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 야너스 벨테브레
[image]
네덜란드 알크마르의 한 마을이자 그의 고향인 더레이프(De Rijp)에 세워져 있는 벨테브레이의 동상.[1] 조선에서 무관직을 지냈기 때문에 융복을 입은 모습으로 표현했다. 서울어린이대공원에도 복제품이 있다.
1. 소개
朴延 / 朴燕, 1595년 ~ ?[2]
네덜란드에서 귀화한 조선의 무관.
2. 생애
본명은 얀 얀서 더벨테브레이(Jan Janse de Weltevree). 귀화 후 하사받은 조선 이름은 '''박연'''. 화란[3] 출생으로 조선에 '''정착'''한 최초의 유럽인이기도 하다.[4] 박연이라는 이름은 '벨테브레', '얀'과 비슷한 발음을 따서 지은 것이다. 일본에 윌리엄 애덤스가 있다면 한국엔 얀 야너스 벨테브레가 있는 셈.
1627년 일본으로 항해하다가 표착해 제주도에 상륙했으나 곧바로 한성으로 압송되었다. 조선시대 전반의 관례로는 조선과 통교하고 있는 국가 중에 접경 국가 출신의 표류자는 직접 송환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무조건 명나라로 보내 조치를 의탁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당시 중국은 명과 후금이 서로 싸우는 등 정세가 좋지 않았기에 부산의 일본 왜관에 의뢰해서 일본으로 보내 조치를 의탁하려 했으나, 일본은 박연의 일행이 절리지단(切利支丹 - 크리스천)[5] 이란 이유로 거절했다.[6] 그러자 조선 조정은 곧 바로 송환을 포기했다. 결국 그는 훈련도감에서 근무하며 결혼해서 귀화했다. 외국 귀화인으로는 매우 드물게 본관을 하사받은 기록이 없다. 정말 안 받은 건지 받았는데 딱히 신경을 안 쓴 건지... 조선 기록에 따르면 조선인 아내와의 사이에서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었다 하나, 그의 후손을 자처하는 박씨 문파도 현재는 없는 상태. 한국경제에서는 원산 박씨가 그의 후예라는 기사를 냈으나 원산 박씨가 실존하지 않는다는 말도 있다. 실제로 벨테브레이는 네덜란드에 가족이 있었고, 그 후손이 1990년대에 한국에 있는 박연의 후손을 찾으러 왔지만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김충선과는 정반대인 경우. 후손이 있더라도 본관이 없거나 여계 후손[7] 만 남아서 족보를 통해 후손을 찾는 게 사실상 힘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병자호란이 발발할 때 동료 2명[8] 과 함께 참전했으나, 박연만 살아남았고 동료들은 전사했다. 그 후 항복해 온 일본인과 청나라 사람들을 감시하는 일, 청나라를 피해 조선으로 귀화해 온 명나라 사람들을 비롯한 외국인들로 구성된 부대의 지휘관 자리, 대포를 개량하는 일 등을 맡았다.
하멜 표류기에 따르면 헨드릭 하멜이 조선으로 표류했을 때 통역을 맡기도 했다. 갓 쓰고 한복 입은 백인, 그것도 같은 나라 출신이 와서 하멜과 동료들도 보고 놀랐다고 한다. 그런데 26년이나 지나서 조선에 적응이 다 되었고 반대로 네덜란드어를 같이 나눌 사람들도 병자호란 때 죽어서 도통 말을 나누지 못해서인지 통역을 꽤 낯설어 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나와있다. 하멜의 기록에 따르면 그의 네덜란드 말은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서툴렀다고 한다. 다만 며칠 동안 같이 얘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다시 능숙해졌다고. 조선인들은 하멜에게 벨테브레를 가리키며 "이 자가 어느 나라 사람인 줄 아는가?"라고 물었고 하멜이 "이 분은 우리 네덜란드 사람[9] 이 틀림없습니다."고 대답하자 조선인들은 웃으면서 "틀렸다. 이 자는 조선 사람[10] 이다."라고 대답했다는 기록을 보아 조선인들에게는 인종은 달라도 같은 조선인으로 대우받은 모양이다. 사실 통일신라시대에 같은 백인 민족인 아랍인이 신라로 귀화하고[11] 고려 말기에 황백혼혈 민족인 위구르족 사람[12] 이 고려로 귀화하기도 했으니, 백인계 이민족이 한민족계 국가에 귀화한 것 자체는 벨테브레가 처음이 아니었다. 단지 유럽계로서는 최초였을 뿐. 아랍계 귀화인을 처음 본 토착 신라인들과 위구르계 귀화인을 처음 본 토착 고려인들의 심정은 벨테브레를 처음 본 토착 조선인들의 심정과도 비슷했을 것이다.
