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제2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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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세계 대전의 종전 이후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수립된 국가. 폴란드 제1공화국이라는 명칭으로도 불리는 폴란드-리투아니아가 1795년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의 제3차 폴란드 분할로 인하여 멸망한 뒤 무려 123년만에 다시 세워진 폴란드인들의 독립국가이다.
천신만고 끝에 독립을 이루었지만, 애초에 국가의 위치가 '''독일과 소련 한 가운데'''에 끼어 있어 너무 안 좋았던 데다가[1] 그동안 쌓여왔던 민족주의 성향을 강하게 표출하여 독립 직후 주변 국가들과 치고받았다.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이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이 시절 국경을 맞댄 나라 중 루마니아를 제외한 모든 나라와(...) 한번씩은 공방을 주고 받았다.[2] 이것이 독일, 소련과 같은 주변 강대국의 어그로를 제대로 끌면서 국경 분쟁까지 일으켰다. 독일과 소련 내부(특히 독일)에서는 자신들의 밥이었던 폴란드가 독립국으로 등장한 것을 같잖아하는 분위기가 짙었고 '언젠가는 폴란드놈들 손 좀 봐 줘야지'라는 목소리가 공공연하게 표출됐다. 결국 기본적으로 악감정이 있는 상태에서 폴란드는 독립국이 되었다는 것과 이전에 지역 강국이었던 시절의 기억으로 어그로를 강력하게 끌었고 결국 이것이 같이 터지면서 독-소에 분할이 되는 단초를 마련했다. 이와 더불어 세계 대공황으로 말미암은 경제 악화 및 독재로 인한 정치 혼란으로 존속 기간 내내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가 이어지다가 결국 1939년 나치 독일과 소련의 폴란드 침공으로 인하여 붕괴되고 말았다.
폴란드 제2공화국 시절로서의 국토 복귀는 현대 폴란드 극우 민족주의자들의 염원이자 정치적 목표이기도 하다.[3] 현대 폴란드 영토 내에서 건사한 바르샤바, 크라쿠프, 포즈난 뿐만 아니라 (순전히 폴란드 입장에서) '빼앗긴 국토'인 르부프, 빌노까지 다섯 도시가 모두 있어야 폴란드의 '정당한 역사적 강역'이라나 뭐라나. 그러나 현실성은 제쳐두고, 객관적인 지정학적 여건만으로 봐도 오늘날의 폴란드는 '''1920-30년대보다는 훨씬 형편이 낫다.''' 현재도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 끼어 있긴 한데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지역이 러시아 본토가 아닌 러시아의 월경지 영토인 칼리닌그라드 하나 뿐이고 1991년 소련 해체 과정에서 발트 3국과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등이 독립하면서 소련 시절 러시아 본토와 맞대고 있던 육지 국경선이 사실상 소멸한 덕분에 지정학상 두 나라 사이에 무력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이 많이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국력도 소련 해체로 많이 약해졌다. 또한, 나치 독일 시절에 비해 21세기 독일은 국방비를 적게 지출하는 평화국가가 되었으며 폴란드와도 오랜 증오를 접고 협력하는 관계에 있다. 더나아가 비셰그라드 그룹이라는 폴란드의 독자적인 세력도 형성되어 빠르게 경제성장이 진행 중에 있다.
애초에 저 지방들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민족들이 폴란드뿐만 아니니 존속 기간 내내 머리에 뿔난 르부프 일대 우크라이나 중심으로 소수 민족 문제가 심각했던 2공화국 시절과 달리 과정은 좀 많이 끔찍했어도 어쨌든 현대 영토에는 소수민족 문제도 없기 때문이다.[4] 하지만 독일과도 무조건 협력하는 것은 아니어서 독일의 유엔 상임이사국 진출에 대해 폴란드가 반대하기도 하고 폴란드 언론들이 종종 독일 정치권을 비판하는 등 갈등의 여지가 약간 남아 있다.
