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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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정치가, 독립운동가, 언론인.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3]
2. 생애
1890년 지금의 전라남도 담양군 금성면 대곡리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적에는 한학을 배웠으나 창평군의 영학숙에서 신학문을 접한 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김성수 등과 몰래 일본으로 유학을 간다. 1915년 메이지대학 법과를 졸업했으며 유학 시절 도쿄에서 안재홍, 장덕수, 신익희 등과 조선 유학생 친목회를 결성했다.
적을 치자면 먼저 적을 알아야 한다는 이치에서이지. 그들에게 지지 않으려면 먼저 그들을 알 필요가 있어.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생각하는 이상을 생각해서 앞을 질러야 하지 않겠는가...
-일본 유학을 주장하는 그에게 백관수가 이유를 묻자
1916년 귀국하여 김성수와 함께 중앙학교를 인수하였다. 중앙고등보통학교의 교장으로서 학생들에게 민족 의식을 불어넣었으며 동아일보사가 주식회사로 개편되자 사장에 취임하여 이후 30여 년 간 사장, 고문, 주필 등을 역임하면서 동아일보를 민족의 대변지로 이끌었다. 사장으로 재임할 당시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설립운동, 브나로드 운동 등을 이끌었다. 그래서 동아일보의 창업자는 김성수이지만 동아일보의 사상적 바탕을 이루는 사람은 바로 송진우라고들 한다. 1919년 전민족적인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48인의 한 사람으로 3.1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로 인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게 되었으며 옥중에 모친의 사망 소식을 접하였다고 한다.이제부터 광복운동은 과거의 의거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첫째, 한 두 사람 또는 한 두 단체의 광복운동이 아니라 전 민족적인 집단운동이라야 할 것이고, 둘째, 어떤 한 부분을 통한 광복운동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산업, 문화 등 각 부분이 병행해야 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교육사업을 해야겠고, 산업을 일으켜야 하겠고, 동시에 금융기관과 신문, 출판기관을 가져야 한다.
1920년대 전반 김성수 등과 함께 '자치론'을 주장했으며 조선인의 합법적인 운동과 참정권 획득을 위해 김성수, 이광수 등과 '연정회'라는 단체를 조직하려 하기도 했다. 1926년 6.10 만세 운동과 관련된 혐의로 종로경찰서에 불려가 취조를 받았으며 동아일보에 3.1운동 7주년 기념사를 게재한 일로 실형을 받아 수감되었다. 1927년 신간회 경성지회에 가입했는데 송진우가 신간회에 가입할 당시 조직의 주도권은 공산주의자와 비타협적 민족주의자 일부가 쥐고 있었다. 이들은 송진우와 동아일보 계열 인사를 타협적 민족주의자, 대자본가로 인식하고 비난했다. 이로 인해 안재홍 등 몇몇 신간회 간부는 송진우를 가입 즉시 제명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 이후 기존 신간회 간부들이 체포되면서 송진우 등 동아일보 계열을 중심으로 한 보수적 민족주의자들이 중앙 지도부를 차지하게 된다. 신간회의 지회들이 새 지도부의 노선에 반발하면서 신간회는 1931년에 해소된다.
1930년대 초 민족의 구심점이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동아일보 사장으로서 역사적 위인들에 대한 현양 사업을 펼쳤다. 권율 사당을 중수하고 이순신 현충사를 완공하고 영정을 봉안했으며 1934년에는 일제에 의해 강제 철거된 단군릉 수축을 위한 기금 모금을 하였다. 그리고 각 현양 사업들에 대해 기자들을 특파해 보도하도록 하여 민족 의식을 일깨우기도 하였다.[5]
1936년 일장기 말소사건 이후 동아일보가 정간되자 책임을 지고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9개월 뒤 복간된 후 동아일보는 점점 일본과 타협하는 노선을 보이게 되었으며 종국에는 학도병 권유문을 뿌리는 등 친일 언론이 되었다. 송진우는 조선총독부의 협력 요구를 수 차례 거절했다고 하는데 창씨개명을 거부했고 태평양전쟁 전후 임전(조선임전보국단) 협력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송진우도 친일파라면서 1934년 '조선대아세아협회'라는 조선총독부 관제 단체에 명의가 있다는 것과 일제강점기 말 1945년 '조선언론보국회 명예회원'에 명의가 있다는 것 등을 근거로 제기하는 이들이 있다. 이 부분에 대해 딱 잘라 말하자면 송진우는 친일파가 아니다.[6]학문의 세계란 자기의 경험과 착상만으로 무엇이나 해치울 수 있는 것 같은 안락한 세계는 아니다. 자기만의 경험을 여러 가지 다른 수많은 경험과 기교해서 음미되어야 하고 한계가 설정되어야 하며 이와 같은 다양한 경험적 사실을 통일적으로 이행하기 위한 이론적 작업의 시행도 거듭되어야 한다. 종교와 신앙은 인간 본래의 것이다.
