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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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한흥(韓興)
일본식 성명
日仙俊炯
족보명
한준형(韓俊炯)
본관
청주 한씨[1]
생몰
1888년 12월 11일[2] ~ 1960년 12월 5일
출생지
함경도 함흥부 가평면 중상리[3]
(현 함경남도 영광군 중상리)
사망지
서울특별시
매장지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한흥은 1888년 12월 11일 함경도 함흥부 가평면 중상리(현 함경남도 영광군 중상리)에서 아버지 한섭용(韓燮容)과 어머니 강릉 유씨 유영신(劉永臣)의 딸 사이의 3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만주로 망명하여 동명학교(東明學校) 교사, 권업신문사(勸業新聞社) 통신원을 역임했다. 1918년 11월 만주 길림에서 김교헌, 김동삼, 조소앙, 이동녕, 신규식, 여준, 이범윤, 이상룡, 박은식, 허혁(許爀) 등 38인과 함께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1920년에는 왕청, 혼춘, 동녕, 영안, 목릉 일대를 관장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간북북부총판부(墾北北部總辦部) 서기로서 김병하(金炳河)·김헌(金憲)·조봉(趙封) 등과 함께 활약했다. 또한 군자금 모집 차 국내에 들어와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5년 6월 베이징으로 망명한 그는 선두자사(先頭者社)의 동인(同人)으로 조남승(趙南升)·원세훈·서왈보·박건병 등과 함께 활동하였으며, 중국국민과 함께 구국구족(救國救族)을 위하여 협력하자는 격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1929년 귀국한 그는 그해 8월 함흥중앙학원(咸興中央學院) 및 유치원을 설립, 경영하였고, 1931년 2월 경성여자상업학교(京城女子商業學校)를 설립, 부교장에 취임하여 교육에 전념했다. 1938년 4월에는 함흥대흥상업학원(咸興大興商業學院)을 창립하여 경영하였고, 1942년 6월에는 함흥대동학원(咸興大東學院)의 원장으로 취임하였으며, 다음 해에는 숙명여자실업학원(淑明女子實業學院)의 원장에 취임했다. 8.15 광복 후 북한이 급속도로 공산화되자 월남했고, 1960년 12월 5일 서울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한흥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69년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1] 예빈윤공파 24세.[2] 청주 한씨 제7교 대동족보에는 10월 11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3] 인근의 능리·장풍리·풍상리와 함께 청주 한씨 집성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