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

 


1.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1.1. 정사
1.1.1. 초기 생애
1.1.3. 복양 전투
1.1.5. 양 전투
1.1.7. 하북 평정
1.1.8. 형주 정벌
1.1.9. 남군 공방전
1.1.10. 관중 평정
1.1.11. 216년 ~ 217년 유수구 전투
1.1.12. 조조 휘하
1.1.14. 조비 휘하
1.1.15. 유수 전투
1.1.16. 죽음
1.2. 연의
1.3. 평가
1.4. 미디어 믹스
2. 후한 말의 인물
2.1. 미디어믹스


1.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曹仁
조인
'''
'''시호'''
충후(忠侯)
'''작위'''
도정후(都亭侯) → 안평정후(安平亭侯) → 진후(陳侯)
'''최종직위'''
대사마(大司馬)
'''성씨'''
(曹)
''''''
(仁)
''''''
자효(子孝)
'''조부 '''
조포(曹褒)[1]
'''아버지 '''
조치(曹熾)[2]
'''생몰기간 '''
음력:168년 ~ 223년 3월 19일
양력:168년 ~ 223년 5월 6일
'''고향'''
예주 패국 초현(譙縣)
역임한 관직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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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조조)
별부사마(別部司馬) 행 여봉교위(行 厲鋒校尉)
광양태수(廣陽太守) 겸 의랑(議郞)
행 정남장군(行 征南將軍)
행 안서장군(行 安西將軍)
행 효기장군(行 驍騎將軍)
행 정남장군(行 征南將軍) 겸 가절(假節)
정남장군(征南將軍)

<bgcolor=#00008b> {{{#FEDC21 조위(조비)

거기장군(車騎將軍) 겸 도독형양익주제군사(都督荊揚益州諸軍事)
대장군(大將軍)→대사마(大司馬)
}}}}}}
후한 말과 위나라의 인물. 는 자효(子孝). 조조의 종제, 조순의 형.

1.1. 정사



1.1.1. 초기 생애


조순전 주석 영웅기에 따르면 조순은 나이 14세 때 부친을 여의고 동복 형인 조인과 따로 살았다.
어려서 활쏘기, 말타기, 사냥을 좋아했다. 그 뒤 호걸들이 아울러 봉기하자 조인 또한 은밀히 소년들을 모아 천여 명을 얻어 회수, 사수 사이에서 활약하다 마침내 조조를 수종해 별부사마 행(行) 여봉교위가 되었다.
조조가 원술을 격파할 때 조인은 자못 많은 적군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1.1.2. 서주 대학살


서주 정벌에 종군하여 조인은 늘 기병을 지휘하며 군의 선봉이 되었다. 따로 도겸의 장수 여유를 공격해 격파하고, 돌아와 팽성에서 대군과 합쳐 도겸군을 대파했다. 비, 화, 즉묵, 개양 공격에 종군하고, 도겸이 별장(別將)을 보내 여러 현들을 구원하자 조인이 기병으로 이를 격파했다.
조인전에 따르면 서주 정벌 당시 조인은 기병장으로 선봉에서 활약했다 했다. 직접적인 기록은 없지만 조인이 선봉, 별동대로서 활약하고 이후에 조조와도 합류하였던 것을 보면 학살을 자행했다고 어느 정도는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혹은 그럴 여지가 있다. 흥미로운 부분은 조조가 호관을 공략하던 시기의 기록을 보면 조인이 저항하는 호관 백성들을 살려 빠른 항복을 받아내자고 하는 장면이 있다. 이는 학살만 하고 완전히 함락시키지 못한 서주의 경험이 뒷받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1.1.3. 복양 전투


조조가 여포를 정벌하니 조인은 따로 구양을 공격해 함락하고 여포의 장수 유하(劉何)를 사로잡았다.

1.1.4. 삼보의 난


조조가 황건을 평정하고 천자를 영접해 허현(허도)에 도읍하매 조인이 수차례 공을 세우니 광양태수로 임명되었다. 조조는 조인의 용맹과 지략을 높게 여겼으므로 태수로서 군(郡)에 두지 않고 의랑으로 기병을 지휘하게 했다.

1.1.5. 양 전투


조조가 장수를 정벌하니 조인은 따로 주변 현들을 돌며 남녀 3천여 명을 붙잡았다. 조조군이 돌아오며 장수에게 추격당했는데 군이 불리하여 사졸들이 사기를 잃자 조인이 장병들을 격려해 심히 분발케 하니 태조가 이를 장하게 여겼고 마침내 장수를 격파했다.