-1934년 평양 숭실전문학교의 신사 참배 거부를 옹호하기 위해 학문과 종교의 자유를 논하면서
광복 직전인 1945년 8월 11일 조선총독부 측에서 경기도 지사 이쿠다(당시 70세 노인네였다)를 통하여 조선의 자본가, 지주, 명사 세력을 대변할 수 있는 송진우를 접촉하여 '행정 위원회'를 구성하여 줄 것을 요청했으나 송진우는 중경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봉대(奉戴)와 연합군의 승인을 이유로 대면서 요청을 거절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었다.[7] 그러나 해방 당시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지냈던 엔도 류사쿠는 1957년 8월 <국제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송진우에게 치안을 의뢰했다는 주장은 사실 무근'이라고 밝혔다.일제의 패망이 멀지 않으니 동요하지 말고 어린이들에게 정신교육을 시키라. 민족긍지를 심어주고, 일제필망, 독립필지의 굳은 신념을 갖게 하여 참고 견디어 나갈 수 있는 정신력을 길러주라.
-1940년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처벌받고 쫓겨난 아이들의 부모들이 찾아와 하소연을 하자
(..중략..) 또 한국에서는 내가 처음에 송진우 씨에게 이 문제를 상의했으나 송씨가 거부했기 때문에 여씨를 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모양이나 그것은 잘못으로 내가 송씨 및 안재홍, 장덕수 씨를 만난 것은 종전 전 총력 연맹에 협력을 요청한 일이 있지만 그들이 깨끗이 거부하여 왔기 때문에 나도 그들의 신념을 이해하여 두 번 다시 권하지 않았다. 따라서 종전후 송씨와 안씨에게 교섭한 일은 없다.
1945년 8.15 광복 후 여운형 등이 이끄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 참여를 거부하고 9월 6일 박헌영, 여운형 등을 중심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조선인민공화국(인공)[8] 으로 개조되자 송진우는 이를 '정부를 참칭하는 반역의 집단'이라며 인공 내각과 박헌영, 여운형을 강하게 비난하였다. 9월 7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봉대론을 내세우며 국민대회 준비회를 조직한다. 9월 9일 서울에 진주한 미군정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하자 임시정부 봉대론을 버리고 미군정과 유착하여 독자 세력화를 시도한다.[9]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해방 전후로 연합국으로부터 대표성을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지만 실패해왔다.("한국 독립운동 단체들이 분열되어 있어 임시정부의 대표성을 인정할 수 없다.", "한반도 국내 세력과 연계가 없으므로 한국인을 대표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10][11] 송진우는 법통(정통성)을 가진 임시정부지만 국외에서 활동했던만큼 '국민 대회'를 통해 국민들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동시에 당시 난립해있던 여러 정치 단체들이 서로 사상이 다르겠지만 우선은 법통을 가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단결하여 국제 사회에 독립 국가로 승인받아 민족의 독립을 완성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12] 9월 16일 송진우는 우익 세력 규합의 필요성을 느껴 한국민주당을 결성하고 당대표격인 수석 총무가 되었다.일본에는 양식있는 정치가가 한 사람도 없어. 정치를 조금만이라도 아는 자가 있다면 승산이 없는 이 전쟁을 이렇게 끌어서 무고한 백성을 떼죽음시킬 리가 없어. 국가는 한때 망해도 민족은 영원히 사는 거야. 민족이 살면 국가는 반드시 부흥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지...
