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선
1. 한국의 전통 배(선박). 韓船
전근대기까지 널리 존재하였던 한국식 목재 선박의 총칭.
1.1. 개요
한국의 배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중소형 평저선을 떠올리나, 평저선 외에도 다양한 선형의 배가 존재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한때 한선에도 첨저선의 존재 주장(특히 장보고 무역선)이 강하게 주장되었으나, 근래에는 첨저에 가까운 평저거나 정크선처럼 원저라는 설로 회귀했다. 이유는 지속적인 배 발굴조사에서 첨저선이 나타나지 않았으며, 일반적인 한선 구조의 대형 원양 무역선인 중국의 봉래고선과 전남의 안좌선이 출토되었기 때문. 특히 중국 산동성에서 발견된 봉래고선은 최초로 발굴된 평저 구조의 외양항해용 한선으로서, 한선의 외양 항해 능력과 격벽식 내부구조를 가진 점으로 한선 연구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선의 외양 항해능력에 대한 문헌으로는 구한말 언더우드가 저서에서 한선 특유의 긴 키가 안정판 역할을 한다는 것과, <표해록>에 원양 항해 과정과 안전성을 위해 선체 하부에 밸러스트로 돌을 적재했다는 기록이 있다.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첨저선이나 평저선이나 파도에 밀리는 것은 똑같으며, 오히려 한선의 길고 바다 깊이 들어가는 키가 현재 요트의 센터보드와 같은 역할을 하여 내파성이 더 좋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1.2. 한선의 역사
한국의 배는 삼국시대에는 백제선, 신라선, 고구려선[1] 등이 있었으며, 고려시대에는 고려선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널리 알려진 판옥선, 거북선 그리고 맹선(조운선)[2] 등이 존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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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봉리패총 출토 통나무선. 현재 국내에서 가장 오래 된 배 유물이자 세계적으로도 오래된 배에 속하는 유물로, 중국의 과호교유적(跨湖橋遺蹟)과 같은 시기인 8천년 전 신석기시대의 배다.[3] 1개의 통나무를 U자형으로 깎아 만든 초기형 통나무배(독목주)다.
출처
이렇게 우리의 고유한 배를 처음 만들게 된 것은 고조선 후기~열국시대 사이로 추정되는데, 이는 이미 중국의 삼국시대인 235년에 2년 전 공손씨 세력에 죽을 뻔했던 오 나라 사신을 구해준 대가로 오나라가 보물을 배로 싣고 와 고구려의 동천왕에게 바치자 그 답례로 동천왕이 수백 필의 말을 주었으나 오나라의 배가 작아 80필밖에 못 실어 고구려의 배로 운반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추리할 수 있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 새겨진 것을 토대로 복원한 청동기시대의 통나무 배. 단순히 통나무의 속을 파서 만든 것에서 보다 발전한 준구조선(準構造船)이다.
이렇듯 삼국시대에는 큰 배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이미 존재하였으며, 신라-가야의 토기를 보건대 평저선, 첨저선이 용도에 따라 다양하게 사용되었음 또한 짐작할 수 있다. 일본의 기록에는 백제선과 신라선의 도입이 언급되고 있어 이 배를 이용해 다양한 대외 활동을 펼쳤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다양하게 존재하던 삼국 시대의 배들은 통일신라 시대에 들어서서 신라선으로 그 명칭이 통합되면서 통일신라시대 해상활동의 기반이 된다. 특히 일본은 9세기에 신라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이다. 이러한 지속적인 기술흡수는 후에 일본의 고유한 배(화선和船)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가야 통나무배. 가야의 영향을 많이 받은 일본의 원시 선박도 이와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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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구법승을 태운 신라선을 그린 일본 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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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기경에 그려진 일본의 '길비대신입당회사'에 그려진 견당선.출처 일본의 견당선은 백제선을 쓰다 통일신라 시기 신라선이 풍랑에 강하다고 하여 수입해갔기에, 관련 문헌들은 한선 연구에 중요한 참고자료 중 하나다. 그러나 위 삽화와 비교해 보면 나오듯이 정해진 형식의 비슷비슷한 게 많아 그대로 참조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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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안압지에서 발견된 온전한 신라시대 나무배. 다만 작은 인공호수 안압지에서 유람용으로 사용된 것이므로 바다에서 사용할 본격적 항해용은 아니다.
