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진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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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MS Agincourt'''
1. 제원
2. 개요
3. 건조
4. 주인이 바뀌었어요
5. 주인이 또 바뀌었어요
6. 퇴역까지
7. 미디어에서


1. 제원


기준배수량
27,850톤
만재배수량
30,860톤
전장
204.7 m
전폭
27.1 m
흘수선
9.1 m
보일러
Babcock & Wilcox 22기
터빈
Parsons기어드터빈 4기 4축
출력
34,000 마력
최고속도
22노트
주무장
BL Mk.XIII 12인치 2연장 함포 7기 14문
부무장
BL Mk.XIII 6인치 단장 양용포 20문
기타무장
3인치 단장포 10문
현측장갑
229 mm
갑판장갑
25 ~ 64 mm
포탑장갑
203 ~ 305 mm
바벳장갑
51 ~ 229 mm
함재기
없음
승무원
1,268명

2. 개요


함명인 애진코트(Agincourt)는 백년전쟁 당시 영국군의 대승리 중 하나였던 아쟁쿠르 전투에서 기원한 것이다. 아쟁쿠르는 프랑스 지명이고 이걸 영어로 읽은 게 애진코트. 이 함명이 붙은 영국 해군 함선은 역사상 총 5척(건조 취소된 경우까지 6척)이며, 이 항목에서 설명하는 것은 그중 가장 유명한 1914년에 취역한 전함이다. 현재에는 동명의 아스튜트급 공격원잠의 함명이 예정되어 있다.
나무위키 특성상 함급이면 몰라도 정말 유명한 함선, 가령 야마토급 전함 같은 함선조차도 특정 함선에 대한 항목이 개설되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HMS 애진코트는 말 그대로 기구한 운명을 지닌, 거기에 본의 아니게 역사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친 배이기에 따로 항목을 개설한다.[1]

3. 건조


1905년 그때까지의 모든 기술을 총집합시켜 만든 새로운 형태의 전함 드레드노트의 출현은 기존 유럽 열강국가 간의 건함 경쟁만 부추긴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20세기 초 남미는 전통의 3대 강국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가 각각 지역 패권을 둘러싼 경쟁을 펼치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유럽 수준의 미칠 듯한 경쟁은 아니었지만 매우 치열한 건함 경쟁이 이루어졌는데 이를 ABC(Argentia, Brazil, Chile) 건함 경쟁이라 불렀다. 그리고 드레드노트의 등장으로 비싸지만 제값 하는 이 결전병기의 확보는 건함 경쟁에서 확고한 우위를 선다는 상징성을 갖고 있었기에 삼국 모두 드레드노트급 신형 전함을 확보하길 희망했다.
  • 브라질은 1910년에 12인치 주포 12문을 장비한 미나스제라이스급 전함 3척을 영국에게 발주하여 그중 2척('미나스제라이스(Minas Geraes)', '상파울루(São Paulo)')을 도입했고 아르헨티나는 1914~15년에 걸쳐 리바다비아급 전함[2] 2척('리바다비아(ARA Rivadavia)', '모레노(ARA Moreno)')을 미국으로부터 도입했으며 칠레는 1911년에 영국에다 14인치 주포 10문을 장비한 초드레드노트급 전함 2척('알미란테라토레(Almirante Latorre)', '알미란테코크라네(Almirante Cochrane)')을 주문했지만 1차대전 발발로 영국이 매수했고[3] 1920년에서야 알미란테라토레 1척만을 인수해 1척을 보유하게 된다.[4]
그중 가장 적극적인 것은 브라질이었는데, 1910년대 초 커피와 목재, 고무의 수출로 경제적 호황을 맞고 있던 브라질은 라이벌 아르헨티나가 미국에 리바다비아급 전함 2척을 발주하자, 해군력의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미나스제라이스급 3번함의 건조를 맡은 암스트롱 사에게 아직 건조되지 않은 3번함의 건조 계약를 취소하고 당시 막 등장한 전함이자 기존의 드레드노트급보다 더욱 강력한 초드레드노트급 전함의 건조를 의뢰했다. 이에 암스트롱 사는 브라질의 의뢰를 받아들여 1911년 9월 14일 새로운 전함의 건조에 들어갔다.
당시 브라질 정부가 의뢰한 새 전함은 영국 해군이 건조하던 초드레드노트급 전함인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의 설계를 기반으로 하였으나 아무래도 수출용이다 보니 많이 다운그레이드되었다. 대표적으로 주무장이 퀸 엘리자베스급이 2연장 15인치 주포 4기인데, 수출용 전함은는 2연장 12인치 주포 7기이다. 다만, 이는 충분히 납득 가능한 다운그레이드인데 15인치급 주포는 열강국가 간의 전함 간 해전에서나 의미있는 거라 아직 경쟁국인 아르헨티나와 칠레가 드레드노트급 전함을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 12인치로도 충분히 의미있고 막강한 화력이었다. 새 전함은 이 전함을 건조하기 위해 취소한 미나스제라이스급 3번함 '리우데자네이루(Rio de Janeiro)'의 이름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4. 주인이 바뀌었어요