2. 역사
2.1. 설립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은 러시아 제국에게 압승을 거두면서 러시아가 점유하고 있던 폴란드 동부 영토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이에 따라 1916년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꼭두각시 괴뢰국인 폴란드 섭정왕국이 수립됐지만 전쟁이 동맹국의 패배로 끝나면서 괴뢰국은 와해됐고 폴란드인들이 독립을 선언하면서 폴란드 제2공화국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종전 직후에는 각 정파들이 제각기 자신들만의 공화국을 선언하는 총체적 개판의 상황이었지만 폴란드의 독립 영웅이었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Józef Piłsudski)가 독일에서 석방되어 11월 10일에 바르샤바에 도착함에 따라 서서히 교통정리가 이루어졌다.[5] 대중의 막대한 지지를 등에 업은 피우수트스키는 폴란드 임시정부와 임시의회에게서 폴란드군의 지휘권을 넘겨받은 뒤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이후 피우수트스키는 옌제이 모라체프스키(Jędrzej Moraczewski)를 수상으로 임명하고 최초의 내각 및 헌법을 창설했다.
그리고 이 시기 다른 유럽 국가와 다르게 여성의 인권이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였다![6] 관련 링크
2.2. 영토 분쟁
폴란드는 1차 대전 이전에 독일 제국과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였던 지역에서 성립되었기에, 이는 필연적으로 근방의 기존 강대국이었던 독일 및 소련[7] 과의 충돌을 야기할 수 밖에 없었다. 파리 강화 회의에서 승전국들은 커즌 선을 폴란드와 소련 사이의 국경으로 제시했지만 폴란드는 그 선 이상인 르부프(현 리비우)를 포함한 동부 갈리치아 일대를 원했다. 한술 더 떠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제2의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부르짖으며 키예프, 카우나스, 민스크까지 폴란드의 땅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발언하곤 했다. 대놓고 리투아니아를 멸망시키고 소련에게서 영토를 빼앗겠다고 공언한 것. 여기에 이데올로기 대립까지 맞물리면서 폴란드와 소련의 국경에서는 잦은 무력 분쟁이 발생했다. 게다가 소비에트 러시아가 내부 교통정리를 어느 정도 진행하고 여기에 서유럽으로의 사회주의 혁명 수출을 기도하였기에 그 길목에 있는 신생 공화국인 폴란드 입장에서는 공포에 떨 수 밖에 없었다. 실제로 이게 과장이 아닌 것이, 1919년 1월 5일에 소련이 빌뉴스를, 1월 15일에는 민스크를 점령하고 해당 지역의 폴란드계 군사조직들이 서쪽으로 패퇴한 적도 있었다. 결국 폴란드는 소련과의 경계선 영역에 군대를 집결시켰다.
그러던 1919년 2월 14일, 브제시치(Brześć)[8] 근방의 베레자 카르투스카(Bereza Kartuska)라는 소읍에서 폴란드군이 러시아군 80명을 사로잡으면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이 발발하였다. 전쟁 초기에는 북부 전선에서, 다음에는 남부 전선으로 파고들어가 기세좋게 키예프까지 밀고 나갔던 폴란드군은 미하일 투하쳅스키가 이끄는 소비에트군의 대대적 반격에 밀려 이후 수도 바르샤바 근처까지 밀렸지만 바르샤바 근방에서 극적인 대승을 거두어(비스와 강의 기적) 전세를 다시 역전시켰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폴란드를 이기는 것보다도 내부의 백군을 제압하는 게 우선이었기에 많은 영토 손실을 감안하고서라도 폴란드와 강화를 맺고자 했고 그 결과 1921년의 리가 조약을 통하여 폴란드는 커즌 선보다도 무려 동쪽으로 250km 가량을 이동한 국경선을 획득할 수 있었다.
