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 큐얼
1. 개요
호주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 현재 올덤 애슬레틱 AFC 감독을 맡고있다.
2000년대 초반 EPL을 풍미했던 레프트 윙어 중 한 명. 리즈시절 왼발을 기가막히게 잘써 '''오즈의 마법사'''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였다. 호주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하나로 꼽히며 드리블 돌파 능력과 날카로운 왼발 킥을 주무기로 삼았던 선수이다. 국내에는 라보나 킥 강의 영상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한때 시한부 인생임에도 축구를 그만두지 않은 엄청난 열정의 소유자로도 알려져 있었다. 물론 이는 사실이 아니며 자세한 내용은 후술.
2. 선수 경력
2.1. 클럽
잉글랜드인 아버지를 둔 덕분에 축구 변방으로 불리는 호주에서 태어났음에도 축구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고, 지역 팀을 시작으로 1995년에는 잉글랜드의 리즈 유나이티드 FC의 유스팀에 입단했다. 대부분의 유망주들이 그렇듯 초반의 큐얼은 가끔씩 성인 무대에 얼굴을 내비치는 선수였고, 1997-98 시즌부터는 본격적으로 성인 무대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1999-00 시즌 큐얼은 리그에서만 10골 13도움을 기록하며 라이언 긱스, 데미언 더프 등과 함께 EPL에서도 손꼽는 왼쪽 윙어로 성장했고 그 해 올해의 유망주상과 올해의 팀에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2000-01 시즌 큐얼은 마크 비두카, 루카스 라데베 등과 함께 리즈 유나이티드의 챔피언스리그 4강에 공헌했다. 그러나 리즈의 재정 문제는 악화되고 있었고, 2002-03 시즌을 끝으로 큐얼은 리즈를 떠나게 되었다.
한때 인터 밀란에게 루카스 라데베와 함께 2500만 유로의 제의를 받았던 큐얼이었으나, 당시의 리즈는 그를 비싸게 팔 수 없는 형국이었다. 리즈시절에는 당연히 팀 전력을 약화시키는 노릇인지라 팔 수가 없었고, 막상 계약기간이 1년 남았을 때에는 보스만 룰 때문에 비싸게 팔 수가 없으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리버풀 FC, 첼시 FC, AC 밀란 등 유럽의 내로라하는 클럽들이 헐값에 시장에 나온 큐얼의 영입을 위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큐얼은 자신이 어린 시절 서포트하던 리버풀 FC로 이적했다.
리버풀의 팬들은 고질적인 약점이었던 레프트윙의 자리를 큐얼이 매꿔줄 것으로 기대했다. 2003-04 시즌 키웰은 리그에서 7골 2도움을 기록하며 팬들의 바람을 이루어주는듯 싶었으나 점점 유리몸이 되어갔다. 그래도 어느 정도 클래스는 있는 선수여서 나올 때마다 나쁘지는 않았으나, 사타구니 부상을 당한 이후 폼까지 떨어져 결국 리버풀에서 방출되기에 이른다.
2008-09 시즌을 앞두고 큐얼은 리버풀을 떠나 터키의 갈라타사라이 SK로 이적했다. 큐얼의 갈라타사라이 이적은 그의 전 소속 팀이었던 리즈 유나이티드의 팬들에 의해 비난을 받기도 했는데, 1999-00 시즌 갈라타사라이와 리즈 유나이티드가 UEFA컵 4강에서 맞붙었을 때 2명의 리즈 팬이 폭력사태에 휘말려 사망했기 때문이다.
터키에서의 첫 시즌 큐얼은 13골 7도움을 기록했고, 2009-10 시즌에는 14골 6도움을 기록하며 팀의 유로파리그 4강행에 공헌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큐얼은 갈라타사라이와의 계약을 연장했고 7골 5도움을 기록했다. 그러나 갈라타사라이는 프랑크 레이카르트와 게오르게 하지라는 두 스타플레이어 출신 감독들이 연이은 삽질을 한 끝에 8위라는 충격적인 성적을 기록했고, 나이도 있었고 팀의 개혁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큐얼은 갈라타사라이를 떠나게 되었다.
