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재(고려)
許載
(? ~ 1144)
1. 개요
고려의 문신. 자는 수강(壽康)으로 공암현(孔巖縣, 서울특별시 양천구) 출신이다.
2. 생애
허재는 어려서부터 부친을 여읜데다 집안은 가난해 홀로 늙은 모친을 부양해야 했다. 허재는 한을 품고 외고조부 삼한공신 김긍렴의 음서로 어려서부터 도필리(刀筆吏, 기록 담당 아전) 자리를 얻는다. 숙종 시기 공을 세워 철주(鐵州, 강원도 철원군)의 방어판관으로 선발된다. 철주에서 선정을 베풀어 숙종으로부터 내시로 발탁돼 개경의 궁중에서 일하게 되며, 예종에게도 잘 보여 크고작은 국가적 사업에 참여하게 된다.
9성의 역(九城之役, 고려의 여진 정벌)에서는 중군녹사를 맡아 길주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곧 길주성에 여진족이 침입한다. 허재는 병마부사 이관진과 수개월을 수성했으나 곧 성이 함락될 위기에 놓인다. 허재 등은 사졸들을 격려해 겹성을 쌓으니 여진족을 격퇴할 수 있었고, 허재는 이 때의 공으로 감찰어사에 임명된다. 그리고 행영병마판관으로서 김의원 등과 길주관 밖에서 여진족을 공격하니 30여인의 목을 베고 갑옷과 병장기, 우마 등을 노획한다. 허재는 또 공을 세웠기에 간관인 잡단으로 승진한다.
예종 10년(1115) 왕이 팔관회에서 돌아오는 길에 합문 앞에서 잠시 멈추고 신하들에게 창화(唱和, 시를 주고받음)하게 한다. 창우(倡優)들이 노래하고 춤추기를 삼경(밤 11시 ~ 1시)까지 계속했는데, 허재가 어사대부 최지와 함께 예종 앞에 나아가 간언하니 예종이 이를 기쁘게 받아들인다.
허재가 여진 정벌에서 보인 군사적 수완 덕분인지 예종 12년(1117) 동북면병마부사 임명을 시작으로 세 번 양계의 병마부사에 임명된다. 병마부사를 마치고 돌아와 인종 2년(1124) 동지추밀원사로 임명된다. 허재는 인종 시기 이자겸에게 아부해 지문하성사, 참지정사를 거쳐 수사도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판상서병부사에 이른다.
인종 4년(1126) 5월 이자겸이 몰락한 뒤에는 같은 붕당으로 간주돼 대간의 공격을 받는다. 척준경의 비호를 받아 처벌을 피했으나 이 해 6월에 허재는 지풍주방어사로, 허재의 아들 허순은 전주방어판관으로 좌천된다. 허재는 풍주(豊州, 황해도 송화군)에서 성을 수리하고 기계를 제작하며 인근 도(道)와 주군에서 군량미를 확보해 전쟁에 대비한다. 풍주에서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 병부상서 관직을 받는다. 이자겸 당 출신인 허재가 병부상서에 제수되는 것에 대간이 반발해 논박이 오가는데, 서해도안찰사가 허재가 풍주에서 공을 세운 점을 드러냈고 다시 호부상서로 재차 임명되고 은퇴한다. 허재의 공적이 허물보다 컸으므로 곧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위가 더해진다.
인종 13년(1135) 서경에서 묘청의 난이 일어나는데, 허재묘지명에 따르면 은퇴한 허재가 왕에게 글을 올려 서경 공성전을 조언했다고 한다. 당시 모든 신하들은 군대를 보내는 것이 상책이라고 주장했는데, 허재는 홀로 말하기를,
인종이 허재의 말에 동의해 이를 중군병마사에게 전달했고, 다섯 성을 쌓고 해자를 막고 공격해 적들을 항복시킨다. 원수 김부식이 이 방식으로 서경을 함락한 것은 사서에서도 나타나지만, 허재가 조언을 했다는 것은 교차검증이 되지 않는다.군사를 밖으로 드러내다가 적에게 사로잡힌 바가 옛날에도 또 있었습니다. 하물며 서경은 신이 일찍이 두 번이나 유수(서경유수)로 종사했는데 그 성은 험하고 견고해, 실로 옛 말에 '금성은 공격해 깨뜨릴 수 없다.'라고 했으니, 마땅히 근방에 성을 쌓고 군사는 숨겨 쉬게 함으로 그들의 항복을 기다려야 합니다.[1]
허재는 인종 22년(1144) 봄 2월 을미일(14일)에 자택에서 사망한다. 3월 10일 정주(汀州, ?) 계내의 동쪽 기슭에서 화장된다. 인종은 부의와 함께 시호를 하사했으며 조서를 내려 태부의 관직을 추증한다. 남은 유골은 8월 18일에 매장된다.
3. 가족관계
- 증조부: 허현
- 조부: 허원
- 부: 허정
- 모: 강릉군대부인 김씨
- 본인: 허재
- 조부: 허원
- 본인: 허재
- 전처: 광평군대군 이씨
- 아들: 허순
- 며느리: 조씨
- 딸
- 사위: 신영린
- 전처: 최씨
- 아들: 허균
- 후처: 상당군부인 김씨
[1] 露師於外, 爲賊所擒, 古或有之. 況西京, 臣嘗再從事留守, 其城險固, 眞古所謂, ‘金城, 不可攻破.’ 宜築城於傍, 藏兵休卒, 以待其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