쾨니히스베르크

 

1.1. 역사
1.2. 흔적
2. 독일 구(舊) 브란덴부르크주의 도시
3. 독일 바이에른주의 도시
4. 독일의 경순양함
4.1. 벽람항로의 캐릭터
4.2. 전함소녀의 캐릭터


1. 칼리닌그라드동프로이센 시절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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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 이전의 쾨니히스베르크, 쾨니히스베르크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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쾨니히스베르크 북역 앞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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쾨니히스베르크 시 문장
칼리닌그라드 시 문장
Königsberg in Preussen / Königsberg i. Pr.[1]

1942년 당시 쾨니히스베르크를 소개하는 영상
폴란드그단스크에서 동쪽, 발트 3국 남쪽, 정확하게는 리투아니아의 서남쪽에 위치해 있는 러시아 영토 칼리닌그라드의 과거 명칭. 러시아식 약칭으로 쿄니그(Кёниг)라고 하며 지금도 이 지역의 여행사들이 이 약칭을 많이 이용한다.
독일 기사단국프로이센 공국의 수도로 동프로이센의 주도이자 중심도시였다. 1939년 기준 인구는 37만 2천 명으로, 구 독일 동방영토에서는 두번째로 큰 도시였다.[2]

1.1. 역사


쾨니히스베르크는 '왕의 산'이라는 뜻으로 튜튼 기사단에게 성의 건설자금을 지원해준 보헤미아 왕 오타카르 2세[3]를 기리기위해 지어진 이름이다. 즉 쾨니히스베르크는 북방 십자군의 전진 기지 역할을 했던 이 쾨니히스베르크 성을 기반으로 발달한 도시이고, 프로이센 왕국 초창기의 수도였던 독일계 도시였다. 수도가 베를린으로 옮겨간 뒤에도 프로이센 국왕들은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대관식을 했고, 1945년까지 프로이센의 국가기록원(Preußisches Staatsarchiv königsberg)이 있었기도 했다.
철학자 칸트가 태어난 곳인데, 칸트는 쾨니히스베르크로부터 100마일 바깥을 여행하지 않았다고도 한다. 그 바람에 졸지에 나고 자라 죽을 때까지 독일 땅에서만 살았던 그의 무덤이 지금은 러시아 땅에 들어가버렸지만(...). 그 외에 '쾨니히스베르크 다리 건너기 문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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쾨니히스베르크의 다리.
7년전쟁 중이던 1757년부터 1763년까지 러시아 제국이 점령하기는 했었지만, 쾨니히스베르크가 속한 동프로이센은 근대 독일 제국에 있어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지역으로, 독일 제국의 근간이 된 프로이센 왕국의 발상지[4]이다. 독일 제국 유수의 귀족 가문이 이 곳 출신이며, 때문에 제1차 세계 대전의 와중, 이 곳을 지키기 위해 많은 예비 병력들의 발이 묶여 있었다. 1차대전에서 서프로이센, 포젠, 갈리치아와 더불어 러시아의 합병 목표였으며 1차대전 패전 이후에도 차라리 다른 곳을 내줄지언정 동프로이센은 포기하지 않았고, 단치히 회랑을 내주면서 독일 본토와 분리되었지만 이 땅은 계속 독일령으로 남아 있었다.[5]

1928년의 동프로이센 지역. 쾨니히스베르크 시가지 모습.
그러다가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초반에 폴란드와 단치히가 독일에게 점령당하면서 다시 독일 본토와 육상통로가 연결되었으나, 몇 년 지나지 않아 독소전에서 소련이 독일을 밀어내고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전후 처리 과정에서 동프로이센은 둘로 나뉘어 남부는 폴란드 인민 공화국에, 쾨니히스베르크를 비롯한 나머지 지역은 소련(당시 러시아 SFSR)에게 귀속됐고, 독일계 주민들은 거의 대부분 전쟁 말기에 서쪽으로 피난가거나 전투에서 죽거나 남은 사람들도 전후 영토 회복의 빌미를 없애기 위해 서쪽의 남은 독일 영토로 강제 이주되었다. 소련으로 할양된 이후 쾨니히스베르크는 소련의 몇 안되는 부동항이었다. 그러나 1991년 9월 발트 3국의 독립[6]으로 인해 본토와의 육상통로가 단절되면서 지금은 러시아의 월경지 영토가 되었다. 소련 시절에야 러시아나 리투아니아나 벨라루스나 전부 같은 나라 안의 행정적 경계일 뿐이었지만 이것이 그대로 국경이 되다보니 상당히 불편한 형태가 된 것.[7] 현재 러시아에서 칼리닌그라드로 가려면 국내선 항공을 이용하면 상관없지만 육로로 러시아 본토와 칼리닌그라드를 오가려면 무조건 2개국 이상의 국경을 거쳐야 한다.
그 이후의 역사는 칼리닌그라드 문서 참조.