소련 이외에 폴란드는 독일과도 영토 분쟁을 벌여야 했다. 폴란드는 폴란드계가 다수인 상부 실롱스크(슐레지엔) 지역과 동프로이센 남부 지역이 폴란드 측에 편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독일은 역사적 경계와 그 지역에 거주하던 독일인들을 이유로 이 지역이 독일에 남아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9] 여기에다가 단치히와 폴란드 회랑을 놓고도 분쟁이 벌어졌는데, 폴란드 회랑은 역사적으로 폴란드 영토였고 남부 폴란드 회랑은 폴란드계가 대다수였기에 별 탈 없이 폴란드에 넘어갔으나 단치히와 폴란드 회랑 북부(구 서프로이센)은 상부 실롱스크와는 정반대로 역사적으로 폴란드 영토였음에도 당시 주민 거의 대부분이 독일계였다. 결국 베르사유 조약에서 폴란드에게 바다로의 출구를 약속한다는 조항에 따라 폴란드 회랑은 폴란드 영토로, 단치히는 독일에서 분리되어 국제연맹 감독 하의 단치히 자유시가 되었다. 상부 실롱스크와 동프로이센 남부에선 주민투표가 시행되어 상부 실롱스크(슐레지엔)는 투표 결과 68%는 독일에 잔류, 32%는 폴란드에 귀속되었으며, 동프로이센 남부는 전역 독일 잔류가 확정되었다.
상부 실롱스크의 독일 편입에 대해서는 폴란드와 독일 모두에서 말이 많았다. 상부 실롱스크에서는 폴란드 편입을 목적으로 한 폴란드인들의 봉기가 3번에 걸쳐 일어났다. 이 봉기는 모두 독일계가 폴란드계를 잔인하게 학살하거나 탄압한 것이 발단이었으며, 특히 1차 봉기 진압 직후에는 보복조치로 2,500여 명의 폴란드계가 학살당했다. 2차 봉기 이후에는 결국 주민투표를 통해 귀속을 결정하기로 하였고, 3차 봉기 이후에는 상부 실롱스크를 분할해 각각 독일과 폴란드 영토가 되었다. 이 주민투표는 베르사유 조약 88항에 의거하여 독일 당국에 의해 추방되어 주민투표 지역에 거주하지 못하던 루르 폴란드인들에게도 투표권을 부여했고 공정한 투표를 위해 상부 실롱스크 지역에 독일군이 주둔하지 못하게 하였다. 허나 휴고 서비스를 포함한 일부 사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 조항은 외부에서 독일인들을 유입하는데 악용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폴란드는 2차 주민투표 때도 폴란드계가 70%에 이르는 오데르 강 이동의 상부 실롱스크 지역에서만 주민투표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어쨌든 폴란드 회랑 문제 때문에 열 빵빵하게 받아있던 독일은 이로 인해 더더욱 폴란드에 부득부득 이를 갈게 된다.
한편 폴란드는 한때 함께 폴란드-리투아니아를 구성했던 리투아니아를 상대로 강압적인 영토 강탈을 펼친 것으로도 악명이 높아졌다.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기간 도중 리투아니아의 수도였던 빌뉴스와 수발카이(폴란드어로 수바우키) 지역을 폴란드군이 강제로 점거, 합병하였다. 당시 빌뉴스는 주민 구성에서 폴란드계가 50%, 유대계가 44% 가량을 차지했는데 이에 대해 '폴란드인들이 대다수이니 폴란드 땅'이라는 명분을 앞세우며 중앙리투아니아 공화국이라는 괴뢰국을 만든 후 병합했고, 소련이 동부 폴란드를 점령할 때까지 자국 영토로 유지했다. 이 때문에 리투아니아는 지금까지도 폴란드를 두고 '남의 나라 수도를 뺏어갔던 것들'이라며 이를 박박 갈게 되었다. 여기에 체코슬로바키아와도 체코 국경의 테셴(체코어로 톄신, 폴란드어로 치에쉰) 지방과 야보리나, 토르스테냐 등 슬로바키아 국경지대 일부를 놓고 분쟁이 벌어졌다. 테셴은 독일, 폴란드, 보헤미아 사이에서 여러번 주인이 바뀌다가 300여 년간 오스트리아 제국의 보헤미아-체코 땅이었다. 그러다 1880년 광공업이 발달한 테셴에 6만에 달하는 폴란드 경제 난민이 들어왔고 이때부터 폴란드계의 인구 비율이 높아졌다. 그러고 나서 1차대전이 끝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소멸하자 폴란드는 빌뉴스 때와 마찬가지로 폴란드계 비율이 69.2%라는 이유로 테셴을 요구하는 억지를 부린다. 결국 참다 못한 체코슬로바키아가 전쟁을 선포하고 비록 전쟁에서는 패했지만 협상 결과 폴란드는 테셴 땅의 40%나마 점유하게 된다.[10] 이러니 체코슬로바키아가 폴란드를 증오할 수 밖에 없었다. 전간기 당시 폴란드와 사이가 나쁘지 않은 이웃 나라는 독립전쟁 기간 동안 폴란드의 지원을 받은 라트비아, 폴란드와 마찬가지로 반소 감정이 강했던 루마니아 왕국, 정권 성향이 반공 극우로 비슷했던 헝가리 왕국 정도였다. 단 헝가리는 뮌헨 협정 이전까지는 폴란드와 직접 국경을 맞댄 이웃 국가가 아니었다.
