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오르게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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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루마니아의 前 축구 선수며 현재는 FC 비토룰 콘스탄차의 감독 겸 구단주이다. 현역 시절 등 번호는 10번. 별명으로는 '''발칸의 마라도나'''가 제일 유명하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1990년대 축구계의 화두였던 '플레이 메이커' 가운데도 몇 안되는 '''천재''' 소리를 들은 슈퍼스타. 탁월한 드리블 실력과 예측을 불허하는 플레이 센스, 정교한 왼발 프리킥과 슛을 자랑했다.
15살인 1980년 루마니아 청소년팀에도 들어가 당시 수많은 해외 클럽의 러브콜을 받았던 하지는 16살인 1981년에 성인 무대에 데뷔하며 서서히 자신만의 커리어를 쌓아 나갔다. 1983년 스포르툴 스투덴스크 부쿠레슈티로 이적한[5] 하지는 네 시즌(1983~87)동안 107경기 58골을 기록하며 매년 부쩍 성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1984-85, 1985-86 시즌에서 2년 연속 득점왕에 올랐고, 1985-86 시즌에는 31경기 31골, 경기당 1골이라는 경이적인 득점 기록을 과시하며 명성을 쌓았다. 그 덕에 하지는 18살 대표팀에 발탁된 뒤 20살인 1985년에 대표팀 주장을 맡는 저력을 보여줬다.
결국 스포르툴 스투덴스크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하지는 1986년 루마니아 최고 명문 FC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로 이적했다. 여기에서도 하지의 진면목은 계속 이어졌다. 1987-88 시즌에 31경기 26골로 득점 3위를 차지하더니 1988-89 시즌에는 30경기 31골, 경기당 1골을 넘는 기록을 세우며 득점왕에 올랐다.
하지가 지휘하는 FC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는 자국리그는 물론이고 유럽에서도 맹위를 떨치며 전성기를 달렸다. 리그 5연패 뿐 아니라 리그-FA컵 동반 우승(더블) 3연패, 유로피언컵 준우승도 경험했다.[6]
1990 이탈리아 월드컵 이후 레알 마드리드 CF와 FC 바르셀로나를 모두 거치면서 전성기를 보내지만 기대치에는 미치지는 못한다.[7] 레알 마드리드에서는 나름 주전으로 제법 활약했지만, 브레시아 칼초로 이적한 뒤의 바르셀로나에서의 모습은 하지 커리어 역사상 가장 부진했던 시기. 물론 그 와중에도 중요한 경기에서의 활약을 하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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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 터키 쉬페르리그의 갈라타사라이 SK로 이적하면서 은퇴할 때까지 5시즌 동안 마지막 불꽃을 화려하게 태운다. 다소 나이 든 베테랑 선수들만 줄기차게 모은 갈라타사라이가 UEFA컵에서 아스날 FC를 꺾고 우승하면서, 당시 변방에서 볼 좀 차는 애들 취급에 불과했던 터키 축구는 일약 유럽 무대의 강자로 재조명받는다.
갈라타사라이로 옮기자마자 하지는 한풀이를 했다. 레알 마드리드 CF-브레시아 칼초-FC 바르셀로나로 이어진 빅 리그에서 활약상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던 것을 한풀이하듯 하지는 1996-97 시즌 30경기 14골을 넣으며 5년 만에 두자릿수 득점 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리그 우승을 이끌며 명성을 드러냈다. 이때가 회광반조의 시작이었다.
이후 갈라타사라이는 1997-98, 1998-99, 1999-2000 시즌까지 4년 연속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그동안 하지는 107경기를 뛰며 48골을 넣었다. 전성기를 이끌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1999-2000 시즌에는 리그, 컵대회 우승과 함께 사상 첫 UEFA컵 우승을 거두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웠다. UEFA컵과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팀끼리 맞붙는 UEFA 슈퍼컵에서도 하지는 [8] 레알 마드리드를 따돌리고 우승을 이끌었다. 35살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거둔 최고의 성과였다. 갈라타사라이에 있는 동안 하지는 127경기를 뛰며 59골을 집어넣고 경기당 0.5골에 육박하는 골 기록을 세웠다. 그를 추앙하는 팬들이 줄을 이었다.
마지막 시즌에서도 9경기 8골을 넣는 준수한 활약으로 팬들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마지막까지 그는 정말 보여줄 걸 다 보여줬다.
