대립을 거듭했고 호족들의 입김으로 선양 이후로도 탁류에 속하는 환관, 외척을 정권에서 배제해야했던 조위 정권은 군권을 놓칠 경우 사실상 무방비 상태가 되어 버릴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1) 조휴가 석정 전투에서 대패한 것에 비해, 조진의 경우에는 전선에 영향을 줄 만한 치명적인 패배는 없었고, 오히려 제갈량의 식량 부족을 이용해 침략을 막아내었다는 점.
2) 조휴가 가규를 모함한 행동을 하였던 것에 반해, 조진의 경우엔 그러한 소인배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며, 사령관의 위품을 보였다는 점.
조조 시기에는 하후돈이 그 역할을 맡았다. 하후돈의 경우 전장에서의 성과는 미미하나, 전선 후방에서의 치안 안전과 내부 반란의 진압에 유능한 친족 장수였고 조조는 그에게 대장군이라는 군권 최고 지위를 내려 후방을 맡김과 동시에 혈족위주의 중앙집권 체계를 공고히 하는 데 성공하였다. 조비 시기에는 태위 가후는 명예직에 머무르고 대사마 조인이 실질적 군부 1인자로 그 역할을 이어받았다. 조예 시절엔 이 역할이 조휴와 조진에게 넘어간 것이다. 다시 말해 '''군재 자체보다는 정권보위의 핵심인 정치군인으로서의 중요성이 높았던 인물이었다.''' 조인처럼 군재도 빼어나면 금상첨화지만 하후돈이 그랬듯 어차피 이 자리는 군재가 최우선되는 자리가 아니었다. 일선에서 구르는건 사마의, 장합, 문빙, 만총 같은 사람들이 하고 그 사람들 잘 부릴 수 있을 정도의 능력과 신망만 있으면 되었다. 하후상, 조휴, 조진이 차례로 사망하자 군권은 거대호족 사마씨에 기울었고 조정 내 조씨-하후씨의 파워가 떨어진 그 결과는 조예 무덤의 흙이 마르기도 전에 터진 사마씨의 쿠데타였다.
결론적으로 조진은 군재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할 인물은 아니지만, 적어도 크게 실책을 저지른 적도 없기에 연의에서 그려진 3류 도독 수준은 아니었고, 적어도 자기의 직책에 맞는 능력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또한 정치적인 면에서 조진의 가치 및 역할이 조위 입장에서의 혈족 위주 중앙집권을 공고히 하는 데에 더 중요하였다고 볼 수 있다.
만약 훗날 조방이 황제로 있을 때도 조진과 같이 조위에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할 친족 장수가 군권을 제대로 장악하고 있었다면 사마의의 고평릉 사변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이 역할을 맡은 것은 바로 조진의 아들인 조상이었는데, 조상은 아버지와 달리 능력이 너무나도 부족해 이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사마의에게 권력을 빼았겨버리고 만다. 그리고 이것이 그대로 조위의 멸망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조진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더군다나 조상은 사마의의 이름값에 눌려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홀라당 항복해 아버지인 조진의 이름에 먹칠을 했고, 당시 조상 일파이던 환범은 이를 보고 '''"조진은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그 아들은 개나 소에 불과하다. 어쩌다 저런 놈한테 엮여서 멸족을 당하는구나"'''라고 한탄할 지경이었다.
1.3. 이야기거리
고금주 잡주편에 따르면 조진은 경범(驚帆)이라는 이름의 결마(駃馬)를 가지고 있었는데, 빠르기가 세찬 바람에 돛을 올리고 질주하는 것과 같았음을 말한 것이다.
1.3.1. 조진잔비
235년~236년 근처에 세운 것으로 추측되는 조진의 비석이 발굴되었던 적이 있다. 이를 조진잔비라고 하는데 재밌는 것은 촉적 제갈량(촉나라 도적 제갈량)이라는 문구에서 도둑 적(賊)자를 발견한 사람이 지워버렸다. 또한 진수의 정사 삼국지에선 조진이 226년 보정대신으로 대장군에 임명되지만 조진잔비에서는 제갈량이 상규로 향할 때 대장군을 수여(授)받았다고 나오는데 그냥 '대장군의 소임을 받들어'라고 해석할 수도 있어 정사와 충돌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다.
1.4. 연의
제갈량 북벌 파트의 온갖 굴욕을 떠안는 삼국지연의의 대표적 피해자.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을 띄우기 위해 정사 기록에는 없는 위나라 군대의 굴욕적 패배가 많이 추가되었는데, 전반부에서 이것 때문에 조인이 제일 큰 피해를 입었다면 제갈량의 북벌 부분에서는 조진이 제일 큰 피해를 입었다. 93회에선 왕랑의 죽음 이후 적군의 기습을 예상했다가 낚여서 팀킬을 하고, 촉군이 패배한 것으로 착각하고 추격했다가 조준과 주찬이 전사하고, 2차 북벌을 다룬 98~99회에서 강유에게 낚여서 비요가 조진 대신 갔다가 전사했다.