이후 고려시대에 들어서면서 한선의 구조는 전반적으로 속도보다 안정성을 중시하는 평저선의 형태로 자리잡아가게 된다. 이러한 변화에 대해서는 정립된 이론이 없으나, 무역선 등 발굴된 유물과 배에 대한 기록자료를 살펴보면 고려시대의 배는 평저선으로 통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배 중 현재 발견된 대표적인 배는 우리나라에서 발굴된 배로는 완도선, 마도 1.2.3호선, 안좌선, 중국에서 발견된 배로는 봉래고선이 있는데, 하나같이 전부 평저선이다. 이는 수도가 이동하면서 경제활동의 중심이 동해-남해에서 서해로 옮겨진 데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도 있겠으나 정확한 연구는 없다. 고려시대에도 신라에 비해 비중은 줄었으나 외양 항해는 여전히 지속되었고, 유물 자체가 부족한 게 많다. 특히 현재까지 발굴된 배 관련 유물 중 첨저 한선의 근거가 될 만한 것은 배모양토기들 뿐이다.
고려시대 구리거울에 새겨진 고려 원양 무역선과 이를 토대로 복원한 그림. <고려도경>에 실린 한선에 대한 기록이나 봉래고선과 큰 차이가 없다.
충북 제천에 위치한 사극 태조 왕건 수상 촬영장에 보관되어 있는 고려시대 전함 복원품.#
그리고 조선시대가 되면 거의 모든 배들이 평저선으로 고정된다. 현재 남아 있는 조선시대 선박의 자료는 판옥선, 거북선 및 조운선의 자료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어선조사보고서』, <표민대화>, <표해록>정도인데, 판옥선이나 거북선의 경우 일관되게 평저선형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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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그려진 해진도. 거북선, 판옥선, 방패선이 보인다.*
출처
조운선. 각선도본을 참고해 만든 현대의 복원품이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작/소장.
재래식 한선 어선의 구조도.
이후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외국의 선형이 들어오게 되면서 재래식 어염상선을 제외한 한선들이 사라지고 구조도 변하게 된다. 우선 일본과 가까운 남부지방을 중심으로 기존의 평탄한 선수에서 일본식의 뾰족한 선수를 가진 한선이 나타나고,[4] 기존의 장쇠(가룡목)중심의 지지구조가 다수의 격벽을 사용하거나 서양선식의 용골과 늑골이 나타나는 식으로 개량된다.[5] 해방 이후, 새마을운동 등을 통해 전국적으로 시골의 생활을 개선하면서 재래식의 한선도 사라지게 된다. 현재에는 지자체나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서 재래 한선제작기술의 연구/유지와 관광상품으로 종종 복원하고 있으나, 선박법과 안전성을 위해 100%재래식이 아닌 현대 기술이 어느정도 섞여 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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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개량형 어선 모형. 일본선식 선수를 하고 있지만 멍에와 돛, 키는 한선식을 유지하고 있다. 일본선과 달리 바닥은 평저에 용골이 없이 한선에서 보이는 저판을 사용하는 것도 특징.
근대의 옹기배 복원품.출처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작. 위 근대 개량어선과 구조는 같다.
한선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박물관은 전라남도 목포의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있으며, 이곳에서는 한선 연구를 겸하는 곳인지라 각종 연구자료와 해양사 관련 도서를 열람할 수도 있다. 이 외에 한국해양대학교 해양박물관*, 국립중앙과학관과 국립과천과학관에서도 한선 소개에 일부를 할애하고 있다.
한선의 일종인 황포돛배를 일부 지자체에서 관광용으로 운용[7] 하기도 한다.
1.3. 한선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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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초중기 한선 완도선의 단면도. 고려 초기까지는 ㄴ자형 만곡종통재가 4개였으나 2개로 줄었다.