주목할 사항은 당시 갈라타사라이 우승 이후 다른 베테랑 선수들은 빅 마켓 클럽으로 이적을 했는데, 하지는 유독 꿋꿋이 갈라타사라이를 지키며 은퇴했다는 것이다. 자신에게도 갈라타사라이는 마지막 무대를 빛낸 구단이라며 애정을 보였기에 갈라타사라이에서도 명예 선수로 기리고 있다.
2.2. 국가대표 경력
하지의 국가대표 활약상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최고수준이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본선 진출을 견인한 하지는 본선 조별경기에서 약체로 평가받던 루마니아를 1승 1무 1패를 거두는데 제 몫을 다 하며 첫 16강 진출까지 이끌어냈다. 조별리그 아르헨티나전에서의 디에고 마라도나와의 맞대결은 지금도 회자되는 명승부.
그리고 4년 뒤인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하지는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조별 예선에서 2골 2어시스트를 넣으며 2승 1패로 16강 진출을 성공시킨다. 특히 첫경기인 콜롬비아전에서는 남미 최고의 선수인 카를로스 발데라마와의 플레이 메이커 대결을 펼치며 하지는 1골 2어시스트를 하며 팀의 3대1 승리를 이끈다. 이날 하지의 로빙 장거리 슛은 월드컵 역사에도 길이 남을 명장면.
하지는 16강에서 우승후보 아르헨티나를 만나 1골 1어시스트 팀의 3-2 승리를 이끌며 자국을 사상 첫 8강행에 가장 큰 공을 세웠다. 아르헨티나의 중원과 수비를 시종일관 헤집어 놓으며 디에고 마라도나가 약물파동으로 결장한 아르헨티나를 유린한다. 8강에서는 스웨덴에 막히며 탈락하나 하지는 팀의 중요한 막판 동점골인 라두치오유의 골을 어시스트하며 자기 진가는 발휘한다. 이렇듯 이 당시의 하지는 루마니아의 영웅이자 발칸 반도의 사령관으로 명성을 떨쳤다.
활약은 그 이후에도 이어졌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도 하지는 노장으로서 제 몫을 다 했고 콜롬비아전과 잉글랜드전에서 각각 어시스트를 하며 또 한 번 팀의 16강 진출을 견인했다. 비록 신흥 강호 크로아티아에 져서 더 이상 올라서지는 못했지만 루마니아 축구가 최전성기를 달리는데 하지가 해낸 몫은 실로 대단했다. 그리고 유로 2000에서 말년을 불사르며 하지의 플레이메이킹으로 또다시 팀을 대회 8강으로 이끌었다. 강호 이탈리아에 졌지만 하지는 골포스트를 맞추는 등 마지막 투혼을 사르는 활약을 한다.
UEFA 50주년 기념 '유럽 최고의 스타 50인' 팬투표에서 28위[9] 를 차지했다.
'1999 월드사커 선정 20세기 위대한 축구선수 100인'에서는 25위를 차지했다.
3. 플레이 스타일
하지 하면 가장 유명한 것은 플레이메이킹 능력. 패스의 정확도가 아주 뛰어났고, 거리가 짧든 길든 정확하고 빠르게 연결해 주는 것이 일품이었다. 한 쪽 사이드에서 반대쪽 윙어에게 길게 연결하는 패스를 자주 사용했다.
킥력이 아주 무시무시하다. 하지의 강력한 슛 파워는 당대의 카를루스, 바티스투타, 쿠만 바로 다음 정도로 언급되는 수준이고, 선술한 롱패싱 능력은 바로 이 킥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연히 중거리 슛 능력은 당대 최고였다. 세트 피스 처리 능력이 훌륭해서 팀의 프리킥 키커를 도맡았다.
축구 센스가 아주 뛰어났다. 물론 축구천재라는 말을 들었으니 당연한 이야기지만. 간단한 드리블로 상대 선수를 손쉽게 제치는 것은 물론이고 상대 선수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 패스를 넣는 것도 잘했다. 하지의 축구 센스를 아주 잘 보여주는 것은 바로 칩슛 능력. 그의 득점 중에는 칩슛으로 넣은 골이 꽤 많은데, 칩슛을 차는 타이밍이나 정확도는 당대 최고의 골잡이 호마리우와 동급이라고 해도 무방한 수준이었다. 심지어 하지는 양발을 자유자재로 사용하여 칩슛을 했다.
