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승종

 



'''역임 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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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 ''' ''' 이사장 '''
제11·12대
'''김병관'''


제13대
'''현승종'''


제14·15대
'''김정배'''


'''성균관대학교 총장'''
제10대
박동묘

'''제11대
현승종'''

제12대
김경수


'''대한민국 제24대 국무총리
현승종
玄勝鍾 | Hyun Soong-jong
'''
<colbgcolor=#003478><colcolor=#c39335> '''출생'''
1919년 1월 26일
평안남도 개천군 개천면 견룡리[1]
(現 평안남도 개천시 건지동)#
'''사망'''
2020년 5월 25일 5시 22분 (향년 101세)
서울특별시
'''본관'''
연주 현씨
'''호'''
춘재(春齋)
'''재임기간'''
제24대 국무총리
1992년 10월 8일 ~ 1993년 2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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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478> '''부모'''
아버지 현기정
'''배우자'''
홍영표
'''자녀'''
딸 현군숙
아들 현윤해, 현춘해, 현선해
'''친인척'''
조부 현희봉
'''학력'''
평양고등보통학교 (졸업)
경성제국대학 (법학과 / 학사)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 1기)
고려대학교 (법학 / 명예박사)
국립정치대학 (법학 / 명예박사)
'''병역'''
공군 중령 예편
'''약력'''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성균관대학교 총장
한림대학교 총장
제24대 국무총리

1. 개요
2. 생애
2.1. 초년시절
2.2. 고대 교수 시절
2.3. 교육 행정가 및 관료 시절
2.4. 일본군 장교 경력으로 인한 논란
2.4.1. 한홍구의 의견
2.4.2. 정청래의 주장
2.5. 말년
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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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법학자이자 제24대 대한민국 국무총리. 그리고 헌정사상 최장수한 정치인이다.

2. 생애



2.1. 초년시절


1919년 평안남도 개천군 개천면 견룡리(現 개천시 건지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 현희봉(玄熙鳳)과 부친 현기정(玄基正)은 의병과 독립운동가로 헌신했던 사람들이었다.
1937년 평안남도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43년 경성제국대학에서 법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1944년 1월 일본군 학도병에 소집되었다. 그리고 1945년 6월 소위로 임관한 뒤, 8월 15일 중국 팔로군과 처음이자 마지막 교전을 했다. 일제의 패망사실을 안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 뒤였다. 그렇게 약 두 달 간 일본군 장교로 복무하였다.

2.2. 고대 교수 시절


8.15 광복 후 1946년부터 1974년까지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에서 28년간 교수를 역임하였다. 법학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로마법개론' '로마법원론' '법사상사' '서양법제사' '민법' '비교법입문' '로마법' '게르만법' 등의 책을 저술하였으며, 법사상사, 법사학, 비교법 및 민법분야에서 연구업적을 남겼다.
고대 민법 교수로 재임하던 시절, 강의를 잘 하였을 뿐 아니라 휴강, 지각이 거의 없었을 정도로 직분에 성실하였다. 천성이 검소하여 교수임에도 불구하고 양복이 아닌 교복 차림으로 출퇴근하였다. 실력이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겸손하였으며, 자애롭고 온화한 자세로 제자들을 대하여 학생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하지만 학문적 측면으로 볼 때, 서울법대 교수 김증한, 곽윤직와의 매치업에서는 일방적으로 밀렸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김증한과 곽윤직이 워낙 뛰어난 학자였던 탓도 있지만, 현승종 교수가 고대 내에서 보직의 부담에 너무 심하게 짓눌렸기 때문이라는 말이 많다. 물론 당대 민법학자들 가운데서 김증한과 곽윤직을 제외한다면, 현승종만 한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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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 당시에는 고려대학교 학생처장으로서 데모행렬의 선두에서 제자들의 신변안전에 정성을 다했다.[3] 5.16 군사정변 이후에도 박정희 정권에 대항하는 고대생들의 데모가 연일 이어졌기 때문에, 박정희 정권은 수많은 고대생들을 구속, 강제징집하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상황이 여기에 이르자 현승종은 스크럼 짠 제자들 앞에 나아가 그냥 드러누워버렸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정 나가고 싶으면, 나를 밟고 지나가라!"'''고 외쳐서 학생들의 대량구속을 막았다.
그렇게 5년 7개월 동안 학생처장직을 수행한 뒤, 1965년 국내 최초로 고려대학교에 교양학부를 설치하고 교양학부장과 도서관장 등의 보직을 맡았다.

