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설암
[image]
胡雪巖
1823~1885
1. 개요
'''홍정상인'''[1]'''벼슬을 하려거든 증국번을 본받고, 장사를 하려거든 호설암을 본받으라.'''
청나라 말엽에 돌던 중국의 격언
청나라 말기 청나라를 주름잡던 거상으로 현대 중국에서는 자수성가의 전형으로 손꼽힌다.
뛰어난 경영 철학과 시대를 읽어내는 탁월한 능력으로 지금도 사업가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존경받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정치와 결탁하여 부를 축적하는 등 전근대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2. 생애
2.1. 유소년기
안휘성 적계현(績溪縣)[2]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이름은 광용(光墉)이고 자가 설암이다. 아버지로 부터 글을 읽고 쓰는 법밖에 배우지 못하였고, 13세 무렵 아버지를 여의고 고향을 떠나 방랑하며 쌀, 화퇴[3] 장수의 곁을 따라다니며 일꾼으로 지내다 2년 뒤 항주에 있는 신화전장(新和錢庄)[4] 에 견습사환으로 일한다. 그러나 남의 밑에서 일하면 그냥 그걸로 끝이라 생각해 자기 이름을 건 전장을 갖는 것을 꿈꾸었다.
2.2. 인연으로 일어서다
사환으로 일하다가 복주 사람인 왕유령(王有齡)이라는 사람과 친해지게 되었다. 파락호 같은 선비였으나 절강염운사[5] 라는 벼슬을 얻어놓은 상태였지만 아직 북경으로 올라가 정식으로 위임 절차를 받아야 하는데 돈이 없어 항주에서 머물러 있던 중이었다. 그러다가 빚 수금을 하다 손에 넣은 은 500냥 어치의 은표(지폐)를 전장에 돌려주지 않고 그에게 넘겨주어 노자로 씀과 동시에 나중에 자기를 도와주는 투자의 의미로 내주었다. 그러자 왕유령은 호설암에게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을 맹세하고 작별인사를 한 뒤 북경으로 떠났다. 왕유령이 겉보기에는 건달같았으나 오랫동안 알고지내 단순한 시정잡배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고 큰 결단을 내린 것이었다.
그러나 왕유령에게 넘긴 돈은 엄밀히 말해 남의 빚에서 받아낸 돈이라 원칙대로라면 전장에 돌려줘야만 했으나 이것을 횡령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어쨌건 일단 왕유령의 명의로 달아둔 500냥어치의 어음을 발행하지만 전장에서는 이것을 문제삼아 주인뿐만 아니라 동료 사환들에게도 완전히 찍혀 결국 신화전장에서 쫓겨난다. 이때 그는 짐꾼 등 허드렛일을 하며 소병(燒餠)으로 배를 채우고 길바닥에서 잠을 자는 부랑자나 다름없는 생활을 한다.
한편 그의 돈을 가지고 간 왕유령은 북경에서 죽마고우인 호부시랑 하계청(何桂淸)을 만나 그의 추천서와 5000냥의 은표를 받고 절강순무인 황종한(黃宗漢)에게 보내줄 것을 부탁받고 항주로 돌아왔다. 그는 자신의 은인인 호설암을 수소문해 보았지만 헛수고였다. 심지어 전에 일하던 신화전장조차 내쫓은 지 오래라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항주의 청루(기방)에서 손님을 맞던 호설암과 재회한다. 1848년의 일이었다.
왕유령은 자신의 은인이 이렇게 거지꼴을 하고 있다는 것에 슬픔을 금치 못했지만 호설암은 오히려 내가 사람을 잘 골랐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뒤 왕유령에게 조언을 하여 아직 주지 않은 5000냥의 은표를 황종한에게 바로 갖다줄 것을 조언하자 바로 해운국의 좌판 직을 얻는다. 그뒤 호설암을 자신을 대리할 수 있게 해주어 호설암은 해운국의 공금을 종잣돈으로 삼아 쌀 등 물건의 시세를 조사하고 상해에서 물가가 저렴할 때 사들인 뒤 해운국의 빈 관선을 이용해 하역한 후 천진으로 보내어 팔아 막대한 차익을 남기는 방법으로 거금을 벌어들였다.
호설암은 왕유령과 함께 수익금을 일단 가지고 있다가 다시 투자하는데, 자신의 꿈인 자신만의 전장을 차려 이름을 부강(阜康)이라 지은 뒤 자신을 내쫓은 신화전장을 인수하려 한다. 마침 신화전장은 그가 관료를 등에 업은 것을 알고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지만 넘어가지 않고 총 70만냥의 해운국의 공금을 신화전장에 예금하도록 주선한 뒤 중개료로 일부 지분을 자신의 몫으로 남겨놓고 기다렸다.
