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귄 제프리스 모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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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seley, Henry Gwyn-Jeffreys, 1887.11.23 ~ 1915.8.10[1]
1. 개요
2. 그의 생애와 업적
3. 여담
4. 관련 문서


1. 개요


영국물리학자.[2] 박물학자인 H.N.모즐리의 아들로, 옥스퍼드 대학교의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하고, 1910년 맨체스터 대학 강사로 있었다.

2. 그의 생애와 업적


그가 대학 강사로 있을 때 E. 러더퍼드의 지도로 X선 연구를 하였다. 연구 초기에는 라듐 B 및 라듐 C의 원자 1개의 붕괴에 의해서 방출되는 알파 입자 평균 개수의 측정 등에 관한 실험을 하였다.
그러다 M.라우에의 X선 산란(散亂) 실험에 흥미를 가지게 되어, 친구 C.G.다윈과 협력하여 X선 산란 연구를 시작, 특성 X선의 연구결과 '모즐리의 법칙'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여러 원소의 특성X선 스펙트럼을 실험적으로 연구하여 그 파장과 원자번호 사이에 간단한 관계(파장의 제곱근이 원자번호에 반비례)가 성립한다는 것을 발견한 것으로서 원자구조론에 크게 기여하고 현대 주기율표 자체의 이론상 근거가 된다. 또한, 주기율상의 미발견원소의 확인, 미측정 스펙트럼의 파장 예측 등 X선 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공병 장교로 자원 입대하였으며,[3] 1915년에 하필 '''갈리폴리 전투에 투입되어''' 그곳에서 전사하였다.
비운의 천재는 실로 많지만, 이놈의 전쟁이 죽인 참 아까운 사람 중 하나. 살아있었다면 분명 노벨상을 받았을 것이다(...). 관련된 연구주제를 연구한 다른 학자들은 전부 노벨상을 받았다. 더구나 윈스턴 처칠오스만 제국에 팔기로 한 애진코트를 꿀꺽하지만 않았어도 오스만과의 전쟁은 없었을지도 모르고, 또 처칠의 뭐같은 작전만 아니었어도 영국군이 갈리폴리에서 1차 대전 중 최악의 패전이라는 굴욕을 찍지 않았을지도 모르니 모즐리도 안 죽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거 보면 꼭 신성한 국방의 의무니 만인의 평등이니 하는 것들을 강조하면서 누구나 다 군대를 보내야 하는지 가끔 회의가 드는 사람도 있을듯. 그래도 징병제 실시 국가에서 이공계 병역특례 도입은 모즐리의 죽음도 한 가지 원인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여담으로, 효모와 발효를 연구한 독일의 에두아르트 부흐너(Eduard Buchner,1860~1917)도 1차대전에 종군하다 전사했는데, 모즐리는 젊기라도 했지 이 사람은 요즘 기준으로도 나이 지긋한 대학교수였다. 1차 세계대전은 아직 근대 귀족문화가 남아 있던 시대여선지 귀족과 고위 정치인, 각 분야의 유력 인사들이 참전해 일선에 배치되거나 전사한 사례가 여럿 있다. 영국 작가인 사키도 1차대전 당시, 40대 중순 나이에 자원하여 참전해 저격당해 전사했으며 이세계로 가는 현대 소설 시발점으로 평가되는 이계의 집 원작자인 영국 작가 윌리엄 호프 호지슨도 자원하여 참전해 역시 1차대전 막판인 1918년에 41세 나이로 전사하며 후대에 문학적으로도 타격을 주었다. 아인슈타인 방정식의 일부 해를 구했던 독일의 물리학자 슈바르츠실트 또한 40대의 나이에 포병장교로 참전했다가 동부전선에서 천포창이라는 피부병에 걸려서 죽었다.
모즐리를 아꼈던 스승 러더퍼드는 모즐리의 전사 통지를 받고는 "이것이 제1차 세계 대전영국에 입힌 최대의 타격"이라며 크게 슬퍼했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듣고 처칠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과학 기술의 꿈나무들이 전쟁에서 죽는 꼴을 볼 수 없다"라고 한 것이 현재의 전문연구요원 제도의 시작이라고 한다.

3. 여담


모즐리의 모교인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의 물리학과에는 '모즐리의 저주'라는 말이 있다. 앞서 설명한 대로 노벨상 수상이 확실시 되었으나 일찍 전사하는 바람에 원통하게 노벨상을 받지 못한 모즐리의 한맺힌 저주(?) 때문에 옥스퍼드 물리학과에서는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지 못한다는 내용이다.
아닌게 아니라 요상한 것이 영국 내에서 옥스퍼드는 케임브리지와 쌍벽을 이루는 명문대학이라서 학생의 수준이나 연구비 지원, 학교 시스템이 케임브리지와 별반 다르지 않은데도 20세기 동안 케임브리지 물리학과에서 수십명의 노벨물리학상 수상자가 배출되는 동안 옥스퍼드 물리학과에서는 신기할만큼 수상자가 1명도 없었다.[4] 일반적으로 옥스퍼드는 문과 쪽이 강하고 케임브리지는 이과 쪽이 강하다는 것을 고려하더라도, 화학이나 생물학(+의학) 분야에서는 옥스퍼드 출신 노벨상 수상자가 (케임브리지 만큼은 아니지만) 수십명 배출되었고, 영국내 다른 대학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도 결코 적지 않으며, 옥스퍼드 물리학과가 유별나게 수준이 낮거나 망한 것도 아니어서 졸업생 가운데 노벨상만 못 받았지 노벨상 바로 직전까지 가는 수준의 권위자들이 득시글거렸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확실히 저주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묘한 현상이었다.
모즐리의 저주는 거의 한 세기가 지나서야 2003년에 옥스퍼드 물리학과에서 학사부터 박사과정까지 전부를 공부한 앤서니 레깃 경이 노벨 물리학상을 받으면서 깨어졌다.

4. 관련 문서



[1] 하이탑 화학Ⅰ교재나 천재 교과서 등 여러 고등학교 화학 책에도 이 사진이 있다.[2] 화학자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물론 이 사람의 연구가 현대 화학의 발전에 지대한 공을 끼치긴 했지만 본인은 물리학자로서 물리학 연구를 한 것이기 때문에 물리학자라고 부르는 것이 맞을 것이다.[3] 헬리콥터 조종사로 입대했다는 말도 있지만, 그 시기에는 극히 원시적인 형태의 헬리콥터만 존재했던 것을 고려하면 잘못된 정보일 가능성이 높다. 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느려터진 복엽, 삼엽기들이 날아다니던 시대였고 헬리콥터가 본격적으로 전장에 투입되기 시작한 건 6.25 전쟁 부터다.[4] 물론 이건 학생으로서 옥스퍼드 물리학과를 졸업한 사람으로 한정했을 때 이야기다. 포닥이나 방문 연구자까지 고려하면 노벨물리학상 수상자가 여럿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