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이포

 


[image]
수원화성에 있는 홍이포 모형. 장안문 옆에 있다.
紅夷砲. 홍의포(紅衣砲) 라고도 부르는데 청나라에서 夷[1] 자를 싫어해 이렇게 썼다 한다.
1604년 명나라 군대가 네덜란드와 전투할 때 중국인들은 네덜란드인을 ‘홍모이(紅毛夷: 붉은 머리를 한 오랑캐)'라고 불렀고, 이때 네덜란드인들이 사용하던 대포컬버린을 ‘홍이포(紅夷砲)’라 부르게 되었다. 네덜란드와 싸울 당시 중국인들은 이 대포의 파괴력에 크게 압도되어 1618년에 이를 수입하였고 1621년에는 복제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홍이포의 설계와 생산이 가능하게 되자 명나라는 대대적으로 홍이포의 생산에 착수하였는데 지방정부인 양광총독부에서만 한해에 500문을 생산할 정도였다.
조선의 경우 인조실록에 의하면 1630년 인조 때 진주사로 명나라에 갔던 정두원이 귀국할 때 처음으로 천리경(망원경), 서포(서양제 수석총), 자명종 등과 함께 홍이포 제본을 가져오면서 처음 존재를 알게 된 것으로 보인다. 실 제조는 100년 후인 1731년 영조 대이다. 이 때문에 고교생용 교과서나 참고서에선 아예 정두원 이야기는 빼버리고 영조 시기 도입된 것으로 설명한다. 도면만 있고 비교할 실물이 없어 제조를 못한 채 속만 끓이고 있었을 확률이 높아 보인다. 다만 1653년에 남만대포라 불리우는 신형 대포가 언급되고 1664년에 강화도에 남만대포 12문이 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남만대포가 홍이포를 지칭하는 걸로 추정되기도 한다.
병자호란청나라군이 홍이포를 사용해 강화도를 함락시키고 남한산성 성채를 공격하기도 했다. 이후 네덜란드인으로 제주도에 표류한 벨테브레(박연), 히아베르츠, 피아테르츠 등이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홍이포 제작 및 조종에 상당한 기여를 했으며 이후 조선 후기 내내 제작되고 운용되었다. 포신 길이가 215cm, 무게는 1.8 톤, 구경은 100mm이며 유효 사거리는 700m 정도이다.[2] 영조 때 훈련도감에서 홍이포 2문이 제작되었는데 탄환의 도달거리가 10여 리[3]에 달하여 위급한 상황에서 사용하기 좋을 거라고 보고하는 내용이 있으며[4] 남한산성을 시찰하던 정조가 홍이포를 두고서 병자년에 이 포를 배우지 못해 사용하지 못한 게 한탄스럽다고 하자 수어사 서명응이 그때 홍이포가 있었으면 적이 성벽으로 접근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 기록이 있다.[5]
원숭환이 이 무기로 영원성 전투에서 누르하치를 격파한 것으로 유명하다.[6]
더불어 1차 아편전쟁에서도 청군의 주력 화포였다.[7] 상대가 당대 최강인 영국군이라 처참하게 발렸지만, 천비해전에서 영국군의 슬루프함 히야신스(Hyacinth)의 마스트를 파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영조대 이후로도 제조 비용과 많은 화약소모, 조선군 교리 문제로 대량 배치되진 못했다. '''조선 후기 주력 화포는 엄연히 불랑기, 개중에서도 소형인 4호와 5호 불랑기다.''' 화기 개발과 발전을 제한하면서까지 팔기의 궁기병을 포기하지 않았던 청을 주적으로 상정한 방어 위주 교리의 조선군이 공성용 대형화포를 대거 보유할 이유가 없었다.

[1] 오랑캐 이(夷)는 중원 기준으로 동쪽의 오랑캐에게 주로 붙는 호칭이다. 그래서 동이(東夷)족이라고 쓰기도 한다. 즉, 夷는 명나라가 만주족을 대놓고 비하하는 글자이니, 싫어하는 게 당연하다.[2] 컬버린 보다는 작은 데미 컬버린급이다.[3] 킬로미터로는 약 4킬로미터 이상[4] 영조실록 30권, 영조 7년 9월 21일 신사 1번째 기사[5] 정조실록 8권, 정조 3년 8월 8일 기미 1번째 기사[6] 원숭환 사후에 치러진 북경 근처의 전투에서 패배한 후 투항한 장수들이나 기술자들이 이 홍이포 제작 기술을 전해주면서 1631년부터 청나라도 홍이포를 전장에서 사용하기 시작한다.[7] 새로운 화기의 도입과 개량에 열성이었던 명나라와 달리 청나라는 이쪽에 관해 거의 관심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