건조가 착실히 진행되던 1913년, 영국과 암스트롱 사로선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신규 전함을 발주한 고객인 브라질 정부가 '''디폴트'''를 해버린 것이다! 브라질은 무리한 군사경쟁과 함께, 자원 수출에 의존하는 경제의 한계에 봉착해서 재정적으로 어려움에 빠진 상태로, 결정적으로 1913년, 발칸 전쟁 이후 불어닥친 불황으로 인해 브라질의 주요 수출 품목이던 커피고무, 특히 고무의 국제가격이 폭락하여[5] 그야말로 망한 상태였다.
영국 정부가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고객이 돈이 없다고 배째는데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영국 해군이 이를 인수하기엔 아무래도 주포가 다운그레이드된 것도 있는 데다 평시에 갑자기 예정에도 없는 함선 인수 비용을 요구하면 의회에서 이를 허용하지 않을 것임이 명백했다.
이런 상황에서 암스트롱 사에 구세주가 나타났으니 그 구세주는 바로 오스만 제국이었다. 예산 확보 미비, 기존 군함의 관리 미비, 근대식 수병의 양성 미비 등로 인해 1870년대부터 오스만 제국의 해군은 그야말로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1890년대에 들어서야 해군 전력의 약화 문제를 인식한 오스만 제국은 해군의 중요성을 깨닫고[6] 1910년 독일로부터 퇴역한 전드레드노트급 전함인 브란덴부르크급 2척을 구매하였으며 1911년 영국 비커스 사에게 레샤디에급 전함 2척[7]을 발주하였다.
그러나 전드레드노트급 전함을 확보하였음에도 오스만 해군은 곧바로 벌어진 발칸 전쟁에서 피사급 장갑순양함 '요르요스 아베로프(Θ/Κ Γεώργιος Αβέρωφ)'를 앞세운 그리스 해군에게 또다시 털렸으며[8] 에게 해와 마르마라 해의 제해권을 내주면서 패전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에 오스만 제국은 전드레드노트급으로는 그리스 해군을 상대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드레드노트급을 구매하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당시 영국과 독일이 주도한 건함 경쟁으로 인해 중고함 매물이 없었고, 시간과 예산을 많이 잡아먹는 대형 전함, 특히 시간과 예산을 더 많이 잡아먹는 드레드노트급을 발주하고 설계에 들어가고 건조에 들어가서 진수하고 취역시키고 인도받기까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소요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이 상황 속에서 오스만 제국에게 있어 느닷없이 주인을 잃고 방치된 리우데자네이루는 알라가 내려준 축복이었다.
이에 오스만 정부는 바로 브라질 정부 및 암스트롱 사와 협상을 개시, 차관을 빌리고 성금까지 모아가며 전함 구매 예산 275만 파운드를 확보하고 이를 지불, 1914년 1월 리우데자네이루 구매 계약을 완료하였다. 이때 함명은 브라질이 명명한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오스만 제국이 명명한 '술탄 오스만 1세(Sultan Osman-ı Evvel)'로 바뀌었다.[9]
건조는 착실히 진행되었고, 해가 바뀌어 1914년 여름 오스만 제국은 엄선한 정예 해군요원들을 영국에 파견했다. 술탄 오스만 1세와 기존에 주문한 레샤디예급 1번함 레샤디예, 2척을 인도받기 위해서였다. 마침내 근대적인 신형 전함을 확보할 수 있다는 사실에 오스만 제국은 희망으로 가득차 있었고, 반면 주변국, 특히 그리스는 오스만이 자신들보다 먼저 드레드노트급 전함, 그것도 초드레드노트급과 거의 동급의 전함을 확보했다는 사실에 절망에 빠져 있었다.[10]