고려 후기~조선시대 한선의 단면도. 바닥이 더 좁아지고 ㄴ자 형태의 부품이 아예 없어진 것을 알 수 있다.
한선은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이다. 이 점은 중국의 정크중 사선과 비슷하나, 중국의 사선과 달리 용골이 전혀 없다. 한선은 본판(저판)을 깔고 가로로 '가쇠'(가룡목, 장쇠)라는 가로대 여러 개를 끼워 고정시킨다. 이는 암초가 많고 조수간만의 차가 커서 갯벌이 발달한 한국의 지형에 따른 것으로, 한선의 밑바닥은 땅에 바로 닿기에 벽체보다 훨씬 두껍고 재질도 단단한 가시나무를 사용한다. 이런 한선의 밑바닥은 뗏목/통나무배[8] 시절의 하부선체 구조와 큰 차이 없이 유지되고 있는데, 이러한 구조에 의해 한선은 수밀 능력이 다소 떨어지지만 이 특유의 하부 구조 덕분에 선체의 부양력이 더 뛰어나다는 장점이 있다.[9]
그리고 결론적으로 서양의 배에 비해 소형(대항해시기의 서양 함선들은 수천 톤에 이르는 것들도 있었으나, 그 당시의 한선은 500톤을 넘어가는 배수량의 물건이 있었다는 존재 증거조차 없다.) 이고, 평저선이라(이건 위에 설명했듯 그리 큰 영향은 아니지만.)상당수의 한선은 원양 항해가 기술적으로나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다. 기껏해야 원양항해 기록이라고 있는게 내해인데다가 수심도 얕아 잠잠한 편인 서해 횡단이나 폭이 좁은 대한해협 횡단 정도. 확실히 사할린 섬 정도의 고위도로 올라가거나, 제주도 밑의 남해 먼바다로 내려가는 항해는 불가능했거나[10] , 하는 것을 고려하지도, 실제로 의도적으로 항해하지도 않았다는게 아직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바면 정설이다.[11]
당연한 이야기지만 한선의 주 무대였던 한반도 서부 근해항로는 썰물때만 되면 넓은 갯벌이 나타나기 때문에 첨저선 형태의 선박은 운항 타이밍 조금만 잘못 잡으면 갯벌 좌초해서 옆으로 쓰러져 버리는데 반해 평저선 계열은 그냥 갯벌에 올라탔다가 밀물이 들어오면 그대로 다시 운행하면 되기 때문에 한선이 평저선 테크를 타게 된 것은 당연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한선의 선체는 클링커 이음과 나무못을 사용해 선체를 조립하고 가룡목을 대어 내구력을 유지하나, 이 부분은 최신 연구결과에 따르면 다소 이견이 있다. 이유는 중국식으로 다수의 격벽을 설치해 배를 지지하는 구조를 가진 봉래(펑라이) 3호선의 발견과 장보고의 함대를 타고 중국을 오간 일본 승려 옌닌이 남긴 문헌에서 격벽구조를 묘사하는 구절, 근대 일본의 한국 표류민과의 대화를 한글로 담은 책인 <표민대화>에서 하재라는 새로운 지지대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12] 자세한 설명은 '''목선 선체의 제작방식'''항목의 링크글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한선의 돛.
한선의 돛은 중국식 돛과 마찬가지로, 가로활대를 넣은 사각형 돛이다. [13] 재질은 천이나 갈대의 일종인 띠를 엮어 만든 자리돛을 사용하였다. 이런 돛은 소위 정크돛의 구조인데, 때문에 풍향의 영향을 덜 받아 역풍항해도 가능하나 돛의 무게가 더 무겁다.
가거도 한선을 복원한 모습. 고물비우에 고정된 한선 특유의 키가 보인다.
