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로데 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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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로데 1세 대왕 (기원전 73~기원전 4)
1. 소개
2. 유대의 왕이 되다
3. 업적
4. 잔혹함
4.1. 죽음
5. 베들레헴의 아기들을 학살했나?
6. 평가
7. 대중매체에서


1. 소개


기원전 1세기에 가나안을 통치한 왕이자 헤로데 왕조의 창시자. 유대의 왕이었고 나름 업적도 남겼으나 포악함으로도 악명이 높았던 통치자였다.

2. 유대의 왕이 되다


헤로데의 아버지는 안티파트로스이다. 안티파트로스는 이스라엘(야곱)의 형이었던 에싸브(에서)의 후손인 에돔 족속으로, 하스몬 왕조의 요한 힐카누스가 에돔을 평정하고 에돔인들을 유대교로 개종시킨 가운데 이당시 유대교로 개종했던 유력가문 출신이었다. 안티파트로스는 나바테아 왕국의 공주 키프로스와 혼인해 두 아들을 낳았는데 큰아들은 파사엘이었고 둘째 아들이 바로 헤로데였다.
안티파트로스는 하스몬 왕조의 알렉산드로스 야나이의 두 아들중 차남인 아리스토불로스 2세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런데 아리스토불로스 2세가 형인 대사제장 힐카누스 2세와 왕위 다툼을 벌인끝에 아리스토불로스 2세가 왕이 되고 힐카누스 2세는 대사제장의 직을 유지하기로 합의를 보면서 자신의 입지에 불안감을 느꼈다. 결국 그는 힐카누스 2세를 꼬드겨서 아리스토불로스 2세를 제거하고 유일무이한 왕과 대사제장을 겸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자신의 처가인 나바테아 왕국의 아레타스 2세에게 5만 병력을 청하기까지 했다.
나바테아군의 침공에 불안해진 아리스토불로스 2세는 은 300탈란트를 들고 다마스커스로 가서 폼페이우스의 부장인 스카우루스를 데리고 왔고 로마에 맞서기 싫었던 아레타스 2세는 그대로 병력을 철수시켜 버렸다.
이 일은 힐카누스 2세와 아리스토불로스 2세, 그리고 안티파트로스까지 모두 로마의 힘을 실감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세 사람은 동방원정을 와있던 폼페이우스에게 온갖 아부와 뇌물을 바치면서 유대의 권력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결국 폼페이우스는 두형제를 중재하겠다면서 '''친절하게 팔레스타인 정복에 나섰고''' 이 와중에도 정신 못차린 두 형제는 예루살렘이 로마군에 포위된 상황에서도 치고박다가 사이좋게 나라를 로마에 들어바쳤다. 그리고 이미 폼페이우스를 확실히 구워삶아 놓았던 안티파트로스가 '''모든 것을 차지했다'''. 이후 안티파트로스는 폼페이우스가 죽고 카이사르가 로마의 실권을 장악하자 재빨리 카이사르편으로 갈아탔고 카이사르는 이집트에서의 곤경을 구해준 안티파트로스에게 감사의 표시로 그를 유대의 행정장관에 임명했다. 사실상 안티파트로스가 하스몬 왕조의 후손들을 제치고 유대의 왕이 된거나 마찬가지였다.
헤로데는 이때 정치의 전면에 등장했다. 안티파트로스는 첫째 파사엘을 유대와 이두매의 행정장관으로 임명했고 둘째 헤로데는 갈릴래아의 행정장관으로 임명했던 것. 어찌보면 파사엘이 더 중용되었다고 볼 수 있었지만 아버지 안티파트로스의 노회한 정치감각을 물려받은 쪽은 헤로데였다.
그러던 기원전 43년, 카이사르가 브루투스에게 암살되었고 같은해에 안티파트로스도 독살을 당했다. 이후 헤로데는 형 파사엘과 유대 통치권을 놓고 쟁투를 벌이는데 헤로데는 아버지 안티파트로스가 로마의 실권자들이 바뀔 때마다 재빨리 갈아타서 권력을 얻은 것을 잘 알고 있어서 그 역시 안토니우스편에 재빨리 붙었고 안토니우스는 헤로데의 편에 서기에 이르렀다.
이런 가운데 아리스토불로스 2세의 아들로 하스몬 왕조의 마지막 정통성을 지닌 왕손인 안티고누스가 파르티아의 힘을 빌려 하스몬 왕조 복권을 노렸다. 안티고누스는 헤로데의 형 파사엘을 죽이는데 성공하고 예루살렘을 함락시키면서 헤로데까지 죽일뻔했으나 헤로데는 간신히 마사다 요새로 피신해 목숨을 건졌고 안티고누스는 이때 헤로데를 죽이지 못한 대가를 톡톡히 치루게 되었다. 헤로데를 후원하는 안토니우스가 파르티아군에 맞서 쳐들어와 파르티아군을 격파하여 헤로데는 곤경에서 벗어났고 헤로데의 반격으로 결국 안티고누스는 처형되면서 하스몬 왕조는 더이상 일어설 수 없게 되었다.
한편으로 헤로데는 유대의 왕이 되기 위한 사전작업을 착착 진행해놓은 상황이었다. 이미 부인과 아들까지 두고있던 헤로데였으나 이스라엘의 후손이 아니었던 그는 왕위계승의 정통성 확보차원에서 하스몬 왕조의 공주인 마리암과 혼인했다. 이는 헤로데가 유대의 왕권을 확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3. 업적