2.3. 교육 행정가 및 관료 시절


1974년 55세의 나이로 고려대학교를 떠나 성균관대학교에 총장으로 부임하였다.[4] 그 후로 1980년까지 6년 동안 성균관대학교 총장을 지냈다. 성대 총장으로 있으면서 구조조정 등 온갖 악역을 도맡았는데, 그런 궂은 일을 예상보다 더 깔끔하게 마무리하였다.
61세의 나이로 성균관대학교를 떠난 뒤 1984년에는 한림대학교 교수로 부임하였다.[5] 한림대 학장을 거쳐, 1989년부터 1992년까지 한림대학교 총장을 맡았다. 성균관대학교와 한림대학교에서 총장으로 일할 동안 학사행정 실무담당자에게 전결권을 부여하는 등 자율과 책임의 원칙을 실현하였다.
1991년에는 한림대 총장과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장을 겸직했다. 교총 회장으로 일하면서 김영삼김대중으로부터 우수교원확보법, 학교안전관리공제회법, 교육시설투자촉진법 제정 지원 약속을 이끌어냈고, 결국 그러한 특별법들을 통과시켰다. 그 외에 교총-교육부 정기교섭 협의도 성사시켰으며, 교원처우개선과 수당지급체계 개선 등 현재 교원정책의 근간이 되는 사항들을 대부분 확립하였다.
1992년 10월에는 노태우 정부의 이른바 중립내각 구상에 따라 국무총리직을 맡아달라는 집요한 부탁을 받았다. 당시 한준수 전 연기군수의 관권선거 폭로 양심선언이 있어서 여론이 매우 뒤숭숭하였고, 자칫하면 제2의 6월 항쟁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러자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이었으며 현승종의 고대법대 교수 시절 제자였던 김중권이 노태우에게 현승종을 중립 내각 총리로 강력 추천하였다. 처음에는 총리직 제안을 극구 사양하였지만, 결국 승낙하였다.
그 후 국무총리직에 취임하여 (취임 당시 인터뷰 링크) 1993년 2월까지 약 5개월 동안 국무총리직을 역임하였다. 총리직에 취임한 후, 짧은 기간이지만 전임총리 시절부터 혼란하던 정국을 가라앉히고 안정되게 만들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노태우는 극심한 레임덕에 빠져 존재감을 거의 상실한 시기였기 때문에, 총리 시절 사실상의 내각 수반으로 활동하였다.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 사건이 터졌을 때에는, 당시 원로교수들에게 평판이 좋지 않았던 마광수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여 결국 마광수가 체포, 구속되게끔 만들었다.
어쨌든 1992년 12월,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비교적 무사히 치렀으나, 선거 직전에 터진 초원복집 사건으로 큰 오점을 남겼다. 사실 13대 대선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더 낫긴 했지만, 14대 대선도 관권개입, 금품살포, 흑색선전, 마타도어가 난무했던, 지저분한 선거이긴 했다.[6]
1993년 2월 국무총리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장으로 부임하였다. 그 후 1993년 건국대학교에서 대규모 부정입시 사건이 일어나 현직 이사장이 파임되었을 때, 74세의 나이로 건국대학교에 관선이사로 파견되었다. 결국 건국대학교 이사장직을 맡아, 1999년 7월까지 6년 동안 이사장직을 수행하였다.[7]

2.4. 일본군 장교 경력으로 인한 논란


1999년 2월 28일 연합뉴스와 가진 회견에서 지난 80년 간의 인생을 회고하면서 자신의 일본군 장교 경력에 대해 고백하였다. 그동안 이런 사실을 숨긴 이유로 "비록 자발적이지는 않았지만 일제 군복을 입고 참전했던 사실을 차마 밝힐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그러한 고백을 한 후 약 두세 달 동안 건국대 교수협의회, 직원노조, 총학생회 등 학내·외 단체들로 구성된 비상대책위로부터 이사장 직위 사퇴 압력을 받았다. 결국 1999년 4월 20일 사의를 표명하였다.

2.4.1. 한홍구의 의견


이러한 친일 논란에 관해서는 역사학자 한홍구한겨레21에서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관련 기사 링크

학생들은 형식상 지원제인 학병에 나간 것을 친일 행위로 본 것인데, 이는 해방 당시의 정서와는 큰 거리가 있다. 물론 학병에 지원한 사람들 중에 황국신민 의식이 골수에 박혀 스스로 자원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당시 사람들은 학병을 대부분 끌려간 것으로 보았다. 때문에 학병 출신들은 일제 통치의 희생자로 간주되었고, 해방 정국 초기에 학병동맹을 결성하여 미군정의 탄압으로 해산될 때까지 진보진영 내에서 정치적으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은 당시에 대학교육을 받은 엘리트 신분에다 일제 강제동원의 피해자였다는 위치를 겸하여 일제 잔재 청산에 목소리를 높였다.

