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자유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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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자유국'''
'''Saorstát Éireann'''
'''Irish Free St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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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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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 1937년
위치
서유럽
수도
더블린
정치 체제
입헌군주제, 의원내각제, 영연방 왕국
국가 원수
아일랜드 국왕[1], 아일랜드 총독
주요 정부 수반
에이먼 데 벌레라
언어
아일랜드어, 영어
종교
가톨릭
민족
아일랜드인
주요 사건
1921년 영국-아일랜드 조약으로 자치령 선포
1922년 헌법 제정
1931년 웨스트민스터 헌장
1937년 헌법 개정, 아일랜드(공화국) 선포
통화
아일랜드 파운드
성립 이전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성립 이후
아일랜드
1. 개요
2. 역사
2.1. 자치 운동
2.2. 독립 운동
2.3. 자유국 수립
2.4. 완전한 독립
3. 현재
4. 임시정부 주석
5. 역대 국왕
6. 역대 총독
7. 역대 총리


1. 개요


아일랜드 섬 남부가 영국으로부터 자치를 얻어내 세워진 대영제국자치령.

2. 역사



2.1. 자치 운동


아일랜드 섬은 1801년부터 영국의 정식 영토였지만[2] 영국의 아일랜드에 대한 취급은 식민지와 별 다를 바 없었다. 영국은 아일랜드인을 차별했고 특히 아일랜드 대기근은 영국이 아일랜드에 저지른 대실책으로 영국에 대한 아일랜드인들의 적개심이 강해져 아일랜드 민족 감정을 자극했다.
그래도 아일랜드는 영국 영토인만큼 영국 본토처럼 지역에서 선거를 통해 의회에 진출한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아일랜드인들의 여론이 중앙 정치계에 제기될 수 있었다. 이렇게 아일랜드인들의 의사가 중앙 정치계에 전달되자 영국 자유당을 중심으로 19세기 중반부터 아일랜드에 자치를 허용하는 방안이 제안되었다. 오늘날의 스코틀랜드, 웨일스처럼 현지에서 양원제 의회를 구성하고 아일랜드에 관련된 입법 권한의 많은 부분을 영국 중앙 정부 의회에서 새로 생길 아일랜드 자치 의회에 넘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국 본토에서는 영국 보수당을 중심으로 이 방안에 대해 연합 왕국을 해체할 것이라며 격렬한 반발이 일었고 아일랜드 내에서도 가톨릭이 대다수인 아일랜드 대부분의 지역과는 다르게 신교도가 주류였던 얼스터 지역은 자치 방안에 대해 결사 반대했다. 결국 자치 논의는 더 진전되지 못했다.
1910년대에는 총선에서 보수당자유당이 하원에서 비슷한 의석을 점하고 아일랜드 자치를 주장하는 아일랜드 의회당(Irish Parliamentary Party)이 약간의 의석을 가져 캐스팅 보터가 되었다. 그리고 자유당이 아일랜드 의회당과 연립 정부를 꾸리면서 자유당 정부가 1911년에 아일랜드 자치 법안을 하원에 상정했다. 이 때에도 격렬한 논쟁이 일어 아일랜드 자치 법안은 하원에서 가결되었지만 보수당이 다수인 상원에서 거부되기를 3번이나 반복했다. 결국 하원에서 상원의 거부권을 무력화하고[3] 바로 국왕 조지 5세에게 법안을 넘겼다. 그러나 이 법안이 결국 의회를 통과하자 얼스터에서는 난리가 나서 얼스터 연합주의자(친영 진영)와 아일랜드 민족주의자가 민병대를 구성해 폭력 사태를 벌이는 등 혼란에 빠졌고 결국 조지 5세는 법안 재가를 연기했다.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영국 의회는 자치 법안을 보류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조지 5세가 이 법안을 아일랜드 자치 법안과 함께 재가하여 아일랜드 자치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로 미뤄졌다.