2.3. 혼돈의 정국
한편 폴란드 제2공화국은 의회민주주의를 원칙으로 하며 국가원수인 대통령에게 제한된 권력을 부여하는 것을 헌법상에 명시했으나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폴란드 초대 대통령 가브리엘 나루토비츠(Gabriel Narutowicz)가 대통령 취임 5일 만에 극우 민족주의자에게 암살당해 저 세상으로 갔을 정도로 폴란드의 정국은 혼란스러웠다. 참고로 나루토비츠의 죽음은 그의 친구였던 피우수트스키가 쿠데타를 일으키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토지 개혁을 둘러싼 좌우파간의 대립, 우크라이나/독일계 소수민족에 대한 탄압 등의 각종 문제로 인하여 폴란드 제2공화국의 정치는 출범과 동시에 사실상 마비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특히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이 큰 문제였는데, 이 시기 폴란드는 1차 대전으로 국토 대부분이 파괴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뒤이은 거대한 전쟁에 예산을 쏟아 부으면서 국가 재정이 거의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소파전쟁이 한창이던 1920년에 폴란드는 국가 예산의 60%를 군대에 쏟아 부었으며, 해외 폴란드 교포들의 재정 지원과 국채 발행에도 불구하고 폴란드 경제는 황폐화되었다.
돈먹는 하마가 되어버린 소련과의 전쟁을 1921년의 리가 조약을 통해 어찌저찌 끝낸 폴란드는 전시 경제로부터 탈피, 국립 은행을 설립하고 국토를 재건하는 일에 정력적으로 나섰지만 뒤이은 독일-폴란드 무역 전쟁으로 인해 경제가 망했어요. 당시 독일과의 무역이 폴란드 국가 수입의 43%, 수출의 35%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 상황에서 독일이 폴란드 회랑과 단치히, 상부 슐레지엔을 내놓으라고 징징대며 석탄 수입을 금지시켜 버린 것. 이로 인해 상부 슐레지엔의 중공업이 큰 타격을 입었으며, 석탄 수출이 급감하면서 전국적인 경기 침체와 함께 실업률이 증가했다. 이외에도 폴란드에 대한 외국 자본이 빠져나가면서 폴란드는 경제적 위기를 맞이했다. 1925년부터 시작된 무역 전쟁은 1934년까지 계속되었고 여기에 1929년 대공황으로 크리티컬 히트를 맞게 되면서 폴란드의 발전이 늦춰졌다.