1.1.6. 관도대전


우금전에 따르면 우금은 별도로 사환, 조인과 함께, 사견에서 수고를 공격해 깨뜨리고 그를 참수했다.
선주전에 따르면 조조가 원소와 관도에서 서로 대치하자 여남의 황건 유벽 등이 조조를 배반하고 원소에 호응했다. 원소는 유비를 보내 군을 이끌고 유벽 등과 함께 허도 아래를 공략하게 했다.
조조는 원소와 더불어 관도에서 서로 오랫동안 대치했는데, 원소가 유비를 보내 예주 여남군 은강현 등 여러 현을 돌며 많은 무리를 일으켜 호응하게 했다. 허현 남쪽에서 관원과 백성들이 안정되지 못하자 조조가 이를 근심했다. 조인이 말했다.

남방 사람들은 대군이 원소와 대치하느라 눈앞이 급박하므로 구원해줄 수 없으리라 여기는 터에 유비가 당도하니 배반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유비가 새로 원소의 군사를 거느리게 되어 그들을 능히 부릴 수 없을 것이니 공격하면 무찌를 수 있습니다.

조조가 그 말을 옳게 여기고는 조인에게 기병을 거느리고 유비를 공격하게 했다. 조인은 이를 패주시키고 모반한 현을 모두 다시 수습하고 돌아왔다.
원소가 별장(別將) 한순을 보내 서쪽 길을 노략질하고 끊게 하자 조인이 계락산에서 한순을 공격해 대파했다. 이로 말미암아 원소는 감히 다시는 군사를 나누어 출군하지 못했다. 다시 사환 등과 함께 원소의 군량 운반 수레를 노략질하고 그 양곡을 불태웠다.

1.1.7. 하북 평정


무제기에 따르면 고간은 조조가 오환을 토벌한다는 말을 듣고는, 주(州)를 들어 모반하여 상당태수를 붙잡고, 군사를 일으켜 호관구(壺關口)를 지켰다.
하북이 평정된 후 호관을 포위하는 데 종군했다. 조조가 영을 내렸다.

성이 함락되면 모두 파묻어 죽여라.

여러 달이 지나도록 함락하지 못했다. 조인이 조조에게 말했다.

지금 공께서 반드시 죽일 것이라 말씀하시니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굳게 지키게 하였습니다. 지금 적의 견고한 성 아래에 머물면서 공격해 포로들을 반드시 죽이겠다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조조가 이를 따르니 성이 항복했다. 이에 조인의 앞뒤 공을 기록해 도정후에 봉했다.

1.1.8. 형주 정벌


형주 평정에 종군했다.
오주전에 따르면 조조는 그대로 북쪽으로 돌아가고, 조인과 서황에게는 강릉을, 악진에게는 양양을 지키도록 했다.

1.1.9. 남군 공방전


조인은 행(行) 정남장군으로 임명되어 강릉에 남아 주둔하며 오장 주유를 막았다. 주유는 수만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공격하고 선봉 수천 명이 처음으로 당도했다. 조인은 성에 올라 이를 보고 3백 명을 뽑고는, 부곡장 우금(牛金)을 보내 거꾸로 싸움을 걸게 했다. 적이 많고 우금의 군사가 적었으므로 마침내 포위되었다.
장사(長史) 진교가 함께 성 위에 있었는데 우금 등이 거의 몰살되려는 것을 보고 주변 사람들이 모두 안색을 잃었다. 조인이 의기로 매우 분노해 좌우에 일러 말을 가져오게 하니 진교 등이 함께 조인을 말리며 말했다.

적의 군사가 흥성하니 당해낼 수 없습니다. 설령 수백 명을 버린다 한들 큰 손해가 아닌데 어찌 장군께서 몸소 가려 하십니까!

조인이 응낙하지 않고 마침내 갑옷을 입고 말에 오르고는 휘하의 장사 수십 기를 거느리고 성을 나섰다. 적과 백여 보 떨어진 곳의 해자에 접근했다. 진교 등은 조인이 응당 해자 가에 머물며 우금을 돕는 형세를 취할 것이라 여겼으나 조인은 해자를 뛰어넘어 곧바로 전진해 적의 포위망 안으로 돌진해 들어갔고 이에 우금 등이 풀려날 수 있었다. 남은 군사들이 모두 빠져나오지 못했으므로 조인이 다시 돌아가 돌진해 우금의 군사를 벗어나게 하고 여러 명을 잃었으나 적이 이내 물러났다.
진교 등은 당초 조인이 나가는 것을 보고 모두 두려워했는데 조인이 되돌아오는 것을 보자 감탄하며 말했다.

장군은 실로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십니다!