-일본이 1945년 7월경 패망할 것으로 본 예측이 빗나가자
이 때부터 송진우는 진보 진영에서 역사적으로 두고두고 까이는 스텝을 밟기 시작하는데 애초에 한국민주당이 막판에 일본에 굴복한 언론인들, 자본가, 지주, 기득권 세력(이들을 줄여서 극단적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라고도 하는 것 같다)의 지지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당이기 때문에 민중과 상당히 괴리되어 있었고 이러한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이들은 친미를 내세워 미군정에 적극 협력해 그들의 비호를 받게 되었고 이를 통해 세력을 확장해 가기 시작했다. 1945년 10월 5일 송진우와 김성수가 군정 위원회의 한국인 고문으로 임명되자 한국민주당의 위상은 더욱 올라갔다. 여기서 한국민주당의 특성을 말하자면 한국민주당 인사들은 대부분 미국 유학파들로 상당한 실력가들이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미국식 민주주의와 시장 자본주의를 옹호하였으며 조선 민족에 대한 열등 의식을 가지고 있어 이들을 개조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이들이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와서 친일로 전향한 이유) 하지만 무엇보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유산 계급에 속했고 일제강점기에 사회주의자들에게 당한게 많았기에 사회주의에 적대적이었다. 한반도 사정을 전혀 몰랐던 미군정은 영어를 잘하는 이들에게 정치적 조언을 듣고 사회주의를 탄압하였다는 의견이 있다.
하지만 1946년 미군정은 과도민주정부 수립과 좌우합작운동을 지원했고 이 결과 좌우합작위원회, 좌우합작 7원칙이 도출되었으며(미군정이 좌우를 포함하는 정치 세력을 만들려고 시도하자 이승만은 하지 중장을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기도 하였다. 이후 좌우합작위원회는 좌우익 서로의 의견 차이로 1947년 해체되었다.) 비판과 달리 한국민주당 당규에는 ●국민 기본생활의 확보 ●교육 및 보건의 기회균등 ●중공주의(=중상주의)의 경제정책 수립 ●주요 산업의 국영 또는 통제관리 등이 포함되어 있는데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사회주의적 요소가 많다. 그리고 하단에 서술되어 있는 송진우의 연설에서 알 수 있듯이 공산주의 세력과의 타협은 거부했지만 위에서 비판한 것처럼 사회주의에 대해 적대적인 것은 아니었다.[13]
사실 여운형은 해방 이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활동 당시 서울 지역 우익의 대표격인 송진우를 찾아가 좌우를 망라하는 조선 민족의 통일 국가를 건립하자고 지속적으로 협력을 요구하였고 열심히 설득했다. 그러나 송진우는 "경거망동을 삼가라, 충칭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지지해야 한다"는 소리만 하면서 여운형의 제안을 끝내 거절하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런 태도를 보인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말이 있지만 이는 당시 송진우가 보기에 조선건국준비위원회 활동이 국제적인 승인을 받았는지 불분명하므로 그럴 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편이 낫다고 보았기 때문도 있고 여운형이 과거 고려공산당 활동에 몸담았던 전적이 있어 공산주의자라고 판단했기 때문도 있다. 여운형이 동아일보의 라이벌 신문 중 하나였던 조선중앙일보 사장이었으므로 자존심상 라이벌이 운영하는 조직인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아래로 들어가기 싫었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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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에 최송설당[15] 동상 제막식에 참석한 최송설당 여사(앞쪽)가 축하하러 온 고하 송진우, 몽양 여운형과 자리를 함께한 사진인데, 확실히 둘이 그렇게 친해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여운형은 1945년 송진우의 집을 나오는 길에서 괴한들에게 두들겨 맞는 테러를 당하여 사실상 결별하게 된다. 이 때문에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서울 지역 우익의 불참, 박헌영 계열 좌익 세력의 주도권 장악으로 좌익 성향으로 가기 시작했다.[16]