이렇게 정치적, 경제적 혼란이 계속되어 마침내 1926년 5월 12일 당대 폴란드의 실력자였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가 군부의 지지 하에 쿠데타를 감행하여 다시금 권력을 손에 넣었다. 피우수트스키 자신은 대통령직을 차지하지 않고 자신의 뜻에 따르던 화학자 출신의 정치인 이그나치 모시치츠키(Ignacy Mościcki)를 대통령에 앉혔다. 하지만 실권은 '폴란드의 국가상징' 직책을 가진 피우수트스키에게 가 있었으며, 그는 배후에서 모든 것을 조종하고 있었다. 1926년 5월 쿠데타 이후 피우수트스키는 1935년 사망할 때까지 군부 독재를 펼치면서 의회를 탄압하였다. 특히 1935년 4월에 통과된 4월 헌법은 프랑스의 헌법을 본따 1921년에 통과된 3월 헌법과 달리 대통령에게 권한을 집중, 강화시키는 헌법으로서 대단히 비민주적인 절차를 거쳐 통과되었다. 이로써 그나마 명목적으로 남아있던 민주적 정치체제도 완전히 파괴되었다. 피우수트스키가 1935년 사망한 후에도 그의 추종자들은 독재 정치를 지속하려고 노력했으나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 지표의 악화는 독재 정권 내부에서의 분열을 야기했다. 이런 정치적 혼란은 농민과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인하여 더욱 심화되었다.
특히 대공황으로 인한 크리티컬 히트는 그야말로 엄청난 것이었다. 동시대의 미국과 독일이 천국으로 보일 정도로 '''폴란드의 대공황은 실로 지옥같은 수준'''이었는데, 실제로 1930년부터 1933년까지 폴란드의 1인당 GDP는 무려 '''20.70%'''나 하락했으며 이 하락률은 오스트리아에 이어 유럽에서는 2번째였다. 참고로 독일은 1929년부터 1932년까지 16.11%가 하락. 당시 폴란드가 미국과 독일과 달리 가난한 농업국이었음을 생각하면 폴란드인들이 입은 피해는 엄청난 것이었다. 폴란드의 1932년도의 공업 생산은 1928년도의 공업 생산량보다 40%나 적었다. 특히 광업과 중공업 부문은 실로 경이적인 하락폭을 기록했는데, 1932년의 폴란드의 석탄 생산량은 1928년에 비해 27% 줄었으며, 철강 생산은 '''61%''', 철광석 생산은 무려 '''89%'''가 줄어들었다. 전체적으로 1929년부터 1933년까지 섬유 분야는 13.1%, 금속 분야는 13.9%, 제당 분야는 13.5%가 줄었다. 실업률은 43%에 이르렀다. 기업들은 어려운 시기를 헤쳐나가기 위해 서로 카르텔을 형성했으며, 이들은 이익을 높이기 위해 일부 공장을 처분하여 실업률 상승에 기여했다. 도시뿐만 아니라 농촌에도 헬게이트가 열려 이미 막대한 부채를 짊어지고 있던 폴란드의 농가들은 대공황까지 만나면서 나락으로 빠졌다.
그나마 다행히도 이 암담한 상황은 1934년부터 개선되기 시작했다. 1933년 독일에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하며(!) 독일-폴란드 무역 전쟁도 끝났고, 독일-폴란드 불가침조약도 맺으며 독일과의 관계도 어느정도 개선되는 것처럼 보였다.[11] 이 시점부터 폴란드의 경제는 다시 성장하기 시작했으며, 1937년 당시에는 19% 이상 성장했다. 당시 상황이 상황인지라 해외에서 자본을 끌어다 쓸 수 없었기에 폴란드 정부는 국내의 자본을 축적하여 경제 개발을 진행했으며, 이는 당시 강화되던 폴란드의 국가주의적 기조와 맞물렸다. 이 시기의 폴란드는 박정희 치하의 대한민국이나 샤를 드골 치하의 프랑스와 유사한 경제, 정치 체제를 가지고 있었다. 폴란드 정부는 은행 경영과 대외 교역, 기업연합(Cartel)에 대한 통제권을 가졌으며, 공공부문과 3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된 폴란드의 공업화에 거액을 투자했다. 교육 면에서도 상당한 진척을 보여 독립 직후 40%에 이르던 문맹률은 1937년에 이르러 18%로 줄어들었으며, 폴란드 침공 직전에는 90% 이상의 아동들이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1936년부터는 실업률 해결과 낙후 지역 개발, 외부의 충격에 대비하고 폴란드의 국가적 위상을 높일 목적으로 독일과의 국경지대에서 멀리 떨어진 중앙산업지대(Centralny Okręg Przemysłowy)에 특히 거액이 투자되었는데, 중앙산업지대에 폴란드가 투자한 액수는 당시 폴란드의 전체 투자 액수의 60%에 달했다. 이 투자로 인해 폴란드 국내에서 낙후되어 있던 지역이 개발되고 실업률이 줄어들었다. 1932년 당시 공업 생산량은 대공황 직전인 1928년을 100으로 하여 비교했을 때 1932년에 45.5에 불과했지만 폴란드 침공 직전인 1939년에는 125.8로 다시 성장했다.
