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무트 뷔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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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전 초기 독일 공군의 에이스로 유명한 헬무트 파울 에밀 뷔크(Helmut Paul Emil Wick : 1915년 8월 5일~1940년 11월 28일) 소령은 곡엽기사철십자장을 전군에서 4번째로 수상한 군인으로 당시 독일 전국민을 열광하게 만든 전쟁 영웅이었다. 이 훈장은 뷔크가 받을 때만 하더라도 독일군에서 최고 등급의 훈장이었다.
1915년 8월 5일에 만하임에서 기술공 칼 뷔크의 세 자식 가운데 막내 아들로 태어난 뷔크의 가정은 전근이 잦은 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남아프리카의 나미비아, 로르바흐, 하노버를 전전했다. 1922년에 그의 어머니 베르타 뷔크가 세상을 떴고 또다시 단치히와 쾨니히스베르크로 옮겨다니면서 생활했지만, 그 무렵 1차 대전의 패배로 빈곤에 허덕이던 다른 가정과는 달리 적어도 금전적으로는 큰 부족함이 없이 자랐다고 한다. 소년 뷔크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철로나 교량 공사를 감독하던 것을 가끔 지켜보면서 독일 곳곳을 기차 여행을 하면서 자라났다. 1935년에 베를린에서 김나지움을 마친 그는 또래의 청년들 상당수가 그랬던 것처럼 나치즘과 히틀러에게 마음을 빼앗겼고, 장차 자신의 진로를 군인의 길을 걷기로 결정한다.
뷔크는 1936년에 드레스덴에서 독일 공군에 입대했다. 2년 후에 엄격한 전투기 조종사 훈련을 모두 마친 뷔크는 JG 2 리히토펜 비행단에 배치되었다. 얼마 후 프랑스 전선과 영국 본토 항공전에 참가한 뷔크는 눈부신 전공을 발판삼아 1940년 10월에는 소령으로 고속 승진했다. 전임 지휘관인 해리 폰 뷜로우-뷔스캄프와 볼프강 슈넬만(Wolfgang Schellmann)을 대신하여 JG 2 지휘관으로 임명된 약관 25세의 젊은 장교 뷔크는 독일군 내에서 최연소 소령과 최연소 항공단장이 되는 진기록을 세우며 출세가도를 달렸다.
헬무트 뷔크는 1940년 11월 28일 와이트섬 상공에서 그와 닮은 점이 아주 많았던 영국 에이스 존 던다스(John Dundas)에게 격추당해 실종 처리됐다. 이때까지 뷔크는 56대 격추를 헤아리고 있었고 이것은 당시 독일 전투기 파일럿 중에서도 단연 최고의 기록이었다. 뷔크의 뒤를 베르너 묄더스와 아돌프 갈란트가 바짝 쫓고 있었는데, 그 무렵 독일에서는 이 세 파일럿들을 가리켜 공군 전투기 조종사 트로이카로 부르며 열광했었다. 실전에서는 메셔슈밋 Bf 109E 전투기만 탑승했던 뷔크는 모든 격추를 최고의 장비와 실력으로 정평이 났던 영연방 공군기를 상대로 기록했다.
1940년 11월 28일, 독일 최고의 에이스 헬무트 뷔크 소령과 영국 공군의 에이스 존 던다스 중위는 와이트섬 상공에서 오직 한 사람밖에 살아남을 수 없는 숙명적인 결투를 벌였다. 그때까지 56기를 격추시킨 25세의 헬무트 뷔크는 두말할 나위없는 독일이 낳은 최고의 전투기 조종사였다. 이에 맞서게 된 상대인 영국 공군 609 비행대(RAF Squadron 609)의 존 C. 던다스 중위 역시 뷔크와 동갑인 25세로 그때까지 도버 해협에서 12대를 혼자서 격추시키고 2기 협동 격추, 4기 추정 격추, 그리고 5기 중파 기록을 갖고 있는 영국군 최고의 에이스 중 하나였다.
던다스는 격렬한 교전 끝에 뷔크의 꼬리를 무는데 성공하고 그를 영불 해협에 수장시켰지만, 잠시 후 던다스가 타고 있던 스핏파이어 역시 뷔크의 윙맨인 루돌프 프란츠(Rudolf Pflanz) 대위의 Bf 109에 격추되고 말았다. 이렇게 독일과 영국의 두 에이스는 바다속으로 사라졌고, 전투 중 실종(Missing In Action) 처리되고 만다.
뷔크의 윙맨이자 복수를 해주었던 프란츠 대위는 그로부터 1년 반 후인 1942년 7월 31일에 프랑스 상공에서 영국 121 비행대(121 Squadron)의 스핏파이어 전투기에 격추당했다. 그때까지 프란츠 대위는 52기 격추를 기록하고 있었다.
