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다 소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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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田宗一郎(ほんだ そういちろう)
1906년 11월 17일 ~ 1991년 8월 5일
1. 개요
2. 생애
3. 이모저모


1. 개요


일본 기업 혼다의 창업주. 파나소닉의 창업주인 마쓰시타 고노스케, 그리고 교세라 창업주 이나모리 가즈오와 더불어 일본 경제계에서 '''신'''으로 불려진 몇 안 되는 인물이다.

2. 생애


혼다 소이치로는 1906년 11월 17일, 일본 시즈오카하마마츠란 곳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철공장이었고 어머니는 직공이었다. 어린시절부터 아버지의 철공소에서 자전거를 수리하는 일을 익혔으며 이는 그로 하여금 기계와 기술분야에 관심을 쏟게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15살에 도쿄로 상경해 자동차 수리소 수습생(修習生)으로 일을 시작해서 22세가 되던 1928년 고향으로 돌아와 자신의 자동차 수리소를 차리게 된다. 그 후 1937년 도카이 세이키(株式会社東海精機)라는 부품 공장을 세워 토요타에 납품했으나 미군의 공습과 1945년 미카와 지진으로 인해 공장을 잃고 복구 가능한 것을 토요타에게 매각해서 받은 45만 엔으로 1946년 10월 혼다 모터스의 전신인 혼다 기술연구공업을 창립하고 2년 후 첫 양산형 오토바이를 생산해낸다.
이후 탁월한 기술능력과 마케팅을 바탕으로 회사를 대기업으로 성장시켰으며 1959년 미국 현지에 첫 혼다 오토바이 딜러를 열게 된다. 그리고 1973년혼다의 사장직에서 물러나 은퇴하기 전까지 최고기술고문이라는 직함으로 기술연구분야에 전념하게 된다.
이같은 활동으로 1982년 미 기계기술자 소사이어티로부터 공로메달을 수여받았으며 1989년 미국 디트로이트에 위치한 미국 자동차 명예의 전당에 일본인으로서는 최초로 헌액되는 개인적인 경사도 누렸다.
그 후 1991년 8월 5일, 간질환으로 타계했다.

3. 이모저모


  • 학교 교육에 부정적인 인물이었다. 제일 싫어했던 과목이 서예였다고. 심지어 독서도 싫어했는데 본인 왈; "책에는 과거에 관한 것밖에 나와있지 않다. 책을 읽노라면 과거에 얽매여 퇴보할 것 같아 싫었다.[1]"라고 했을 정도.
  • 직원들이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일반 사람들이 어른[2]을 부르던 애칭이던 "오야지"라고 불리는 것을 더 선호했다. 정장차림의 말쑥한 사장보다는 기름때 묻은 작업복차림 공장장 호칭으로 불리는 것을 더 좋아한 것. 한번은 천황을 알현하게 됐는데 작업복 입고 가겠다고 하도 고집을 부리는 통에 궁내청 측과 임원들이 사정사정하여 그날만은 특별히 정장을 입었다고 한다[3].
  • 독학으로 엔지니어링을 공부했음에도 혼다를 재벌들 사이에서 거대 기업으로 키워냈고 세계적으로 기술력을 인정받은 덕에 기술에 관해 고집이 엄청나게 강했다고 한다. 이처럼 강한 에고로 인해 아랫사람들과 발생하는 갈등을 잘 조율하고 경영 업무 전반을 맡은 소이치로의 오른팔 후지사와 타케오도 명 경영자로 칭송받는다.
  • 다만 이러한 고집 때문에 말년에는 여러 실패들을 겪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엄청난 공랭식 엔진 덕후라 자동차 업계에서 주류로 자리잡은 수랭식 엔진 도입에 소극적이었다. 이러한 공랭식 덕후 기질로 인해 혼다의 대중차 시장 진출을 이끌기 위해 개발된 야심작 혼다 1300이나 혼다가 자체 제작한 마지막 F1 레이스카인 RA302 등에 공랭식 엔진을 적용했다가 대실패를 겪기도 했고, 결국 이 둘의 실패가 혼다 소이치로와 후지사와 타케오의 명예직으로의 은퇴를 불러오게 되었다.
  • 소니의 창업자였던 이부카 마사루와는 백년지기였다고 한다. 기술연구라는 공통점이 있는 인물들이라 쉽게 친해질 수 있었을 것이다.
  • '본업에 전념한다'는 사훈을 내세워 정치권과의 교류 역시 거부했다. 일본 경제에 만연한 정경유착에서 자유로웠던 인물.
  • 그가 타계 했을 당시의 일화도 인상깊은데, 그가 타계한 후 일본신문에 올라온 사진은, 유족들과 지인들이 조문객들을 돌려보내는 사진이었다. 이는 다름 아닌 혼다의 유언 때문이었다. 그는 임종 시 유언으로 "회사장을 지내거나 장례식을 치르지 마라. 내가 자동차를 만드는 사람인데 이 사회에 폐를 끼칠 수 없다. 내 장례식에 사람들이 자동차를 타고 올 것이고 그러면 교통 체증이 일어난다. 자동차 회사 책임자가 할 도리가 아니다."고 했다는 것. 유족들과 지인들은 그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장례식 대신 회사와 공장별로 '감사 모임'이라는 이름의 추모자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때 전국 각계 계층의 인사들이 찾아왔으며, 그 수는 6만 명이 넘었다.[4]
  • 그의 아들인 혼다 히로토시 역시 아버지의 기질을 이어받아 혼다 레이싱카 튜닝전문회사인 무겐 모터스포츠를 설립했다.

[1] 원문은 다음과 같다. 僕は、本を読むのが嫌いだ。極端ないい方をすると、本というものは過去のものしか書いていない。僕は、本を読むと、それにとらわれてしまって、何だか退歩するような気がして仕方がない。大体、僕の人生は、いわゆる見たり、聞いたり、試したりで、それを総合して、こうあるべきだということで進んできた。もしわからないことがあって、そのために本を読むんだったら、そのヒマに人に聞くことにしている。[2] 또는 몸을 쓰는 일터의 작업조 두령[3] 일본에서는 천황이란 말을 함부로 언급하는 것조차 불경하다고 여긴다. 그렇다보니 진보성향의 언론매체도 '천황'이라는 말을 함부로 못다룬다. 다만 현재에 와서는 이런 성향이 변화될 조짐이 미세하나마 일어나는 중.[4] 단순히 생전 친구들, 정재계 인사들 뿐만 아니라, 혼다의 바이크, 자동차를 좋아하는 사람들, F1 광팬 등 혼다가 만든 제품을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그중에는 혼다 커브로 배달을 하는 라면가게 사장도 있었는데, 그는 '내가 이 회사에 아는 사람은 없지만, 배달을 할 수 있도록 커브를 만들어 주신 소이치로씨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