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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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한치진(韓稚振)
필명
눌인(訥人)·용강학인(龍岡學人)·한민(韓民)·백웅(白熊)
생몰
1901년 5월 25일 ~ ?
출생지
평안남도 용강군 귀성면 석찬리
사망지
미상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독립운동가, 정치학 교수.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한치진은 1901년 5월 25일 평안남도 용강군 귀성면 석찬리에서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가난했기에, 그는 농사를 짓기도 하고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하면서 가계를 도왔다. 하지만 워낙 책을 책을 좋아해 산에 올라가서는 책만 읽어 집으로 돌아올 때는 언제나 빈 지게여서 부모에게 많이 혼났다고 한다. 또한 그의 집안은 기독교를 신봉했고, 그는 장성하면서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었다.
1917년, 한치진은 16세의 나이로 이미 미국에서 유학하던 형 한치관(韓稚觀)의 도움으로 중국으로 유학했고, 1921년 6월에 난징 금릉대학 부속중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상하이에서 잠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업무를 도왔으며, 미국 로스엔젤레스에 위치한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로 유학했다. <동창회보>는 그가 동향의 항일운동가인 안창호를 존경했고 그의 영향을 받았다고 소개했다.
이 무렵, 한치진은 자신의 이름을 Clarence C. Hahn으로 표기하고 이 이름으로 <심일신보(三一申報)에 한국의 독립을 역설하는 글들을 기재했다. 그러면서 학업에 종사한 그는 1925년 6월에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를 졸업하고 B.A. 학위를 받았으며, 1년 뒤인 1926년 6월에 M.A. 학위를 받았다. 이후 박사과정으로 진학한 그는 1928년 6월 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Ph.D. 학위를 수여받았다. 그는 이 모든 과정에서 정치학, 사회학, 철학, 심리학, 윤리학 등 인문사회 과목의 주요 학문들을 섭렵했다.
1929년 1월 조선으로 도라온 그는 경성부의 협성신학교 교원으로 임용되었다. 그는 이 학교에서 1932년 3월까지 봉직했으며, 1932년 5월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원으로 임명되었고, 1935년 6월에 이화보육학교 교원을 겸임했다. 하지만 그가 가르친 과목들이 무엇이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한편 그는 이 시기에 <논리학개론>, <종교개혁사요> 및 <종교철학대계>를 집필했으며, 이화여자전문학교 철학연구사에서 출판했다. 그 외에도 <사회학개론>, <아동의 심리와 교육>, <증보윤리학개론>, <최선철학개론> 등 당시 철학이 다루는 거의 모든 분야에 걸친 개설서를 집필, 간행했다.
1938년경 교수직에서 물러난 한치진은 1938년 4월부터 1938년 초까지 와세다대학에 유학해 철학 연구를 하면서 일본 도쿄유학중인 한국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국어·민족문화에 대한 토론을 진행하기도 했다. 1939년에 복직한 그는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4년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장차 일본은 패전하고 미군이 상륙할 것”이라는 시국담을 논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8.15 광복 직후인 1945년 8월 17일에 석방되었다.
그 후 그는 미군청정이 관직을 제의하는 걸 거부하고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교직에 전념함과 도시에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대중을 상대로 미국의 민주주의를 해설하는 일을 맡았다. 또한 그는 <민주주의 원론> 전 3권과 <미국 민주주의:미국의 이상과 문화>를 출간했다. 이 책들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그는 이 책을 통해 정치학자로 떠올랐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공산주의자들의 미움을 사는 계기를 제공하고 말았다.
6.25 전쟁 직후, 한치진은 서울 종로구 사직동 자택에서 납북되었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한치진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