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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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김교헌(金敎獻)
자/호
백유(伯猷)/무원(茂園)
당명
보화당(普和堂)
본관
경주 김씨
생몰
1867년[1] 7월 5일 ~ 1923년 11월 18일
출생지
경기도 남양도호부 며지곶면 구포동
(현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구포리)
사망지
만주 영안현 남관
매장지
중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화룡시 용성향 청호촌 삼종사 묘역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2.1. 순탄한 관직 생활
2.2. 개화파가 되다
2.3. 대종교 신자
2.4. 대종교 2대 교주
2.5.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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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유공자, 대종교 2대 교주.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순탄한 관직 생활


김교헌은 1867년 7월 5일 경기도 남양도호부 며지곶면 구포동(현 화성시 비봉면 구포리) 소재 외조부 조희필(趙熙弼)의 집에서 부친 김창희(金昌熙)와 모친 풍양 조씨 조희필(趙熙弼)의 딸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조선 왕조 500년 대대로 벼슬을 역임한 명문가였으며, 조부 김정집(金鼎集)은 사학에 밝고 지방관으로서 많은 선정을 베풀었으며, 특히 평안도 관찰사 재임 때 온갖 잡세를 혁파해 백성들의 칭송을 받은 인물이었다. 부친 김창희는 6조의 요직과 삼사와 문한(文翰)의 주요 직책을 두루 거쳤으며, 1882년 임오군란 직후에는 호군(護軍)으로 영접관에 임명되어 청군을 이끌고 내조한 오장경, 마건충(馬建忠) 등과 협력하여 군란 수습에 기여하기도 했다.
김교헌은 어릴 때 서울로 이사간 뒤 한학에 정진했고, 18세 때인 1885년(고종 22) 정시 문과에 병과 33위로 급제하여#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고종은 김교헌의 급제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 승정원일기 고종 22년 3월 17일자 기사에는 고종의 하교가 실려 있다.

서상우에게 전교하기를, ‘이 가문에 급제 소식이 있으니, 매우 드물고 기쁜 일이다. 새로 급제한 김교헌에게 사악을 내려 주고, 방방(放榜)하는 날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 내외의 사판에 승지를 보내어 치제하게 하라.' 하였다.

김교헌은 1885년 3월 29일 가주서(假注書)로 임명되었다. 그 후 성균관전적·부교리·별겸춘추·응교·문학·집의·검교사서·경리청군사마·병조정랑·사간·예조참의·돈녕부도정 등을 두루 역임하면서, 대사성·우부승지·내무참의·첨지중추부사·법부참서관 겸 고등재판소판사·중추원의관·비서원 승 등의 요직을 두루 섭렵하였다. 이어 문헌비고속찬위원(文獻備考續撰委員) 및 감인위원과 내대신비서관(內大臣祕書官)을 역임한 후에 옥구감리와 더불어 옥구항재판소판사에 임명되었고, 이어 동래감리 겸 부산항재판소판사로 자리를 옮겼으며 곧 동래부윤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국조보감찬집위원 및 규장각부제학이 되었다. 그리고 1910년 8월 25일 마침내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까지 특승(特陞)하게 된다.
이때 문헌비고속찬위원과 국조보감찬집위원 및 감인위원, 그리고 규장각부제학을 맡았던 경험은 후일 대종교를 경험하면서 나타나는 민족주의적 역사서술에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1903년 1월, 그는 홍문관 안에 찬집소(纂輯所)를 두고 박용대(朴容大)·조정구(趙鼎九)·김택영·장지연 등 33인과 함께 찬집을 맡아 5년 만에 <증보문헌비고>를 완성시켰다. 또한 1908년에는 찬집위원으로 참여하여 헌종·철종 2대 임금의 국조보감을 찬수하였다. 그리고 1909년 세조 대로부터 이어지던 <국조보감>을 순종의 어제서와 이용원의 진전을 첨부하여 총 90권 28책으로 완성시켰다.
한편 김교헌은 벼슬을 시작한 후 3년째인 1887년부터 1888년까지 자치통감 강목을 통한 진강에 35회 참여했다. 자치통감 강목은 송나라 때 주희의 사찬(私撰) 사서로, 천리(天理)로 역사를 해석하고 역사를 통해 경전을 연구하는 송나라 지식인의 경사관(經史觀)과 역사관에 기초한 서술이었다. 또한 주희는 강목의 기사 형식에 자신의 사관을 덧붙여 스스로의 주관성을 강하게 투영하였다. 즉, 자치통감 강목은 주희의 성리학적 역사관에 기초한 강목체 역사서였다. 김교헌은 주희로 대표되는 성리학을 신봉했고, 조선조 대부분의 사대부들이 그러했듯이 소중화인으로서의 자부심을 향유했다.