단 위나라 조정에서 하후무와는 달리 실전경험이 많다고 언급되고,[10] 공명이 조진을 죽이기 위한 계략을 구상하고 앞서 미리 계산한 대로 조진이 죽자 기뻐하기까지 하는 등 '그래도 무시하지 못할 적'이라는 이미지는 있다. 그리고 병법에 꽤나 능통하다는 위연의 언급이 있는 등 제법 유능한 장군으로 그려진다. 문제는 그저 언급으로만 끝나고 실제 전장에서는 털리는 게 일상이다... 그래도 조진과 세트로 연의에서 같이 망신당하는 곽회보다는 사정이 좀 낫다.
이후 병환이 깊어 자리에 누운 채 여러 날을 보내던 중에 공명이 진창을 함락하자, 조진은 병에 걸린 몸을 움직여 위나라를 위해 사마의에게 대도독의 인수를 위임하였다. 최후는 100회 때 사마의와의 내기에서 져 부끄러움으로 병이 든 상태에서 제갈량의 도발성 편지를 받고 격분하여 가슴이 막혀 죽는 것으로 묘사된다. 편지의 내용을 요약하면 대략 '조진 당신은 장수로서 하나도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참패하고 도망이나 쳤으니 무슨 낯으로 다른 사람들을 만나겠는가?'라는 조롱이다.
또한 마속의 계책으로 사마의가 의심을 받고 숙청 직전까지 몰렸을 때, 조진이 나서서 사마의의 결백함을 주장한 덕분에 사마의가 그나마 좌천되는 선에서 그치는 등 전체적인 대국을 파악하는 능력도 있다. 그런데 정사에서 사마의가 훗날에 조진의 아들을 상대로 은혜를 제대로 갚았으니 굉장히 미묘하다.
1.5. 미디어 믹스
- 조진/기타 창작물 항목 참조.
2.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2
曹珍
생몰년도 미상
위나라에서 사마사가 조방을 폐위하고 조모를 즉위시키는 등 전횡을 부리자 255년에 관구검, 문흠 등이 거병해서 이에 대항하면서 악가에서 싸웠는데, 이때 손준이 여거, 유찬 등과 함께 수춘을 공격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문흠이 위군에게 패해 투항하자 정봉을 호위장군으로 삼고 손준을 따라 수춘에 가서 맞이하도록 하면서 오군은 수춘을 공격하려 했는데, 제갈탄이 수춘에 들어갔기에 군사를 물리게 되었다. 이때 여거, 정봉 등이 돌아가는 길에 조진은 이들을 추격했다가 고정에서 싸웠지만 정봉이 적의 진중에 돌입해 수백 명의 머리를 베는 등의 활약을 해서 격파되었고 이로 인해 군기들을 빼앗겼다.
2.1. 미디어 믹스
진삼국무쌍 6에서는 관구검, 문흠의 난에서 등장해 후편에서 제갈탄과 함께 관구검군의 본진에서 관구검, 관구중 등을 공격해서 싸운다.
삼국전투기에서는 관구검이 도망가고 제갈탄이 수춘을 함락하면서 조진이 문흠, 문앙을 추격하기 위해 파견되어 내 추격에서 벗어나기 힘들 거라고 말했으며, 문흠 부자를 구하기 위해 오군에서 파견된 정봉에게 한 칼에 썰린다.
[1] 오질이 부리던 부하 장수 정도의 계급이다.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내가 니 시다바리가?'''[2] 두 사람의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 둘은 조비에게 제대로 찍혀 있던 상태였고 실제로 피를 본 전적이 있는지라, 조비가 총애한 실세였던 오질의 비위를 맞출 수밖에 없었다.[3] 오질에게 직접 욕을 하지 못하고 애둘러 광대를 겁주는 것으로 보아 조진 정도 되는 중진마저 오질의 권위를 함부로 대할 수 없던 것이다. 조비의 삼촌이자 개국공신인 조홍조차도 은근슬쩍 오질의 눈치를 살피며 조진을 달래는 것을 보았을 때 조씨일족을 웃도는 권세였던 것이 확실하다. 이건 솔직히 오질도 오질이지만 이렇게 황실의 중진들마저도 기게 만든 권세를 준 조비의 잘못이 더 크다.[4] 따지고보면 권세를 믿고 교만하게 구는 건 오질이다. 한마디로 적반하장.[5] 하지만 그냥 안 풀어주고 재산을 몰수했는데, 무선황후가 다시 갈구자 재산도 돌려줬다.[6] 조진전, 곽회전에는 기술이 보이지 않음.[7] 삼국지집해 하후연전에 따르면 하후패의 이 자오 전투는 230년 조진의 원정이다. 이 기사 다음에 하후패가 정시 연간에 하후유의 정촉호군을 이어받았다고 나오는데 하후유가 정촉호군을 그만둔 때는 240년경으로 이 시기 하후유는 정남(征南)장군도독형예주(都督荊豫州)가 되었고, 정시 2년인 241년에는 형주 번성에서 오나라 장군 주연과 맞섰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이 기록을 244년에 있었던 흥세산 전투에 대한 기록으로 보기엔 시열상으로 전혀 맞지 않는다.[8] 조진의 경우엔 장합-곽회, 조휴의 경우엔 가규-만총.[9] 물론 조운이라는 이름값이 감히 무시 할 수 있는 수준의 그것이 아니었다.[10] 하후무가 공명과 싸워 이기지 못하자, 공명을 막을 상대로 실전 경험이 풍부한 조진을 왕랑이 추천하였다. 조진은 자신의 능력으로는 공명을 이길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고, 함부로 나서지 않아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