송진우가 해방 이후 우익의 지도자로 성장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의 관계도 점차 악화됐다. 본래 송진우와 한국민주당은 애국지사 후원회, 환국지사 후원회를 조직하여 임시정부 인사들을 금전적으로 후원하기도 했지만 임시정부의 법통론과 송진우의 현실주의가 충돌하면서 사이가 점차 멀어졌다. 친일 문제가 대표적인 예인데 김구가 귀국한 직후 송진우가 후원금 900만 환을 전달하자 김구는 친일 인사의 돈이 섞여 있다며 조완구를 통해 돌려 보냈다.[17] 12월 중순에는 송진우, 장덕수 등 한국민주당 인사와 김구, 김규식, 조소앙, 신익희, 엄항섭 등 임시정부 인사가 식사를 하다 친일 문제로 고성을 주고 받으며 싸우기도 했다.[18] 그 와중에 미군정이 이승만에게 힘을 실어 주자 한국민주당도 김구보다 이승만과 가까워지게 됐다. 그럼에도 한국독립당(김구), 한국민주당, 이승만은 서로 단결하려는 노력들을 해왔는데 1947년 12월 한국민주당의 장덕수가 피살된 이후로 임시정부 세력과 한국민주당, 이승만 세력은 결별하게 된다.[19]
비록 공산주의 세력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기는 하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민족의 실력 및 문화 양성과 민주주의라는 원칙을 고수하였던 상당한 원칙주의자였다. 그가 몰락하게 된 것은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대한민국의 신탁 통치안이 전해졌을 때 반탁 운동에 신중을 기하라고 자신의 입장을 표명한 때부터였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모스크바 3상 회의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신탁 통치가 결정이 되었고 미국은 반탁, 소련은 찬탁을 주장하였다"는 식으로 양측 입장을 완전히 바꿔 사전에 오보하는 신탁통치 오보사건을 터트렸는데 이에 대해 송진우는 동아일보 사장이면서도 반탁을 주장했던 임시정부 요인들과 의견을 달리하였다. 강원용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경교장 회의에 신탁통치안에 대해 논하기 위해 정당 대표들, 좌익, 우익, 중간파 할 것 없이 모였는데 다들 격해있었다고 한다. 이때 석상에서 김구는 “우리가 왜 서양 사람 구두를 신느냐. 짚신을 신자. 양복도 벗어버리자. 우리 민족은 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신탁통치만은 받을 수 없다.”면서 흥분했다고 하는데 강원용은 당시 자리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그런 입장이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송진우는 원칙적으로 반탁 입장임을 명시하면서도 “침착하고 신중하게 대처하자.", "미국을 적으로 돌리면 공산당이 어부지리를 얻는다.”, "무력으로 미군정으로부터 정권을 접수하려 해서는 승리할 수 없다."는 등의 주장을 했다고 한다.# 또한 다른 자리에서 송진우는 자신을 찬탁론자로 몰고가는 시중의 여론을 불쾌히 여기면서도 “우리들은 미군이 적어도 2년 동안은 머물러 있기를 원한다. 만일 미군이 지금 떠나게 되면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잡게될 염려가 있다. 왜 그러냐 하면 그들은 우리들보다 조직이 더 잘되어 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해방 직후의 혼란이 수습되기 전에 미군이 빠져버린다면 한반도는 혼란의 도가니로 가거나 공산주의 세력에 의해 통일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천만의 말씀이오. 우리에게는 비록 식민지 교육이라 할지라도 전문학교 이상 대학교육을 받은 한국인이 많고 해외에서 항일투쟁을 해 온 혁명 세력이 있기 때문에 두려울 것이 없고 그럴 필요는 조금도 없으니 염려 마시오.