2.2. 개화파가 되다


그러나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 농민 혁명, 을미사변, 단발령, 아관파천 등 일련의 정치적 격변을 지켜본 김교헌은 점차 자신의 소중화적 사고관에 한계를 느끼고 가문 대대로 이어온 성리학적 명분론 및 위정척사를 벗어던지고 개화파로 변모했다. 그는 1898년 독립협회에 참여해 만민공동회를 주도했다. 이때 그와 함께 간부로 참여했던 유근, 나철, 장지연, 신규식, 최동식, 오기호, 김인식, 지석영, 신채호, 이동녕, 박은식 등이 훗날 그와 함께 대종교에서 활동했다.
그는 독립협회에서 민중계몽운동을 전개했고, 1906년에는 동래감리 겸 부산항재판소판사와 동래부사로 재직하였다. 이때 그는 통감부의 비호 아래 자행된 일제의 경제 침략에 맞서서 이권 운동을 징계하여 다스리다가 일본인들의 횡포와 친일파 송병준의 모함으로 해직되었다라고 왜곡되어 알려졌었다. 그러나 당시 신문 <<대한매일신보>>, 1907.8.18일자, <팔아먹은 죄> 등 기사를 면밀히 살펴보면 동래부사 시절 농상공부 소유인 동래 태복시(太僕寺) 기지를 일본인에게 몰래 팔았다가 발각되어 이듬해 1월 8일에 해임되었고 결제권자가 송병준이었을 뿐이다. 이를 목장지 계권 사건이라고 한다.
그후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新民會) 회원과 교우 관계를 맺었으며, 조선광문회에 들어가 현채(玄采) · 박은식 · 장지연 등과 함께 고전간행사업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2.3. 대종교 신자


1910년 음력 1월 15일, 김교헌은 대종교에 정식으로 입교했다. 그는 이름을 헌(獻)으로 개명하고 호를 무원(茂園)이라고 하였다. 이후 신앙 생활을 이어가던 그는 그해 8월 한일병합을 찬성하는 상소를 올렸고, 그 공로로 일한합방기념탑에 합방 공로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이후 1911년 총본사 요직을 거쳐 도사교위리(都司敎委理)의 중책을 맡아 4년간 직무를 수행하였다. 유근과 함께 단군의 사적을 살핀다'는 뜻의 단군 기록 모음집인 『단조사고(檀祖事攷)』(1911) 편찬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1914년에 남도본사 전리, 1915년에 남도본사 도강사 및 전강(典講) 등 중책을 맡으면서 종리(倧理)와 종사(倧史)를 연구하던 중 1914년 『신단실기(神壇實記)』와 『신단민사(神壇民史)』를 저술하였다.
<신단실기>는 대종교 종리에 관한 것인데, 이는 처음 이 교의 교명이 단군교(檀君敎)인 것처럼 단군을 종조로 내세워 민족종교의 교리와 단군사(檀君史)를 밝힌 것이다. 또한 <신단민사>는 상고(上古), 중고(中古), 근고(近古), 근세(近世) 등으로 나누어 시대구분을 하였다. 이때 그는 '근고' 항목에서 요나라금나라도 포함시켰는데, 이는 그가 만주를 우리의 영역으로 봤기 때문이다. 이 두 저서는 건국 시조인 단군과 대종교를 연결시켜 그 연원(淵源)을 역사적으로 규명하고 한민족의 정통성을 체계적으로 세워 사대주의 사상을 배격하고 민족주의 사관을 정립시키고자 했다.
이러한 저술들에 나타나는 역사인식은, 벼슬 시절 김교헌이 경연을 통해 숙지했던 <자치통감강목>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즉 유교적 중화사관에서 반유교적 신교사관(神敎史觀)으로의 일대 반전이었다. 이것은 또한 법고창신·위정척사·동도서기로 이어오던 조선후기 지식인들의 정신적 굴레에서도 완전히 탈피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2.4. 대종교 2대 교주