1.2.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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쾨니히스토르(왕문)
참고로 쾨니히스베르크 시절의 건축물들은 2차대전 말기의 시가전 및 폭격으로 상당수가 파괴되었으며, 쾨니히스베르크 성 역시 이때 복구조차 불가능할 만큼 치명적으로 무너졌고 남은 잔해마저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의 지시로 프로이센 군국주의 잔해를 없앤다는 명목 아래 1968년 철거되었다.[8] 그 자리에 칼리닌그라드판 류경호텔인 '소비에트 하우스'라는 해괴한 미완성 건물이 들어서 있으나(...)[9] 의외로 구 쾨니히스베르크 역이나 쾨니히스베르크 성당, 십자가교회(Kreuzkirche), 증권거래소, 쾨니히스토르(왕문), 칸트 동상 등 프로이센 시절 주요한 시설이나 상징물도 여전히 군데군데 잘 남아있다. 게다가 쾨니히스토르에는 프로이센 상징인 검은 독수리 문양이 선명하게 잘 남아있기도 하고...또한 독일인들이 이 시절의 유물 유지보수 및 고향 방문 등의 목적으로 적잖게 칼리닌그라드에 방문하고 있으며, BMW 공장이나 영사관을 설치하는 등 이 지역에 공을 들이는 중. 현재는 러시아 영토가 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독일의 흔적은 여전히 살아남아있다.'''
이런 유적지는 현재 관광자원으로 남아있다. 대한민국 여권 소지자는 솅겐조약 지역과 러시아가 모두 무비자이므로 가 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면 유럽여행 중에 들리기는 어렵지 않은 편이다. 관광 관련은 칼리닌그라드 문서 참조.
이 도시를 연고지로 삼던 유명 축구 구단으로 VfB 쾨니히스베르크가 있었으나, 이곳이 소련에 넘어가면서 이 구단도 해체되었다. 현재 칼리닌그라드를 연고지로 삼는 축구 구단으로 1954년 창단된 FC 발티카 칼리닌그라드가 있으나, 당연히 VfB 쾨니히스베르크와의 연관이 없다. 슈트라스부르크를 연고지로 삼던 FC 노이도르프는 이름만 바꿔서 프랑스 구단으로 존속 중이지만, VfB 쾨니히스베르크는 독일계 주민들 자체가 대부분 추방되었으므로[10] 구단을 해체할 수밖에 없었다.
이 지역을 대표했던 음식으로는 미트볼 요리[11]인 쾨니히스베르거 클롭세#레시피(영문)가 있는데, 현재는 독일 본토로 추방된 실향민들을 중심으로 독일 전역에 퍼져있다. 갈아놓은 고기(돼지고기와 소고기를 섞는다.)와 계란과 향료에 유럽 멸치를 섞어서 반죽하고 소금물에 삶아 크림 소스를 뿌려 내오는 식. 삶은 감자도 곁들여진다. 러시아계 이주민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오늘날의 칼리닌그라드도 칼리닌그라드 분리주의자들이 러시아 본토와 다른 칼리닌그라드만의 독자성(독일풍)을 강조하는 것의 영향을 받아 쾨니히스베르거 클롭세를 먹는 이들이 존재한다.

2. 독일 구(舊) 브란덴부르크주의 도시


Königsberg in der Neumark
1945년까지 독일 브란덴부르크주 동북부에 있었던 도시. 여기도 제2차 세계대전까지는 독일 영토였으나, 이후 폴란드의 도시 호이나(Chojna)로 바뀌었다.

