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 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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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훈 센 (ហ៊ុន សែន, Hun Sen)
생년월일
1952년 8월 5일
경력
캄보디아 총리: 1985년~
1. 개요
2. 생애
3. 근황
4. 여담


1. 개요


캄보디아의 정치인. 캄보디아 칸달 지역구 하원의원(비례대표)이며 현직 총리이자 독재자.
'''35년째''' 캄보디아를 통치하고 있으며 1985년 32살 나이에 최연소 총리가 된 이후 연정, 쿠데타, 선거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훈 센은 현재도 정적 숙청과 탄압, 인권 탄압 논란 등으로 야당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아오고 있으며, 그는 외신과의 인터뷰는 거의 하지 않는 폐쇄적인 성격으로도 유명하다. 다만 훈 센은 2009년에 중앙일보와 인터뷰 한 바 있다.인터뷰

2. 생애


훈 센은 1952년 캄보디아의 껌뽕짬 주에서 태어났다. 이후 베이징에서 망명하면서 라디오로 무장 투쟁을 선동하고 있던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을 따라서 친미 정권인 론 놀 정권에 대항하는 크메르 루주의 부대 지휘관으로 열심히 싸워 크메르 루주가 집권한 후에도 군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크메르 루주가 깽판을 부리기 시작하자 그는 점차 크메르 루주를 멀리했다고 하며, 결정적으로 그는 베트남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변경지대 자국민들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자 크메르 루주의 명령을 거부하고 1977년 베트남으로 도주했고, 이후 베트남에서 게릴라 훈련을 하며 반 크메르 루주 군대를 양성했다. 이렇게 키운 군대를 바탕으로 베트남군이 1978년 12월 캄보디아를 침공하자 베트남과 함께 크메르 루주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도움을 주어 베트남과 함께 괴뢰 정부를 이끌었다. 이후 훈 센은 베트남이 크메르 루주 정권을 몰아내고 수립한 캄보디아 정부에서 주요 자리들을 거친 후 1982년에는 29세에 부총리가 되었고 '''1985년 32세 때 세계 최연소 총리라는 기록을 세웠다.'''[1]
1997년 7월에는 쿠데타를 일으켜 노로돔 시아누크의 아들이자 원내 1당 대표인 노로돔 라나리드 제1총리를 캄보디아에서 쫒아냈고, 단독 총리를 맡아 군부의 지지까지 얻어서 권력 기반을 다져나갔다. 물론 라나리드 진영의 게릴라전이 있었으나 손쉽게 격퇴되었다. 이후 캄보디아의 절대권력자가 된 훈 센 휘하 군부대들은 축출된 노로돔 라나리드에게 동조하는 부대원들의 아내와 자녀들을 학살했다. 태국으로 도피해온 캄보디아의 한 경찰관은 "훈 센의 부대가 라나리드 군인들의 자녀들과 아내들을 모두 죽였다"라고 증언하기도 했다. 자료 또한 라나리드 편에 대해서 무자비한 고문을 실시했는데 증언에 의하면 라나리드 편의 병사는 캄캄하고 환기통이 없는 골방에서 눈이 가려지고 손을 뒤로 묶인채 심문받는 도중 각목과 허리띠, 부러진 책상다리 등으로 심하게 얻어맞았으며 무거운 쇳덩이로 손바닥을 짓누르는 고문을 당했다고 하며, 훈 센측 고문 기술자들이 라나리드측 병사들에게 결코 잠을 재우지 않았으며 이들이 수용소에서 마신 물은 하수도 물, 특히 인분이 섞여 구린내가 나는 물이 전부였다고 한다. 기사 또한 전기충격은 기본이고, 달군 쇳덩이로 몸을 지지거나, 머리를 비닐봉지로 묶어 질식시키는 등의 잔인한 고문을 했다고도 전해진다.
한편 타이 국경지대로 숨어든 크메르 루주와의 '''싸움은 1991년 파리평화협정을 끝으로 끝났다.''' 한편 협정 이행을 위해 대규모 유엔 평화유지군이 캄보디아에 주둔할 때도 훈센은 야당을 탄압했고 유엔이 지켜보는 데에도 약 100명 이상의 야권 인사가 살해됐다.
노로돔 시아누크가 서거하자 그 아들 노로돔 시아모니를 왕위로 내세우고 자신은 배후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 사실상 캄보디아판 최충헌 또는 일본 막부를 창립한 초대 쇼군이라고 해도 무방한 인물.