전체의 군대가 그 용맹에 감복했다. 조조가 더욱 장하게 여겨 안평정후로 옮겨 봉했다.
조인의 용맹이 돋보이는 일화지만 한편으로는 선봉 수천 명을 상대로 부곡장 우금에게 고작 3백 명만 보내서 싸우게 한 점이나 위기에 놓은 우금을 구한다고 고작 수십 명만 편성해서 두 번이나 포위망을 돌파하여 두 번 모두 목적을 이루고 빠져나온 점이 실로 기묘하기 짝이 없다. 수세적으로 나설 것이라 예상한 연합군의 허를 찔러 기선을 제압해보겠다는 의도였는지 몰라도 사실 굉장히 무리수적인 전략이고, 우금은 진짜로 죽을 뻔 하였다. 조인이 괴물같은 용맹을 보여줬기에 망정이지 자칫했으면 조인이 죽거나 붙잡혀 거기서 곧바로 형주 전체가 연합군에게 넘어가는 상황도 벌어지지 말란 법이 없었다.
이통전에 따르면 유비와 주유는 강릉에서 조인을 포위하여 공격하고 따로 관우를 보내 북쪽길을 끊어 놓았다.
서황전에 따르면 서황은 또한 만총과 함께 한진에서 관우를 치고, 조인과 함께 강릉에서 주유를 쳤다.
감녕전에 따르면 감녕은 먼저 곧장 이릉으로 진군하여 취할 것을 건의했다. 그는 가서 그 성을 얻었으며, 들어가서는 고수했다. 그 당시 수하에는 수백 명의 병사가 있었는데, 새로 얻어서 1천 명을 채웠다. 조인은 곧 5, 6천 명을 시켜 감녕을 포위하도록 했다. 감녕은 며칠간의 계속된 공격을 받았으며, 적은 높은 누각을 세우고 성 안으로 비가 내리는 듯이 화살을 쏘았다. 병사들은 모두 두려워했다. 오직 감녕만은 태연자약하게 담소했다.
주유전에 따르면 감녕은 주유에게 위급함을 알렸다. 주유는 여몽의 계획을 사용하여 능통을 남겨 그 뒤를 지키도록 하고, 자신은 여몽과 함께 감녕을 구하러 갔다. 감녕의 포위가 풀린 후, 주유는 강을 건너 북쪽 해안에 주둔하고 조인과 결전할 날을 정했다. 주유는 직접 말을 타고 싸움을 지휘하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오른쪽 겨드랑이를 맞아 상처가 대단히 심했으므로 곧 바로 돌아왔다. 후에 조인은 주유가 일어나지 못하고 누워있다는 소식을 듣고 병사를 이끌고 진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주유는 직접 일어나서 군영을 시찰하고 관리와 병사들을 격려했다. 조인은 이 때문에 후퇴했다.
오주전에 따르면 209년, 주유와 조인이 서로 대치한 지 1년이 넘어, 죽거나 부상당한 자가 매우 많았다. 조인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이통전에 따르면 이통은 부대를 인솔하여 말에서 내려 방책을 걷어내고 포위권으로 진입하여 싸우면서 앞으로 나가 조인의 군사를 구출했는데, 무용이 여러 장수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다.

1.1.10. 관중 평정


조조가 마초를 토벌하며 조인을 행(行) 안서장군으로 삼아 제장을 지휘해 동관을 막게 하고 위남에서 마초를 격파했다.

1.1.11. 216년 ~ 217년 유수구 전투


무제기에 따르면 3월, 왕(조조)이 군을 이끌고 돌아오며 하후돈, 조인, 장료 등을 남겨 거소에 주둔하게 했다.

1.1.12. 조조 휘하


소백(蘇伯), 전은(田銀)이 모반하자 조인은 행(行) 효기장군으로 임명되어 7군을 지휘해 전은 등을 토벌하고 이를 격파했다. 다시 조인을 행(行) 정남장군, 가절로 삼았고 번에 주둔하며 형주를 진수하게 했다.
허저전에 따르면 조인이 형주에서 조조를 보러 왔는데, 조조가 아직 나오지 않았으므로 조인은 들어간 후 허저와 궁전 밖에서 만났다. 조인이 허저를 불러들여 곧 말을 하려는데, 허저가 말했다.

왕(조조)께서 곧 나오십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돌아와 어전으로 들어갔으므로, 조인은 마음속으로 그를 원망했다. 어떤 사람이 허저를 질책하며 말했다.

정남장군(조인)은 조공(조조)의 종족이고 조정의 중신인데, 낮추어 존경하며 그대를 불렀거늘 당신은 무엇 때문에 거부했소?

허저가 말했다.

그는 비록 친족의 중신이지만, 결국은 외번(제후)입니다. 저는 조정 신하의 일원이므로 일이 있으면 여러 사람의 말을 종합하면 되는데 무엇 때문에 반드시 방으로 들어가 속삭이겠습니까?

