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7 법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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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80년 10월 27일에 벌어진 전두환 독재정권의 대규모 불교 탄압. 현대 한국 불교계에 가해졌던 독재정권의 흑역사 중 하나이다.
2. 전개
1980년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의 신군부 세력은 사회 각계의 반대 세력을 탄압해서 자신들의 권력 기반을 다지고 있었다. 여기에는 종교계도 예외가 아니었다.참으로 참담하였다. 이미 많은 스님들이 도착해 있었다. 옷을 늦게 갈아입는 스님에게 그들은 발길질과 쇠몽둥이질을 서슴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퍽퍽 내려치는 소리와 고통의 비명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어떤 스님은 벌써 얼굴에 피멍이 들었고 어떤 스님은 고통스럽게 가슴을 부여잡고 울부짖었다.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발길질과 쇠몽둥이로 닥치는 대로 내려치니 시멘트 바닥에 피와 울부짖음이 낭자했다. 그들은 나를 의자에 거꾸로 세워 콧구멍에 수건을 씌우고 고춧가루를 퍼 넣고 거기다 양동이의 물을 들어부었다. 이름 하여 고춧가루 물고문. 다짜고짜 고문을 강행하면서 나에게 몇 차례나 허위 진술을 강요했다. 계속 잠을 재우지 않고 눈에 서치라이트를 비추면서 고문을 가하면 정신이 몽롱해져 사뭇 헛소리를 했다. 혼몽 중에 나는 최면에 걸린 듯 까마득하게 잊었던 어린 시절의 어느 날로 돌아가 있기도 하고, 돌아가신 할머니가 생생하게 앞에 다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러다가 기절하여 시멘트 바닥에 쓰러져 버리면, 양동이 물을 냅다 끼얹는 바람에 정신이 들곤 했다. 정신이 드는가 싶으면 다시 일으켜 책상 앞에 앉히고 내게 볼펜과 메모지를 밀쳐놓으면서 다그쳤다.#
당시 조계종을 비롯한 불교계는 신군부 세력에 대해 조직적으로 저항의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유신 체제 당시 천주교를 비롯한 종교계가 체제에 저항한 것을 경험한 신군부에선 예방 차원에서 불교계 또한 '손을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반면 불교계에서는 1978년부터 일어난 조계사와 개운사 간의 종단 분규가 원만히 수습된 데 이어 1980년 4월부터 월주가 조계종 총무원장이 되면서 서울의 봄이라고 불리던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불교 자주화와 개혁 조치를 준비하고 있었던 때였다.
1980년 10월 27일 새벽, 신군부가 조종하는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 산하 합동수사단의 주도로 '사회정화'를 앞세워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인 월주를 비롯한 관련 인사 153명을 강제 연행했다. 또한 전국 각지의 사찰 및 암자에 경찰 및 군부대를 동원해 수색에 나서서 승려 및 관련 인사 1776명을 추가로 연행했다. 당시 연행자들에게는 각종 폭행 및 고문이 가해졌으며, 삼보 등 일부 승려는 삼청교육대로 가거나 교도소에 수감된 채 순화교육을 받기도 했고 흥국선원으로 끌려가기도 했다. 고문과 고생의 후유증으로 몇몇 승려들은 풀려난 후 사망한 이들이 있었고 지금 생존해 있는 이들 중에서도 파킨슨병과 후유증으로 괴로운 날들을 보내는 사람도 있다.
특히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이었던 월주는 이 사건으로 인해 계엄사 요원들에 의해 수모를 당한 끝에 총무원장직을 내려놓아야 했다. 그리고 법난 당시 제주교구본사 관음사 주지였던 지선 역시 군 수사관들에 의해 새벽에 제주 보안대 지하실에 끌려가 3일 밤낮을 쉬지 않고 취조를 받았다. 말을 듣지 않으면 수사관들은 "두들겨 패서 승복을 벗기고 속복을 입혀 쫓아내겠다."거나 "바닷가에 빠뜨려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리겠다."는 협박과 함께 "여기는 죄를 만드는 곳"이라 하여 무조건 죄를 불라고 다그쳤다고 한다. 그리고 월주가 끌려간 같은 시각에 혜성 역시 경찰 특수수사대에 의해 치안본부 무교동 분실에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했다.