1916년 대종교 초대 교주 나철이 자결한 뒤, 김교헌은 제2대 교주에 취임했다. 그러나 일제가 대종교 포교 금지령을 내렸기 때문에 국내에서의 활동은 거의 불가능했다. 이에 그는 1917년 3월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 화룡현 대종교 총본사로 망명했다. 그는 망명 후 교단 정비와 교세 확장을 주도하고 항일 무장투쟁을 추진했다. 이와 동시에 교단 하부 조직인 46개소의 시교당(施敎堂)을 설치하고 민족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1922-1923년 2년 동안 개척한 시교당 수가 46개소에 이르렀다. 대종교의 시교당 설치는 바로 항일운동의 교육장인 동시에 항일독립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또한 김교헌은 1919년 2월 <대한독립선언서>(일명:무오독립선언서) 발표를 주도했다. 이 선언서의 내용은 대종교적 정서를 반영한 무장혈전주의를 그대로 드러낸다. 먼저, 이 선언은 대종교의 중광의 헌장인 「단군교포명서」에서 연유된 단군대황조(檀君大皇祖)에 원(願)하고 맹세하는 내용이다. 또한 자주독립쟁취의 방법으로써 평화적 협상이나 외교적 노력이 아닌, 우리 독립군의 힘과 피로써 빼앗긴 조국을 되찾아야 함을 천명하고 있다.
1922년 일제 정보기록에 따르면, 일제의 간자(間者)였던 이림삼(李林三)이 하얼빈 총영사 야마우치 시로(山內四郞)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고 한다.

서일이 자살한 후, 김교헌은 밀산에서 다시 영안으로 대종교총본사를 옮긴 뒤 북로군정서 간부들과 긴밀히 연락하며 재기를 도모하고 있다. 또한 측근인 신최수(申最秀)를 국내로 파견하는 등 분주하게 움직였고, 특히 무기와 탄약까지 구입하고 있다.

이렇듯 김교헌은 무장투쟁에 힘을 기울였고, 그의 이같은 사상은 만주에서 중광단·정의단의 군정부(軍政府)·북로군정서·신민부 등 일련의 항일무장투쟁 단체들이 결성되어 독립운동을 이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는 법. 김교헌의 사학은 1930년대 이후 최남선 등 대동아주의자들에게도 영향을 끼쳐 대동아공영권론의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 이용되기도 하였다. 민족의 외연을 자의적으로 확대하는 태도는 김교헌 당대의 강렬한 민족주의적 의지와는 달리 후일 단군민족주의적 역사인식이 일제의 황국사관(皇國史觀)과 결합하면서, 대동아공영권 이론체계에 흡수될 수 있는 계기를 부여하였다.
1930~40년대에 출간된 것으로 추정되는 규원사화, 환단고기, 단기고사 등은 모두 김교현 사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면서도 단군족 범위를 한층 확대하여 일본 민족까지를 단군족의 일부로 설정했다. 특히 1930년대에 유포된 규원사화는 동이의 여러 종족이 연합하여 중국을 정벌할 것을 제창하고 있어 일제의 중국침략을 방조하는 구실을 하였다. 또한 김교헌은 나철이 민족의 사상적 정신무장를 위해 추진하던 단군신앙에 신비주의적 경향을 덧붙였다. 이에 신채호는 대종교가 본래의 뜻을 잃고 변질되었다고 간주하고 대종교와 연을 끊었으며, 오늘날 한국 역사학계에도 이로 인한 폐단이 이어지고 있다.

2.5. 사망


1920년 10월 말 일제가 간도 참변을 자행했다. 이로 인해 희생된 대종교도들은 수만 명에 달했다. 이에 그는 일본군의 탄압을 피해 대종교 총본사를 영안현으로 옮겨 선도포교사업을 통한 구국투쟁에 진력하였다. 그러나 서일이 자결하자 큰 충격을 받아 병을 앓다가 1923년 11월 18일 영안현 남관 대종교 총본사 수도실에서 윤세복에게 교주의 지위를 물려준다는 유서를 남기고 사망했다. 향년 56세. 그의 유해는 중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화룡시 용성향 청호촌에 나철, 서일과 함께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김교헌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 국조방목에는 1868년으로 등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