조인은 어릴 때 바른 품행을 닦지 않았으나 장성해 장수가 되자 엄격하게 정돈하고 법령을 받들어 늘 법령을 좌우에 두고 이를 살펴 사무를 처리했다. 언릉후 조창이 북쪽으로 오환을 정벌할 때 조비는 동궁(태자궁)에 있었는데 서신을 써서 조창을 훈계해 말했다.

장수가 되어 법을 받드는 것은 응당 정남(조인)과 같아야 하지 않겠는가!


1.1.13. 번성 공방전


후음이 완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주변 현의 무리 수천 명을 초략하자 조인이 제군을 이끌고 후음을 공파하여 참수했다. 무제기와 자치통감에 따르면 조인은 완을 도륙했다. 조인전에 따르면 이후 번으로 돌아와 주둔하고 정남장군에 임명되었다.
온회전에 따르면 온회가 관우를 경계하면서 지금 강물은 불어나는데 조자효(조인)가 너무 깊게 들어가 고립되어 대비를 못하고 있다고 위험하다며 홍수에 대해 걱정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는 관우가 수몰로 적을 격파하는 것을 계획하고 치고 올라갔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과연 관우가 번을 공격하고 이때 한수가 범람하여 우금 등 7군이 모두 물에 잠기고 우금이 관우에게 항복했다. 조인은 인마(人馬) 수천으로 성을 지켰는데 성에서 물에 잠기지 않고 남은 부분이 수 판(板)에 불과했다. 관우가 배를 타고 성으로 와서 여러 겹으로 포위하여 안팎이 단절되었고 양식이 떨어지려 하고 구원병은 도착하지 않았다. 조인이 장사들을 격려하고 필사의 각오를 보이자 장사들이 감복하여 모두 하나가 되었다.
만총전에 따르면 번성은 물에 잠겨 자주 붕괴되었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안색을 잃었다. 어떤 사람이 조인에게 말했다.

지금의 위험은 우리들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관우의 포위진이 합쳐지지 않는 틈을 타서 가벼운 배를 타고 밤에 달아나십시오. 비록 성을 잃을지라도 생명은 보존할 수 있습니다.

만총이 말했다.

산으로부터 흐르는 물은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오래 지속될 수 없다고 생각됩니다. 관우가 파견한 다른 군대는 이미 겹현 아래에 주둔해 있으며, 허성 남쪽 지역의 백성들은 불안해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관우가 지금 즉시 진격하지 않는 까닭은 우리 군대가 그들의 뒤를 끊을까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도주한다면 홍하 이남 지역은 다시는 위나라의 소유가 될 수 없습니다.

조인이 알겠다고 말했다.
서황의 구원군이 도착하고 물 또한 점차 줄어들었다.
조엄전에 따르면 번성에 도착한 후, 관우는 조인을 더욱 견고하게 포위했고, 남아 있던 구원병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서황이 이끄는 병사로는 포위망을 뚫기에 역부족이었지만, 장수들은 서황이 급히 구조하지 않고 있다고 질책을 했다. 조엄이 장수들에게 말했다.

우리쪽 병사는 단독이며 너무 적고, 조인은 따로 떨어져 있어 힘을 합칠 수 없습니다. 지금은 첩자를 보내 조인에게 통지하여 밖에 구원병이 왔음을 알게하여 면려하는 것만 못합니다. 북쪽의 지원군은 열흘을 넘기지 않고 도착할 것이며, 성 또한 굳게 지킬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장수들은 모두 좋아하였으며, 곧 땅속으로 길을 파고, 화살을 날려 조인에게 편지를 보내서 몇 차례 소식을 연락하였다.
서황이 밖에서 관우를 공격해 조인은 포위를 허물고 벗어날 수 있었고 관우는 퇴주했다.
조엄전에 따르면 관우의 군사가 물러난 후, 촉나라의 배가 면수를 점거하여 양양은 완전히 연락이 끊겼다. 손권이 관우의 치중(輜重)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관우는 이 소식을 듣고 즉시 퇴각하여 남쪽으로 돌아갔다. 조인은 장수들을 모아서 상의했는데, 모두 이렇게 말했다.

지금 관우는 위기에 처해 있으니, 쫓아가면 반드시 체포할 수 있습니다.

조엄이 말했다.

손권은 관우의 배후를 습격하려고 했지만, 관우가 구원병을 이끌고 돌아올 것을 염두에 두고 우리 군대가 양쪽 군대가 피로해진 틈을 타서 공격할 것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관우는 달아났지만, 또 그가 손권의 심복이 될 걱정거리는 여전히 있습니다. 만일 추격한다면, 손권은 관우에 대한 태도를 바꾸어 우리에게 재앙을 일으킬 것입니다.