3. 근황


'''현재 캄보디아의 언론은 철저히 통제되고 있다. 캄보디아의 방송사인 바욘TV는 훈 센의 맏딸인 훈 마나가 소유하고 있다.''' 아프사라TV는 캄보디아 여당인 인민당 소속인 사이삼알 환경장관이 운영하고 있으며, 마이TV 등을 비롯한 다른 방송들은 중국계인 끗 멩이 소유하고 있다. 끗 멩은 이름 앞에 옥냐란 별칭이 붙어 있는데, 캄보디아의 국왕이나 총리가 주요 기업인들에게 내리는 일종의 명예 작위로, 그가 캄보디아 여당과 굉장히 친밀한 관계임을 보여준다.
2003년부터 미국 국무부에서는 훈 센의 개인 자산이 5억 달러를 넘어섰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캄보디아는 2000년대 들어서 경제적 토지양허가 크게 유행했는데 이것은 부동산 개발 이권을 노린 훈 센과 그의 측근들이 막대한 규모의 토지를 외국계 자본에 마구잡이로 팔아넘긴 거나 다름없다. 이를 위한 법과 제도 또한 크게 변경되었는데, 외국인이 100% 지분을 보유한 회사를 차릴 수 있게 했으며, 이들 회사가 토지 등 부동산을 소유하도록 허용했다. 계약기간 99년에 같은 기간을 한 차례 연장할 수 있도록 하는 ‘장기임대’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런 식으로 캄보디아의 숲과 호수 그리고 해변과 산호섬까지 전부 외국인들에게 팔려나갔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2008년 4월 26일날 “지난 18개월 동안 캄보디아 국토의 절반가량이 외국 투기꾼들에게 팔려나갔다. 크메르 루즈의 학살을 피해 피란길에 올랐던 인구보다 많은 이들이 삶의 터전을 뺏기고 정처 없이 떠도는 신세로 전락했다”고 캄보디아 정부를 비판했다.
사실 그가 크메르 루주라는 희대의 미치광이들 때문에 개판이 된 캄보디아를 안정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사리사욕을 챙기는 정책들을 실시하면서 점점 불만이 고조되고 있는 상태다. 특히 2001년 토지법이 개정되면서 농민의 불만이 커지기 시작했는데, 개정된 법은 농민이 경작하고 있는 토지에 대해 5년 이상 아무런 분쟁이 없으면 소유권을 인정하도록 하고 있지만 농민은 대부분 권력자들에게 토지를 빼았겼다. 게다가 캄보디아는 지난 10년간 연간 7% 이상의 고속성장을 거듭해왔지만 임금 인상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의류공장 노동자의 월급은 80달러(8만 원)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전 세계의 내로라 하는 의류기업이 모여들고 있지만 캄보디아 국민에게 돌아가는 것은 적다는 불만이 상당히 팽배한 상황이다. 실제로 2013년 12월 말부터 80달러인 최저임금을 2배 수준인 160달러로 올려달라고 요구하며 파업을 벌인 의류노동자들에게 무장경찰과 공수여단을 투입해 진압하면서 최소 5명이 사망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기사
2013년 1월 5일에는 야당이 수개월째 시위장소로 수도 프놈펜 시내에 위치한 자유공원을 사용하자, 훈 센 총리의 큰아들 훈 마넷 중장의 부대원들로 추정되는 오토바이 헬멧을 쓴 사람들에 의해서 강제로 철거되었다. 집회 장소에 간이텐트를 치고, 임시거처 삼아 장기투쟁을 벌여온 야당지지자들과 사회운동가와 승려들도 무력 진압에 의해 강제로 쫓겨나야 했다. 또한 체포된 사회운동가들과 시위 가담자 23명은 정식재판도 받지 못한 채 외딴 교도소에서 약 5개월 가량 강제 수감되었다가 간신히 풀려나기도 했다. 그리고 몇 개월 동안 자유공원 진입로는 군과 경찰이 친 철조망으로 막혔으며, 무장한 군과 경찰 병력이 시위진압용 차량을 동원하며 계속해서 지키고 있었다고.