2009-10 시즌이 끝난 뒤 한 차례 자국의 골드 코스트 유나이티드의 제안을 거절한 바 있었던 큐얼은 QPR로의 이적설과 자국의 멜버른 빅토리 FC로의 이적설에 휘말렸다. 큐얼이 A-리그로 복귀하는 과정에는 많은 논란이 있었는데, 그가 구단에 무리한 요구를 했기 때문이다. 여하튼 큐얼의 다음 행선지는 멜버른 빅토리 FC로 정해졌고, 자국 최고의 슈퍼스타의 이적 소식에 호주의 축구팬들은 그를 열렬히 환영했다.
2011-12 시즌 리그에서 8골 4도움을 기록한 큐얼은 멜버른과의 계약을 연장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의 장모가 암으로 투병 중이었기 때문에 유럽으로 건너가기 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큐얼은 12/13 시즌을 거의 무적 상태로 보냈고 시즌 막바지에 대표팀 동료인 마크 브레시아노의 대체자로 카타르의 알 가라파와 단기 계약을 맺었다. 이때 K-리그의 FC 서울도 오퍼를 넣었으나 그가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해서 협상이 결렬됐다는 루머도 있다.
2013-14 시즌 큐얼은 멜버른 빅토리의 지역 라이벌인 멜버른 하트[2] 로 이적했다. 그는 16경기 2골이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은 성적을 냈고 부상 등이 겹치면서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2.2. 국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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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시절)
1996년 칠레를 상대로 데뷔했으며 데뷔했을 당시 호주 국가 대표팀 역대 최연소 선수였다. 2012년까지 56경기에 나서 17골을 기록했으며 주요 대회로는 1997 컨페드컵, 2006 독일 월드컵, 2007 아시안컵, 2010 남아공 월드컵, 2011 아시안컵에 참가한 바 있다.
1997년 1996 OFC 네이션스컵 우승팀 자격으로 참가한 컨페드컵에서 호주는 조별리그를 2위로 통과했고 큐얼은 4강 우루과이를 상대로 골든골을 기록하며 팀의 결승행에 기여했다. 그러나 결승전에서 호나우두, 호마리우에게 쌍으로 해트트릭을 얻어맞으며 0-6으로 대패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2006년 호주는 우루과이를 플레이오프[3] 에서 꺾고 32년 만에 월드컵에 진출했으며 큐얼은 이 경기에서 승부차기에서 골을 넣었다. 대회 본선에서 큐얼은 조별리그 최종전인 크로아티아전에서 동점골을 넣으며 호주의 16강행을 주도했으나 정작 16강 이탈리아전에서는 부상 때문에 팀의 패배를 바라봐야만 했다.
2007년 아시안컵에서 큐얼은 조별 리그 최종전 태국을 상대로 골을 넣으며 4-0 대승에 기여했으나 일본과의 8강전에서 첫 번째 승부차기 키커로 나서 실축하며 패배의 원흉이 되었다.
2010년 월드컵 첫 경기인 독일전에 큐얼은 결장했고 팀은 0-4로 대패했다. 팀 케이힐이 그 경기에서 퇴장당하면서 큐얼은 가나전에서 선발 출전했으나 24분 만에 퇴장당했고(...) 세르비아전에도 결장했다. 호주는 가나에 골득실차에 밀려 조별 리그 탈락.
2011년 아시안컵에서 큐얼은 케이힐과 투톱을 이루며 출장했고, 조별리그 인도전 골, 8강 이라크전 헤더 결승골, 4강 우즈베키스탄전 골 등 총 3골을 기록했다. 호주는 결승전까지 진출했으나 큐얼은 일본을 상대로 득점하지 못했고 결국 연장 후반 이충성에게 결승골을 얻어맞고 준우승을 기록했다. 이 대회에서 큐얼은 대회 베스트 XI에 선정되었다.