왼발잡이로 유명하지만 긱스, 마라도나, 히바우두 같은 극단적 왼발잡이와는 거리가 멀다. 거의 양발잡이 수준으로 오른발도 잘 썼다. 왼발을 자주 쓰긴 하는데 불가피하게 오른발을 써야 하는 상황에서 오른발로도 왼발에 준하는 플레이가 나오는 선수. 양발의 사용 빈도에 한해서, 프랭크 램파드의 왼발잡이 버전이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약점은 피지컬. 작은 키를 가지고도 예외적으로 몸싸움이 뛰어난 마켈렐레, 테베스, 마라도나같은 선수도 있지만 하지는 마라도나만큼 다부진 몸을 가진 것은 아니어서 덩치 큰 선수의 몸싸움 시도에 고전했다. 다만 몸싸움에 소극적이거나 덩치 큰 선수를 일부러 피해다니지는 않았다. 수비력은 공격형 미드필더 치고 꽤 훌륭했다. 역습 상황에서 상대방의 공격을 거친 태클로 끊어낼 줄 아는 선수였다
4. 평가
현역 시절에는 루마니아 축구 역사상 전무후무한 재능이었고 은퇴 이후로는 루마니아의 다음 세대 선수 육성으로 루마니아 축구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근래 루마니아 대표팀에 소집된 선수들 중에서 하지의 손을 직, 간접적으로 거쳐간 선수들이 40% 이상 된다는 점은 그가 얼마나 대단한 업적을 해내고 있는지 보여준다. 감독으로서는 매 시즌 핵심 선수들을 그렇게 팔면서 어떻게든 빅 6안에 진입하여 UEFA 유로파 리그 예선이라도 나가는 점을 보면 지도력도 굉장히 좋다는 것도 보여주었다. 한 마디로 그냥 전설이다.
5. 지도자 경력
현재 루마니아 사람들은 게오르게 하지의 세대 이후로 루마니아의 축구 실력이 많이 죽었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그만큼 하지의 세대가 잘했다는 소리이고 이는 전에 지나간 월드컵을 회상하는 TV 프로그램에서 잘 드러나있다.
이후로 갈라타사라이의 감독을 맡아 FA컵 우승을 이끌기도 하다가 조국으로 와서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 감독도 역임했다. 2010년 10월 21일 다시 한 번 갈라타사라이 SK의 감독으로 재계약했는데... 전임 감독 프랑크 레이카르트가 7위에 머물렀다고 해임했더니만 하지 감독 체제로 17라운드째 10위권 바깥에 머물자 결국 그도 해임당했다.
5.1. 비토룰 콘스탄차
조국으로 돌아와 자신이 2009년에 설립하고 구단주로 있는 축구 클럽 FC 비토룰 콘스탄차의 감독을 맡으며 루마니아의 다음 세대 육성에 힘썼다. 유스팀인 '게오르게 하지 아카데미'에서 수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고 전성기가 지나거나 타 리그에서 부진하여 루마니아로 돌아온 선수들의 폼 회복 같은 부분에서도 기여하였다. 자신이 키워낸 선수들을 주전으로 쓰고 거기에 상대적으로 적은 수지만 폼이 떨어졌으나 부활을 꿈꾸는 선수들을 섞어서 하나의 팀으로 만들다보니 베테랑과 어린 선수들이 조화를 이루는 스쿼드가 되었다. (평균 연령이 굉장히 어린 편이다.) 선수들의 이적에 관해서는 굉장히 관대한지 FC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같이 동리그 내 더 큰 규모의 클럽이나 상위 리그에서 오퍼가 올 시에 보내준다. 성적보다는 클럽의 설립 목적인 '루마니아의 미래 육성'을 최우선으로 하는 듯 하다.
5.1.1. 2016-2017시즌
그러다가 2016-17 시즌 '하지의 아이들'이 일을 냈다. 정규리그 1위 및 플레이오프 1위로 리가 I 우승을 해낸 것이다! 매 시즌이 끝날 때마다 선수가 팔리고 심지어 이 시즌에는 겨울 이적시장에도 핵심 선수를 보내는 상황에서 이런 업적을 달성한 것이다. 유스에서 콜업한 선수들과 하지 본인이 살려놓은 선수 조르제 수쿠데안 등 여러 요소들이 시너지를 일으켜 우승을 해낸 것이다.
