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량미
1. 개요
軍糧米
군대에서 장병들의 식량으로 사용하는 곡물을 일컫는 단어이며, 단어에서 보듯이 동아시아에서는 주식이 쌀이었던 환경에 걸맞게 군대에서 식량으로 이용되는 쌀을 의미한다.
2. 상세
무기와 더불어 단연 1순위에 드는 보급품으로 무게가 많이 나가고 부피가 꽤 컸기 때문에 고대로부터 운송에 어려움이 많이 뒤따랐던 품목이었다. 과거에는 군마에게 공급할 마초(馬草)와 함께 엮여 근대까지의 군대가 전투병보다 더 많은 보급병을 운용해야 했던 원인으로 작용했다. 예를 들어 수양제의 고구려 원정을 살펴보면, 전투 병력은 113만이었지만, 각종 무기와 군량을 포함한 군수품을 운송하는 병력은 두 배에 달했다고 자치통감에 기록되어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여유가 있다면 적의 군량을 불태우는 것 보다는 빼앗는 편이 훨씬 좋다. 손자병법에서도 보급을 충실히 하며 부족한것을 적에게서 취하라고 하는데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조선의 백성들에게 세금을 걷었고 나아가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탈취하려 했던 일본군은 병법의 정석대로 용병술을 한 것이고, 앞서 예시로 든 수양제의 군대의 경우에는 고구려의 청야전술에 대비하여 내호아가 이끄는 보급선단을 패강으로 미리 보내 본대가 먹을 양식을 준비했다가, 건무가 이끄는 별동대의 습격으로 모조리 잃어버려 패전으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결과가 되었다. 고려 말 공민왕 시대 때 벌어진 요동 공략에서도 요동성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지만 철수한 여러 이유 중 하나도, 성은 점령했지만 군량미가 모조리 불타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제대로된 보급선도 없이 무작정 적에게서 뺏을 생각으로 일본군의 모 지휘관마냥 '우리는 풀만 뜯어먹고 살 수 있으며 필요한 자원은 약탈로 충당하면 된다.'는 망상을 했다가는 끝장이다. 상기한 수나라의 사례처럼 적군이 청야전을 계획했을 수도 있으며, 약탈로 필요한 군량을 충당하는 것은 한계가 있고, 무엇보다도 점령지의 민심획득이 싸움이 끝난 후 우선적으로 행해져야 할 일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군량미에서 군이 의미하듯, 군대를 제외하면 거의 쓰이지 않는 어휘이고, 역사적으로 보통 근대까지의 기록에서 언급된다. 군대 1종 창고에 있는 쌀 포대들에는 군량미라고 인쇄되어 있다. 군대에서 쓰는 용어이지만, 텔레비전 사극이나 영화, 근대 이전을 배경으로 삼은 게임 등등 대중매체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단어라서 의외로 세간에서도 쌀이든 밀가루든, 라면이든 장기 저장이 가능한 양식이 들어오면 재미삼아 은근히 많이 사용하는 표현이다. 특히 사극을 즐기거나, 삼국지 등의 동양 전쟁소설 독자층들은 군량미란 표현이 매우 친숙한 편이다.
사극 등의 미디어 매체물에서 전투 식량은 쌀만 언급되는 경우가 많고, 군량미(米)라는 이름 때문인지 사람들로 하여금 밥만 먹고 전투하는 거냐는 의문을 갖게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벼농사가 지금만큼 발달하지 못했던 과거의 시대상을 감안하면, 백미보다는 잡곡이 많았을 가능성이 농후하다.[1] 몽골이나 흉노 등의 유목제국들은 보르챠처럼 가축을 도축해 말린 고기를 주로 전투 식량으로 식용했고 이 때문에 진격 속도가 더 빨랐다고 한다. 춘추전국시대에서는 쌀이 아닌 좁쌀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가장 일반적으로 먹는 곡물이었고, 진의 시황제도 조밭을 대규모로 개간하여 군량을 마련하기도 했다. 쌀이 본격적으로 군량의 주를 차지하기 시작한 것은 남북조 시대 이후 강남일대가 개발되면서부터이다. 이 무렵부터는 쌀은 아예 중요한 주식이 되어 일반 서민들까지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시대나 배경에 따라 달랐겠지만, 잡곡밥과 함께 먹는 찬거리는 별로 없었다고 전해진다.