2.2. 독립 운동


1910년대에 내셔널리즘이 고조되자 아일랜드에서는 아일랜드 공화국군(IRA)이 조직되어 영국에 대한 독립 운동을 벌이기에 이르렀다. 1916년의 부활절 봉기는 실패했지만 IRA는 게릴라전과 영국의 요인 살해와 주요 거점에 대한 테러를 벌여 영국의 진을 빼놓았다. 물론 국력으로 따지면 영국이 압도적이기는 하나 전쟁의 여파로 국력을 크게 소진한 영국은 아일랜드를 무력으로 누르는데도 한계를 느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1918년에 영국에서 총선이 치러졌고 신페인북아일랜드를 제외한 아일랜드 거의 전역의 의석을 석권했다. 그리고 아일랜드 지역구에서 당선된 신페인 국회의원 73명은 당선되자마자 따로 아일랜드 의회(Dáil Éireann)를 차려 아일랜드 공화국(영어: Irish Republic, 아일랜드어: Poblacht na hÉireann 또는 Saorstát Éireann)의 독립을 선언하고 영국 의회 등원을 거부했고[4] 이들과 영국 정부 사이에 아일랜드 독립 전쟁이 일어났다.

2.3. 자유국 수립


결국 영국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내각은 1921년에 아일랜드를 '아일랜드 자유국'이라는 이름으로 당시 캐나다, 호주와 같은 British Commonwealth of Nations[5]자치령(dominion)으로 지정할 것을 약속했다. '자유국(free state)'이라는 이름은 '공화국'을 가리키는 아일랜드어 표현 두 개 중 'saorstát'을 분해해서 번역차용한 것이다. 영국은 자신들의 왕을 거부하는 '공화국(republic)'을 인정할 수 없지만 아일랜드 독립 운동가들과 타협하기 위해 공화국 같지만 공화국은 아닌 '아일랜드 자유국'이라는 이름을 쓰게 했다.
하지만 아일랜드 독립 세력에게 자치령 지정은 못미더운 것이었다. 자치령은 비록 폭넓은 자치를 누리지만 군사권과 외교권을 영국 본국이 갖고 영국 국왕국가원수로 섬겨 아일랜드에 그를 대리하는 총독을 두어야 하는데 그들은 완전한 독립국 아일랜드의 건설을 바랐기 때문이다. 또한 자치령 지정을 약조한 영국-아일랜드 조약에서 신교도가 다수인 얼스터 지역 6주를 영국의 직접 통치 지역으로 남길 것을 규정하자[6] 아일랜드 독립 세력은 조약 찬성파와 조약 반대파로 분열했다. 조약 찬성파는 조약이 못미더웠지만 완전한 독립을 이룰 수 있으리라 보아 조약에 동의했고 조약 반대파는 완전한 독립과 아일랜드 분단을 이유로 반대했다. 아일랜드 의회에서 조약 비준안이 근소한 차로 통과하였고 1921년에 임시정부가 세워져 1922년에는 아일랜드 자유국이 정식 출범하였다. 에이먼 데 벌레라 등의 조약 반대파는 아일랜드 공화국 정부의 모든 지위에서 사퇴하고 별도의 무장 세력을 꾸려 아일랜드 내전을 일으키게 된다. 이 와중에 독립 영웅 중 하나인 마이클 콜린스가 조약 반대파에 의해 살해당하기도 했다. 결국 내전은 조약 찬성파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고 조약 반대파는 체포되어 처벌되었다. 하지만 국가 통합을 위해 아일랜드 자유국은 조약 반대파의 주요 인사들을 곧 사면했고 이들은 정계로 진출해 아일랜드 공화당(Fianna Fáil)의 기원이 된다.

2.4. 완전한 독립


이후 아일랜드의 독립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일단 1931년에 영국에서 웨스트민스터 헌장이 제정되면서 영국의 각 자치령이 군사권과 외교권까지 갖는 거의 완전한 독립을 이루게 되었다. 아일랜드 자유국이라는 이름은 1937년을 끝으로 쓰이지 않는다.
1932년부터 집권한 에이먼 데 벌레라의 아일랜드 공화당 정부는 반영 아일랜드 민족주의를 강화하면서 아일랜드 자유국의 흔적을 점차 지워나갔다.
에드워드 8세의 스캔들과 퇴위 사건을 계기로 아일랜드 자유국은 1937년에 신헌법을 제정해 국호를 그냥 에이레(Éire)[7]/아일랜드(Ireland)라고 고쳤고 총독직을 폐지하고 대신 상징적 국가원수로서의 대통령직을 신설해 공화국이 되었다.[8] 영국 국왕의 국가 원수 자격을 박탈하지는 않았다. 이 시기 국왕은 단지 대외적으로만 아일랜드를 대표할 뿐 그 외의 국무는 대통령이 대표했다. 대통령과 국왕이 실제로 수행하는 역할과 권한은 헌법과 법률에 구체적으로 규정되어 있어서 양자가 충돌할 가능성은 없었고 어차피 아일랜드 자유국 역시 의원내각제라 실권이 총리에 있기 때문에 이렇게 해놓아도 큰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결국 영국 국왕을 배제하자는 의견이 우세를 점해 1948년에 아일랜드 공화국법을 제정해 영국 국왕의 아일랜드 내 지위를 박탈하여 완전한 공화국이 되었다. 1937년부터 아일랜드는 자국이 더 이상 영연방[9]에 속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영국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가 결국 1949년에 아일랜드의 영연방 탈퇴를 승인했다.

