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티 그린
미국의 여성 사업가이자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구두쇠.'''
1. 일생
1834년 11월 21일, 헤티 그린은 미국 매사추세츠주 뉴베드포드의 퀘이커교도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당시 엄청난 부자였던 고래잡이 선주였다. 태어날 때의 이름은 헨리에타 헤티 라빈슨. 부모뿐만 아니라 조부모까지 매우 엄격하게 재산을 아끼며 모아왔던 터라 어린 그녀도 이런 모습을 보고 배웠다. 2살 때부터 어머니의 건강이 나빠지자 외할아버지 밑에서 자랐는데[1] , 8살이 되자 그녀는 심부름으로 받은 용돈 5센트를 모아 은행에 저축하기 시작했고, 13살에는 집안 사업 가계부 정리를 맡았다. 10살에 초등학교를 나오고 15살에 보스턴에 있는 사립학교에 재학했으나 가까운 친구는 없었고, 그녀가 키운 개들만이 평생 가장 가까운 친구였는데, 이 때부터 그는 지독한 구두쇠로 이름이 자자했다고 한다.
21살에 헤티 그린은 9만 달러라는 거금을 유산으로 상속받았다.[2] 하지만 이 와중에 750만 달러라는 막대한 재산에서 겨우 9만 달러밖에(...) 못 받았다고 반발했다. 각주에서도 서술했듯 1855년 당시 9만 달러라는 재산은 상당한 돈이었기에 그녀의 불만은 당연히 먹히지 않았고, 이 때문에 그녀는 형제, 자매, 친척들과 죽을 때까지 원수로 지내게 되었다.
남북전쟁이 터지자 채권에 투자하고 뉴욕 월스트리트로 진출하며 재산을 계속 늘려갔다. 아버지에게 상속받은 9만 달러를 '''50여 년에 걸쳐 1000배 이상으로''' 늘렸다는 점은 엄청나다. 헤티 그린은 2007년 포브스지 선정 세계 역사 100대 부호 순위에서 16위까지 차지했으며 20세기 중순까지 1000년동안 여성 중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번 사업가였다.
그러나, 그녀가 돈을 벌면서 벌인 짓거리들을 대충 소개해도 엄청나다... 그녀의 일생을 보면 책 몇 권이 나올 법할 정도인데, 최근에는 <묻지마 돈만 벌면 다야~>라는 그녀의 행적을 찬양하는 책까지 나왔으나 그다지 인정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그녀가 벌인 행동 중에는 범죄도 수두룩했기 때문이다. 각종 세금 탈세에서부터 주변 인물들의 재산을 차지하려고 여러 위법 행위를 시도했던 것 때문에 '''월가의 마녀(Witch of the Wall Street)'''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다.
종교에 대해서도 일절 거부감을 보였고, 평생 기부조차 하지 않았다.
1.1. 전설이 된 구두쇠 짓
- 세탁비를 아끼겠다며 늘 검은색 옷만 입었고, 자식들에게도 검은 옷만 입혔다. 이러다보니 동네 아이들은 늘 검은 옷만 입는 마녀라고 그녀를 보면 겁먹고 달아나기 일쑤였을 정도이다. 아들 에드워드나 딸인 실비아는 커서 검은 옷만은 잘 입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 이유는 어릴 적에 어머니 때문에 검은 옷만 입다보니 아이들에게 마녀 집안이라고 놀림당했던 아픔이 있어서라고 치를 떨었다.
- 세금을 안 내겠다고 무려 50여 년을 집도 없이 싸구려 호텔에만 머무르는 떠돌이 생활을 했다. 심지어 그 상황에서도 숙박료를 덜 내겠다고 억지를 부리며 깎으려고 해서 숙소 주인들과 마찰을 빚곤 했다. 숙박료를 지불하고 남은 돈으로는 남은 식빵 조각들이나 찬 오트밀 죽만 먹었다. 이렇게 해서 하루에 쓰던 식비는 늘 15센트(현재가치 약 14달러)였다고 한다.