실제로 2013년 7월 치뤄진 캄보디아 총선에서는 투표용지에 여러 차례 표기하지 못하도록 지워지지 않는 잉크를 도입했으나, 잉크가 라임주스 같은 액체에 쉽게 지워지는 등 표 조작 의혹이 생겼으며 많은 사람들이 유권자 명단에서 제외돼 투표를 못 할 정도로 부정선거 의혹을 받고 있다. 이렇게 부정선거 논란이 크게 일어 야당이 선거불복종을 선언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논란이 되기는 했지만 어찌저찌 넘어가고 훈센의 연임이 확정. 다만 여기서 인간말종적인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반대세력을 약화시키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아예 죽여버려야 한다. … 누구든 거리에 나가 시위를 벌일 정도로 강하다면, 그 개새끼들을 흠씬 두들겨팬 다음 우리에 가둬버리겠다."''' 다만 이런저런 수단을 동원했다고 해도 여당 의석수가 크게 줄어들고 야당 의석수가 크게 불어난지라 훈 센의 입지에 큰 타격이 오기는 했다 한국으로 친다면 캄보디아판 7대 대선, 8대 총선12대 총선인 셈인데 거액의 선거자금을 뿌리고 여러 부정스러운 수단을 동원하지 않았다면 판세가 어떻게 돌아갈지 예측불허였던 상황이었다는 뜻이다.
2015년에는 자신의 아들 세 명을 당 내 고위직으로 승진시켰는데 훈 센 총리의 이 같은 조치에 자신의 권력을 승계하려 한다는 비난이 나오고 있다. 아마도 장남인 훈 마넷에게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
그는 정책 홍보와 이미지 관리에 페이스북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동시에 반정부 목소리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고 있다. 캄보디아인권센터(CCHR)에 따르면 최근 7개월 사이에 캄보디아 당국이 온라인상의 글을 문제 삼아 최소 7명을 체포했으며 적어도 23명이 자신들의 글 때문에 공개적인 위협을 받고 있다고 하며 2015년 8월에는 한 야당 의원이 페이스북에 과거 캄보디아와 베트남의 국경선 합의를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가 훈 센 총리의 지시로 체포되었고(기사), 최근 제1야당인 캄보디아구국당(CNRP)의 삼랭시 대표에게 입국 금지 조치를 취했다(기사). 게다가 2016년 11월 27일에는 유엔 인권기구와 갈등을 빚으면서 캄보디아 정부는 내정불간섭을 약속하지 않으면 유엔인권사무소를 폐쇄하겠다고 밝혔다. 기사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을 항해 1970년대 초 정권에 있었던 론 놀 정권이 미국에서 빌린 돈을 거론하면서 미국에 진 '더러운 빚'을 모두 탕감해달라고 요구했다. 기사 하지만 미국은 거부했고 그래서 미국과의 합동군사훈련을 취소했다. 물론 미국은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캄보디아는 이미 충분히 친중 성향이 짙은 데다가 옆에는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더 유용한 동맹인 베트남이 있기 때문에 미국 입장에서는 있으나 마나 한 곳이다.
2017년 6월 지방선거에서 제1야당인 캄보디아 구국당이 크게 약진하여 2018년 총선에서 정권교체가 일어날지 모른다는 예측이 나오던 와중에 9월 들어서 캄보디아 구국당 당수를 반역죄로 체포하고, 캄보디아 영자매체인 캄보디아 데일리에게 압력을 가해 폐간을 강제하는 행보를 보이고 있어서 차기 총선을 앞두고 야당의 세를 꺽을려는 의도로 탄압을 강화하는 움직임을 보였고, 야당이 무력화된 상황에서 치러진 총선에서 모든 의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웠다. 원래대로라면 캄보디아 구국당이 이겼어야 하는 선거였지만 탄압을 강화해서 야당을 무력화시켰기에 승리할 수 있었다는 평이다.
2018년 12월에 장남 훈 마넷이 사실상 후계자로 발탁되었다.#
장모가 위독한 상태여서 곁을 지키기 위해 2019년 11월 한국에서 열린 아세안 회의에 불참했다.
2021년 2월에 인터넷을 통제, 검열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내용의 법령을 공포했다.# 사실상 중국과 같은 셈이다.

