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너 묄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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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3월 18일 ~ 1941년 11월 22일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
2.2. 스페인에서
2.3. 2차 대전에서
2.4. 영국 본토항공전에서 활약
2.5. 전투기대 총사령관
2.6. 어이없는 최후
3. 기타


1. 개요


스페인 내전2차 세계대전 초기 독일 공군 최고의 에이스(전투조종사)이자 지휘관.

2. 생애



2.1. 어린 시절


'''베르너 뮐더스'''는 독일 에센시에서 가까운 겔젠키르헨(Gelsenkirchen)에서 교사의 아들로 1913년 3월 18일 태어났다. 하지만 그가 태어나고 불과 2년 후에 1차 대전에 징집된 그의 아버지 빅토르 묄더스는 프랑스 전선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4남매 중에서 3남이었던 묄더스는 편모 슬하에서 어렵게 자라야했지만, 독실한 천주교도였던 어머니 덕분에 올바르게 자라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대에이스 베르너 뮐더스는 심한 비행기 멀미 증상을 자주 호소하는 환자기도 했다. 1931년에 육군에서 생도로 교육받고 있던 그가 새로 창설되는 루프트바페로 옮겨달라고 지원했을 때만 하더라도, 이런 신체적인 약점 때문에 시험에서 낙방하는 고배를 마셔야만 했었다. 그러나 꺾이지 않는 의지는 그를 막고 있던 거대한 출입구 빗장을 열게 했고 끝내 독일의 탑에이스로, 그리고 영예로운 전투기 총감직까지 오르는 영광을 안게 된다.

2.2. 스페인에서


뮐더스가 처음 공중전을 경험한 것은 본격적으로 독일이 전쟁을 일으키기 전인 스페인 내전에서였다. 즉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측인 팔랑헤를 지원하는 콘돌 군단(Kondor Legion) 소속으로 참전하여 타고난 공중전술가이며 전사로서의 기질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복엽 전투기 하인켈 He 51를 몰면서 전투기 조종사 생활을 시작한 그를 단지 한 사람의 에이스일 뿐 아니라 뛰어난 전술가로 이야기하는 가장 큰 원인은, 아마도 그가 개발한 슈밤(Schwarm) 전술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전투기 4대가 이루는 편대를 말하는 것인데, 당시 대부분의 공군들은 아직까지도 1차 대전 때부터 내려오는 비효율적인 밀집편대 전술을 고집하고 있었다. 이때 뮐더스는 전투기 2대로 이루어진 로테(Rotte)를 기본으로 2개의 로테가 각기 다른 고도에서 꽤 넓은 간격을 두고 비행하며 서로의 약점을 엄호하며 사주 경계에 좋고, 기동성 역시 뛰어난 전혀 새로운 개념의 편대형인 슈밤을 만들어 낸것이다. 후에 연합군도 뮐더스의 슈밤 편대 전술을 받아들여 핑거 포라는 명칭으로 사용하게 되니, 뮐더스를 오스발트 뵐케와 자주 비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구식기인 He 51을 몰던 그는 스페인 내전 기간 동안 Bf 109 B-2로 바꿔타고 총 14대의 격추[1]를 달성해냈고, 2차 대전 초기부터 프랑스 함락까지 25대를 격추시켜 영예로운 기사 십자장을 수여 받게 된다.

2.3. 2차 대전에서


이 당시 뮐더스는 JG 53 비행단의 제1중대장으로 임명되었다가 제3그루페를 이끄는 비행대장직까지 맡게 되면서 점점 완숙함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프랑스 항공전에서 뮐더스는 성공 뿐만 아니라, 값진 교훈도 얻게 되는데, 그것은 프랑스 전투기와의 교전 도중 엔진에 적탄이 명중당해 동체 착륙을 경험한 것이었다. 이날 그의 Bf 109는 지상에 닿자마자 거꾸로 쳐박혔고, 그때문에 한동안 조종실에 갇혀 있어야 했는데, 다행히 인근 농부들에 의해 가까스로 구조되었다고 한다. 또 1940년 6월초에도 적기와의 공중전 도중 짧은 점사에 명중당해 격추되면서 낙하산 탈출을 시도해야만 했고, 불행히도 프랑스군의 포로가 되고 만다. 그후 프랑스가 함락될 때까지 포로 생활을 해야만 했으니 대에이스 뮐더스도 초기 전투에서는 쓴맛 단맛을 가리지 않고 다 경험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런 아픈 교훈이 이후 그의 조종술과 전투력을 한 단계 올리는 촉매가 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나중에 뮐더스는 이렇게 이야기 했다.