-1945년 국민대회를 마친 후 중국 대공보 기자가 신탁통치의 불가피성을 질문하자
당시 송진우의 입장은 강준식의 《적과 동지》에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송진우의 태도는 일제강점기의 상처가 덜 가신 민중들과의 괴리를 심화시키는 것이었고 반탁을 주장하는 임시정부 요인들과 견해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의 발언은 모두가 현실적이고 사실인 것은 맞다.[22] 그러나 문제는 현실은 그의 생각만큼 느긋함을 요구하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신탁 통치안이 내려진 후 국내의 세력은 오로지 '찬탁'이냐 '반탁'이냐의 두 세력만 존재할 뿐 그 외의 어떠한 입장도 용납되지 않았다. 더구나 송진우는 당시의 상황이 해방이 되고 난지 얼마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간과했을 뿐 아니라 신탁 통치안에 나왔던 자주적 통치 능력을 갖추기까지 당분간이란 항목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당분간"이라는 기간은 연합국이 일방적으로 정한 것이라 기한이 언제까지인지를 명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23] 따라서 반탁 측에서 내놓았던 의견인 '사실상의 또다른 식민 통치'라는 것도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사실이 잘못 기술되어 있다. "당분간"이 아니라 모스크바 3상회의의 신탁통치안에는 "●한국을 독립국가로 재건하기 위한 임시한국민주정부를 수립(set up a provisional Korean democratic government.) ●'''최고 5년''' 기간의 4개국 신탁통치안을 '''임시한국정부와 협의(consultation)''' ●구체화를 위해 2주 이내에 미국, 소련 사령부 대표회의(미소공동위원회) 소집"이라고 나와있다. 그 최고 5년의 기한도 '''한반도에 단일 임시정부를 세워 협의했다면 줄일 수도 있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미소공동위원회 기간 동안 의견 차이로 임시 한국 정부를 세우지도 못했고 따라서 신탁 기간을 논하지도 못했으며 이로써 한반도 문제는 UN 소총회로 이관되었다. UN 감시하의 총선거를 위한 위원단의 북한 지역으로의 입장이 소련군정 당국에 의해서 거부당하자 UN 소총회는 선거 가능한 지역에 한해서만이라도 총선거를 추진할 것을 결정하였다. 결국 한반도는 남과 북에 별개의 정부가 수립되며 남북분단되었다. 그리고 송진우는 한반도가 공산주의 세력에 의해 지배될 수 있으니 적어도 2년 동안은 미군 주둔이 필요하다는 현실적인 입장이었지 찬탁은 아니었다.강병순 : 찬탁을 주장하셨다는 소문은 사실입니까?
송진우 : 누가 그따위 소리를 해?
강 : 좌익이 퍼뜨린 낭설인가 봅니다. 어쨌든 그런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더군요.
송 : 임정은 짚신 감발을 하고 다니면서라도 반탁하겠다고 하는데. 반탁하는 건 좋지만 군정과 충돌하는 건 피하는 게 좋다고 했더니 백범이 화를 내면서 고하는 찬탁파냐고 묻더군.[20]
아마 그런 얘기가 와전된 것이겠지. 조선을 신탁 관리 아래 둔다는데 나라고 찬탁을 주장할 수 있겠나.강 : 글쎄, 그러셨겠지요. 저도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습니다.
송 : 허지만 백범은 차제에 정권을 인수하겠다는 생각인 모양인데 이게 도무지 현실 정치를 무시한 얘기란 말이야. 군정이 저렇게 터억 버티고 있는데 정권을 인수하겠다고 나오면 군정과 부딪칠게 뻔한 이치 아닌가. 아무리 생각이 간절해도 앞뒤를 좀 재가며 일을 해나갈 줄 알아야지. 이건 숫제 모험을 하려 드니 도대체 어떻게 뒷감당을 하겠다는 거야.
강 : 듣고 보니 그렇군요.
송 : 역사를 상고해봐도 조선인은 개개인이 우수한데 비해선 집단 전략에 능하질 못해. 정신은 고귀하달 수 있지만, 가령 기미년 운동을 돌이켜봐도 독립하겠다는 감정과 기분만 앞섰지 그에 부수되는 여러가지 전략이 없어. 그저 만세 부르다 많은 양민만 희생시키고 끝났거든. 물론 그로 인해 상해 임정이 서고 독립 정신을 고취시키는 운동들이 시작된 점은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민중 운동의 결과론이고, 적어도 3.1 운동을 추진했던 지도부의 정치 능력만큼은 빵점이었단 말이야. 전국적으로 만세의 불길을 질러놓는 덴 성공했지만, 그 다음 즉 일본의 무력 제압에 대처할 방안은 아무 것도 없어. 그저 태화관에서 선언문 낭독하고, 경찰에 자진 신고한 것밖에 더 있는가. 내 말은 이번 반탁 운동도 그런 식이 되어선 곤란하다, 이 말이야.[21]
임정은 거리 시위의 여세를 몰아 정권을 인수하겠다지만 적어도 지도부가 그런 무모한 계획을 추진하면 곤란하지 않은가. 말이야 바른 말이지, 우리가 정권을 달란다고 그럼 가져가시오 하고 내놓을 군정이 어디있겠나. 응해오지 않을 때의 대비책도 있어야지. 그래서 내가 방법을 신중히 고려해보자고 했던 건데, 백범은 오히려 화를 내면서 나더러 찬탁파냐고 묻더란 말이야. 원, 정치한다는 사람들이 이렇게 말귀를 알아듣지 못해서야. 쯧쯧.