2005년 8월 29일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에 현승종은 포함되지 않았다. 건국대 졸업생들이 이에 항의하였으나, 민족문제연구소측은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현승종 이사장은 일제시대인 1944년 1월 학병으로 끌려가 해방될 때 소위로 제대했지만 자발적으로 입대한 것이 아니어서 친일파로 보는 건 무리가 있다."[8]

2.4.2. 정청래의 주장


한홍구의 글에 대해서는 정청래오마이뉴스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관련 기사 링크

결론부터 말하겠다. 현승종 씨 문제에 대한 한 교수의 주장은 틀렸다. [...] 위에서 한 교수는 학병에 나간 것을 학생들이 친일행위로 본 것이라 단정했는데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 같은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다른 글도 아니고 역사의 문제를 다루는 학자가 어떻게 기초자료도 조사하지 않고 함부로 글을 쓰는지 놀랍다. [...] 비대위는 현씨가 학병을 나간 것을 친일로 몰아붙이지 않았다. 1945년 1월 20일 현승종씨가 학병을 나간 것은 사실이다. [...] 비대위가 문제를 삼은 핵심사항은 현씨가 학병으로 나간 것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그가 학병으로 나간 이후 자발적 의사(대단히 중요한 팩트다)에 의해 일본군 장교에 자원했고[9]

일본 황국의 장교로서 황국신민의 첨병이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현씨는 일본군 소위 계급장을 달고 팔로군과 교전까지 치른 일본군 전투장교였다.[10] 사실이 이러함에도 비대위는 현씨 개인의 과거에 대해 같이 아파했고 다른 것은 몰라도 이런 전력은 적어도 후학을 양성하는 기관의 대표로는 부적격이고 더군다나 설립자가 독립운동가인 민족사학에는 더더욱 어울리지 않음으로 이사장직을 수행할 권위를 상실했다고 판단해 사퇴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2.5. 말년


건국대학교 이사장직에서 물러난 후 2001년에는 인촌기념회 이사장직을 맡았다. 그리고 2005년 9월에는 86세의 나이로 고려중앙학원 이사장직에 취임하여 2009년 7월까지 이사장직을 수행하였다. 남들은 한번도 하기 힘든 것이 재단이사장직과 총장직인데, 고려대와 건국대에서는 재단이사장을, 성균관대와 한림대에서는 총장을 각각 역임하였다.
그 밖에 1994년 유니세프 한국위원회가 출범하였을 때 한국 유니세프 회장이 되었다. 그렇게 취임한 한국 유니세프 회장직을 1994년부터 2010년까지 무려 16년 동안이나 수행하였다.
2017년 2월 2일, 정치인 한광석이 98세의 나이로 별세한 뒤로 현재 기준 살아있는 전직 정치인들 중에서는 최고령자로 밝혀졌다. 1992년 최고령 국무총리 타이틀에 이어 2018년 현재 역대 국무총리들 중에서 가장 최고령인 인물. 여담으로 역대 정치인들 중에서 제일 오래 산 인물은 2009년 향년 100세의 나이로 사망한 김판술이었으나[11] 2020년 4월에 기록을 경신했고, 한달 뒤 10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현재 최고령인 전직 정치인은 101세의 김종호이다.
2018년 3월 3일에 촬영된 사진

3. 평가


학자로서 학문적 업적을 쌓았다기보다는 교육행정가로서의 행적이 더 돋보이는 사람이다. 보수주의적 성향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정치색을 그리 강하게 드러내지 않아, 보수-진보 양쪽에서 무난하게 수용되었다.
고위직을 계속 연임하였지만 가난하기로 소문난 동네인 도봉구 쌍문동에서 말년까지 계속 살았을 정도였다. 성대, 한림대, 건대, 고대에서 총장과 이사장직을 역임할 동안 대부분의 판공비를 그대로 반납하였다.
3남 1녀를 두었다. 셋째 아들 현선해는 현재 성균관대학교 경영학과 교수이다.[12]