5.1.2. 2017-2018시즌
리그 우승 이후로 핵심 선수들이 떠났다. 수비의 한 축이었던 라이트백 로마리오 벤자르, 포백을 지켜주고 동료들이 마음놓고 공격에 참여할 수 있게 해줬던 드라고슈 네델쿠, 드리블로 공격을 이끌었던 플로리넬 코만이 대표적이다. 사실 이런 일은 매 시즌이 끝나고 벌어졌던 일이었다. 이미 플로린 터나세, 러즈반 마린 같은 선수들을 잃어봤기에 별 문제 없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2017-18 시즌이 시작되고 결과는 달랐다. 연패로 리그의 바닥까지 떨어졌으나 2017년 겨울 이적시장에서 데려온 조르제 수쿠데안의 득점포가 재가동되면서 에릭-수쿠데안-킷수 이 3명의 공격조합이 살아났고 미친듯이 순위를 올리기 시작하였다. 어느덧 챔피언십 플레이오프 진출 순위까지 올라왔다. 2016-17 시즌 리그 우승과 2017-18 시즌 리그 순위 반등 덕인지 루마니아 축구협회 주관의 2017년 올해의 감독상을 받았다. 플레이오프 직전인 겨울 이적시장에서 조르제 수쿠데안, 에릭을 떠나보내고 아들 야니스 하지를 다시 데려왔다. 플레이오프 도중인 3월에 아우렐리안 킷수를 대전 시티즌으로 보냈으나 유스 출신의 데니스 드러구슈를 적극 기용하면서 플레이오프에서 4위를 차지하는 쾌거를 이뤘다. 롤러코스터와 같은 시즌이었으나 마무리는 잘 해낸 것이다.
5.1.3. 2018-2019시즌
시즌이 시작되고 좋지 못한 출발을 했으나 승점을 착실히 쌓기 시작하며 상위권으로 도약하였다. 돌풍을 일으킨 가즈 메탄 메디아슈와 셉시의 견제에도 빅 6에 진입하기 위해서 노력하였고 그 결과 정규 시즌을 5위로 마쳐 플레이오프인 챔피언십 라운드에 돌입하였다. 겨울 이적시장에서 투도르 벌룻서를 시즌 끝나고 보내는 계약을 하였고 히바우지뉴, 에릭, 안드레아스 칼칸과 같은 선수들을 데려오는 동시에 유스 선수들을 기용하여 삽질을 한 CS 우니베르시타타 크라이오바를 제치고 3위를 달성하였고 쿠파 로므니에이를 우승하는 엄청난 지도력을 보여주었다.
시즌이 끝나고 있었던 대회인 UEFA U-21 챔피언십 본선 확정 명단 23인 중에서 게오르게 하지 아카데미를 거쳐간 선수들이 10명이나 되었고 선발 명단에는 최소 4명 이상 포함되어 하지가 루마니아 축구계에서 얼마나 큰 영향을 주고 있는지 다시 보여주었다.
6. 기록
- 1988~1989 챔피언스리그 준우승
-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16강
- 1994년 미국 월드컵 8강 - 16강전 아르헨티나를 3:2로 격파(하지 결승골)
- 1998년 프랑스 월드컵 16강
- 2000년 UEFA컵 우승
[1] 왼쪽 윙어, 공격형 미드필더[2] 구단주도 병행한다.[3] 루마니아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최다 득점자. 아드리안 무투와 동률.[4] 1998년생으로 현재 레인저스 FC의 선수이다.[5] 철권통치로 악명높던 무서운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도 하지의 잠재력에 매료되어 이 팀으로의 이적을 적극 밀어붙였다.[6] 다만 1980년대는 아직 유럽의 빅리그와 중소리그, 유럽 리그와 남미 리그 간의 격차가 크지는 않았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7] 그래도 바르셀로나에서는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나 로날트 더부르와 함께 팀 레전드 대우를 받고 있다.[8] 2:1로 갈라타사라이가 승리했는데, 당시 갈라타사라이의 두 골은 모두 자르델이 넣었다. 덤으로, 당시에는 골든골 규정이 있었기 때문에 자르델이 연장 13분에 득점한 뒤 바로 경기종료 휘슬이 울렸다.[9] 당시 현역인 뤼트 판니스텔로이, 알레산드로 델피에로보다 높은 랭킹
분류
- 1965년 출생
- 루마니아의 축구선수
- 루마니아의 축구감독
- 루마니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 FC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은퇴, 이적
- 레알 마드리드 CF/은퇴, 이적
- 브레시아 칼초/은퇴, 이적
- FC 바르셀로나/은퇴, 이적
- 갈라타사라이 SK/은퇴, 이적
- 부르사스포르/역대 감독
- 갈라타사라이 SK/역대 감독
- FC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역대 감독
- FC 비토룰 콘스탄차/역대 감독
- 루마니아의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 참가 선수
- 1994 FIFA 월드컵 미국 참가 선수
-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참가 선수
- UEFA 유로 1984 참가 선수
- UEFA 유로 1996 참가 선수
- UEFA 유로 2000 참가 선수
- FIFA 센추리 클럽 가입 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