2.4. 붕괴
1933년 집권한 나치 독일은 처음에는 놀랍게도 폴란드와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는 등 폴란드를 상대로 그 이전의 바이마르 공화국보다 훨씬 유화적인 태도를 취했다. 독일-폴란드 무역 전쟁이 끝난 게 나치가 집권한 다음 해인 1934년. 하지만 독일은 여전히 폴란드를 상대로 칼을 갈고 있었으며, 뮌헨 협정으로 체코슬로바키아를 잡아먹고 나자 뒤이어 폴란드 회랑에 대해 국경 문제를 제기하면서 서서히 폴란드를 압박하다가 결국 1939년 전격적인 폴란드 침공을 감행했다. 이 때 나치 독일이 주장한 논리가 폴란드가 리투아니아한테 빌뉴스를 빼앗을 때, 체코슬로바키아한테 테셴 일부를 빼앗을 때와 똑같았다. 게다가 빌뉴스의 폴란드인은 50%였지만 단치히의 독일인은 90%였다. 그리고 테셴은 당시 기준 고작 40년 전 폴란드 난민이 취업하러 와서 폴란드계 비율이 높아진 것이다. 폴란드의 논리대로라면 히틀러가 폴란드보다 정당성이 있었다. 결국 제대로 인과응보당한 것. 여기에 독소 불가침조약을 통해 밀약을 맺은 소련까지 폴란드의 뒤통수를 후려치면서 폴란드는 결국 두 달을 버티지 못하고 전 국토가 침략군에게 점령되었으며, 이로써 폴란드 제2공화국은 붕괴되었다. 이 때 서방 연합국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한 주요 정치인, 군인들이 폴란드 제2공화국의 뒤를 이은 폴란드 망명 정부를 수립하고 독일과의 항전을 계속해 나갔다. 휘하에 자유 폴란드군도 창설되었으며, 이들은 제2공화국과는 달리 민주정을 지향했다.
3. 대외관계
폴란드 분할로 인한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삼강의 식민 지배라는 뼈저린 경험 탓에 폴란드 제2공화국의 외교정책은 가상적국이었던 독일과 소련을 견제하는 데 거의 모든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었다. 독일을 견제하기 위하여 폴란드는 프랑스와 동맹을 체결하였으며,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서 인근의 루마니아와도 군사 협정을 맺었지만 결과는 망했어요.
프랑스는 1차 대전의 어마어마한 피해 및 대공황으로 인하여 독일을 견제하는 데 소극적이었으며 인접국 가운데 어느 정도 힘 있는 국가였던 체코슬로바키아는 1920년대 테셴 지역을 놓고 벌인 영토 분쟁으로 인하여 폴란드와 영 불편한 관계였다. 실제로 프랑스와 체코슬로바키아, 프랑스와 폴란드를 잇는 동맹관계는 있었어도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를 잇는 동맹관계는 없었다. 즉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는 서로에게 '동맹'이 아닌 단지 '동맹의 동맹'이었을 뿐이다. 오히려 폴란드는 뮌헨 협정 당시 독일이 수데텐란트를 뜯어먹는 틈을 타 독일에 빌붙어 테셴 지역을 체코로부터 영토 반환 명분을 앞세워 뜯어내는 등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증오를 보였다. 그리고 소련을 견제할 동반자였던 루마니아는 빈약한 농업국인데다가 폴란드 이상으로 내부 분열이 심각했으며 1930년대부터는 친독 성향으로 기울었기에 영 믿을 수 없는 동맹이었다.
