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시타 고노스케
"직원들 때문에 이 위기가 닥친 것이 아닙니다. '''직원들이 있어야 이 위기를 넘길 수 있습니다.''' 정리해고를 당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재고품의 판매를 위해 노력합시다."
세계 대공황 당시 경영악화로 인건비를 줄여야 한다는 건의가 빗발치자 전 직원을 강당에 모으고 연설하며
가난과 허약, 무학(無學)은 하늘이 내게 준 축복이다.
집안이 가난했기 때문에 열심히 일을 해야 했고,
몸이 허약했기 때문에 건강에 신경을 썼고,[2]
배움이 없었기 때문에 학식이 있는 사람들의 충고를 경청할 수 있었다.
1. 개요
일본의 기업인으로 마쓰시타 전기산업(현 파나소닉.)의 창업주이다. 일본 내에서 '''경영의 신'''이라 불리우는 인물이다.[3]
2. 생애
살림지식총서- 마쓰시타 고노스케
1894년 일본 와카야마현 카이소 군[4] 의 가난한 집안에서 3남 5녀 중 막내로 태어나 어려운 생활을 했다.[5] 자전거 가게 점원으로 17세까지 일하고 이후 시멘트 운반업을 거치며 1910년에 오사카 전등 주식회사에 입사한다. 그러나 1917년 허약한 몸으로 인하여 퇴사하고 1918년 3월 7일 오사카시 기타구(北區. 오늘날 후쿠시마구) 오비라키 1번가 2층 목조 가옥을 빌려 마쓰시타 전기기구제작소를 창립했다.
직원은 마쓰시타 부부와 마쓰시타의 처남 이우에 도시오(산요전기 창업자)가 전부였지만 50년도 지나지 않아서 내쇼날, 파나소닉 브랜드로 유명한, 연매출 7조 엔(연결기준)이 넘는 세계 굴지 기업으로 발전하였다. 아무리 기업이 어려워도 '''절대 직원을 해고하지 않고 종신고용을 사수하면서 일본식 연공서열제도를 확립한 인물'''이다. 종신고용과 연공서열로 대표되는 마쓰시타의 경영철학은 전후 고도성장기에 일본 기업의 롤모델이 되었고, 마쓰시타는 일본 내에서 경영의 신으로 추앙받게 된다. 1962년에는 타임지의 표지를 장식하기도 하였다.[6]
1961년, 파나소닉의 사장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물러났으며 1973년에 회사 운영에서 완전히 손을 뗀 이후 만년인 1979년에는 자신의 재산 70억 엔을 들여 마쓰시타 정경숙(松下政経塾)이란 교육기관을 설립했다. 이 학교는 2000년대에 와서는 수십명의 의원, 장관, 지자체장 등을 배출한 정치 엘리트 교육기관으로, 일본 내에서는 상당히 잘 알려진 기관이다. 국내에서는 파나소닉이 전범기업이라는 점때문에 마쓰시타 정경숙을 우파 정치인 양성기관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데, 사실 마쓰시타 정경숙 출신의 대부분은 자민당이 아닌 민주당에서 활동하고있으며, 최초로 이곳 출신으로 수상직을 역임한 노다 요시히코도 민주당 출신의 수상이었다.[7][8] 정치 엘리트 양성기관인만큼 외국인은 거의 받아들이지 않는데,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주간조선에서 활동하는 유민호 퍼시픽 21 소장이 이곳 출신이다.유민호 소장이 쓴 마쓰시타 정경숙 경험기
3. 비판
파나소닉의 전신인 마쓰시타 전기산업은 2차대전 당시 일본의 주요 기업들이 그랬듯이 전쟁 물자 공급에 큰 역할을 했던 소위 전범기업으로 평가받고 있다. 조선인들을 강제 동원해 노동시킨 전력도 있기 때문이다. 해당 기사[9][10] 상기된 처남 이우에가 산요전기를 창업하게 된 것도 목조선 건조를 담당했던 이우에가 마쓰시타 전체의 책임을 지고 공직추방을 당했기 때문이다.