4. 여담


  • 한국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한 바에 따르면 18세 때부터 담배를 피웠다는데 그 이유는 캄보디아 내전 당시 정글에서 생활할 때 모기[2]를 쫓기 위해 담배를 피운 것이 지금까지 끊지 못한다고 한다. 물론 자신의 주치의도 금연을 권하고 가족과 국민도 담배 끊기를 바라지만 매우 어렵다고, 실제로 몇 차례 금연을 시도했는데 전부 다 실패했다. 다만 손자나, 손녀들과 있을 때 또는 국제회의장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고 말했다.
  • 2000년부터 골프에 취미를 붙여서 매주 한두 차례 골프장에 간다고 한다. 하지만 골프장에 가기 전에 반드시 집사람의 허락을 받는데 그 이유는 내 식사를 준비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기 위해서라고. 또한 노래 작사를 즐긴다고 하며, 직접 만든 가사를 가수에게 주기도 했다. 바쁜 일정 때문에 식사 시간은 10분이면 충분하며 뉴스를 접할 때는 TV 두 대와 라디오를 동시에 켜 놓는 습관도 가지고 있다. 기사
  • 캄보디아 최고의 여배우였던 삐셋 삘리카가 1999년 7월 6일 프놈펜의 한 시장에서 권총 3발을 맞고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진 지 일주일만에 사망했는데 이 여자의 사망이 훈 센의 연인이였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녀는 고아 출신으로 왕립무용단원을 거쳐 영화계에 들어가서 스타가 된 여자인데, 몇몇 주장에 의하면 훈 센이 이 여배우와 사랑에 빠진 것을 훈 센의 아내가 알고 크게 질투하자 경찰국장이 여배우에게 관계를 끊으라고 경고했으나, 그녀가 듣지 않자 경찰국장이 그녀를 암살하라는 명령을 내려 그녀가 살해되었다는 주장이다. 물론 진실은 저 너머에. 기사
  • 야당인 삼랑시당의 의원이 독재자라고 비난하자 "독재자라는 말, 조심해라. 대법원에 고소할 테니.", '우린 입헌군주제 의원내각제이다." 고 말하고 "내가 통치하는 동안 캄보디아가 못산다고 주장하는 작자들은 벼락을 맞아 뒈질 것이다."고 막말을 하였다.
  • 김영삼 대통령이 사망하자, 2015년 11월 24일 조문을 다녀가기도 했다. 기사
  • 이명박 대통령이 2000년부터 2007년까지 그의 경제고문을 맡았다. 퇴임 이후 2013년부터 다시 훈 센 총리의 경제고문을 맡았다. 동남아의 지도자들이 그렇지만 한국과 여러모로 인연이 깊은 인물이다.[3] 박정희와 새마을운동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1] 훈 센보다 더 최연소로 이끌게된 지도자는 김정은일 것이다.[2] 동남아시아 같은 열대우림 지역의 모기들은 치명적인 질병을 옮기는 경우가 많고, 담배가 독하다보니 모기도 담배연기를 싫어한다.[3] 말레이시아 총리인 마하티르, 인도네시아 대통령인 조코 위도도, 미얀마의 실질적인 국가원수인 아웅산 수치도 한국과 인연이 깊은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