- 한 숙모가 2백만 달러 유산을 자기에게 준다고 약속했다가 자선단체에 기증하고 세상을 떠나자 이를 찾겠다며 소송을 제기했는데(...), 5년간 소송비 15만 달러를 들여 끝내 50만 달러를 받아냈다. 하지만 이후 다른 숙모인 엘리자베스 여사가 세상을 떠나자 이번에는 유언장까지 조작하여 숙모가 남긴 3백만 달러 유산을 가로채려고(참고로, 당시에 헤티 그린에게는 4000만 달러가 넘는 재산이 있었다!) 가짜 유언장을 쓰고 진짜 유언장을 빼돌렸다가 걸렸다. 이 일로 헤티는 숙모네 식구들에게 쌍욕과 난타를 당한 것은 물론, 연방법원으로부터 10만 달러 벌금형 판결까지 받았다. 그녀는 어떻게든 벌금을 안 내려고 발악했지만, 안 내면 갈수록 벌금이 올라간다고 해서 결국 어쩔 수 없이 10만 달러를 냈다. 주변 사람들에 따르면 그녀가 벌금을 낼 때 팔다리가 잘리는 듯한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고.
- 우표 값으로 2센트를 더 받았다고 가게 앞에서 밤을 새가면서 기다렸다.
- 젊은 남자들이 친절하게 대해주면 자기의 재산을 탐내는 것으로 해석하여 주의ㆍ경계를 하다가 30대 초에 에드워드 그린을 만나 결혼했다. 에드워드 그린은 20년간 동양과의 무역으로 재산을 모으고 있었기에 그녀는 마음에 들어했지만, 결국 돈이 중요했던 헤티는 결혼 계약서에서 자기 재산을 철저히 보호하기 위해, 남편의 개인 재산은 별도로 관리하며 남편이 파산하면 이혼한다는 조건으로 결혼했고, 결국 남편이 사업실패로 파산하자 주저 않고 이혼했다. 파산한 남편이 진 빚을 갚기 전에 모아둔 재산 과반수인 2600만 달러 이상 채권과 주식, 증서들을 팔지 못하게 한 법원 판결에 마지못해 70만 달러를 갚아여 했고 이후 이혼했다. 남편이 망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 남편 에드워드 헨리 그린은 당시 파산했다가 이혼한 다음에 어렵게 살아야 했다. 그래도 그녀는 남편이 1902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날 때 병수발을 맡기는 했다. 물론 병원은 안 갔다고...
- 헤티 그린은 자신이 결혼했을 때뿐만 아니라 딸이 결혼할 때도 재산에 대한 조건을 건 후에야 결혼을 허락했다. 딸 실비아가 결혼할 때, 사위가 자기 재산을 노리고 딸에게 청혼했다고 여겼기 때문에 사위가 딸의 상속권을 받지 않겠다는 조건을 걸고 결혼을 허락했다.[3] 아들 하워드는 상황이 더 좋지 않았는데, 헤티는 아들의 연인이 예전에 매춘부였다는 이유로 아예 결혼을 반대해서 두 사람은 오랫동안 결혼할 수 없었다. 결국 하워드는 어머니가 죽은 뒤인 1916년이 되어서야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 수 있었다.
- 아들 에드워드 하워드가 사고로 다리를 다치자 150달러의 치료비가 아깝다고 무료 병원만 계속 알아보다가 그런 병원을 찾지 못하자 집에서 대충 고쳤다가 결국 상처가 악화되어 파상풍 때문에 다리를 절단하게 되었다. 그런데 더 무서운 건, 아들이 한쪽 다리를 잃은 안타까운 비극이 있었음에도 아들이 다리를 짚는 데 쓸 목발까지 싸게 사려고 별 짓을 다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시점에서 그는 지금도 거액이지만 19세기에는 더 엄청난 거액인 무려 3140만 달러씩이나[4]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하워드는 당연히 어머니를 혐오했고, 나중에 독립한 후에도 평생동안 찾아가지 않았다.
- 그녀는 부스러진 쿠키를 포장 없이 떨이로 싸게 샀다가 빈 상자를 5센트에 되팔았고, 그 돈으로 값싼 우유를 찾아다녔다. 그리고 푸줏간에서 쇠고기 뼈를 얻어다가 개밥을 만들었다.
- 고리대금업도 했는데, 고리대금의 융자를 주기 전에 차용자들의 신원조사를 철두철미하게 조사했고, 원금 및 이자 납부 날짜를 정확히 기록했다. 한 번은 200달러의 빚을 받겠다고 무려 수천 마일이나 되는 먼 거리를 추적한 적도 있었을 정도이다.
- 돈을 아끼겠다고 겨울에도 더운물을 쓰지 않고 난방 없이 살았다고 이웃들은 증언했다. 추운 겨울날에는 바깥에 버려진 헌옷들을 모아 그걸 덮어서 추위를 견뎠다고 한다.
- 송사에 걸리자 헤티는 고소자들을 피하려고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떠나 살았는데, 그곳에서도 계속 미국 채권을 사들이고 투자하면서 대박을 거뒀다. 당연하지만 영국에서도 그녀의 악명높은 구두쇠 짓은 그대로였다.