또한 6.25 전쟁이 발발하고 냉전 체제가 구축되면서 일본에 대한 미국의 입장이 변화하자, 제재 조치가 풀리고 경기가 활성화되는 덕을 봤다고도 한다. 실제로 미국은 소련이라는 더 큰 적을 앞두고 있었기에 남한과 일본을 전진기지로 만들 필요성이 있었다. 오키나와 미군정도 그 당시의 산물인 것. 요컨대 그가 일본의 경제에 기여한 업적과는 별개로, 한국과 직간접적으로 불편한 관계에 있었던 인물이라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또한 그가 정립한 일본식 기업문화는 비효율성과 경직성, 혁신에 대한 기피로 이어져 1990년대 이후 일본 경제를 정체시킨 원흉으로도 평가받고 있다. 아닌게아니라 노사간의 끈끈한 유대를 통해 대공황을 이겨내고 여기에 상술한 6.25 전쟁의 특수효과를 누리며 회사를 재건했으나, 당시 방침을 어떻게 보면 안이하게 유지했기 때문에 내부 문제가 곯다가 터진 것. 후술할 시마 시리즈에서도 현실 역사를 어느 정도 반영하여 창업주 요시와라 쇼타로(=마쓰시타 고노스케)가 주창한 '하츠시바이즘'을 부수고 전면적인 대개혁을 하는 장면이 시마 이사나 시마 상무 즈음에 나온다.
4. 기타
- 에로사극(…)인 시마 시리즈에서 주인공 시마 코사쿠가 근무하는 대기업 하츠시바 전기의 창업주 "요시와라 쇼타로"로 나온다. 하츠시바 전기 역시 마쓰시타 전기를 바꾼 것. 그래서인지 다른 만화에서 대기업을 운운할 때는 실존명칭 언급도 피할 겸하여 하츠시바 전기를 운운하는 경우가 많다.
[1] 사인은 기관지 폐렴.[2] 그 덕분인지 90세가 넘는 장수를 누렸다.[3] 니혼 TV가 2006년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역사적 인물을 설문조사한 적이 있는데 전체 리스트에서 5위, 기업인으로서는 토머스 에디슨에 이어 2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눈여겨볼 점이라면 파나소닉의 업계 라이벌이자 서양권에서 일본 최고의 기업인으로 평가받는 소니 창업주 모리타 아키오는 이 리스트에서 들지 못 했다는 사실. 일본의 기업가로는 마쓰시타 이외에 혼다 소이치로가 91위에 든 것이 전부였다.[4] 현재 와카야마시[5] 와카야마선 센다역에서 내려서 걸어서 몇 분 가면 그의 출생지가 있다.[6] 저 시기에 마쓰시타는 한국 나이 기준으로 68세였다! 이 시기 기준으로 이미 많이 장수한 셈.[7] 마쓰시타 정경숙에서의 교육은 민족주의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사상적으로는 우파와 연결점이 있지만, 실질적으로 사회자유주의적인 교육을 상당히 많이 한다고 알려져있는 만큼 경제적으로는 좌파에 가깝다. 특히 지방분권과 행정개혁에 대한 교육이 많다보니 출신자들 중에는 본격적인 정치인의 길을 걷지 않고 지자체장이나 지역 NGO의 단체장을 역임한 이들도 많다.[8] 마쓰시타 정경숙 출신 중에는 친중파가 많은데 이는 창립자 마쓰시타 고노스케부터가 21세기는 중국의 시대가 될것이라며, 중국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인지 이들이 주로 민주당에 진출한 이후 민주당은 친중성향이 강한 편이 되었다.[9] 이 기사는 약간 걸러들을 필요가 있어 보인다. 마쓰시타 정경숙을 우파 정치인 육성 기관으로 기술했기 때문이다.[10] 과거 웅진출판사에서 집필한 "20세기의 큰 인물" 위인전 시리즈에선 일본군이 마쓰시타에게 연습용 목제 비행기와 목조선을 만들라고 압박하자 마쓰시타가 어쩔 수 없이 이에 따르고, 종전 이후 미군정에게 재벌이라며 제재 조치를 당하자 "연습용을 만든 것도 무기 생산에 들어가냐"라며 타카하시(당시 부사장)가 항의했다는 묘사가 나오는데... 판단은 각자에게 맡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