[2] 물론, 쌀밥만 먹기에는 맛이 없고, 하루종일 전장에서 고생하며 땀을 비오듯 흘렸을 장병들에게는 짭짤하고 맛깔난 반찬이 반드시 필요했겠지만, 이것은 잘 언급되지는 않는 편이며 사서에서는 군량미에 포함되어 언급되는 것 같다.[3] 삼국시대에 제갈량이 지휘한 촉한군은 무와 순무[4] 를 반찬으로 먹었다고 기록한 서신이 남아있고[5] 원술의 군대가 강에서 채집한 물풀과 다슬기를 끓여 먹었다는 기록과 전란시대에 타쿠앙 소호가 단무지를 만들어서 군에 보급했다는 기록 정도다. 그러나, 국가와 국가간의 경계를 떠나 장병들이 먹은 주된 반찬이자 부식은 소금이다.[6] 소금 이외에 간장이나 된장 같은 조미료도 반찬의 일원이었으며, 베나 덩굴 등에 절였다가 식사 때 물에 풀어 사용하기도 했다. 특별식으로 가축이나 멧돼지 등을 잡아 술과 함께 장병들에게 공급했지만 이런 특혜는 중요한 전투에 앞서 장병들의 체력을 증진시키고 사기를 고무시키려는 목적을 지녔거나, 혹은 진중에 적장이 투항하거나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는 등의 호재가 있었을 경우에 해당되었다. 물론, 잦은 극한 체력소모와 부상에 시달려야하는 군대 입장에서 장병들의 전투력 유지를 위해 가능하면 육류를 많이 확보하는 것을 신경썼다.[7]
반대로 진중에 완전히 군량미가 떨어졌을 경우에 더 멋진 식사가 장병들에게 제공되었는데, 이는 성내의 가축들이나 군마를 잡아서 먹는 것이였다. 당시 전투에서 군용말이 오늘날의 탱크와 같은 역할을 했고, 또한 상당히 비싼 물건이었음을 생각한다면, 군용말을 잡아 군량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장병들이 정말 굶주림에 허덕여 어쩔 수 없을 때 감행되었다. 나폴레옹 전쟁기를 다룬 문학작품을 보면, "말까지 잡아 먹었다", "네놈들이 말고기를 먹게 해주마"하는 구절이 나오는 데 이것을 뜻한다. 프랑스 파리에서 말고기 요리가 생긴 연원이 보불전쟁 당시 파리가 고립됐을 때 말까지 잡아 먹으며 버틴 데서 나왔다는 야사도 있다. 덧붙여 보불전쟁 막바지에는 워낙 식량사정이 안 좋아서 말고기를 먹으면 오히려 다행이고, 대다수의 서민들은 쥐고기까지 먹으며 연명했을 정도이다.
군량이 다 떨어져서 위에서 말한 군마 같은 제 살 깎아먹기까지 했는데도 계속 군량이 부족하면, 보통은 사기가 떨어져서 항복하거나, 죽지 않기 위해 상관을 하극상하거나, 다들 탈영하거나 그냥 쓰러지고 굶어죽거나, 배가 고파 싸울 힘도 집중력도 없어져서 전투가 벌어져도 쉽게 진다. 다만 역사적으로 가끔씩 결사항전하는 경우에는 평소라면 입에 못 댈 것들까지 먹어가며 치열하게 저항했던 전투가 회자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오줌과 시신을 먹으면서 저항한 가잠성 전투, 말의 피와 오줌을 먹으며 버텼던 울산성 전투가 그 예다. 당연히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고, 전설적인 군인으로 칭송하거나 살아남은 당사자는 심각한 트라우마가 생기기도 한다. 울산성 전투에서는 살아남은 가토 기요마사가 일본에 돌아가 구마모토 성을 지을 때 바닥에 까는 다다미도 식용 가능한 토란 줄기로 만들 정도로 비상식량 확보에 집착하게 되기도 했다.
국가의 정규군이자 조위가 정촉호군이라는 기병대를 따로 운용해 상대할 정도로 정예병이었던 촉한의 군대나, 원소에 이은 거대 군벌이였던 원술군의 전투 중의 식생활이 이런 수준이었음을 감안하면, 다른 군벌은 좋지 않았으면 더 좋지 않았지 더 나았던 식생활을 영위 했을리는 없다. 실제로 삼국시대보다 1300년이나 뒤인 일본 전국시대의 병량이 쪄서 말린 현미였던 것을 생각하면, 그나마 순무나 다슬기를 반찬으로 삼는 것은 어느정도 경제력이 받춰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 할 수 있다. 6.25 전쟁 당시에도 전장에서 소금으로 간을 한 주먹밥을 배급받기가 일쑤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정규군이 아닌 의병이 전투시에 고두밥, 말린 어패류[8] , 시래기 등을 가지고 다녔다는 일본측 기록도 있는 것을 미루어 전시 중에 현지에서 그때 그때 필요한 식자재를 보급했던 것 같다.