3. 현재


아일랜드 자유국이 국호를 에이레(Éire) 또는 아일랜드로 고친 1937년부터 완전한 공화국이 되는 1949년까지 영국 정부는 Eire(보조 부호 삭제) 또는 드물게 Éire로 지칭하여 Ireland와 구분지었다. 영국 정부는 Ireland를 북아일랜드까지 포함한 지리적 명칭으로 고정시키고 아일랜드 자유국이 이름을 바꾼 에이레/아일랜드를 Eire로 고정시켜 양자의 의미를 확실히 구분지은 것이다. 이렇게 한 이유는 아일랜드가 1990년대 말 벨파스트 합의와 헌법 개정을 하기 전까지 아일랜드 섬 전체를 명목상 자기네 영토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영국이 영유권 주장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다가 아일랜드가 아일랜드 공화국법(Republic of Ireland Act)를 통과시켜 스스로가 공화국이라고 규정함에 따라 영국 정부는 아일랜드 공화국(Republic of Ireland)[10]이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헌법상 그냥 Éire, 영어로 Ireland인 건 변함이 없었고 Republic of Ireland의 Republic of는 국호의 일부가 아니라 정치 체제의 설명(description)이었기에 영국의 Republic of Ireland라는 표기는 아일랜드 입장에서 봤을 땐 일방적으로 취해진 조치였다.[11] 물론 영국 정부가 Republic of Ireland라는 표기를 쓴 건 Ireland(아일랜드 섬 전체)와 구분 지으려는 것이었다. 영국 정부는 아일랜드 정부(Government of Ireland), 아일랜드 대통령(President of Ireland) 같은 아일랜드 측이 사용하는 공식 표현을 무시하고 Irish Government, Irish President로 돌려 쓰게 된다. 반면 아일랜드에서는 영국의 공식 국호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를 인정할 수 없어서 풀네임의 사용을 거부하고 약칭 United Kingdom(UK)로만 표기하거나 지리적으로 Great Britain 또는 형용사로 British 등을 이용해 돌려 썼다. 양국의 명칭 분쟁은 벨파스트 합의를 체결하고 아일랜드가 헌법에서 영토 조항을 삭제한 이후에 해소된다. 그래서 현재는 Ireland의 의미가 아일랜드 섬 전체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국가를 의미한다는 걸 명확히 할 때에만 Republic of Ireland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그 외에는 그냥 아일랜드 측이 쓰는 공식 명칭을 쓴다. 아일랜드가 완전한 독립을 쟁취한 오늘날에는 1937년 이전의 아일랜드 자유국에 대해 아일랜드인들이 완전한 자유를 얻지는 못했으나 자유를 달성할 자유(freedom to achieve freedom)를 얻었다는 정도의 평가를 많이 내린다.
아직 북아일랜드의 존재와 아일랜드 자유국과 그 후신인 현재의 아일랜드를 인정하지 않는 강경한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이 소수 존재한다. 이 관점을 아일랜드 공화국 정통론(Irish republican legitimatism)이라고 한다. 이들의 관점에서는 1919년 선포된 아일랜드 공화국(Irish Republic)이 아일랜드 섬 전체를 지배하는 정통 국가고 아일랜드 자유국과 그 후신인 현 아일랜드는 영국과 야합하여 생긴 비정통 정권이기 때문이다. 영국의 지배가 유지되고 있는 북아일랜드도 마찬가지로 불법 점령된 지역이라고 본다. 사실 신페인도 1980년대까지 이런 관점을 견지했다가 이후 준군사 활동을 접고 현 아일랜드를 인정하는 쪽으로 선회했다. 북아일랜드의 존재는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외면하지만 실제론 북아일랜드의 의정 활동을 하고 북아일랜드 공동 집권당이 되기도 한다. 한편 신페인의 노선 변경에 반발한 강경 민족주의자들이 따로 공화주의 신페인이라는 법외 정당[12]을 만들어서 현재도 존속되고 있다.