유대의 왕족으로 약속된 다윗의 후손이 아닌 것은 물론이고 이스라엘의 후손조차도 아닌 사람이 유대의 왕이 된데다가 갖가지 종파들의 갈등으로 늘 화약고를 안고있던 유대의 상황에서 헤로데는 나름대로 노회한 정치력을 발휘하며 유대를 통치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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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로데 대왕이 장악한 이스라엘의 영토. 일부이긴 하지만 다윗, 솔로몬 시절에 필적할 영토를 정복했다. 이스라엘판 광개토대왕이라는 농담도 충분히 가능해질 지경이다.
그의 광대한 땅따먹기와 정복로. 그가 정복한 땅은 지금의 요르단과 시리아 일부에 달한다. 거의 현대 이스라엘 영토와 맞먹는 정도.
그의 업적은 각지에 도시를 건설하고 농업을 장려한데 있었다. 이때 헤로데에 의해 건설된 도시들을 살펴보면
  • 예루살렘에 수도시설과 헤로데궁 건설
  • 예루살렘 성전 신축
  • 마사다 정비
  • 카이사레아
  • 세바티아(옛 사마리아)
등이 있다. 이런 광범위한 건축의 재원은 유대, 사마리아, 갈릴래아 곳곳에 있던 헤로데왕의 직할 토지들의 수입, 키프로스의 구리광산, 사해의 아스팔트, 예리코의 대추야자밭 등이 있었다. 다만 클레오파트라가 사해의 아스팔트와 예리코의 대추야자밭을 탐내서 뺏으려 한 탓에 안토니우스를 의식해서 사해의 아스팔트 채굴권은 분할하고 예리코의 대추야자밭은 클레오파트라에게 소유권을 이전하고 이를 헤로데가 임대하는 형식으로 해주었다. 물론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가 패배하고 클레오파트라가 몰락하면서 알짤없이 다시 챙겼지만.
또한 유대에 흉년이 들자 이집트에서 대량의 밀을 수입해 곡물난을 해결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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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헤로데의 가장 큰 업적으로 꼽히는 것은 예루살렘 성전의 신축이다. 당시 예루살렘 대성전은 바빌론 유수때 파괴되었다가 페르시아의 용인으로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귀환 이후에 세워진 스룹바벨의 제2성전이었는데 헤로데는 제1대성전보다 초라한 규모였던 제2성전을 아예 뜯어고치고 '''초호화판 스펙타클 대신전'''을 건설한 것.[1] 당연히 목표는 솔로몬의 제1대성전의 위용 이상을 재현하는 것이었다. 이를 헤로데의 제3대성전이라 칭한다. 대리석에 벽에는 금을 바르는 등 초호화판으로 유명해서 예수의 제자들도 그 위용에 주눅들었지만 예수는 '''저거 나중에 다 불타 사라질 거야'''라고 말하면서 예언한다.[2] 어쨌든 이 초호화판 대신전은 기원전 20년부터 공사를 시작해서 기원후 60년이 되어서야 겨우 공사가 끝났다. 의외로 당시 유대인들은 이 건설을 호의적으로 보지 않았는데, 기본적으로 엄청난 세월이 걸린 만큼 백성들을 죽어라 쥐어짜는 것도 물론이었거니와, 워낙 규모가 큰 공사였기 때문에 행여나 도중에 중단되기라도 하면 그나마 있던 신전마저도 잃을지 모른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대신전 공사의 준공으로 불온한 분위기가 팔레스타인을 감싸서 결국 제1차 유대전쟁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여담으로 자기가 평생의 숙원이랍시고 80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들여 완공한 성전은 꼴랑 6년 만에 아작이 났다. 거기다 현재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유명한 이슬람의 황금 돔 사원이다.
훗날 성지가 된 마사다도 그의 작품이며, 대운하 계획도 있었다고. 특히 카이사르의 이름을 딴 카이사레아를 항구와 함께 건설했는데, 이 카이사레아는 유대 왕국 멸망후 로마 직할령의 수도(주도)가 되었다. 그는 올림픽과 로마식 원형경기장을 적극 지원했고, 그의 세력은 다마스쿠스, 안티오크, 로도스에 미쳤으며, 이집트와 지역 이권을 배분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아나톨리아크레타의 유대인의 보호자를 자처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아우구스투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안티오키아, 로도스, 다마스쿠스 등에 온갖 건축물을 지어서 기증하고 올림픽을 후원하기도 하는 등 동방에서 유력자가 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적어도 이런 엄청난 건축공사'''만''' 보면 대왕이라는 칭호가 걸맞을지도 모른다. 아니, 건축뿐만이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헤로데는 솔로몬 왕 이후 이스라엘을 처음으로 지역강국의 반열에 올려놓은 인물이다.