5. 주인이 또 바뀌었어요


그런데 오스만 제국 해군 장교들이 배를 인수받을 준비 다 하던 1914년 여름의 유럽 정세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사라예보 사건을 시발점으로 7월 28일,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8월 1일에는 독일이 러시아에, 그리고 8월 3일에는 독일이 프랑스에 선전포고하고 중립국 벨기에를 침공하면서 전 유럽은 걷잡을 수 없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이때 술탄 오스만 전함이 정박 중이던 영국은 프랑스, 러시아 맺은 삼국협상과 동시에 벨기에의 중립을 보장한 상태였는데 독일이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고 동시에 벨기에 침공하면서 영국도 독일과의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그런데 당시 독일은 영국과 건함경쟁을 표방하며 영국해군과 비등한 해군을 보유했다고 알려져 있었다.[11] 이런 상황을 두고 영국의 해군성 장관이던 '''윈스턴 처칠'''은 급격히 성장한 독일 해군과의 결전을 앞두고 단 1척의 전함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좋은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슈퍼드레드노트급 전함인 술탄 오스만 1세가 오스만 제국에게 인수된다는 것에 주목했다.
이에 처칠은 즉시 해군 병력을 보내어 술탄 오스만 1세에 이미 승함한 상태였던 오스만 해군 인수요원들을 다 강제로 퇴함시키고 배를 점거, 영국 해군기를 게양하고 영국 해군 선적에 편입시켰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미 '''오스만 제국은 배값을 100% 다 지불한 상태였다'''. 당연히 오스만 제국은 이에 격분하면서 강력히 반발하여 항의했으나, 처칠은 쿨하게 '''"그까이거 임대료 주면 될 거 아님?"''' 하면서 1일에 1000파운드를 제안했으나 전함 가격 2,750,000 파운드 + 인도 지연으로 인한 전력 공백을 생각하면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거기다가 처칠은 단순히 배가 필요해서 뺏은 것뿐만이 아니라, "유럽에서 세계 대전이 터진 상황에서 오스만을 잠재적인 가상의 적국으로 단정하고 전함을 넘길 수 없다."라는 의지로 배를 압류한 거라서 오스만의 항의는 전혀 먹히지 않았다.
당시 전함의 위상은 적국전함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동급 이상의 전함으로 대응해야 했다. 즉, 오스만 제국이 전함 2척을 인수한 후 적국이 되면 오스만의 전함들을 견제하기 위해 영국은 최소 3~4척의 전함을 동지중해에 배치하고 상당한 감시전력을 전개해 오스만 전함들의 동향을 감시해야 하므로 처칠의 오스만 전함 강탈은 전함전력 증강과 쓸데없는 전력분산의 가능성을 없앤다는 명목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1차대전 개전 당시 이탈리아는 독일과 (일단은)동맹(오스트리아와 감정이 있어 개전 초기에 참전하지 않았고 나중엔 영/프의 설득으로 오히려 독/오에 선전포고하지만...)이었다. 프랑스는 청년학파 등의 영향으로 전함전력이 부실했고 결국 지중해에서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의 전함들에 대응하기엔 프랑스 단독으론 역부족이고 지중해 제해권(브리튼-이집트-인도-호주로 이어지는 영국 해양제국을 지키려면 지중해는 필수였다. 수에즈운하가 있는 이집트가 차단되는 순간 영국은 인도를 상실한다.)을 확실히 하려면 영국은 세계 2위의 해군력을 가진 독일 해군에 대응하기 위해 본토로 집결시킨 대함대중 상당한 전력을 지중해로 차출시켜야 한다. 