큐얼은 2012년 사우디아라비아를 상대로 월드컵 예선전에 참가해 골을 넣었다. 이 경기 이후 큐얼은 더 이상 대표팀의 유니폼을 입고 출전할 수 없었고, 현역 은퇴를 했기 때문에, 이 경기는 큐얼의 국가 대표팀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
2.3. 플레이스타일
재치 있는 개인기와 엄청난 스피드를 지녔고 왼쪽 크로스 패스는 엄청난 정확도와 날카로움을 지녔다. 득점력과 프리킥 능력도 준수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사커루의 돌격대장 역할을 맡아주기도 했고, 긱스의 후계자 소리를 들을 정도로 왼쪽 측면에서 날카로운 모습을 보였다. 수려한 외모 덕분에 한국인 한정 좌베컴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리버풀 FC 이적 이후 잦은 부상으로 인해 리즈 시절에 보여줬던 스피드가 완전히 죽어버렸고, 그러다보니 리버풀에서는 왼쪽에서 드리블링은 시도하지만 부족한 피지컬 때문에 제대로 측면을 돌파하지 못하는 계륵 같은 윙어였다.
그러나 터키 리그의 갈라타시라이에서는 예전의 날카로운 모습을 많이 보여주며 알토란 같은 활약을 펼쳐 주었다. 호주 A리그 이적 이후 아시아에는 왼쪽 측면 대신 중앙에서 공격형 미드필더처럼 움직이면서 특유의 탈압박과 패스로 경기를 잘 풀어갔다.
3. 감독 경력
현역 은퇴 이후 큐얼은 유소년 팀에서 일했고, UEFA A급 지도자 라이선스를 취득했다. 2015년, 왓포드 FC의 21세 이하 팀 감독에 선임되어서 2017년까지 있었다. 이후 크롤리 타운 FC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가 2018년 8월 31일에 노츠 카운티 FC의 감독으로 이직했다. 첫 경기는 9월 4일에 있었던 그림스비 타운 FC전이었는데 2:1로 졌다. 이후 부임한지 3달째인 11월 13일에 경질되었다.
최근 리버풀 대표로 레전드 매치에 얼굴을 자주 드러내고 있다.
2020년 8월 2일 올덤 애슬레틱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4. 여담
한때 '자가면역성 간염'이라는 희귀병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음에도 축구를 그만두지 않은 것으로 많은 연민을 샀다. 그러나 이는 와전된 이야기인데, 우선 큐얼이 자가면역성 간염이라는 병에 걸린 것은 맞다. 그러나 시한부 인생은 아니다. 큐얼이 이 병에 걸린 것을 발견했을 당시에는 초기였고 꾸준히 약물 치료를 받으면 별 문제 없이 살 수 있는 상태였다. 즉, 이 병은 만성질환의 형태라는 것.
마음의 소리의 작가 조석이 가장 좋아하는 축구 선수이다. 212화 내가 축구선수가 된다면에서 언급. 다만 해리 큐얼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좋아하는 선수를 물어보면 대충 적당히 둘러대며 유명한 선수 이름을 댄다고.
한때 이 선수가 한국에 알려질때, Kewell이라는 철자를 Ke-well로 끓어서 해리 키웰이라고 부르게 되고 그쪽이 먼저 익숙해졌다. 하지만 영미권에서 그를 부르는 실제 발음은 키웰이 아닌 Kew-ell로 끊은 큐얼에 가깝다. 해설을 들어보자. 마이클 오언이 오웬(O-wen)이 아니라 오언(Ow-en)인 것처럼, 큐얼도 키웰(Ke-well)이 아니라 큐얼(Kew-ell)이다.
왼발을 잘 사용해서 별명이 오즈의 마법사이다. 리즈시절 리즈의 경기에서 그가 해결사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