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흥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한흥은 1888년 12월 11일 함경도 함흥부 가평면 중상리(현 함경남도 영광군 중상리)에서 아버지 한섭용(韓燮容)과 어머니 강릉 유씨 유영신(劉永臣)의 딸 사이의 3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만주로 망명하여 동명학교(東明學校) 교사, 권업신문사(勸業新聞社) 통신원을 역임했다. 1918년 11월 만주 길림에서 김교헌, 김동삼, 조소앙, 이동녕, 신규식, 여준, 이범윤, 이상룡, 박은식, 허혁(許爀) 등 38인과 함께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1920년에는 왕청, 혼춘, 동녕, 영안, 목릉 일대를 관장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간북북부총판부(墾北北部總辦部) 서기로서 김병하(金炳河)·김헌(金憲)·조봉(趙封) 등과 함께 활약했다. 또한 군자금 모집 차 국내에 들어와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5년 6월 베이징으로 망명한 그는 선두자사(先頭者社)의 동인(同人)으로 조남승(趙南升)·원세훈·서왈보·박건병 등과 함께 활동하였으며, 중국국민과 함께 구국구족(救國救族)을 위하여 협력하자는 격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1929년 귀국한 그는 그해 8월 함흥중앙학원(咸興中央學院) 및 유치원을 설립, 경영하였고, 1931년 2월 경성여자상업학교(京城女子商業學校)를 설립, 부교장에 취임하여 교육에 전념했다. 1938년 4월에는 함흥대흥상업학원(咸興大興商業學院)을 창립하여 경영하였고, 1942년 6월에는 함흥대동학원(咸興大東學院)의 원장으로 취임하였으며, 다음 해에는 숙명여자실업학원(淑明女子實業學院)의 원장에 취임했다. 8.15 광복 후 북한이 급속도로 공산화되자 월남했고, 1960년 12월 5일 서울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한흥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69년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