특히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표격인 김구 세력의 큰 반감을 사게 되었는데 그로부터 얼마 안 있어[24] 25세의 한현우에게 암살당하였다.[25][26] 한현우는 일당들과 새벽에 종로구 원서동에 있는 송진우의 저택에 들어와 13발의 총탄을 난사했고 송진우는 얼굴, 심장, 배에 총알 6발을 맞아 즉사했다.미군정부는 군정에 그쳤으면 좋겠소. 반탁운동은 이 나라 국민의 의사이며 국민운동인데, 국민운동에 군정이 개입한다는 것은 현명한 행동은 아니라고 생각되오.
-반탁 시위를 하는 시위 행렬을 미군 헌병이 강압으로 해산시키자 군정장관 아놀드를 방문하여 항의하면서
허정의 회고에 따르면 송진우는 암살 전날 경교장에서 늦게까지 김구, 장덕수와 신탁 통치 문제를 의논했는데 밤이 깊자 장덕수가 자신의 집에서 자고 가라고 했다 한다. 그러나 잠자리에 예민했던 송진우는 제안을 사양하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는데 이 때 장덕수의 말을 들었으면 적어도 그 날의 암살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여러분의 생각이 모두 애국심에서 나온 것이란 걸 나도 알고 있지만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들로서 경박해서는 안되겠지요. 여기 누구라도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의정서의 원본을 제대로 읽어본 분이 있습니까? 내가 알고 있기로는 그 내용이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한 후 한국의 정당 사회단체들과 협의해서 남북을 통일한 임시정부를 세우고 5년 이내의 신탁통치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내가 알고 있는 게 정확하다면 길어야 5년이면 통일된 우리의 독립정부를 세울 수 있는 것을 그렇게 극단적인 방법으로까지 반대할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우리가 우리 힘으로 정부를 세운다고 해도 현재 이렇게 분할통치되고 있는 상황이고, 강대국간에 전후(戰後)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가 그들과의 합의없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신탁통치가 길어야 5년이라고 하니 3년이 될 수도 있는 것인데, 그렇게 거국적으로 반대할 이유가 뭐 있습니까. 물론 나도 신탁통치는 반대합니다. 그러나 반대 방법은 다시 한번 여유를 가지고 냉정히 생각해 봅시다.
3. 대중매체에서
- 1973년작 영화 <광복 20년과 백범 김구>에선 배우 성소민이 연기했다.
- 1981년작 MBC 드라마 《제1공화국》에선 원로배우 박근형이 맡았는데, 비록 출연은 짧지만 여운형과의 갈등 관계나 임시정부 계통 인사들과의 갈등 관계가 잘 묘사되어 있다. 박근형은 당시 눈에 띌 정도로 느릿한 대사 처리를 선보였는데 아마 중후하고 근엄했다는 송진우의 말투를 재현한 듯하다.
- 1982년작 KBS1 특집드라마 《그 여름의 이틀》에선 배우 김흥기가 연기했다.
- 1984년작 MBC 드라마 《조선총독부》에선 성우 김수일이 연기했다.
- 1985년작 KBS1 대하드라마 <새벽>과 1994년 2월 6일자 <다큐멘터리 극장>에선 배우 박경득이 각각 맡았다.
- 1989년작 MBC 특집드라마 <백범일지>에선 성우 정승현이 연기했다.