4. 잔혹함


그러나 헤로데는 대단히 잔혹한 군주이기도 했다. 순수 유대인이 아니라 에돔(이두매아)인 혼혈이라는 혈통과, 헤로데 이전까지 유대를 다스리던 유대인 왕가인 하스몬 왕가(마카베오)의 외척(공주 마리암의 남편, 즉 부마)[3]이었다가 왕위를 빼앗은 점 때문에 정통파 유대인들은 그를 왕으로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또 헤로데도 나름대로 안티고노스와 파르티아의 침공으로 잠시 로마까지 피신했던 나쁜 기억이 있었다.[4]
가장 큰 문제는 그에게 왕위계승의 정통성을 안겨준 왕비 마리암이었다. 헤로데는 마리암을 사랑했으나 마리암은 하스몬 왕조의 혈통을 물려받은지라 도도하기가 이를데 없었고 둘은 부부이긴 했으나 사실상 권력을 놓고 다투는 경쟁자나 다름이 없었다.
결국 헤로데와 마리암의 갈등은 폭발하여 마리암은 간통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처형되었으며, 마리암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들인 알렉산드로스와 아리스토불로스 4세도 처형되었다. 헤로데가 이들을 처형한 데에는 이들이 하스몬 왕조의 혈통이 이어지는지라 헤로데 사후에 왕위가 하스몬 계통으로 넘어갈 우려때문이었던 걸로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헤로데의 불안정한 정신상태를 여실히 드러내는 행위이기도 했다.
이후 왕위계승은 첫째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안티파트로스 2세가 유력해졌으나 헤로데는 이후 안티파트로스 2세도 아우구스투스의 동의를 구해 처형시켜버렸다. 아우구스투스는 이때 "헤로데의 아들이 되느니 헤로데의 돼지가 되는 게 낫다. '''헤로데는 적어도 돼지는 안 잡아먹을 테니까."'''[5]라고 헤로데를 비웃었다.
결국 왕위를 계승할만한 왕자는 넷째부인에게서 난 헤로데 아르켈라오스, 헤로데 안티파스, 그리고 다섯째 부인에게서난 헤로데 필립포스 2세 정도였다.

4.1. 죽음


기원 4년, 헤로데는 결국 세상을 떠났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말년의 헤로데는 대단한 병의 고통속에서 죽었다고 한다. 헤로데는 자신의 왕위는 아르켈라오스에게 물려주고 안티파스에게는 갈릴래아와 페레아, 필립포스에게는 골란 고원과 베타니아, 트라코니티스를 물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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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년 헤로데 사두정치
헤로데 아르켈라오스
헤로데 안티파스
헤로데 필립보 2세
살로메 1세
헤로데에게 질렸던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몰래 로마로 사절단을 보내 아우구스투스에게 헤로데의 아들들이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도록 간청했고 아우구스투스는 이를 받아들여서 헤로데의 세 아들들은 왕이라는 칭호 대신 통치자(개신교 성서에서는 '분봉왕')라는 칭호만을 내렸다. 이에 격분한 아르켈라오스는 이 사절단에 가담한 사람들과 그 일가족 3천여 명을 학살했고 이것이 문제가 되어 결국 기원후 6년에 유대의 통치자직에서 폐위되고 유대는 시리아 총독의 직할통치령이 된다.

5. 베들레헴의 아기들을 학살했나?