"신참 조종사들 중에서 처음 몇번의 공중전 임무에서 살아남는 이야말로 대에이스가 된다."

이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지만, 그의 초기 조종사 시절의 역경을 은근히 표현한 말이기도 하다. 즉 신참 파일럿 중 대부분이 자신의 초기 공중전에서 격추되어 전사하는 예가 많은데, 그것을 본 신참들은 교전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초조함이 겹쳐, 제 실력을 십분 발휘할 수 없고 이런 상황에서의 실수는 치명적인 것이니...

2.4. 영국 본토항공전에서 활약


프랑스가 나치 독일의 손에 떨어진 후, 루프트바페의 다음 목표는 영국이 되었다. 뮐더스는 JG 51의 젊은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1940년 10월 중순까지 45기의 영국 전투기를 격추시키는 기염을 토한다. 뮐더스는 매우 과묵하면서도, 종교적인 믿음이 강한 천주교도였고, 부하들에 대한 배려가 깊어, 대원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의 비행대원들, 그리고 나중에 전투기 총감이 된 후에는 모든 독일 전투기 조종사들이 뮐더스를 바티(Vati : 아빠)라는 별명으로 불렀다고 하니, 초기 독일 공군의 정신적인 지주였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독일의 에이스라고 하면 떠오르는 스타일은 대부분은 외로운 늑대식 전법을 주로 구사하는, 한 마디로 개인기에 탁월한 파일롯이라는 느낌일 것이다. 실제로 많은 독일 조종사들은 고공에서 급강하 공격으로 적기를 격추시키는 단독 플레이에 매우 능했었다. 그러나 뮐더스는 개인적인 기량 보다도 팀웍을 매우 중요시했는데, 이것이 결과적으로 첫 공중전에서 살아남기 힘든 여러 신참들의 목숨을 구하게 된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뮐더스의 개인 기동술이나 전투력이 딸리는 것은 아니었다. 초기 루프트바페의 격추왕 3인방인 아돌프 갈란트, 헬무트 뷔크, 뮐더스 중에서 전투력의 순위를 들자면 뷔크가 1위, 뮐더스 2위, 갈란트를 3위로 평가되는 경우가 흔하다. 헬무트 뷔크야 타고난 전투력의 전사 스타일 그대로라 더 이상 말이 필요없겠고, 나머지 갈란트와 뮐더스는 자주 선의의 라이벌로서 비교되는데, 대개는 갈란트 보다는 뮐더스가 더 기량이 높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대표적인 예로 한때 Bf 109E형의 무장중 주익의 20mm MG/FF 기관포 2문이 Bf109F-2형에서 모터캐논의 15mm MG 151/15 기관포 1문으로 바꾼 적이 있었는데, 이것을 받아들이는 독일 조종사들의 입장은 크게 양분되었다. 갈란트 같은 경우는 결과적으로 기관총의 구경이 작아진 것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지만, 뮐더스는 연사 속도가 빠른 기관포를 장착하고 기체가 전반적으로 날렵해진 것에 만족해 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뮐더스의 기동술이 더 정교하고 예리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일화이기도 하다.
사실 묄더스가 독소전에서 탑승한 Bf109F는 F-2형이 아닌 F-1형으로 모터캐논이 20mm MGFF/M 기관포이다. F-1은 선행양산형으로 소수가 양산되었는데 MGFF/M의 장탄수는 드럼식 60발 탄창으로 Bf110C/D와는 달리 인력에 의한 재장전이 불가능했다. 바로 이 장탄수문제 때문에 본격 양산형인 F-2에서는 15mm MG151/15와 탄띠식의 200발 탄약으로 교체된다.
독소전 발발전인 1941년 3월부터 6월까지 서부전선의 JG26 본부에서 F-1를 운용했었기 때문에 화력문제는 단순히 갈란트만의 불만사항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더욱이 F-1에 DB601E엔진을 탑재한 F-3는 JG2와 JG26만이 소수의 기체를 단기간 운용했다.
또 갈란트가 JG 26의 비행단장으로, 뮐더스가 JG 51의 단장으로 각기 임명되었을 때, 뮐더스는 갈란트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갈란트, 자네는 리히토펜이 되려고 하는군. 행운을 비네, 그렇다면 나는 뵐케가 될 걸세."