조인은 그래서 전투태세를 풀었다. 조조는 관우가 달아났다는 소식을 듣고, 장수들이 추격할 것을 걱정하여 과연 긴급히 조인에게 칙령을 보냈다. 그것은 조엄의 계책과 같았다.
수경주에 따르면 번성의 서남쪽에는 조인의 《기수비(記水碑)》가 있는데 (후일) 두원개(두예)가 그 뒤에 오나라 정벌의 일을 기록하여 중간(重刊)하였다고 한다. 직접 번성에서 구르면서 개고생했던 조인은 꽤나 기념할만한 일로 여겼던 것 같다. 사족이지만 조인이 세웠다는 이 기수비는 241년에 주연의 번성 공격에 의해 한 번 훼손됐을 가능성이 있는데 두예가 후일 수리하면서 자신의 공적을 적었을 가능성이 있다.

1.1.14. 조비 휘하


조비가 왕위에 오르게 되자 조인을 거기장군, 도독형양익주제군사로 임명하고 진후로 올려 봉하고 식읍을 2천 늘리니 예전과 함께 모두 3,500호가 되었다. 조인의 부친 조치(曹熾)를 죽은 뒤에 추가하여 하사해 진목후라는 시호를 내리고 묘지기 10가를 두었다.
선제기에 따르면 손권이 군사를 거느리고 서쪽으로 진군하자 조정에서 의논하기를, 번, 양양에는 곡식이 없어 적을 막을 수 없다 하며 당시 조인이 양양을 진수하고 있었는데 조인을 불러 완으로 돌아오게 하도록 청했다. 사마의가 말했다.

손권은 이제 막 관우를 격파하여 지금은 그들이 스스로 우리와 결탁하려 할 때이니 필시 감히 침범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양양은 수륙의 요충이며 적을 막는 요해이니 이곳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 말을 결국 따르지 않았다. 조인이 마침내 두 성(번, 양양)을 불태운 후 버렸는데 손권은 과연 침범하지 않았고 조비가 이를 후회했다.
그 뒤 불러서 완으로 돌아와 주둔케 했다. 손권이 장수 진소를 보내 양양을 점거하자 조인에게 조서를 내려 이를 토벌케 했다. 조인은 서황과 함께 진소를 공파하고 양양으로 들어가서 장군 고천(高遷) 등을 시켜 한수 남쪽의 부화민(附化民)들을 한수 북쪽으로 이주시켰다.
문제기에 따르면 221년 여름 4월 거기장군 조인을 대장군에 임명하였다.
문제기에 따르면 221년 5월 정감(鄭甘)이 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조인을 파견하여 토벌하고 그를 참수시키도록 했다.
또 조서를 내려 예주 영천군 임영현으로 옮겨 주둔케 하고 대사마로 올렸다.[3] 다시 제군을 지휘해 오강(烏江)을 점거하고 돌아와 합비에 주둔했다.

1.1.15. 유수 전투


오주전에 따르면 222년 가을 9월, 위나라는 곧 조휴, 장료, 장패에게 동구까지 나가도록 명령하고, 조인에게는 유수까지 병사를 출동하도록 했으며, 조진, 하후상, 장합, 서황에게는 남군을 포위하도록 했다.(조비의 1차 남정)
주환전에 따르면 222년, 위나라에서 대사마 조인을 파견하여 보병과 기병 수만 명이 유수로 향했다. 조인은 주를 취하기 위해 우선 위나라가 동쪽으로 선계를 공격하려고 한다고 거짓으로 알리려고 했다. 주환은 병사를 나누어 선계로 가도록 했다. 대우가 이미 출발한 후, 주환은 갑자기 조인이 유수로 진군하려고 하며 70리 떨어진 곳까지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주환은 사자를 파견해 선계로 향해 가는 병사들을 좇아 돌아오도록 했다. 그러나 선계의 병사들이 도착하기 전에 조인이 신속하게 도착했다. 그 당시 주환 수하의 병사와 그가 통솔하는 부대로 남아있는 자는 5천 명이었다. 장수들은 불안해하며 각기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다. 주환은 그들을 깨우쳐 말했다.

현재 적군의 장수에게는 지혜도 없고 용감하지도 않으며, 사졸들은 매우 두려워하고 있으며 천 리를 걸어왔으므로 병사와 말은 피곤한 상태이오. 나와 각 부대가 높은 성을 차지하고 남쪽으로는 대강에 임하고, 북쪽으로는 산과 구릉을 등지고 충분한 휴식을 취한 병사들은 수비쪽에서 공격쪽을 제압하는 백전백승의 형세인 것이오. 조비가 직접 왔을지라도 오히려 걱정할 것이 못되거늘, 하물며 조인 등임에랴!