하멜 표류기에서는 별 다른 얘기가 없이 사무적인 얘기만 나눈 것처럼 되어 있지만 조선측의 기록에는 벨테브레이가 하멜 일행을 처음으로 만난 이후 숙소로 돌아와서 소매가 다 젖도록 울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기록상으로는 조선 여자와 결혼해서 1남 1녀를 두었는데, 당연히 혼혈이라 네덜란드 얼굴과 조선 얼굴이 반반 섞여 있다고 놀랍다는 기록이 있다. 하멜은 자신이 탈출하던 1668년까지만 해도 벨테브레이가 살아있었다고 했는데 하멜이 일본으로 탈출하는 시점이면 이미 70이 넘은 나이로 고령이었으나, 언제 죽은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는 무기 기술에 해박하고, 동료들과 함께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했으며, 거친 환경에서도 적응을 잘 했던 것[13] 으로 보아 군인 혹은 해적이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건축가의 아들이고, 그의 대부가 시장이었으며, 300굴덴짜리 집을 살 정도로 부유했던 하멜과는 처지가 많이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3. 원래 신분
당시 네덜란드 기록을 추적한 결과,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소속 사략선 아우베르케르크 호의 간부급 선원이었다고.[14] 그러니까 추측대로 해적에 가까웠던 셈이다. 제주도에 오게 된 것은 아우베르케르크 호가 나포한 중국 상선을 동인도회사 본부가 있는 바타비아[15] 로 몰고 가기 위해 부하들과 함께 중국 상선에 옮겨 탔다가 태풍을 만나 모함과 헤어지고, 식수가 떨어지자 마침 가까이 보이던 제주도에 부하 두 명을 거느리고 상륙했는데, 그 때 중국 상선의 원래 선원들이 반란을 일으켜 배를 탈환해 도주해버리는 바람에 제주도에 남겨지게 된 것이라고 한다. 자세한 내용 그의 고향으로 추정되는 더레이프는 암스테르담 북쪽에 있는 조그마한 시골 마을[16] 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하멜과 달리 어떻게든 먹고 살려고 상경한 뒤 동인도회사에 입사해 산전수전 다 겪은 30대 초반의 청년이라 추정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하멜과 달리 탈출하지 않고 그대로 조선에 귀화해 산 이유도 혼란스러운 중국의 정세와 효종의 북진 정책, 일본의 송환 거부에 돌아갈 가능성이 적어졌고, 생각보다 조선에서 그를 후하게 대접해 주니 돌아갈 의지가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뱃일이 상당히 고된 일이기도 하거니와 당시의 선상생활은 육지에 비해 삶의 질이 굉장히 낮았고,[17][18] 동인도회사는 그 중에서도 극동 원양항해까지 다닐 정도로 빡센 곳이었다.[19][20] 하물며 정규 상선도 아니고 국외에서는 그냥 흉악범 취급받는 사략선의 간부라면 절대 안정된 직업이라 할 수 없었다.[21] 다시 말해서, 바다에서 갖은 고생만 하다가 낯선 곳에 떠밀려왔다가 발견되어 수도로 올라가게 됐는데, 거기서 아주 후하게 대접을 해주니 눌러살기로 마음을 먹었던 모양이다. 실제로 조선 정부에서 박연의 재주를 보고 훈련도감에서 근무하게 하고 외인부대(...)의 지휘관으로 삼는 동시에 병장기를 개량하는 일을 맡겼다.[22]