물론 이때 당시 폴란드도 바보가 아니라서 루마니아 외에 불가리아 왕국과 유고슬라비아 왕국, 헝가리 왕국 등 다른 동유럽 국가들과도 군사적 동맹을 체결하려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당시 이 국가들 또한 루마니아 못지 않게 친독일, 친추축국 성향으로 기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불가리아는 나치 독일에 의해 억지에 끌려가다시피 한데다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나치 독일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독일군을 공격하면서 나치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유고슬라비아는 제2차 세계 대전 초기 추축국에 붙었다가 페타르 2세의 친위 쿠데타로 동맹을 깨고 연합국으로 편을 바꾸면서 나치 독일군에게 침공, 점령당했으며 이후로는 빨치산 투쟁 등으로 저항하면서 줄곧 연합국의 일원으로 독일군과 싸웠다. 하지만 루마니아는 특유의 반유대주의 정책으로 가는 곳마다 독일군 못지 않은 학살을 벌였고 헝가리는 아예 추축국 준메이저였던지라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단 이들 나라가 폴란드와 관계가 나쁜 건 아니었는데 불가리아는 전간기 초, 중기 군사 편제와 정치, 사회의 모든 법적 기준 및 분야에서 폴란드의 원조, 자문을 받을 정도로 폴란드의 영향을 받은 시절이 있었고 헝가리의 경우는 1938년 뮌헨 협정 당시 테셴, 토르스테냐, 야보리나, 루테니아, 슬로바키아 남부 지역 등 체코슬로바키아 영토들을 뜯어먹기도 하고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전까지 같은 반공 극우 독재 정권이 지배하던 국가였기에 상당히 친했다. 그 때문인지 다른 지역에서는 각종 전쟁범죄를 서슴없이 저지르던 헝가리는 훗날 바르샤바 봉기 때만큼은 독일이 지원을 요청하자 거부 의사를 나타냈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은 로카르노 조약을 통하여 전범국 지위에서 벗어나는데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독일-폴란드 국경의 변경을 요구할 권리까지 암묵적으로 인정받았다. 거기다 라팔로 조약을 통하여 바이마르 공화국과 소련이 국교를 다시 맺으면서 폴란드의 악몽은 점차 현실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1930년대가 되어 나치가 집권하자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독일은 노골적으로 폴란드에 대한 적의를 드러내기 시작했고 1939년 8월 독소 불가침조약이 전적으로 체결되면서 폴란드는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물론 프랑스와 영국이 있기는 했지만 폴란드 침공 항목에서도 보이듯이 '''말로만''' 도와주는 동맹국이었다. 결과를 놓고 보면 폴란드 침공 이전에 이미 폴란드의 운명을 결정지었다고 봐도 무방한 사건.
여담이지만 폴란드 제2공화국은 만주국을 정식으로 승인한 국가이다. 물론 만주국은 일부 국가로부터만 승인을 받았을 뿐이며, 국제적으로는 일본 제국의 괴뢰국으로 인식되었다.
4. 민족
2차 대전 발발 직전 폴란드의 인구는 3510만 명이었다. 인구의 70%가 농촌에 거주했다.
폴란드 제2공화국은 다민족 국가로, 최대 소수민족은 13.9%를 차지하는 우크라이나인이었고, 이들은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신자들이었다. 그 외에 10%가 유대인,[12] 3.1%가 벨라루스인, 2.3%가 독일인, 그 외에 체코인, 리투아니아인, 러시아인 등이 거주했다. 당시에는 전세계 유대인의 1/5이 폴란드에 살았으며, 폴란드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유대인이 많은 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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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별 언어사용자 비중. 짙은 분홍색이 폴란드어 사용자이다. 현재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지역인 동방영토(Kresy)에도 폴란드인 비중이 상당했고 르부프(현 우크라이나 리비우), 빌노(현 리투아니아 빌뉴스)같은 지역에선 과반수를 차지했지만, 2차 대전 이후 소련에 의해 대부분이 추방당하고 만다. 이들은 주로 독일인들이 추방당한 구 독일령으로 이주했다.