주환은 그래서 깃발을 쓰러트리고 북을 울리지 않은 채 외부에 허약함을 나타내 조인을 유인하여 이르도록 했다. 조인은 과연 그의 아들 조태를 파견해 유수성을 공격하도록 했으며, 장군 상조를 나누어 파견하여 제갈건왕쌍 등을 지휘하여 유선을 타고 따로 중주를 습격하도록 했다. 중주는 부대의 가족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조인 자신은 1만 명을 인솔해 탁고에 머물렀고, 조태 등은 후방에서 막도록 했다.
장제전에 따르면 조인이 유수의 중주를 공격하려고 하자, 장제가 말했다.

적병은 서쪽 해안을 점거하고 배를 상류에 나란히 진열시키고 있는데, 우리 병사들은 주중으로 들어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스스로 지옥 속으로 들어가고, 위험과 사망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조인은 장제의 말에 따르지 않았고, 과연 패했다.
오주전에 따르면 223년 3월, 조인은 장군 상조 등을 파견하여 병사 5천을 이끌고 유선을 타고, 새벽에 유수 중앙의 사주를 건너도록 했다. 조인의 아들 조태는 군사를 이끌고 급히 주환을 공격했다. 주환은 병사로 방어하면서 장군 엄규 등을 파견하여 상조 등을 격파시키도록 했다.
주환전에 따르면 주환 부대의 병사들은 유선을 공격하여 취했고, 때로는 별도로 상조 등을 공격했다. 주환 등은 직접 조태에게 항거해 조태의 군영을 불태워 퇴각하도록 했다. 그래서 상조를 죽이고 왕쌍을 사로잡아 무창으로 보냈다. 이 싸움에서 머리를 베이거나 물에 빠져 죽은 자는 1천여 명이나 됐다.

1.1.16. 죽음


문제기에 따르면 223년 3월 19일, 대사마 조인이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위서 기준으로 조인의 이때 나이는 향년 55세였다.[4]
부자에서의 평가로는 조인의 용맹은 맹분, 하육도 이보다 더하지 못하고 장료가 그 다음이라 극찬하였다.
시호를 내려 충후(忠侯)라 했다. 아들 조태가 후사를 이었다.

1.2.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그냥 매번 당하는 악당의 수하같은 모습이다. 그래도 그의 무술 실력에 대해서는 은근히 높이 쳐주는 편이지만, 정사를 기준으로 본다면 '''상당히 심하게 너프가 된 모습이다.'''
연의에서는 예형이 조조의 부하들을 싸잡아 놀릴 때 "조자효는 요전태수라고 부르는게 낫겠다."라고 했는데 '돈에 환장한 태수'라는 뜻이니 이것도 결코 좋은 별칭은 아니었다. 정사에서 실제로 인색하고 치부를 했던 인간은 조자렴, 즉 조홍이었다. 조인 본인에게는 무척 억울할 것이다.
조인은 조조의 구원군을 기다리라는 이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신야의 유비를 공격한다. 그러나 서서의 계책에 당해 '팔문금쇄의 진'이 깨트려지고 번성까지 함락당하는 굴욕을 당한다. 단 이 전투는 창작이다. 본래 번성은 유표의 거성인 양양에 한수를 사이에 두고 딱 붙어있는 성이다. 그러니 신야보다도 남쪽에 위치하고 길도 하나 밖에 없어 우회도 불가능하기에 유표 생전에 조인이 번성을 점거한 적이 없다. 한마디로 연의의 내용만 보면 서서가 번성을 점거한 것을 극찬하기 전에 유비가 도대체 경비를 어떻게 했길래 조인이 번성을 점거했는지부터 탓해야 할 일이다.
남군에서는 직접 큰 칼을 휘두르며 오군을 공략해 패퇴시키는 장면이 나온다. 또 주유에게 독화살 크리를 날려서 주유의 죽음의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그냥 주유에게 농락당해 남군을 내주는 포지션.
관우와의 전투는 결국 끈기 있게 성을 지켜내어 관우의 패망에 일조하는 식으로 역사적 내용도 어느정도 반영하고 있다.