현대로 치면 제주도로 떠밀려온 외국인이 정부에게 직접 기술을 인정받아 국방부 육본 정책과장(중령급)으로 특채된 셈이다. 비록 미미한 정도였지만 이후 하멜 일행의 통역도 담당하는 등 알게 모르게 협소한 조선의 세계관을 넓혀준 이였으므로 조선에게도 좋은 일이였다 하겠다. 어쨌든 선원이란 고된 신분에서 등용도 되고 결혼도 하는 등 상당히 성공한 인생으로 신분상승을 했지만, 동시에 이역만리에서 몇 남지 않은 동료를 잃고 고향으로 평생 돌아가지 못한 사람의 소감이 어땠을지는 오직 그 자신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4.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image]
- 1996년 KBS 다큐멘터리 '중세 조선의 비밀-하멜 표류기'에서는 당시 주한 네덜란드 대사 요스트 볼프스빙컬(Joost Wolfswinkel)이 벨테브레이를 연기했다. 이 다큐멘터리에는 네덜란드 대사 뿐만 아니라 대사관 농무관이었던 프레데릭 보스나가 헨드릭 하멜 역을 맡은 등 주한 네덜란드 대사관에서 적극적으로 참여, 협력하였다.
- 소설 《천년의 왕국》에서 그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 그의 생애가 2017년 9월 10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뤄졌다.
- 이외에도 짤태식[24] 이 다음 웹툰에 연재하는 짐승친구들의 스핀오프격 웹툰인 금수친구들에서는 동인도회사의 무역선 선원으로 등장한다. 선원으로 채용되기 전부터 남들과는 다른 모습으로 구박받는 쥐인 슘댱이를 거둬 길러주며, 이후 슘댱이와 일본으로 항해하는 중 폭풍을 만나면서 "반드시 살아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실종됐다. 물론 실제 역사에서 벨테브레는 조선에 정착했으니 언젠가 만날 일이 있을것이다.
5. 같이보기
[1] 제작자는 엘리 발튀스(Elly Baltus). 공식 홈페이지.[2] 하멜 표류기에 따르면 1668년까지는 분명히 살아 있었다고 하니 사망 당시 나이는 최소 73세 이상이다. 하멜을 만나고 2~3년 뒤에 전국을 헬게이트로 만든 경신대기근이 일어났는데, 이때도 살아있었는지는 불명이다.[3] 네덜란드는 '홀란드'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어서 동아시아에서는 홀란드를 한자로 치환한 화란으로 불렀다. 일본에선 포르투갈어 '올랑다Holanda'를 옮긴 '오란다'로 읽는다.[4] 정착이 아닌 서양인의 최초 조선 상륙 기록은 1582년 제주도에 표착한 마리이(馬里伊)라는 사람이다. 이는 포르투갈 어로 선원을 뜻하는 마링예이루(Marinheiro)의 음차이며, 본명은 알수 없다. 그는 명나라 사행길을 통해 중국으로 송환되었다.[5] 일본식 표현으로는 키리시탄(キリシタン)이다.[6]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는 가톨릭 탄압 정책을 취했고 결국 벨테브레가 조선에 표류한 지 10여년 뒤엔 시마바라의 난을 겪으며 가톨릭과는 완전히 척을 지게 된다. 이 당시 네덜란드는 개신교국이라 가톨릭과는 별 상관이 없었지만 이 당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에도 막부 사이에 분쟁이 있던 시기여서 네덜란드인에게도 적대적이었다.[7] 딸이나 손녀 등 여성 직계 자손의 후손.[8] 디럭 헤이스버르츠(Direk Gijsbertz), 얀 피르터르츠(Jan Pierterz).[9] 실록 기록에는 '남만인(南蠻人)'이라고 나와 있다.[10] 하멜 표류기에는 '코레시안(Coresian)'이라고 표기되어 있다.