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의원(고려)
1. 고려 중기의 인물
金義元
(1066 ~ 1148)
1.1. 생애
나주 광양현 출신. 본관은 광산이다. 수태보 문하시중 감수국사 김양감과 서해군대부인에 추증된 최씨의 아들로 외조부는 상서우복야 중추원사 최연하(崔延嘏)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좋아해 문종 36년(1082) 17세의 나이로 좨주 김근이 주관한 성균시에 합격한다. 초시에 합격한 뒤에는 아버지 덕에 음서로 장사랑 군기주부동정으로 관직에 나가고 23세에 성불도감판관에 임명된다. 이후 관직이 여러 차례 바뀌어 감찰어사가 됐다가 연주(漣州, 경기도 연천군)의 수령으로 나간다.
예종 때 행영병마판관에 임명돼 여진 정벌에 참전한다. 웅주성 전투에서 성을 방어하고 적을 사로잡으며 군공을 올린다. 이어 원수 윤관의 명으로 지병마사 이관진, 행영병마판관 허재와 함께 길주성을 지킨다. 사서에는 예종 4년(1109) 2월 길주성 관외에서 허재와 함께 적 30급을 베고 철갑옷과 우마를 노획하는 군공을 세웠다고 전한다. 곧 여진군이 성을 포위하는데 길주성을 도우러 온 윤관의 지원군이 패퇴하니 충붕(衝棚, 공성 병기)으로 성이 무너지기에 이른다. 김의원은 칩입한 여진족 병사 하나를 때려죽이고 크게 소리질러 적군을 물러나게 한 뒤 밤새 겹성을 쌓음으로 수성에 성공한다.
김의원이 고함으로 적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든 것이 여러 차례였다고 하며 길주성을 마지막까지 지켰으나 결국 여진과 화친에 이르게 된다. 예종이 길주에서 활약한 이들의 공을 치하해 관직을 내렸고 김의원은 형부원외랑, 호부낭중을 역임한다. 예종 8년(1113) 형부시랑으로 예부상서 홍관과 함께 거란에 사신으로 다녀오며 또 여러 차례 관직을 옮겨 병부시랑에 이른다.
인종 즉위 후에는 병부시랑 지다방사, 예부경 지어사대사를 거쳐 인종 4년(1126) 4월 호부상서 동지추밀원사에 이른다. 이자겸의 난 당시 김의원은 외척이자 혼인 관계에 있는 문벌귀족 이자겸과 가까이 지내며, 최자성과 함께 이자겸의 사택 중흥택(重興宅)에 집사로 있으며 거처를 옮긴 인종을 맞이한다. 말이 좋아야 집사지, 중흥택에 유폐된 인종을 감시하는 역할이었을 것이다. 시어사 송근(宋覲), 전중시어사 이중(李仲)과 함께 궁궐에 불을 낸 사람의 처우를 모의하다가[1] 위협을 느끼고 수십일동안 휴가를 내세우며 칩거한다. 이자겸이 척준경에게 진압된 후에는 이자겸의 당파였기 때문에 양주사로 좌천된다. 김의원의 묘지명에서는 (김의원을) '물리치려고 했던 자가 방자한 뜻을 얻었다.'[2] 라고 한다.
김의원은 양주에서 인정을 베풀었으며, 그 척준경마저 탄핵된 뒤인 인종 6년(1128) 왕이 죄가 없다고 해서 안변도호부의 수령으로 옮긴다. 인종 10년(1132) 공부상서 ▨북대도호부사에 올랐는데, 다시 개경으로 돌아온 것으로 보인다. 은퇴를 청한 뒤 호부상서 ▨삼사사에 오르고 특진 금자광록대부가 더해진다. 의종 2년(1148) 11월에 병이 들어 그 해 12월 4일(음력) 향년 83세로 성 동쪽의 임천사에서 죽는다. 19일 진봉산에서 다비(茶毗, 화장)했으며 5년 뒤 개성부 임강현 북산에서 장사지내진다.
1.2. 가족관계
- 부: 김양감
- 모: 서해군대부인 최씨
2. 고려 후기의 인물
金義元
(? ~ 1224)
고종 시기의 인물.
2.1. 생애
날래고 용맹했는데 집안이 가난해 무뢰배가 된다. 지나가는 사람에게서 돈과 옷을 뺏어 달아났는가 하면, 이웃 아낙이 은병과 비단을 넣은 상자를 머리에 이고 가는데 몰래 훔치기도 한다. 어떤 계기로 군졸이 됐는데 승진을 거듭해 고종 8년(1221) 관직이 중서시랑평장사 판병부사에 이른다. 김의원은 높은 지위에 오른 뒤 자기가 물건을 훔쳤던 아낙을 불러 은병과 비단을 준다. 여인은 조정의 고관이 자신을 불러 선물을 주는 까닭을 몰라 이상하게 여기며 받지 않으려고 하는데, 김의원은 이유는 알려주지 않은 채 억지로 받게 한다.
고종 11년(1224)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