어느 날 호설암이 신화전장의 잔고가 10만냥 뿐인 것을 알자마자 30만냥의 은을 급한 일이 있으니 당장 인출하겠다고 통보하자 신화전장은 결국 울며 겨자먹기로 호설암에게 신화전장의 소유권을 넘겨 줄 수밖에 없었다. 그 후 돈을 온갖 상점에 대출하고 갚지 못하면 인수해 운영하는 방식으로 자기 소유의 상점과 전장을 늘리며 부를 축적했다.
이때쯤 왕유령은 절강순무로 승진하여 호설암에게 관직을 주선하겠다고 했지만 거절하고 철저한 상인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2.3. 태평천국의 난과 제 2의 전성기
1861년, 태평천국군이 항주를 포위하자 2개월 동안 버티다 식량이 바닥을 드러내자 왕유령은 호설암을 불러 공금 2만냥의 은표를 주어 구원병과 군량미를 항주로 가져올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호설암이 군량을 가져올 때 항주는 이미 점령당하고 왕유령은 관청이 점령되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6]
호설암은 태평천국군을 피해 조차지였던 상해로 피신해 머물다가 운명적인 만남을 한다. 바로 태평천국을 토벌하기 위해 좌종당이 증국번의 추천으로 절강순무의 관직을 받아 군대를 이끌고 상해에 주둔해 있었기 때문이다. 군자금과 군량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좌종당은 호설암을 그저 졸부에 잡상인 정도로 여기고 처음에는 그를 횡령죄로 사형에 처하라고 할 정도로 모질게 대했으나 그가 은표와 군량이 국가의 재산인 점을 들어 모두 돌려주자 태도가 누그러지고, 사석에서 몇 번 이야기를 나눠본 뒤에야 비로소 좌종당은 호설암을 매우 신뢰하게 되었다. 왕유령이 죽었지만 그 대신에 좌종당의 마음을 얻게 된 것은 호설암의 또 다른 전성기의 서막이었다.
좌종당이 전쟁터를 누비며 태평천국군과 싸우는 동안 호설암은 그 뒤를 물심양면 지원해 주고 민심 수습과 구휼을 앞장서서 해결해 내면서 그의 신뢰를 점점 두텁게 쌓아가고 있었다. 좌종당이 민절총독으로 승진하자 그를 따라간 호설암은 복주에 중국 최초의 근대식 조선소인 복주선정국(福州船政局)을 짓는 데 기여하고 회풍은행(匯豊銀行)[7] 을 통해 상승군[8] 을 창설했다.
마침내 항주를 되찾고 왕유령의 장례를 치러준 뒤 좌종당의 추천으로 서태후에 의해 정2품의 벼슬을 받아 홍정상인이 되었다. 이때 그의 재산은 2천만냥을 넘는 당대 최고의 거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으며 태평천국을 진압한 뒤 좌종당이 섬감총독 자리를 받은 뒤 따라가 회족 봉기를 진압하는 데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고 이때 약방을 운영하여 명성을 얻는데, 이것이 설기약창(雪記藥廠)이다. 이 설기약창은 평소에는 군인들에게는 무상으로 약품을 제공하고 남는 것은 모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공급한다. 굴지의 어용상인에서 본격 자선사업으로 변신하는 순간이었다. 이 설기약창은 나중에 강남 각지에서 약방으로 뻗어나가는데, 이때 상호를 호경여당(胡慶餘堂)으로 바꾼다.
좌종당이 섬서, 감숙, 영하, 신강의 회족봉기를 진압하고 나서 호설암의 공로를 조정에 보고하는 동시에 북경에서 서태후를 알현하는데 그녀에 의해 정1품으로 승진하는 동시에 청나라 최고의 영광을 상징하는 황마괘(黃馬掛)[9] 를 하사받는다. 그뿐만 아니라 양강, 민절 4개 성의 조세 징수 대리권을 호설암이 운영하는 부강전장에 위임하여 중국 역사상 최고의 상인으로서 자리매김한다.[10]
2.4. 말년과 비참한 몰락
그러나 평생 전성기를 겪을 수는 없듯이, 좌종당은 점점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나 양강총독으로 밀려나나 밀려남과 동시에 호설암이 지금까지 자신을 도와주는 동시에 중간에서 엄청나게 해먹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고 그와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국내에서 영국상인들을 견제하기 위해 견직물의 원료인 생사(누에고치)를 무차별적으로 매점매석해 양강 일대에서 생사의 물량이 바닥날 지경이었다. 이로 인해 영국상인들은 중국에서 생사를 한 톨도 살 수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게 먹구름이 드리운다. 영국상인들이 생사를 중국이 아닌 누에고치가 한창 풍작이었던 이탈리아에서 조달하면서 국내 수요를 충족하는 바람에 호설암이 생사를 매점매석한 의미가 사라져 버렸다. 더군다나 보험이었던 프랑스 상인단조차 때마침 일어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중국의 국경분쟁이 일어나 1883년 10월 프랑스 군함이 상해 항구에서 무력시위를 한바탕 벌이는 바람에 청나라는 프랑스와의 무역을 전면 중단하는 조치를 취해 생사를 팔 길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었다.