1. 개요
개전 초기 독일 공군의 에이스로 유명한 헬무트 파울 에밀 뷔크(Helmut Paul Emil Wick : 1915년 8월 5일~1940년 11월 28일) 소령은 곡엽기사철십자장을 전군에서 4번째로 수상한 군인으로 당시 독일 전국민을 열광하게 만든 전쟁 영웅이었다. 이 훈장은 뷔크가 받을 때만 하더라도 독일군에서 최고 등급의 훈장이었다.
2. 유년 시절
1915년 8월 5일에 만하임에서 기술공 칼 뷔크의 세 자식 가운데 막내 아들로 태어난 뷔크의 가정은 전근이 잦은 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남아프리카의 나미비아, 로르바흐, 하노버를 전전했다. 1922년에 그의 어머니 베르타 뷔크가 세상을 떴고 또다시 단치히와 쾨니히스베르크로 옮겨다니면서 생활했지만, 그 무렵 1차 대전의 패배로 빈곤에 허덕이던 다른 가정과는 달리 적어도 금전적으로는 큰 부족함이 없이 자랐다고 한다. 소년 뷔크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철로나 교량 공사를 감독하던 것을 가끔 지켜보면서 독일 곳곳을 기차 여행을 하면서 자라났다. 1935년에 베를린에서 김나지움을 마친 그는 또래의 청년들 상당수가 그랬던 것처럼 나치즘과 히틀러에게 마음을 빼앗겼고, 장차 자신의 진로를 군인의 길을 걷기로 결정한다.
3. 독일 최고의 격추왕
뷔크는 1936년에 드레스덴에서 독일 공군에 입대했다. 2년 후에 엄격한 전투기 조종사 훈련을 모두 마친 뷔크는 JG 2 리히토펜 비행단에 배치되었다. 얼마 후 프랑스 전선과 영국 본토 항공전에 참가한 뷔크는 눈부신 전공을 발판삼아 1940년 10월에는 소령으로 고속 승진했다. 전임 지휘관인 해리 폰 뷜로우-뷔스캄프와 볼프강 슈넬만(Wolfgang Schellmann)을 대신하여 JG 2 지휘관으로 임명된 약관 25세의 젊은 장교 뷔크는 독일군 내에서 최연소 소령과 최연소 항공단장이 되는 진기록을 세우며 출세가도를 달렸다.
헬무트 뷔크는 1940년 11월 28일 와이트섬 상공에서 그와 닮은 점이 아주 많았던 영국 에이스 존 던다스(John Dundas)에게 격추당해 실종 처리됐다. 이때까지 뷔크는 56대 격추를 헤아리고 있었고 이것은 당시 독일 전투기 파일럿 중에서도 단연 최고의 기록이었다. 뷔크의 뒤를 베르너 묄더스와 아돌프 갈란트가 바짝 쫓고 있었는데, 그 무렵 독일에서는 이 세 파일럿들을 가리켜 공군 전투기 조종사 트로이카로 부르며 열광했었다. 실전에서는 메셔슈밋 Bf 109E 전투기만 탑승했던 뷔크는 모든 격추를 최고의 장비와 실력으로 정평이 났던 영연방 공군기를 상대로 기록했다.
4. 숙명적 결투
1940년 11월 28일, 독일 최고의 에이스 헬무트 뷔크 소령과 영국 공군의 에이스 존 던다스 중위는 와이트섬 상공에서 오직 한 사람밖에 살아남을 수 없는 숙명적인 결투를 벌였다. 그때까지 56기를 격추시킨 25세의 헬무트 뷔크는 두말할 나위없는 독일이 낳은 최고의 전투기 조종사였다. 이에 맞서게 된 상대인 영국 공군 609 비행대(RAF Squadron 609)의 존 C. 던다스 중위 역시 뷔크와 동갑인 25세로 그때까지 도버 해협에서 12대를 혼자서 격추시키고 2기 협동 격추, 4기 추정 격추, 그리고 5기 중파 기록을 갖고 있는 영국군 최고의 에이스 중 하나였다.
던다스는 격렬한 교전 끝에 뷔크의 꼬리를 무는데 성공하고 그를 영불 해협에 수장시켰지만, 잠시 후 던다스가 타고 있던 스핏파이어 역시 뷔크의 윙맨인 루돌프 프란츠(Rudolf Pflanz) 대위의 Bf 109에 격추되고 말았다. 이렇게 독일과 영국의 두 에이스는 바다속으로 사라졌고, 전투 중 실종(Missing In Action) 처리되고 만다.
뷔크의 윙맨이자 복수를 해주었던 프란츠 대위는 그로부터 1년 반 후인 1942년 7월 31일에 프랑스 상공에서 영국 121 비행대(121 Squadron)의 스핏파이어 전투기에 격추당했다. 그때까지 프란츠 대위는 52기 격추를 기록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