식자재를 관리하고 조리할 수 있는 진중에서는 그나마 제대로 밥과 반찬을 해먹었던 것 같다. 조선시대에는 군대에서 육류 보급을 위해 가축을 도축하거나 사냥 등을 했고, 이것을 따로 관리하는 병사들도 있었다. 해안가 쪽으로 가면 청어, 명태, 조기 등등 다양한 생선과 김, 미역, 톳 같은 해조류도 비교적 잘 해 먹었다. 장병들 입장에서도 먹는 것은 사기와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에 제대로 기풍이 잡힌 군대라면 가능하면 군사들을 잘 먹이는 것은 당연하다. 한나라 때 비장이라 불리던 명장 이광도 사냥한 짐승을 모든 병사들이 골고루 나누어 먹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도 정유재란 발발 당시 보급상황이 극도로 나빠진 상황에서도 무짠지에 보리밥, 쇠기름 뜬 무국을 저녁식사로 냈으며, 인근 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여 된장을 푼 생선탕을 군사들에게 먹였다고 한다.[9]
군량미는 곡식이었으므로 보관기간이 긴데다가 화폐 대신 교환물품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므로, 고대·중세 시대에는 쓰임새가 다양한 귀한 물품이었다. 그래서 군량미를 횡령하는 관리도 빈번했다. 조조가 군량 담당을 벤 역사적 사례는 군량미가 떨어졌음을 알게 될 병사들이 느낄 분노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원소가 관도대전에서 패한 것도 마찬가지로 원소의 병사들이 당장 며칠 먹을 식량은 지니고 있었겠지만, 긴 교착상태를 견뎌낼 자신감(이겨도 굶는다)을 잃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조조는 허유가 투항했을 때 그의 면전에서 '군량이 아직 며칠 분은 남아 있다'며 연거푸 거짓말을 했다. 군벌들이 군량미 확보에 목을 맨 것도(연의 초반부를 보면 병량을 빌려주네, 빼앗네 하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온다) 군대의 유지와 사기 문제도 있었겠지만, 식량확보를 함으로써 이를 이용하여 전란에 흩어진 유랑민을 군대로 흡수하고 세력을 불리려는 목적이 있었다. 초한지에서는 진승과 오광의 반란군을 토벌한 장한이 승전 후 진채에 밥을 지어두고 죄수병사들에게 "먹고 싶은만큼 실컷 먹어라."라고 한 것만으로도 사기가 크게 올랐다는 장면도 나온다. 오늘날에도 국민소득 1,000달러 미만의 개발도상국에서는 그래도 밥은 제대로 주는 군대에 입대하려는 빈곤층의 사람들이 넘쳐난다. [10] 심지어 로스 세타스 같은 막장 깡패 준군사 집단도 '우리는 끼니로 컵라면 따위를 제공하지 않는다'라는 구실로 조직원들을 모은다. 근대 일본군의 모병 유인책도 "군대가면 쌀밥을 배불리 먹여준다"였고, 각기병 예방을 위해 잡곡밥과 빵을 급식하니 거부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고, 임오군란의 방아쇠가 된 사건도 (전투식량보다는 봉급으로서의 의미였지만) 군량 보급이었다. 잦은 전쟁으로 인하여 먹고 살기가 힘들었던 시절에 하층민들에게는 그저 밥을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목숨을 걸고 싸울 만한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삼국지연의를 비롯한 많은 고전 전쟁소설에서 허구한 날 적에게 탈취당하고 불타는 역으로 등장한다. 당장 삼국지에서 전쟁 장면에서 가장 자주 나오는 대사 중 하나가 "군량을 빼앗겼습니다!", "군량이 불탔습니다!"이다. 아무리 강한 군대나 성채라 할 지라도 식량이 없으면 오래 버티지를 못하니, 기회가 있을때마다 상대방이 이를 공격하는건 병법에 있어서 당연한 이치이다. 그래서인지 군량미는 전쟁소설의 숨은 주역처럼 보인다. 코에이의 게임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버전마다 효과가 다르지만, 군량이 떨어지거나 약탈당하면 바로 패배판정나거나, 사기가 떨어져 병사가 탈영해 결국 패배한다.
한편 현대전에서는 물론 병사들이 먹을 식량을 조달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탄약이나 각종 연료, 장비의 부품 등 전투력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요소들이 더 늘어나서 비중은 줄었다. 병사들이 군량이 없으면 굶주린 상태로 얼마간 버틸 수는 있지만 탄약이나 연료가 떨어져버리면 아예 전투력이 사라지기 때문에 특히나 그렇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식량 보급을 아예 등한시해서는 안된다.'''