[11] 처용이 아랍 사람이었다는 설이 있다. 또한 이슬람측의 기록에도 신라(알 실라)를 두고 "'''그 땅은 물이 맑고 땅이 좋아서 거기 간 사람들은 대부분 돌아오지 않고 그 땅에 그대로 눌러 살았다'''"고 하고 있을 정도니.[12] 고려 말 조선 초의 관인으로 경주 설씨의 시조가 되었던 설장수의 아버지 설손이 바로 위구르인이었다. 홍건적의 난을 피해서 고려로 도망쳤다가 눌러 살았다고. 설장수는 이민 2세대에 해당한다. 설손 말고도 임천 이씨의 시조가 된 이현(李玄)이라는 인물도 있는데 마찬가지로 위구르 출신이다.[13] 겨울에도 솜옷을 입지 않을 정도로 건장했다고 한다.[14] 간부인 걸 어찌 아냐면, 같이 표류한 부하 2명이 벨테브레이를 '호탄만'이라고 불렀다는 조선 측 기록이 있다. 호탄만은 네덜란드어 Hoofdman(대위 or 과장을 의미) 정도로 추정된다. 후일의 행보로 봐서 병기 직별장이었을 가능성이 크다.[15] 현재의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16] 2005년 기준으로 4000명이다. 우리로 치면 파주시나 연천군에 속한 면읍 같은 곳.[17] 대항해시대 같은 게임으로 접했다면 항해가 낭만적이라 생각하겠지만, 식사만 해도 원액 수준의 독주로 목을 축이며 소금친 고무타이어 같은 염장육과 돌덩이 같은 쉽비스킷을 씹어먹어야 했고 선원들은 괴혈병과 각기병을 달고 살았다.[18] 19세기 미국 포경선에서 일하다 보트를 타고 도망친 선원들이 조선에 표착했다가 북경을 통해 송환된 적#이 있는데, 그들은 "한번도 만난 적이 없던 이방인들이 우리에게 사람대접을 해줬다"고 증언할 정도로 근대까지 선상업무는 고되다.[19] 당시 선원이 되었다가 살아서 본국으로 돌아간 네덜란드인이 1/3밖에 안 되며 그나마도 평균 수명이 '''40세'''였다. 일본에서도 소문이 돌 정도. 게다가 당시 사략선 선원의 승급 과정을 보면 벨테브레이 역시 어릴 때부터 배에 타서 고생깨나 했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사략선이 아니더라도 선원 노릇을 하기란 현대에도 꽤나 고된 일인데, 하물며 선내 시설도 현대보다 아주 열악했던 그 시대는 말할 것도 없다.[20] 마이크 대쉬의 '미친 항해'에 의하면, 동인도 회사는 사실상 네덜란드에서 가장 멀리 항해하는 회사이기에 생환률도 극도로 낮아 기록이 나쁜 사람들이나 범죄자 출신도 자주 뽑아 썼다. 안 그러면 선원을 구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동인도회사 출신 선원이라고 하면 뭐하고 살았길래 거기까지 갔냐며 다른 뱃사람들조차 채용을 꺼렸다고.[21] 실제로 헤어진 모함 아우베르케르크의 선원들은 단단히 벼르고 있던 포르투갈 해군에 잡혀서 전부 사형당했다.[22] 이때 조선에 플린트락이 전래되었지만 당시엔 비싸고 불발률이 높은데다 수요가 없었던 관계로 양산되지 않았다.[23] 원작에서는 주인공 윌리엄에게 조선을 탈출할 방법은 없으니 그냥 포기하고 조선에 정착해서 살아볼 것을 권유한다. 그리고 아예 훈련도감에 자리까지 알아봐 주겠다고 한다. 참고로 왜인지는 몰라도 원작, 드라마 둘 다 경상도 사투리로 얘기한다. 심지어 인물 소개 항목을 보면 "지는 마 원래는 네덜란드 사람이었는데예. 인자는 마 조선 사람 다 됐다 아인교? 인자는 네덜란드 말도 다 잊아뿌고 우리 조선말이 더 편합니더. 지는 마 조선이 너무 좋심더."라고 소개되어 있다(....) 이거야 뭐 하일이 구사하는 한국어가 동남 방언이니 어쩔 수 없다 쳐도(...)[24] 본명은 유수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