3. 독일 바이에른주의 도시


Königsberg in Bayern
1640년 작센 공작령에 편입된 이래 그 공작령의 일파인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의 코부르크 지역에 속한 도시였다. 하지만 이 지도에서도 보듯 소속은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이었지만, 코부르크 지역에서 떨어져 바이에른 땅 안에 박혀있는 월경지였다.
그러다 1920년에 코부르크 지역이 통째로 바이에른주에 넘어가면서 그에 속한 쾨니히스베르크도 함께 바이에른의 도시가 되고 월경지도 해소되었다. 이름도 Königsberg in Franken에서 현재의 이름으로 바뀐 것은 덤. 인구는 2015년말 현재 3,596명(...)이다.

4. 독일의 경순양함


제 1차 세계 대전 당시의 함선은 쾨니히스베르크급 경순양함(1905년형) / 쾨니히스베르크급 경순양함(1915년형) 참조.
제 2차 세계 대전 당시의 함선은 쾨니히스베르크급 경순양함 참조.

4.1. 벽람항로의 캐릭터


쾨니히스베르크(벽람항로) 참조.

4.2. 전함소녀의 캐릭터


쾨니히스베르크(전함소녀) 참조.

[1] 독일어에서 명사 및 고유명사의 머릿글자(이니셜)는 모두 대문자로 표기한다. 따라서 königsberg로 표기해서는 안된다.[2] 가장 큰 도시는 슐레지엔의 주도 브레슬라우로 63만 명.[3] 보헤미아의 국왕으로 대공위 시대 때 합스부르크 왕가의 루돌프 1세와 왕위를 놓고 대립하다가 마르헤펠트 전투에서 패해 살해당하였다.[4] 사실 엄밀히 따지고보면 프로이센의 발상지는 왕국의 전신인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중심지인 브란덴부르크이지만 이름의 기원이 된 것만 해도 어디야...[5] 대신 항구지역인 메멜란트를 리투아니아에게 할양하였다. 그러나 이 지역은 약 500년간 프로이센의 일부로 있어왔으며 차별대우도 없었기 때문에 주민들 대부분이 자신을 리투아니아계 독일인으로 생각했으며 동족들의 국가에 통합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즉 민족자결주의가 허상임을 드러내는 좋은 예로 꼽히는 지역이다.[6] 소련 해체 3개월 전에 발트 3국의 독립을 소련이 승인. 소련이 해체되지 않았다 해도 발트 3국이 독립한 이상 칼리닌그라드는 월경지가 될 수밖에 없다.[7] 비슷하게 소련 시절엔 문제되지 않았지만 나라 안 행정경계가 국경으로 변하면서 월경지 문제로 큰 불편이 생긴 사례로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국경, 우즈베키스탄-키르기스스탄 국경이 있다.[8] 성 내부는 크게 불탔지만 외벽은 비교적 튼튼했던 탓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칼리닌그라드의 학생들과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도시의 주요 문화재인 쾨니히스베르크 성을 보존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았지만 결국 철거는 강행되었다.[9] 애초에 쾨니히스베르크 성 자리가 원래 늪이라 큰 규모의 건물을 세우기에는 지반이 약했던 탓도 있고, 쾨니히스베르크 성 지하의 터널이 무너지는 바람에 지반이 급격히 약해져서 건물의 규모를 축소했다가 결국 공사를 중지했다. 현지 주민들은 이를 두고 '프로이센인의 복수'라고 불렀다고... 현재는 겉에 페인트칠을 하고 창문을 붙여서 멀쩡한 건물처럼 보이게 해 놨지만 내부는 공사가 중단된 상태. 여담으로 쾨니히스베르크 성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바 있고 성의 재건도 논의되고 있기는 하다.[10] 독일계 인구도 아직 수천명이 남아있긴 하지만, 100만에 가까운 칼리닌그라드 전체 인구의 1%도 채 되지 않는다. 그것도 토박이가 남아있는 건지, 독일계 소련인들이 이주해온 건지도 불명.[11] 사실 미트볼은 독일뿐만이 아닌 북유럽 전반에 퍼진 요리로 스웨덴이나 노르웨이에도 독자적인 미트볼 레시피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