생사는 현물이었지만 보존이 어려워 점점 썩기 시작하면서 호설암은 눈물을 머금고 생사를 투매하기 시작한다. 이로서 매점매석은 결국 자신에게 비수로 돌아왔지만 그것으로 그친 것이 아닌 호설암이 운영하는 부강전장의 예금과 어음 등 대출금에 커다란 직격타를 안겨주면서[11] 결국 대대적인 뱅크런이 일어나 결국 항주의 본점이 먼저 부도가 났고 곧이어 북경, 진강, 복주, 무창 등의 20여개의 지점도 연쇄부도라는 된서리를 맞는다. 이윽고 12월 5일 부강전장은 최종적으로 부도처리, 사실상 상장폐지 처분을 받는다.[12]
재앙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1884년 9월 좌종당도 병사하고 2개월 후인 11월, 서태후는 성지를 내려 호설암을 국가경제를 파탄내었다는 책임을 물어 삭탈관직 처분하고 재산을 몰수할 것을 명령하나 그는 재산을 정리해 하인과 첩들에게 나누어 주어 내보낸 뒤 재산이 없는 상태에서 80을 넘긴 어머니가 지켜보는 앞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난다. 향년 64세였다. 공교롭게도 그가 죽고 나서야 성지를 받은 항주지부와 전당, 인화현의 지현 두사람이 함께 그의 저택에 도착해 재산을 정리하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3. 평가
매우 입체적이고 다양한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재물과 장사의 신으로 떠받드는 평가에서부터 사치방탕하고 황음무도하며 위선적인 악질 부르주아의 전형이라는 악평까지 있는 그야말로 매우 다양한 평가를 받는 사람.[13]
현대 중국의 기업인들도 그를 벤치마킹하는 경우가 많은데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는 알리바바의 창업주인 마윈이 대표적이다.[14]
[1] 홍정(紅頂)이란, 청나라 2품관 이상의 고위관료만 쓸 수 있는 붉은 뚜껑의 모자를 가리킨다.[2] 적계현은 용천 호씨 가문의 본적지 겸 집성촌이 있는 곳으로, 문호 후스, 후진타오 전 주석의 본적지이다.[3] 훈제하여 소금에 절인 돼지 뒷다리살[4] 전장은 중국에서 자생적으로 생긴 근대적 은행의 전신으로 19세기 말 무렵에는 예금, 대부, 환어음 등을 다루는 거의 은행에 가까운 사설 금융 기관이었다. [5] 당시 중국은 소금이 국가의 전매품이었으므로 소금 거래에 부과한 세금을 징수하는 일을 하는 관리이다.[6] 이 사건은 호설암의 또다른 위기였다. 은인을 죽게 내버려 뒀을 뿐만 아니라 공금을 횡령하고 자취를 감췄다는 누명까지 썼다. 게다가 자신의 후원자를 잃은 뼈아픈 사건이기도 하다.[7] HSBC의 전신으로 호설암의 중재로 태평천국의 난과 회족 봉기 진압에 쓰일 군자금을 대출하는 은행이다. 하지만 후술할 사건으로 인해 호설암의 몰락에 기여한다.[8] 이 상승군은 서양식 무기로 무장하고 프랑스인 장교를 지휘관으로 삼은 서양식 군대로 소수였으나 태평천국을 진압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9] 황제가 하사하는 노란색의 마괘로 국가에 큰 기여를 한 공신 또는 화석친왕, 어전시위만이 입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어전시위가 입는 것은 근무중에만 입을 수 있었다.[10] 저 수준의 위세를 누렸던 상인은 여불위가 있다.[11] 이것을 조장한 사람이 다름아닌 좌종당의 정적이었던 이홍장이었으며, 훗날 신해혁명의 원인을 제공하는 성선회가 이홍장의 사주를 받고 별의별 뒷공작을 하면서 호설암의 몰락을 부추겼다.[12] 이때 청산을 직접 호설암 본인이 하면서 부유층과 극빈층 고객에게만 예금과 채권을 정리하는 작업을 해 주었으나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해줄수 없었다. 사실상 이들을 희생시킨 셈이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였다.[13] 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 사람 중 하나로 대만의 국사로 명망이 높았던 남회근(南懷瑾, 1918~2012)을 들 수 있다. 남회근은 2007년 베이징대학 강연에서 호설암을 좌종당이 키워 우연히 가지고 논 인물 정도로 평가하며, 진정한 홍정상인에 대해 알려거든 한국의 드라마인 상도를 보라고 추천하였다. 출처는 남회근의 강연을 모은 중국문화만담 99pg.[14] 그리고 마윈도 정치권력에 휘말려 몰락했다는 공통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