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초대 법무부 장관이자 독립운동가, 변호사, 정치인.
2. 생애
1896년 경상북도 대구군(현 대구광역시 중구) 사일동(射一洞)에서 아버지 이종영(李宗榮)과 어머니 연일 정씨 정복희(鄭福姬)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니혼대학 전문부 법률(야간) 수료 및 메이지대학 전문부 법과를 졸업하였다.
1923년 일본변호사시험에 합격하여, 변호사를 개업하였다. 이후 일제강점기 당시 가인 김병로, 허헌과 함께 다른 독립운동가를 상대로 무료변호를 하여 3대 민족 인권 변호사로서 명망을 날렸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창씨개명을 거절하였다.
8.15 광복 후,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여 한국민주당 소속으로 있었으며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론을 지지하였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이승만 정부의 초대 법무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1949년 7월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어 반민특위를 해체시킨 흑역사가 있다. [2]
1949년 법무부 장관에서 물러난 이후 제헌 국회의원 선거 재보궐선거(서울특별시 종로구 을)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당시 장면이 주미 대한민국 대사로 부임하여 국회의원직을 사임하였기 때문이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을 지역구에서 대한국민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참의원(參議員)에 당선되었다.
1962년 유엔 인권옹호 한국연맹 이사에 임명되었다. 1972년 민족통일촉진회장, 국토통일원(현 통일부) 고문 등을 역임했다.
3. 둘러보기
[1] 경주 이씨 36세손으로 항렬자는 쓰지 않았다.[2] 1949년 6.6 반민특위 습격사건과 반민특위 위원장으로 활동했던 김상덕이 물러난 전후로 반민특위의 활동은 사실상 무력화되어버린 시점이었다. 당시 법무부 장관이던 이인은 애초부터 친일 청산에 반대하는 입장을 가졌었던 인물. 이러니 반민특위의 활동은 무력화되어버리고 활동 기간도 대폭 축소되어 끝내 해체되어버린 것이다. 이인 외에도 장헌상이나 조병옥처럼 친일파 처벌보다는 반공주의를 강조하는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은 상당히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