1.3. 평가


'''하늘이 내린 장수 - 정사'''[5]

조조 시대 조위 최고의 장수 중 하나이자 조조의 인척 중 최고의 능력자로 평가된다. 하후돈, 하후연, 조홍, 조휴, 조진, 하후상이 모두 조씨의 인척이기에 정치적 안배로 실제 능력에 비해 높은 지위에 올랐다는 인상을 지울수 없는 반면,[6][7] 조인은 지용을 겸비한 명장으로 능력으로 보나, 정치적 위치로 보나 조조 시대 그 누구보다 믿음직한 카드였다. 인척 버프를 빼고 평가해도 독보적인 위용을 자랑하는 장군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전반적으로 보면 조인은 군웅 조조의 시작과 끝을 함께한 대들보 같은 용장으로서, 언제나 조조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조인은 용맹을 바탕으로 거병 초기엔 우금, 악진과 더불어 정벌전을 담당하며 조조군을 먹여살린 3톱으로 맹활약했다. 관도대전 이후 활약상이 줄어든 우금, 악진과는 달리 조인은 관도대전 이후에도 명성을 이어나가는데, 특히 남군이나 번성에서 성공적인 방어전을 이끌며 조위 사직을 지켜낸 대장은 언제나 조인이었다. 그의 훌륭한 수성 덕분에 손유 연합군은 적벽이라는 희대의 대승을 이뤄내고도 점령한 지역은 형북 이남에 그쳤고 조인이 지켜낸 이 강역이 그대로 삼국 통일 시점까지 이어졌다. 또한 한중에 이어 번성에서까지 크나큰 실패를 맞을 뻔했던 상황에서도, 끝내 강역 보존과 전세 역전에 성공할 수 있었다.
자신이 참전한 대부분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지만, 커리어에 흠을 잡을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남군 공방전 단락에도 나와있지만 고작 수백명으로 수천 군사에게 무모한 싸움을 걸게 하여 그 병사들을 적진에 고립시킨 점, 수십 명을 이끌고 괴물같은 용맹을 발휘해 아군을 구출한 점은 조인이 괴물같은 맹장임을 증명하지만 사실 이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아무래도 자신의 용맹을 과신했던 모양이다. 말년엔 번성 공방전 당시 위험을 대비하지 못한 측면이 있어 온회가 조인이 적진에 고립되어 대비를 못하고 있다고 경계하기도 하고 결국 이 우려대로 조인에게 지원된 위의 7군은 그대로 전몰되고 만다. 거기에다가 번성공방전 관련 기록에는 이상하게 촉 수군에 대한 기록은 있는데 번성에 주둔했을 법한 위 수군에 대한 기록이 없다. 어떤 일로 없었거나 관우의 수군에 격파되었거나 중 하나일 것인데 어쨌든 이 부분에선 관우의 공격에 밀린 계기를 제공하였고 이로 인해 번성에서는 조인보다 서황만총의 활약이 두드러지게 되었다.[8] 또 신예 주환에게 병력과 전술의 우세를 점하고도 대패하는 의외의 일면을 보여줬다. 그러나 이 정도는 병가지상사로 퉁쳐줄 만한 부분이며, 〈주환전〉의 기록을 살펴보면 수전의 기록이 있기에 평생 기병을 운영했던 조인의 병력 운용이 서툴었다는 점을 감안할 여지가 있다.
당대 조조군 내에서의 평가는 '''최고'''로 장료보다 조인을 더 윗줄로 쳐줄 정도이다. 물론 이는 조인이 조조의 친척이기에 전공이 부풀려졌다고 말할 수도 있다. 실제로 커리어 면에서 조인과 비견할 만한 조조군의 장군은 오자양장, 후대의 사마의 정도인데, 적어도 패전 기록이 적은 축인 서황이나 적은 병력으로 오나라 대군을 박살낸 장료보다 조인의 커리어가 우위라고 말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벽 패배 이후 주유유비의 협공을 견뎌낸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며, 이 당시 조인이 보여준 무용과 성과는 조조군에서 손꼽을 만하다. 무엇보다 조인은 위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조조 생전, 초기부터 후기까지 항상 조조군의 중심장수였다는 점에서 다른 장군들보다 확실히 더 조조군내에서의 입지가 탁월했으며, 단독으로 군 운용권을 가지고 전적을 올린 경우가 매우 많다. 오자양장과 비교해도 이러한 부분은 우위라고 볼 수 있다.[9] 여포 격파 이후에 합류하여 중기 이후부터 커리어를 쌓았으며 가장 빛나는 전공을 자랑하는 합비에서도 악진 이전과 공동으로 군을 운용했던 장료, 수적, 질적으로 월등한 군세를 보유한 상태에서 진행된 관우 격파 이전까지는 단독 작전이 거의 없는 서황, 중기 이후 커리어가 부실한 우금, 전반적으로 단독작전 기록이 없는 악진, 종종 큰 패배를 경험했고 관도대전 이후 합류한 장합과 비교해보면 명확해진다. 조조군 내부의 전공 면에서 조인과 비견될만한 장수는 아예 없다.
다만 무성왕표나 십칠사백장전과 광명장전 평가로는 장료와 달리 조인은 한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다. 흔히 장료와 조인의 우열을 비교하는 글이 많으나 이런 과거의 평가에서는 장료가 조인보다 평가면에서 우위에 있었던 듯 싶다. 부자에서의 평가 때문에 조인>장료라는 평가가 있는데, 이 평가에서는 단순히 조인의 용맹함이 조조군 내에서 최고였고, 장료는 그 다음으로 용맹했다는 것이지, 누가 더 명장이냐에 관한 평가가 아니다.
더불어 조조의 부하 장수들 중 유비를 단독으로 상대해서 승리한 것은 조인이 유일하다.[10]