이것은 너무도 적절한 비유라 생각된다. 리히토펜은 탁월한 사격술 보다는 붐앤 줌식(Boom & Zoom) 공격법을 자주 사용했고, 선호하는 전투기도 기동성보다는 속력을 우선 순위에 두었다. 붉은 남작이 포커 Dr.1 삼엽기를 처음엔 꺼려했던 것도, 종전에 탑승하던 알바트로스 전투기 보다 기동은 뛰어나지만 속력이 딸렸기 때문이다. 뵐케 역시 붉은 남작에 많은 영향을 준 에이스라 공격 전술 역시 남작의 것과 대동소이하겠지만 사격술은 앞섰던 것 같고, 남작이 전사의 느낌이라면, 뵐케는 전술가적인 이미지가 더 강하다. 뮐더스 역시 뛰어난 조종사였지만, 전술면에서도 높은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묄더스는 영불 해협 상공에서 영국기들과 자주 조우했는데, 이때 다시 한번 격추당하는 시련을 겪게 된다. 그때가 1940년 7월 28일의 일로, 뮐더스의 Bf 109를 격추시킨 장본인은 다름이 아니라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 영연방 에이스이며 해군장교 출신이라 <선원>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던 아돌프 말란이었다. 묄더스와 말란은 둘 모두 사격술이라면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공중전의 달인들이었으나, 대결은 너무 싱겁게 끝나버렸다. 도버 해협 상공에서 말란의 면도칼 같은 사격에 뮐더스의 애기는 거의 벌집이 되어 간신히 프랑스 연안까지 날아와 동체 착륙을 시도했으며 부상까지 입게 된 것이다.

2.5. 전투기대 총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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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투기 기동에 대한 설명을 하는 아돌프 갈란트와 지켜보고 있는 바로 우측의 베르너 묄더스.

뮐더스의 나이 28세.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파격적인 인사가 독일 공군에서 일어났다. 30세가 채 안되는 이 새파란 비행 장교가 독일의 모든 전투기 부대를 지휘하는 전투기 총감이라는 장군 보직을 맡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후에도 뮐더스는 동부 전선으로 옮겨가 지속적으로 출격을 계속해나갔고, 종래는 115기 격추를 달성하게 된다. 1차 대전 당시 80기 격추가 최고 기록이었는데, 이제 100대가 돌파된 것이다. 참고로 뮐더스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100대 격추의 신화를 깬 조종사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 일로 해서 뮐더스에게는 전군에서 처음으로 최상위급 무공 훈장인 다이아몬드 곡엽 검 기사 철십자장이 수여되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2]

2.6. 어이없는 최후


1941년 11월 17일, 묄더스는 1차 대전의 격추 기록 3위의 에이스이며 루프트바페의 장성인 에른스트 우데트의 장례식에 참가해 관을 메기로 되어있었다. 우데트는 루프트바페의 지휘부와 마찰이 심해서 끝내 자살을 선택한 것이었는데, 뮐더스는 평소 존경하던 우데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애써 지켜보려한 것이었으나, 운명은 뮐더스로 하여금 우데트의 뒤를 곧바로 따르게 만들어 버린다. 당시 뮐더스는 JG 77 비행단을 순시하던 중에 우데트 사망 소식을 접했고 수송기편이 마련되지 않자, 하는 수 없이 He 111 폭격기에 탑승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1941년 11월 22일의 기상은 최악이었고, 비행 도중 브레슬라우 상공에서 폭격기 엔진 하나가 고장을 일으켰다. 조종사 바로 옆자리에 탑승하고 있던 뮐더스는 가까운 비행장으로 착륙하기로 결정했고, 활주로에 접근하던 중 남아 있던 엔진 하나 마저도 멈춰버리고 만다. 뮐더스의 탑승기는 활주로 근처에 곤두박질쳤고, 조종사와 뮐더스는 그자리에서 사망하고 만다. 뮐더스 바로 뒤 좁은 공간에 동승했던 뮐더스의 보좌관 파울 벤첼(Paul Wenzel) 소령은 이 사고에서도 극적으로 살아남아 뮐더스의 최후를 증언했다. 뮐더스가 사망한 후 공석인 전투기 총감직은 그의 선의의 라이벌이며 친구인 아돌프 갈란트에게 주어졌고, 뮐더스가 이끌던 JG 51 비행단은 "뮐더스 비행단"이라는 영광스런 명칭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뮐더스는 선회전을 위해 마련된 소극적인 방어적 편대형에서 탈피해 공격적이며 유동성이 좋은 슈밤 대형의 개념을 완성한 전술가였다.

3. 기타


스트라이크 위치스 설정 중 베라 묄더스의 모티브가 되었다.

[1] 1938년 7월 부터 11월 초까지 14기 격추를 달성하는데 이중에는 소련제 I-15 전투기 4대를 포함해 I-16 전투기가 대부분을 차지했다.[2] 현실적으로 그 위에 있는 황금 다이아몬드 백엽검 기사 철십자장은 수여자가 한스 울리히 루델 밖에 없기 때문에 제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