중국 정크가 선미와 분리된 선미 수직타, 서양의 배가 선미 고정타(개발 이전에는 측타)를 장착한 것과 달리 한선은 고물비우[14] 에 따라 비스듬하게 물 속으로 들어가는 특유의 전향타(前向舵)를 사용하며, 키의 길이 또한 다른 나라의 배에 비해 길다는 특징이 있다.[15] 이러한 한선의 키는 서양 요트의 센터 보드(Center board)와 같은 역할을 하여 배의 흔들림을 막아, 다른 목선들에 비해 훨씬 안정적으로 뜰 수 있도록 해 준다.[16]
1.4. 나무위키에 등재된 한선들
2. 汗腺
땀샘(sweat gland)의 다른 이름.
사람에는 에크린 한선(''glandula sudorifera eccrina'', eccrine sweat gland)과 아포크린 한선(''glandula sudorifera apocrina'' apocrine sweat gland)이 있어 여기에서 땀을 낸다.
3. 둘러보기
[1] 시기/국가별로 나눈 가칭이다. 다만 신라선의 경우는 해당 단어가 일본 문헌에 나온다.[2] 조운선은 유사시 전투선으로 개조가 가능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전투함일 때의 이름이 맹선(병조선).[3] 일본의 경우 도리하마, 이키리키 통나무배가 있지만 한국보다 2천년 정도 시대가 늦다.[4] 물론 이전에도 해상용 한선의 경우 뱃머리가 일반적인 싸움배나 강선에 비해 다소 좁은 것도 있긴 했다. 외국 배의 뾰족한 뱃머리에 비할 정도는 아니지만.[5] 이것은 조선총독부의 한선개량정책에 의한 것이었다. 더 많이 한국에서 해상자원을 뽑아가려면 그만큼 많이 긁어모아야 하고, 그려려면 일단 한선이 더 좋아져야 하니까.[6] 그 중 하나가 서양선식 용골과 늑골. 근대 한선에서 용골과 늑골을 도입했을 뿐 아니라, 선박법에 통과되기 위해 설치한다.[7] 하남시, 연천군, 파주시, 여주시, 부여군, 나주시, 목포시, 안동시 등[8] 뗏목인지 아니면 준구조선급의 통나무배인지는 부분은 학자마다 이론이 분분하다. 여기에서는 양쪽 이론을 모두 적었다.[9] 바닥부분의 수밀력이 낮다는 점을 보완하기 위해, 전통 한선에는 본문의 "재래식 한선 어선의 구조도"에 보이는 것처럼 중요한 화물을 실을 때 배 밑바닥 바로 위에 약간의 공간을 두고 마루를 깔아 바로 습기가 닿지 않도록 하고 짐을 싣는다. <표민대화>에 '물에 젖어서는 안 되는 것을 실을 때는 착념이 적지 않다'는 한국인 표류민의 증언을 보면 고심이 많았던 듯. [10] 다만 표류해서 홋카이도나 베트남까지 간 사례는 있다. 관련 기록을 보면 폭풍에 돛이 부러져 배를 통제할 수 없게 되어 해류에 운명을 맡기고 표류했는데, 의외로 한선이 거친 파도에도 뒤집히지 않고 잘 버텨냈다.[11] 조선 시대 이전은 기록이 없고, 조선시대엔 중국과 일본 외엔 교역할 대상이 없었다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 조선시대엔 중국과도 대부분 육로로 교역해서 해로 교역 상대는 일본 밖에 없었다.[12] 국내 번역본에 부록으로 실린 표민대화 내 그림을 보면 하재는 서양의 용골과 비슷하게 생겼다[13] 다만 중국이나 한국이나 모든 돛이 다 이런 구조는 아니었다. 동양에도 일반 사각돛은 존재하였다.[14] 배 뒷부분(고물)의 평평한 부분[15] 당연하지만 한선도 이런 키만 있던 건 아니다. 중국식의 선미 수직타도 사용했다.[16] 중국에도 유사한 키가 있으나, 한국식 수직타보다 작아 한선의 것만큼 물 속에 깊이 들어가지 않는다. 때문에 정크선은 별도의 피수판을 부착한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에서 피수판의 사용 여부를 보여주는 자료는 조선시대 그림 한 점이 전부고, 국립해양유물전시관 '조선시대 그림 속의 옛 배'특별전 도록의 부록 논문에 따르면 중국의 비슷한 주제를 가진 그림의 배를 모방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