이런 조급함으로 오스만의 전함을 강탈한 것이고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감정이 많던 이탈리아를 삼국동맹에서 이탈시켜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면서 이탈리아 함대를 이용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함대를 견제함으로써 지중해 제해권을 확보하고 독일 해군이 감히 영국 본토 함대에 도전하지 못하게 억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오스만은 친독파와 친영파가 갈라져서 대립을 하고 있던 상황으로, 처칠의 생각과는 다르게 독일의 잠재적인 동맹국이라고 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오스만 여론이 급격히 친독으로 기운 것은 전적으로 처칠의 전함 강탈 덕분이었다. '''적국에게 돈을 주고 무기를 사오는 바보는 없다'''는 점에서 처칠의 삽질이 맞다.
그리고, 이 꼬라지를 보고 있던 독일의 빌헬름 2세는 마침 영국 해군에게 추적당해 오스만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에 숨어있던 독일 제국 해군의 몰트케급 순양전함 '괴벤(SMS Goeben)', 경순양함 '브레슬라우(SMS Breslau)' 함과 그 승조원들을 오스만 제국에 선물하겠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했고, 괴벤 함은 '야부즈 술탄 셀림(Yavuz Sultan Selim)', 브레슬라우는 '미딜리(Midilli)[12]'라는 함명으로 정식 오스만 해군 전함이 되었다. 그리고 오스만 정부는 영국에게 뒷통수를 맞은 것을 복수하기 위해서 독일과 동맹을 맺고 영국에다 선전포고를 하고 참전한다고 흔히 알려졌다.
보다 정확히 그 내역을 살펴보면, 처칠의 삽질로 인해 여론이 반영친독 쪽으로 기울었음에도 오스만 정부는 여전히 중립을 지키려고 시도하였다. 그리고 독일이 일방적으로 공여한 2척은 선적만 오스만으로 옮겼을 뿐 함장도 독일인, 승조원도 독일인. 지휘도 독일 해군의 지휘를 받은 사실상 독일 전함 그대로였다. 이 2척이 나머지 오스만 함대를 멋대로 이끌고 세바스토폴오데사, 노보로시스크흑해의 러시아 항구들을 기습적으로 공격하면서 분노한 러시아가 오스만에게 선전포고, 이에 친독파였던 오스만의 실권자 이스마일 엔베르가 술탄을 겁박해 참전 선언을 하게 만들면서 오스만은 반강제로 전쟁에 뛰어들게 된다. 그리고, 야부즈는 1971년까지 터키 공화국 해군이 쓰다 퇴역시켜 최장수 순양전함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결국, 처칠이 우려하던 최악의 상황을 처칠이 스스로 자초한 셈이다. 그리고 1차대전 중 영국은 독일의 편으로 돌아선 오스만 제국으로 인해 자그마치 260만이라는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야 했으며[13] 갈리폴리 전투라는 세계 전쟁사에 길이남을 삽질을 벌여야만 했다.[14]
어쨌든 1914년 8월 20일, 우여곡절 끝에 '리우데자네이루'는 '술탄 오스만 1세'를 거쳐 다시 'HMS 애진코트'로 이름을 바뀌어 정식으로 취역한다. 또한 '술탄 오스만 1세'와 같이 인수할 예정이던 레샤디예급 전함 1번함 '레샤디예' 역시 '술탄 오스만 1세'와 마찬가지로 영국한테 강탈당해 'HMS 에린'이라는 이름으로 취역한다. 그리고 2번함 '파티흐 술탄 메흐메트'는 막 건조에 들어간 상태였는데 전쟁이 터지면서 자연스럽게 건조가 취소되었고 나머지 잔해는 스크랩 처리된다.
그리고 영국은 이런 함선 매입을 칠레에게도 또 행한다. 칠레는 영국에게 알미란테 라토레급 전함(알미란테 라토레, 알미란테 코치라네)을 2척 주문했는데, 이중 1번함 알미란테 라토레는 1차대전 발발 당시 거의 완성이 다 된 상태였다. 이걸 영국이 가져간 것이다. 다만 이 때는 함선을 재매입하는 형태로 구입금을 모두 환불해서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이 함선이 캐나다급 전함이다. 2번함은 전쟁으로 인해 건조를 중단했다가 1918년에 마찬가지로 영국이 구입해서 이글급 항공모함으로 바뀌었다.