[1] 독립 직후에는 벨라루스 인민 공화국과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등의 완충국들이 존재했지만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둘 다 소련에게 제압당하면서 몇년만에 멸망했다.[2] 독일과는 상실레시아 분쟁, 체코슬로바키아와는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 전쟁, 리투아니아와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전쟁과 빌뉴스 위기, 그리고 소련과는 소비에트-폴란드 전쟁.[3] 물론 그렇다고 해서 2차대전 이후 독일 쪽에서 뜯어온 땅을 반환하겠다는 소린 아니다. 옛 동서부 프로이센, 슐레지엔은 '정당한 전후 처리에 따라 받은' 땅이지만, 소련이 뺏어간 동부 크레시 일대는 '제국주의자들의 야합에 의한 강탈'이라는, 정치적 민족주의 극우파의 내로남불식 역사해석에 가깝다.[4] 폴란드 민족주의적 관점에선 2차대전까지만 하더라도 르부프나 빌노나 폴란드인들이 다수였다는 주장을 펼치지만, 시내에서 다수, 사회적 주류 민족이 폴란드인이었다고 해서 시외에 많이 살던 우크라이나인, 리투아니아인들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시가지 중심부 인구로만 따져도 현대 인근 민족 국가 아무에도 속하지 않은 유대인들의 숫자도 폴란드인과 맞먹을 만큼 굉장히 많았다. 정치적 의미를 따져도 리투아니아 민족주의자들에게 있어서 빌뉴스는 명백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형성 이전부터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수도였던 자국 수도였고, 리비우 또한 반면 당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의 중심지이자 중세 폴란드 왕국 편입 이전의 루스인들의 도시였던 역사가 있다. 반면 크라쿠프, 바르샤바는 명실상부한 역사적 폴란드 전근대 국가들의 수도였으니 흔하디 흔한 '''전근대사를 근대 민족주의적 의미로 해석하기 작전으로''' 이웃 민족들이 클레임 걸 건덕지도 없었고, 포즈난(독어론 포젠) 또한 동서부 프로이센과 상부 슐레지엔에 대해선 정파불문하고 모두 징징거렸던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에도 딱히 이 일대에 대한 주장은 안 했을 만큼 독일 제국의 통치 아래 있었어도 구성 인구나 문화적 영향력이나 비-폴란드인들의 영향력이 적었다.[5] 피우수트스키는 처음에는 독일군 휘하의 폴란드 의용군을 이끌고 러시아와 맞서 싸웠지만 독일이 폴란드를 독립시킬 의향이 없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독일과의 협력을 거부해서 투옥당했다.[6] 여성의 대학 진학, 여성에게 투표권 제공, 여성 경찰, 여군 등.[7] 소련 자체는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이후인 1922년 12월 30일의 소비에트 대회에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자캅카스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이 연합하여 성립되었지만 여기서는 편의상 소련으로 칭하기로 한다.[8] 오늘날의 벨라루스 브레스트. 역사덕후들에게 더 익숙할 이름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9] 상부 실롱스크는 폴란드계가 절대다수였지만 동프로이센 남부는 독일계와 폴란드계가 박빙이었다.[10] 결국 1938년 뮌헨 협정으로 나머지 테셴 지역도 뜯어간다[11] 물론 히틀러는 이러한 정책들을 펼치면서도 내부에서는 공공연하게 인종주의 운운하며 폴란드를 비난했다.[12] 당시 폴란드 영내에 거주하던 유대인은 총 300만명으로 이 수치는 당시 유럽 대륙에 거주하던 유대인 950만명 중에서 무려 '''32%'''나 차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