[1] 연주 현씨 집성촌으로 독립유공자인 아버지 현기정도 이 마을 출신이다.[2] 현승종 교수는 곽윤직 교수의 물권법 교과서에 대해 매우 호의적인 서평을 남긴 적이 있었다.[3] 물론 데모를 마치고 해산하는 과정에서 깡패들에 의해 제자들이 구타 당하는 것까지 막지는 못했으나, 이때 고대생들의 희생으로 4.19 혁명의 불꽃이 더 크게 타올랐고, 이승만 정권이 결국 무너졌다.[4] 전임자인 황산덕 총장이 평양고보-경성제대법대 선배라서 현승종을 성균관대 총장에 추천했다고 한다. 당시 고려대학교는 박정희 정권의 탄압으로 극심한 재정난에 직면하여 언제 망할지 모를 정도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현승종처럼 호봉 높고 나이 많은 교수들은 눈치껏 다른 학교로 떠나주는 것이 예의였을 것이다.[5] 한림대 설립자인 고 윤덕선 박사와 평양고보 동기로서 동문 수학한 사이였다. 대학 설립의 기획단계부터 관여해 한림대를 짧은 시간 안에 급성장시켰다.[6] 물론 제13대 대통령 선거 때만 해도 선거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부정선거에 맞서서 끝까지 투쟁하겠다고 기염을 토했던 김대중이 제14대 대통령 선거 결과에 대해서는 즉각 승복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할 정도로, 14대 대선은 13대 대선에 비해 좀 더 엄정하게 관리되었던 것은 사실이다.[7] 1993년 당시 건국대학교는 평판도 나빠져 있었지만, 재정적으로도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이사장으로 재직하면서 건국우유의 경영을 정상화하는 등 건국대학교의 재정을 충실히 하는 데 힘썼다.[8] 비슷한 사례로 김수환 추기경이 있다. 실제 학도지원병이 말만 지원이지 실상은 강제징집이었기 때문에 이 사람들을 친일파로 모는 것은 부적절하다.[9] 참고로 1943년 2월 과달카날 전투와 1943년 11월 창더 전투 이후 일본의 패망이 100% 확실해진 당시 학병으로 끌려간 조선인이 사병이 아니라 장교를 자원했다는 것은 공명심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조선인 학병 동료들을 위한 희생정신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어차피 당시 학병으로 끌려간 조선인 가운데 일정 수는 장교를 자원해야 했고, 자원하는 자가 없으면 제비뽑기라도 해야만 했기 때문. 사병은 참호 안에서 머리를 수그리고 있어도 되었지만, 소대장은 언제나 선두에서 "소대원 돌격 앞으로!"를 외쳐야 했다. 상부에서 집단옥쇄 명령을 내릴 경우에도 장교는 사병보다 먼저 할복을 해야 했다. 그러므로 그 상황에서 장교를 자원한 자는, 조선인 학병들 가운데서도 양보심이 있는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다.[10] 참고로 중일전쟁 말기 중국 팔로군의 사기는 날로 치솟고 있었던 반면에 이에 맞선 일본 관동군은 거듭된 패전으로 거의 껍데기만 남은 오합지졸이나 마찬가지 상태였다. 주력부대는 본토방위를 위해 일본으로 돌아갔고, 기존부대 나머지는 소련군을 막기 위하여 동부전선으로 배치되었다. 중일전선 최전방에는 급조한 신설부대만 총알받이 용도로 보냈으며, 1942년 이후 관동군에 대한 본토의 군수물 및 식량지원은 사실상 끊겨 있는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인 학병 출신 장교가 당시 중일전선 최전방에 전투부대 소대장으로 간다는 것은 사실상 죽으러 가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일본군 가운데 소총을 가진 병사가 40%, 총검을 가진 병사가 30%일 정도로 전투장비가 부족하여 죽창이나 맨몸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고, 군화도 없어서 추운 겨울에 짚신으로 걸어야 하는 처지였기 때문에, 최전방 전투부대로 갔다고 해서 후방의 비전투부대보다 더 폼이 났던 것도 아니었다. 당시 중일전선에서 일본 관동군 신설부대원은 팔로군과 전투를 치르는 족족 걍 사망크리였고, 장준하김준엽처럼 탈영을 한다 하더라도 살아남는다는 보장은 없었으며, 오히려 탈영했다가 조선인 동료에게 폐를 끼칠 수도 있었다. 따라서 당시 전투장교, 특히 최전방 전투부대 소대장(소위) 자리는 사실상 "우리 조선인 학병 중에 누군가 죽어야 한다면 차라리 내가 죽겠다"는 마음으로 가는 자리라 할 수 있었다.[11] 김허남김창규도 100세까지 살았다.[12] 송중기의 스승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