1.2. 최후
이러니 사업상 교류하는 사람 빼고는 친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돈을 빌리려고 오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
자식들은 당연히 크자 죄다 독립하여 어머니와는 거의 연락을 끊고 살다시피하였고, 그에게 위안이라면 집에서 홀로 온갖 주식 관련 문서를 보면서 돈으로 마음을 달래는 것뿐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유일한 벗은 오로지 개 뿐이었다. 하지만 위에 나오듯, 그 개들에게도 푸줏간에서 내다버린 뼈만 먹였을 뿐이었다.
저러고도 만 81살까지 장수했다. 생전에 건강비결에 대하여 질문을 받았을 때, 그녀는 양파를 통째로 불에 구워 먹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여기에서 볼 수 있듯, 그녀가 살아있을 때 기자들이 붙어서 그녀를 소재로 기사거리로 다루는 일이 많았다. 기자들은 그녀가 자주 가는 시장이나 여러 가게에도 찾아갔는데, 상인들에게 그녀에 대해 질문하면 다들 터무니없이 값을 깎는 여자라며 치를 떨었다고 한다.
나이가 들면서 그녀는 탈장으로 고생했으나, 수술비 150달러를 아끼겠다며 수술을 받지 않았다. 거기에 수 차례 발병한 중풍 때문에 휠체어를 타고 다닐 정도로 고생했는데, 결국 1916년 7월 3일, 우유값을 덜 내겠다며 도매상인과 말다툼을 하다가 갑자기 쓰러져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토록 지독하게 살아왔던 것에 비하면 참으로 허망한 최후였다. 사망원인은 뇌졸중이었으나 뇌에 치매가 일부 진행된 상태였고, 실제로 늘그막의 그린은 더더욱 사람 불신에 빠져 정신불안정에 시달렸고 날 누가 독살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시달려 잠도 제대로 못 잤다고 한다. 유서는 남기지 않았다.
그가 남긴 재산은 9500만 달러로, 1916년 당시 값어치는 현재 액수로 약 22억 달러 정도, 원으로 환산하면 약 2조 4천억원인데 위키피디어 영어판에서 1억에서 2억만 달러 추산으로 더 많다고 서술되어 있다. 참고로 그가 더 못 내겠다고 하던 우유값은 고작 5센트였다.
2. 자식들의 행보
아들 에드워드 하워드 로빈슨 그린(1868~1936)은 거액을 상속받고 평생을 사치스럽게 살다 갔다. 에드워드를 백수 잉여로 보는 이들도 있으나 대학도 나와 어머니 죽을 당시 나이 50에 가까운만큼, 이미 자수성가하여 사업가로 대박을 거둬 어머니에게 유산을 받았을때는 스스로 800만 달러 이상 재산을 보유한 부자였다. 즉 백수는 커녕 어머니에게 사업가 자질도 이어받아 그도 대박을 거둔 사업가였다. 돈이 넘쳐나는데도 그 돈 때문에 다리를 하나 잃은 것에 대한 아픔을 잊고자 많은 돈을 보트, 요트, 고급 자동차, 집, 빌딩 등을 사는 데 펑펑 썼음에도 평생 돈이 부족한 적이 없었을 정도였다. 오죽하면 20년동안 실컷 쓰다가 죽어서도 남은 재산이 무려 4400만 달러에 달했다. 놀구먹은 것만 아니고 사업도 하면서 편히 지냈는데 매춘부 출신인 마벨 해먼드 할로라는 여성과 사랑에 빠졌으나 어머니가 결혼을 반대하여 어머니 죽은 다음에서야 마벨과 결혼했다.
사업가로서도 대박을 거두고 정치 당원으로도 활동하면서 평생 부족함이 없었던 그는 적어도 자신이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 장애인들에 대한 기부를 적극적으로 했고, 자신처럼 다리가 없어 의족을 쓰는 사람들을 위해 의족 연구 기금을 아낌없이 지원했으며, 가난하여 의족을 사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의족을 사서 기부하는 일을 열심히 했다. 평생을 의족을 써서 목발을 안 썼지만 죽을때 아내에게 따로 묻은 다리를 꺼내서 내 시체에서 원래 있던 자리에 널어두고 묻으라고 유언을 남겼다.