1.4. 미디어 믹스



2. 후한 말의 인물


曹寅
(? ~ ?)
후한 말의 인물.
무릉태수로 형주자사 왕예가 동탁을 공격하기 위해 거병하려고 했을 때 왕예는 앞서 손견과 함께 영릉과 계양의 도적을 함께 공격했는데, 손견은 무관이라 언행이 자못 가벼웠다.
왕예는 본래부터 조인과 서로 용납하지 못해 반드시 조인을 먼저 죽이라고 떠들어댔는데, 결국 조인이 이 사실을 알고 거짓으로 문서를 만들어 격문을 위조해서 손견에게 사자를 보내 손견이 왕예를 죽이도록 유도했다. 격문의 내용은 광록대부 온의(溫毅)의 격문인 것처럼 되어있으며, 손견에게 보내 왕예의 죄상에 대한 내용과 행형의 중지를 거둬 들이라는 영을 내렸다.
왕예가 손견에게 무례하게 대한 적이 있었는데, 손견이 조인의 격문을 받은 것을 계기로 명분을 삼아 왕예를 공격하기로 하면서 오랫동안 전쟁을 치러 상으로 얻은 것이 부족해 군수품을 빌린다는 핑계를 대서 형주로 들어가 마침내 왕예를 죽게 만들었다.

2.1. 미디어믹스


삼국지톡에서는 자신의 원수인 왕예가 반동탁연합에 참가한 것을 알고 짜증내면서 하인이 가져온 마실 것을 쓰다고 함부로 때리다가 친구가 사이 나쁘고 물불 안 가리고 덤비는 놈을 시켜서 죽이면 된다고 하자 손견을 언급한다.
손견에 대해 가문 수려서 출세에 목숨건 놈이라고 말하며, 친구가 천한 것들이라면서 아등바등 절박한 거 꼴보기 싶다고 하자 애쓴다고 평민이 황제가 되냐면서 손견을 무시한다. 황실의 명을 사칭해 손견을 이용해서 왕예를 죽게 만든다.
삼국지: 한말패업에서 등장해 군사 53, 무용 36, 지모 47, 정무 54, 인사 52, 외교 54의 능력치로 156년생으로 나온다.

[1] 영천태수를 지내었다.[2] 시중, 장수교위를 지내었다. 후에 추증되어 진목후(陳穆侯)가 된다[3] 태위가 명예직에 불과한 상황에서 실질적인 군부 1인자가 되었다.[4] 이때 기준으로 치면 제법 천수를 누리고 늙어서 하늘로 올라갔다.[5] 진수의 직접적인 평가는 아니다. 조인의 부하가 조인에게 감격하여 한 말을 그대로 기록했을 뿐. 조인의 능력이 뛰어난 것은 맞지만 이런 미사여구로 사람을 띄워주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6] 이들이 무능했던건 아니지만 조위군부에 그들보다 능력이 더 뛰어난 사람들이 없었냐면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타공인 조위 최고의 무장들인 오자양장은 이들에게 밀려서 도독제군사 한 번 못해보고 죽을때까지 전선에서 뛰어야 했다.[7] 실제로 하후연은 상당히 유능한 지휘관이었고, 하후돈은 훌륭한 내정관으로 조조군을 안정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대장군에 봉해진다. 이들 중 무능한 건 조휴 뿐이다.[8] 위서 무제기에 따르면 우금(于禁)을 보내 조인을 도와 관우를 공격하게 한 것으로 애당초 조인의 목표는 원군을 기다리며 수성하는 것이 아니라 관우를 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인은 온회의 걱정대로 역으로 홍수에 대비하지 못해 밀려서 번성에 고립된 처지가 되어버려 관우가 서황과 만총의 협공으로 번성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면수를 촉군이 장악해 양양을 완전히 포위했을 지경이었다.[9] 그러나 하후돈, 하후연, 하후무 등도 도독으로서 단독작전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들이 오자양장보다 군공이 많았느냐면 그건 아니라는 반론도 있다. 조인의 경우도 단독작전권이 있었다고 해서 오자양장들 보다 우위라고 볼 순 없다는 것.[10] 다만 조인이 말하길 유비는 새로 원소의 병사들을 받았으니 그들을 통제하기 어려울 거라는 유비에게 불리한 핸디캡이 붙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