3. 관련 문서
[1] 군사들에게 지급하는 군량은 백미에다가 보리, 기장, 조, 콩 등을 섞어서 주는 것이 보통으로, 주로 보리를 많이 섞었다. 중국은 남북조 시대 이전만 하더라도 쌀보다는 좁쌀을 더 많이 먹는 편이었다. 콩과 보리를 섞는 것은 귀중한 쌀을 아끼는 방편이기는 했지만, 한편으로 병사들에게 부족해지기 쉬운 영양을 보충해주는 효과도 볼 수 있었다. 벼농사가 일찍부터 발달한 한국의 군대에서는 예로부터 찐밥을 군량미로 사용하였다. 찐쌀말린 것은 호화되어 있으므로 생쌀보다 섭취하기 좋다. 오늘날의 동결건조 전투식량과 같다.[2] 이것은 다른 문화권도 마찬가지이다. 유럽의 군대도 군량의 메뉴가 아주 조촐했고, 특히 따뜻하고 수분이 많은 음식은 없다시피했다. 그래도 동아시아 지역은 유럽권과는 달리 식량이 쌀이기 때문에 특성상 야전조리시 주식메뉴인 밥은 일반적으로 먹던 밥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는 장점이 있어 국 정도만 곁들여도 병사들 입장에서 나름 야전에서 먹을 만한 식사가 완성되었다. 밀로 만든 빵을 주식으로 삼던 유럽권은 다른곳에서 빵이나 건빵으로 구워 실어오는게 아니라면 야전조리시 보급받은 밀가루로 그냥 죽을 끓이던가 제대로 발효도 안된 대충 물에 갠 반죽을 판자에 붙이건 무기에 감아서던 안타게 감싸서 잿불에 묻던 어떻게든 구워먹어야 했고, 이로 인해 병사들의 불편이 막심하였다.익혀서 먹을수있게됬다 정도지 불에 구운 수제비반죽같은 물건이라 평소에 먹던 빵의 맛이 아니란건 당연하고...[3] 사극이나 사서에 부식에 대한 표현이 없는 이유는 이를 굳이 기록해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종이가 아닌 비단이나 죽간 혹은 쪼갠 나무에 기록을 했던 고대에는 이러한 물건들이 지녔던 부피 때문에 책의 권수가 수레로 옮겨야 할 만큼 많았다. 때문에, 고대의 문집들은 핵심내용만 간략히 추려적었으며, 그러한 습관이 종이가 발명된 후에도 이어졌고, 인류가 이러한 습관에서 벗어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손자병법만 해도 내용이 상당히 짧고 간략하다. 시시콜콜한 자세한 설명 따위는 없다. 이렇기에 어떠한 문헌의 내용에 주석을 다는 학문이 발생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서에 시시콜콜한 반찬이나 기타 부식이야기 따위는 들어갈 틈이 없었다고 여기는게 타당하다.[4] 지금도 중국 사천지방에서는 무를 가리켜 제갈채라고 부르고 있는데, 제갈공명이 전장에 나아갔을 때 본영에서 무를 많이 심어서 그런 것 같다. 실제로 공명은 병사들에게 무씨를 가지고 다니라고 명할 정도로 무를 중요한 부식이자 대체 군량으로 여겼다고 한다. 무는 더욱이 볶거나, 끓이거나, 말리거나, 소금에 절이는 등 요리법이 다양한 것도 장점. 순무는 그 이미지와는 다르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름난 전쟁식량이다. 1, 2차대전기 독일군도 순무를 애용했다.[5] 단무지처럼 염장한 순무로 추측된다. 촉한은 정염을 국가적인 산업으로 삼고 있었을 뿐더러, 김치처럼 순무도 소금으로 절이면 보존성이 월등히 높아진다.[6] 소금을 그냥 먹었다기 보다는 밥에다 넣어 간을 맞추거나, 약간의 채소나 기름, 장등을 넣고 소금으로 맛을 낸 염장국으로 끓여 먹었을 것이다. 실제로 염장국은 식량이 부족한 과거에는 흔하게 먹는 음식이었다.[7] 고대부터 고기는 기력저하와 상처의 회복을 돕는 보약으로 여겼다. 지금도 환자들이 어느 정도 호전에 들어가면 고기 등의 육류를 섭취하게 하여 회복을 빠르게 하도록 돕는다.[8] 주로 명태나 바지락 말린 것 따위[9] 의외일지 모르지만, 진중에서 장을 담그는 일이 많았다. 이 때 생긴 것이 속성으로 만든 장인 전국장, 즉 청국장이다.[10] 링크 내용 자체는 사실 굉장히 특이한 경우에 속한다. 군대는 집권층의 보호막이 되어 주는 역할이기 때문에 절대로 식량을 제대로 주지 않아 전투력을 떨어뜨리려 하지 않는다. 3세계 어딜 가든 아무리 나라가 힘들어도 정규군에서까지 밥을 쫄쫄 굶는 사례는 정말 보기 드물다. 그리고 국가 스스로가 감당해 낼 수 있는 경제력에 비해 군사력을 지나치게 많이 키웠기 때문도 있고, 이 동네도 징병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