딸 해리엇 실비아 앤 하워드 그린(1871~1951)은 130만 달러만 자신이 가졌고, 나머지 재산을 전액 기부하여 도서관 및 여러 사회시설을 짓는 데 기여했다. 물론 그 130만 달러도 당시 평생동안 부족함 없이 살 수 있는 큰 돈이긴 했다. 다만 오빠인 에드워드가 먼저 아들딸없이 죽자 아직도 막대하게 남은 재산을 가지고 에드워드의 아내 마벨과 재산싸움을 벌여 대다수 재산을 차지했다. 즉 4400만 달러 오빠 재산에서 상속세 600만 달러와 마벨이 합법적으로 이어받은 50만 달러를 빼더라도 막대한 돈을 오빠를 통해 상속받았다. 에드워드는 누이동생과 사랑하던 아내 마벨에게 각각 재산 절반을 물려주라고 유언했으나 당시만 해도 아내에게 상속권이 없어서 이 유언은 무시당했다고 한다. 마벨은 적어도 남편이 유언으로 남긴 재산 1000만 달러가 넘는 막대한 돈을 상속받지 못해 암울했지만 그래도 합법적으로 상속된 50만 달러도 1930년대 당시에도 결코 적은 돈이 아니라 이 돈만으로도 평생을 조용하지만 어렵지 않게 살다가 갔다.
어찌보면 능력은 어머니가 나을지라도 인격적으로는 자식들이 더 나은 것이라고 볼수 있다.
3. 옹호와 비판
그녀에 대하여 옹호하는 측은 당시에는 여성 경제인, 사업가가 제대로 활약할 수 없던 여성차별 시대였다는 점을 주장한다. 한마디로, 헤티 그린은 남성부호들 보다 많은 재산을 축적하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에 지독한 자린고비로 살았다는 것이다. 확실히 그런 불리한 배경에서도 재산을 저렇게 늘린 그녀의 재능은 뛰어났지만, 범죄도 마다하지 않고 친아들 다리까지 잘라가며 돈을 악랄하게 아낀 점은 도저히 옹호하기 어렵다는 게 대세이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다른 이야기도 있다 사실 아들의 상처는 그 당시에는 도저히 치료가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한 병이였기에 의사가 치료를 포기했고 결국 발을 자를 수 밖에 없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아이들에게 몇백 달러씩 주면서 도와주거나 수많은 돈을 빈민들을 위해 기부했다는 것도 밝혀져서 무조건 까는 것은 불공평하다는 옹호가 있다. 그리고 그녀의 이러한 짠돌이 짓은 헤티 그린의 성장과정에서의 문제 때문이라고도 한다. 학자들에 따르면, 헤티 그린은 어릴 적 남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에 대한 지독한 컴플렉스가 있었으며, 남동생이 사망하자 자신이 건강하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어떤 사치도 허락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2000년대에 와서 여자라서 억울하게 더 악랄하게 포장되었다느니 페미니즘 시각으로 쓰인 책자도 나오고 있다. 국내에서도 정발되어 나온 책자에서 나오던 주장이 위에 서술한 거랑 비슷하다.
하지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고자 공문서 및 사문서 위조와 같은 범죄를 저질러 가며 돈을 모은 점, 이미 수천만 달러의 재산이 있었음에도 다른 친척의 수백만 달러 재산까지 가로채려고 발악하던 걸 보면 결국 욕을 먹을 수 밖에 없다.
4. 문화에서
엘러리 퀸이 쓴 소설 <할멈이 살고 있는 곳>(There was an old woman)에 나오는 여부자 코넬리아 포트가 바로 헤티 그린을 모델로 쓴 소설이다. 참고로 이 책은 <수수께끼의 038 사건>이라는 유치한 제목을 달고 해문출판사에서 해적 중역판으로 나온 바 있다. 다만 이 소설에 나온 코넬리아 포트는 적어도 노랭이는 아니고 오히려 괴짜 부인으로 악명높고 걸핏하면 고소하여 고소부인이라고 비아냥을 많이 듣던 노인네이다. 37번 고소하여 모조리 패소했는데 그 이유부터가 가관이다. 클래프 스태터라는 이름을 가진 지나가던 사람이 코넬리아 포트의 아들인 설로 포트를 알아보고 쳐다보다가 피식거렸다고 고소했다든지.... 오죽하면 37번째 패소 판결이 나자 재판장이 "법원이 무슨 놀이터인지 아십니까? 포트 부인은 돈이 많으니 이런 돈 별거 아닐지 모르지만 누구에게 급하고 중요한 돈이 나갈 법원과 재판소를 이렇게 낭비하는 일이 다시는 없기를 바랍니다!" 라고 까는 말을 할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