- 2003년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선 배우 임성표가 연기했다.
- 2006년작 KBS1 대하드라마 <서울 1945>에선 배우 박칠용이 연기했다.
4. 여담
- 정치적으로는 독재를 배척하는 민주주의 체제를 추구했다. 이것은 경제적으로도 마찬가지였는데 정치에서 독재가 문제있듯이 경제에서 독점 자본이 문제있다는 인식을 보였으며 사회주의 성향을 포용하는 성향을 보여주기도 했다.[28]
정치적으로는 민주 의정체(義政體)를 수립해야 합니다. 독립한 국가가 될지라도 그 권력이 한 사람의 것이되고 일계급의 독재한 바가 된다면 무엇으로써 우리의 생명재산과 자유가 보장될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국가나 사회에는 오직 마찰과 대립이 있을뿐이니 우리는 만인이 기구하는 민주적 정치체제를 확립하지 않으면 안될지니...(중략)
과거에 있어서는 자유에만 치중하고 균등에 있어서는 진실한 고려가 없었기 때문에 자본가가 이윤 추구에 방분한 나머지 경제적 균등의 기회는 파괴되고 따라서 근로 대중의 생활은 그 안정을 잃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치적 민주주의가 독재적 전횡을 타파하는데 있는 것 같이 경제적 민주주의는 독점의 자본을 제재하는데 있는 것이니 진정한 의미의 경제적 민주주의는 그 정책에 있어서 사회주의 계획 경제와 일치된 점을 발견치 못하리라고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대자본을 요하고 독점성을 띄운 중요 산업은 국영화 혹은 공영으로 해야만 할 것이오 또한 토지 정책에 있어서도 종래의 불합리한 착취 방법을 단연 배제하기 위하여 일본인 소유 토지의 몰수에 의한 농민에게 경작권 분여는 물론이거니와 조선인 소유 토지도 소유를 극도로 제한하는 동시에 매매 겸병을 금하여 경작권의 전국적 시설을 촉진하여 민중의 생활을 권보하지 않으면 아니될 줄 믿습니다.
송진우의 연설, 동아일보 1945년 12월 23일
- 현실주의적이고 이념 문제에 상대적으로 온건했던 송진우가 암살당하지 않았더라면 좌우 대립이 완화되지 않을까 평가하는 이들이 있다. 실제로 송진우 암살 이후 한국민주당에서는 김성수가 수석 총무로 선출되는 등 보수적 색채가 짙어졌다.
- 생전 '목소리가 멋진 남자'에 손꼽혔으며 억양에 악센트가 없고 근엄하고 중후하기로 이름나 있었다고 한다. 특히 일본어 악센트가 세지 못한 것으로 유명했다. 가령 光化門(광화문) 550番(동아일보 사옥의 주소다)이라고 부를 때 「고까몽」할 것을 「고가뭉」하고 또 「私し 宋鎭禹ですが」라고 전화 받는걸 보면 「와따시 송징우데스가」하고 첫자부터 마즈막 「데스가」에 이르기까지 줄곧 고저 장단 없이 그냥 주욱 말했다고 한다.
- 초대 대한민국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을 할 때 둘째아들이 결혼을 서울에서 해야했는데 당시 동아일보 사장이었던 송진우가 주례를 섰고 동아일보에서 결혼 비용을 대주었으며 큰아들은 한자를 잘해서 동아일보 교열부 기자로 취직시켜 주었다고 한다. 이시영의 조카인 이종찬 전 국정원장은 당시 동아일보가 해외로 나간 독립운동가들의 개인사를 돕는 국내 거점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기사 또한 김좌진 장군 휘하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했던 이강훈 전 광복회장은 “인촌 김성수가 송진우 동아일보 사장을 통해 김좌진 장군에게 여러차례 군자금을 보내왔다."고 증언했다.기사
- 1935년 새해를 맞아 광산 부자 최창학과 함께 황해도 신천 온천으로 드라이빙하다가 차가 낭떠러지 아래로 굴러떨어져 죽을 뻔했다 살아난 적이 있었다. 다행히도 바퀴가 아카시아 나무에 걸려서 전치 3주에 그쳤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