6. 퇴역까지


이후 스캐퍼 플로에 배치되어 제1차 세계 대전의 한복판에 섰으나 독일 해군이 함대결전을 회피한 관계로 실전은 딱 1번뿐인데 그 1번은 바로 세계 최대의 해전이라는 유틀란트 해전. 여기서 애진코트는 독일군 순양함들과 교전하며 어느 정도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종전 후에도 몇 년간 현역으로 남아 있었으나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으로 전함들을 대거 폐기처분해야 할 처지에 놓이자 폐함처분되었다. 15인치급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들을 지키기 위해 12인치급이었던 애진코트는 최우선적으로 희생된 셈이다.

7. 미디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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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오브 워쉽 블리츠 에서 영국 5티어 프리미엄 전함으로 등장한다.
전함소녀에서도 등장한다.

[1] 소련의 강구트급 전함 마라도 별도 항목이 있긴 하다. 물론 마라 역시 함생이 지독하리만큼 기구하다. 아니, 어떻게 보면 이쪽이 더 기구한 팔자다. 적어도 애진코트는 두 번씩이나 적의 공격에 가라앉지는 않았다. 자세한 내역은 마라 항목을 참고.[2] 12인치 주포 12문으로 미나스제라이스급과 대등하지만 장갑과 속도가 더 우수하다.[3] 알미란테라토레는 '캐나다(HMS Canada)', 알미란테코크라네는 '이글(HMS Eagle)'로 개칭하였다.[4] 알미란테코크라네는 전쟁 당시 항공모함의 가능성을 시험하던 영국 해군이 항공모함으로 개장했기 때문에 인수받을 수 없었다.[5] 여기에는 동남아에서 영국이 경영하는 고무 플랜테이션으로 인해 브라질의 고무 독점이 깨져버린 것도 한몫했다.[6] 1897년 그리스와 벌인 크레타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은 군사적으로는 승리를 거두었으나 해군에서는 그리스 해군에게 말그대로 탈탈 털렸다.[7] 킹 조지 5세급 전함을 기반으로 하였으나 여러가지 개수가 있었기 때문에 오스만은 '레샤디예급'이라고 불렀으며 함명은 각각 '레샤디예(Reşadiye: 당시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5세의 별칭)'와 '파티흐 술탄 메흐메트(Fatih Sultan Mehmed)'였다.[8] 엘리 해전과 렘노스 해전에서 오스만 해군은 요르요스 아베로프 단 한 척에게 정자전법을 허용해 큰 맘 먹고 산 브란덴부르크급 2척이 큰 피해를 입는 등 제대로 굴욕을 찍었다.[9] 그리고 리우데자네이루를 팔아치운 브라질은 다른 초드레드노트급 전함을 암스트롱 사에게 의뢰했고 암스트롱 사는 '히아셸루(Riachuelo)'라는 이름의 새 전함의 건조를 시작하였으나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결국 계약이 취소되었다.[10]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그리스는 독일에게 드레드노트급 전함 '살라미스(Θ/Κ Σαλαμίς)'를 발주하였으며(건조 도중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여 결국 계약이 취소되었다) 미국으로부터 전드레드노트급 전함인 미시시피급(12인치 주포 4문 장비) 2척('미시시피(USS Mississippi (BB-23))', '아이다호(USS Idaho (BB-24))')를 도입했다(2척은 각각 '킬키스(Θ/Κ Κιλκίς)'와 '림노스(Θ/Κ Λήμνος)'로 개명했으며 미국은 2척의 매각 대금으로 뉴멕시코급 전함 3번함 '아이다호(USS Idaho (BB-42))'를 건조했다).[11] 후대의 연구에 따르면 독일 해군의 규모는 당시 영국해군의 절반에도 못미치는 규모였고, 때문에 건함경쟁은 외교적 허세라는 해석이 강하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빌헬름 2세(독일 제국) 문서 참조[12] 그리스 레스보스 섬의 터키어 명칭.[13] 주요전장인 서부전선에 동원한 영국군이 약 540만이었다[14] 갈리폴리 전투는 터키의 입장에서는 구국의 승전이자 영국의 굴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