거기에 신군부는 신도회장 등 사찰 간부들까지 잡아들여 사건을 조작하려고 광분했지만 나올 게 없었다. 겨우 풀려난 지선은 사건 직후 계엄하에서 해체된 총무원 대신 만들어진 비상종단의 정화위원으로 위촉되었다. 월간 말 1994년 5월호에서 안영배 기자가 쓴 <불교개혁 외길 지선스님의 사바세계 사랑법>이란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건 당시 계엄사령부는 “불교계가 사이비 승려와 폭력배들이 난동·발호하는 비리 지대로서 자력으로는 갱생의 힘이 없는 것으로 판단”했다고 발표했다. 이후 신군부의 강요로 조계종 측에서는 '정화중흥회의'를 열어서 13명의 승려의 도첩을 박탈하는 처분을 내렸다. 11월 21일에는 '흥국선원'이라는 순화교육장을 세워 ‘정화중흥회의’ 산하 사정기관인 정화분과위원회에서 징계를 받은 승려 중 24명을 순화교육을 실시하기까지 했다.울분을 안고 서울에 올라와 대면한 조계종의 현실은 그를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사복을 입은 군인들이 나와 말 한마디로 승려들을 제적시키거나 치탈도첩시켰다. 참다못한 그는 "수십 년간 승려생활을 해 온 스님들을 어떻게 해명 한 마디 듣지 않고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항변했다. 그런데 더욱 가관인 것은 옆에 앉아있던 스님이 "잔소리하지 말고 듣기나 하지"라며 말을 막고 나선 것이다. 그가 참을쏜가, "당신이야말로 정화대상인데 왜 여기 와 있냐"며 시비가 벌어졌고 그는 결국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렸다. - <불교개혁 외길 지선스님의 사바세계 사랑법(안영배 글)>. 월간 말 1994년 5월호. P. 168.
3. 이후
이러한 야만적인 폭력으로 신군부에 의해 점령당한 불교계는 이후 군부독재정권을 위한 '어용불교'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지선은 1981년부터 광주의 문빈정사에 내려갔으나 제대로 칩거하기 어려웠는데, 하필 그 절이 무등산에 위치했다. 그 이유를 말하자면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뒤 무등산을 오르내리면서 광주 시민들은 "중놈들, 나쁜 새X들. 무고한 시민들이 무참히 죽어나갔는데도 살인마를 위해 조찬기도회나 열고"라고 하며 욕설을 하거나, 심지어는 문에 대고 발길질을 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1]
그런 현실 상황에도 불구하고 불교계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는지 내내 침묵했다. 그러다가 1985년 5월 불교계 최초 재야단체인 '민중불교운동연합(이하 민불련)'이 진보적인 젊은 불교인들에 의해 발족되면서 불교계 일각이나마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해 9월 7일에 대한불교 조계종은 경남 합천 해인사에서 전국 승려대회를 열어 '불교관계 악법의 철폐'와 '10.27 법난에 대한 책임과 해명' 등을 요구하는 19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민불련이 주도한 민중불교운동의 투쟁 성과로 1988년 12월 30일에 강영훈 국무총리 명의로 '10.27 불교계 수사사건에 관한 국무총리 담화'를 이끌어내고 불교방송 설립 및 승가대학의 정규대학 인가 등의 성과를 거뒀으나, 1989년 12월 31일 5공 청문회에서 전두환은 법난에 대해 "잘 모르겠다"고 말하는 바람에 진상 규명이 이루어지지 않아 완전히 진실은 밝혀지지 못했다. 1994년에는 개혁불사(종단개혁)로 의현 총무원장을 몰아내고 10.27 법난에 대해 진상규명을 하자는 목소리가 있었으나, 결국 탄성, 월주가 차례로 총무원장이 되어 보수화되면서 또 물거품이 되었다.
이후 재야단체와 불교계의 끈질긴 진상규명 요구로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10.27 법난에 대한 진상조사를 벌여서 ‘국가권력 남용사건’으로 규정했고, 2008년 3월에는 '10·27법난 피해자의 명예회복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2] 그러나 이 과정에서 사료관 건립 등의 불교계의 요구가 배제되어 국방부가 피해 당사자인 불교계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왔다.
4. 출처
- <한국 현대사 산책 - 1980년대편 :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1권. 강준만 저. 인물과사상사(2003). P. 254 ~ 2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