신약성서에는 헤로데가 아기 예수의 탄생과 관련되어 언급된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동방에서 유대의 왕이 태어났음을 별을 보고 알게된 동방박사[6]이 예루살렘에 와서 태어난 유대의 왕이 어디 계시느냐고 묻자 예루살렘과 헤로데가 발칵 뒤집어졌다. 다윗의 자손도 아니고 이스라엘의 후손도 아니면서 왕이 된 사람 앞에 다윗의 자손으로 알려진 유대의 왕이 어디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으니 어안이 벙벙해진 것.[7]
헤로데가 대사제장들과 서기관들을 불러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베들레헴임을 안 뒤에[8] 동방박사들에게 아기를 찾고 경배하거든 자신에게도 그곳을 알려달라고 말한다. 동방박사들은 별의 인도로 아기 예수에게 경배하고 예물을 바친다. 이후 신의 사자가 꿈에 나타나 동방박사들에게 헤로데에게 가지 말고 다른 길로 돌아가라고 명하고 이에 동방박사들은 헤로데를 만나지 않고 돌아가버린다. 아무리 기다려도 동방박사들이 돌아오지 않자 헤로데는 명을 내려서 베들레헴에서 2살 이하의 아기들을 모조리 죽이라는 명을 내리지만
성경에 따르면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다.

호세아 11:1(개역개정판)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마태복음 2:15(개역개정판)

이 예언대로 아기 예수는 그 부모와 함께 이집트로 피신하고 베들레헴의 아기들만 죽어났다는 이야기.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데, 마태 복음서를 제외하고 헤로데의 영아살해를 언급한 외부문헌으로는 (1) BC 1세기/AD 1세기 초반의 유대교 위경인 '모세의 승천'과 (2) 고대 말기의 지식을 백과사전식으로 집대성한 AD 5세기의 문법학자이자 신플라톤주의자 마크로비우스의 '사투르날리아' 제 2권 4장 11절이 거의 전부라 할 수 있다.
흔히 헤로데에 대해 일반적으로 적대적이었던 바리사이파이기도 했던 요세푸스가 이 사건을 기록하지 않은 점이 이 사건의 실제 일어나지 않았다는 증거로 제시되기도 한다. 그러나 요세푸스의 저작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당대 중요했던 사건들도 여럿 있다. 게다가 예수가 태어날 당시의 베들레헴은 도시라기 보다는 마을 수준의 인구를 가진 곳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복음서에 기록된 대로 2살 이하의 유아가 살해되었더라도 그 수는 후대의 과장된 숫자와 달리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며, 요세푸스가 특별히 주목하지 않은 것은 그런 이유일 수 있다.
위경 '모세의 승천'은 예언의 형식을 빌어 헤로데 대왕의 폭정을 고발하고 있는데, 헤로데는 특별히 "이집트인들이 히브리인들을 죽였던 것처럼" 유대인들을 죽일 것이라고 적는다. 학자들은 이 언급을 "이집트인들이 히브리인들의 태어난 남자아기들을 죽인" 이야기를 암시하는 것으로 본다. (언급되는 인물의 연대로 보아) 이 문서의 연대가 AD 1세기 초반이라면, 이 문서는 '마태 복음서'를 제외하고는 헤로데의 영아살해를 다룬 가장 오래된 문건이다.

6 Then there shall be raised up unto them kings bearing rule, and they shall call themselves priests of the Most High God: they shall assuredly work iniquity in the holy of holies. And an insolent king shall succeed them, who will not be of the race of the priests, a man bold and shameless, and he shall judge them as they shall deserve. And he shall cut off their chief men with the sword, and shall destroy them in secret places, so that no one may know where their bodies are. He shall slay the old and the young, and he shall not spare. Then the fear of him shall be bitter unto them in their land. And he shall execute judgments on them as the Egyptians executed upon them, during thirty and four years, and he shall punish them. And he shall beget children, (who) succeeding him shall rule for shorter periods. Into their parts cohorts and a powerful king of the west shall come, who shall conquer them: and he shall take them captive, and burn a part of their temple with fire, (and) shall crucify some around their colony. --- {Assumption of Moses} 6장

...[전략]...그 (=헤로데)는 늙은이와 어린이들을 죽이는데 가차없을 것이다. 그 땅에 사는 이들(=유대인들)이 그에 대한 공포로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는 이집트인들이 그들(의 조상들)에게 했듯, 34년 간 통치하며 그들을 죽이고 처벌할 것이다. 그의 자식들은 그보다 짧은 기간 동안 통치할 것이며, 서방의 강력한 군주가 쳐들어와 그 땅을 정복할 것이며, 사람들을 사로잡고, 성전을 불태우고...[후략]... 저자 미상, {모세의 승천} 6

한편, {사투르날리아} 제 2권에서 마크로비우스는 주로 키케로와 아우구스투스의 일화와 어록을 정리해 옮기고 있는데, 그 4장 11절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Cum audisset inter pueros quos in Syria Herodes rex Iudaeorum intra bimatum iussit interfici filium quoque eius occisum, ait: Melius est Herodis porcum esse quam filium, --- Macrobius, {Saturnalia}

...유대인의 왕 헤로데가 시리아에서 두 살 이하의 남아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것과 헤로데의 아들들도 같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우구스투스는) 이렇게 말했다: "헤로데의 아들(=huios / υἱός)이 되느니 차라리 헤로데의 돼지(=hus / ὕς)가 되는게 낫겠군"..." -- 마크로비우스, {사투르날리아}

아우구스투스 당시, 행정구역 상 유대아는 시리아의 일부로 여겨졌다. 마크로비우스가 전하는 아우구스투스의 발언은 그리스어로 아들/huios과 돼지/hus의 발음이 유사하다는 것을 이용한 일종의 언어유희다. 유감스럽게도 마크로비우스가 어떤 소스에서 아우구스투스의 발언을 가져온 것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마크로비우스가 기독교도가 아니었고, 또 그때까지의 어느 기독교 교부들도 아우구스투스의 이 발언을 저작 속에서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볼 때, 원 출처가 기독교 측이었다고 볼 이유는 특별히 없다.
유아학살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고 보는 시각에서는 헤로데가 자신의 왕위를 위협할 아기 예수를 죽이기 위해 베들레헴의 모든 아기들을 학살한 것은 두번째 왕비 미리암과 그에게서 난 두 아들을 죽인 이야기의 변주로 본다. 또한 마태복음에서 이 일을 예레미아서를 인용하면서 '''라마에서 아이가 죽고 라헬은 위로받기를 거절했다'''라는 예언이 일어난 것이라 해석하는 점에서 헤로데의 잔혹함과 산고끝에 죽은 야곱의 부인 라헬의 사건을 결합한 것이란 분석이 있다.

6. 평가


한국 개신교에서는 헤롯이라 변역되어 불리며. 기독교계에선 폭군으로 묘사하고 예수를 죽이려든 악마같이 대하지만 정작 이스라엘에선 대왕이라고 칭송된다. 그러다보니 신약 성경으로 헤로데 대왕을 악마같이 대하는 기독교인들이야말로 이스라엘의 적이라는 극단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7. 대중매체에서


영국 사극 ROME에서 잠깐 등장한다. 하스몬 왕조를 대체한 유대의 왕이 될 야심을 가지고 있으며 냉철한 판단력으로 을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동방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협상하여 유대의 지배권을 인정받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만 유대의 독립을 포기하고 로마의 휘하에 들어가는 것을 인정했다는 이유로 유대인 민족주의자들이 그를 보고 이를 가는 모습이 나오기도 했다.
기독교 영화 '네티비티 스토리'에서는 냉혹한 폭군으로 등장한다. 배우는 ROME에서 카이사르 역을 했던 키어런 하인즈.
붉은 추장의 몸값에선 개초딩에게 당하던 납치범 빌이 성경 속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찬양했다.
어쌔신 크리드: 오리진의 DLC 감추어진 존재들에서 암살단원 카와브에 의해 이름만 언급되었다.
[1] 제2성전은 BC 63년 경 폼페이우스를 필두로 한 로마의 침략으로 붕괴되었다.[2] 그것도 제 1성전이 붕괴한 날과 똑같은 날짜였다. 더구나 참 불쌍하게도 헤로데 왕은 완공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3] 그나마도 정략결혼으로 전처를 버리고 10대인 마리암과 결혼한 것이었다.[4] 이 때 그는 최초로 원로원에게 "유대의 왕" 칭호를 받는다.[5] 유대교는 후대의 이슬람교와 마찬가지로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여겨 먹지 않는다. 즉 헤로데의 돼지가 되면 잡아먹진 않을테니 살아남을게 아닌가라는 뜻.[6] 아마도 페르시아의 점성술사들일 것이라고 한다.[7] 이스라엘의 2대 왕 다윗과 그의 자손은 유대 역사에서 유대에 유일하게 통치권을 약속 받은 정통 왕족이라는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8] 미가서의 예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