4. 임시정부 주석


정식으로 자유국 정부가 출범하기 이전에 임시정부가 꾸려졌는데, 영국-아일랜드 조약에 따라 임시정부의 수반을 아일랜드 자유국 임시정부 주석(Chairman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Irish Free State)이라 하였다.
  • 1대: 마이클 콜린스 (1922.1-1922.8)
  • 2대: 리암 토마스 막 코스가르 (Liam Tomás Mac Cosgair, 1922.8-1922.12)[13]

5. 역대 국왕



6. 역대 총독


  • 초대: 티모시 마이클 힐리 (Timothy Micheal Healy. 1922~1927)
  • 2대: 제임스 맥네일 (James McNeill, 1928~1932)
  • 3대: 도우날 우아 부어할라 (Domhnall Ua Buachalla, 1932~1936)

7. 역대 총리


이 당시에는 아일랜드 자유국 집행 평의회 의장(President of the Executive Council of the Irish Free State/Uachtarán ar Ard-Chomhairle Shaorstát Éireann)이라는 직함을 썼다.

[1] 영국의 군주가 아일랜드 자유국의 왕이 되는 것은 자치권을 얻기 전과 마찬가지였다.[2] 그 전에도 아일랜드 왕을 잉글랜드 왕 혹은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잉글랜드 왕국스코틀랜드 왕국의 연합 왕국)의 왕이 겸하여 사실상 지배하고 있었다.[3] 1911년에 통과된 의회법에 따라 하원은 제한적인 상황에서 상원의 거부권을 무력화하고 바로 국왕의 재가로 넘길 수 있게 되었다.[4] 이 전략은 abstentionism이라 하여 신페인 당원들이 자주 써먹는 것이다. 오늘날 북아일랜드에서도 신페인은 영국 의회 총선에 출마하는데 당선자들은 영국 의회 의원으로서의 의정 활동을 하지 않는다. 북아일랜드 자치 의회에는 참석한다.[5] 당시에는 영연방영연방 왕국이 존재하지 않았지만 유사한 개념들은 오랫동안 제안돼 왔고 그래서 British Commonwealth of Nations 같은 용어가 사용될 수 있었다. 이 용어는 대영제국(British Empire)이라는 용어가 줄 수 있는 아일랜드인들의 반감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대체어로서 조약문에 사용되었다.[6] 아일랜드의 각 주(county)에 아일랜드 자유국에서 탈퇴할 권한을 줬다. 이 때 아일랜드 자유국의 정식 성립과 함께 얼스터 지역 6주가 탈퇴해 영국의 직할 통치 지역이 되었다.[7] 사실 아일랜드어 발음은 '에려'에 가깝고 영어화된 발음은 '에어러'에 가깝지만 한국에서 오랫동안 관행 표기로 '에이레'로 적혀 왔다.[8] 원칙적으로 자유국의 헌법 개정은 영국 의회에서 승인을 해줘야 한다. 그러나 아일랜드 자유국은 영국-아일랜드 조약을 통해 영국의 아일랜드에 대한 입법권이 사라졌다고 해석하여 영국의 승인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헌법을 개정했다.[9] 본래 영연방은 웨스트민스터 헌장 이후 영국 본국이 더 이상 자치령을 수직적으로 통솔하지 못하게 되자 세운 협의체다. 당연히 아일랜드 자유국도 영연방의 일원이었다.[10] 1919년 아일랜드 독립 운동가들이 선포했던 아일랜드 공화국(Irish Republic)과는 다르다. 다만 정부의 공식적인 문서나 담화가 아닌 일반인들의 비공식적인 표현이나 언론 매체의 표기 등에서 현재의 아일랜드를 Irish Republic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으니 맥락을 잘 살펴야 한다.[11] 다만 FIFA에서는 두 Ireland를 구분하기 위해 Northern Ireland와 Republic of Ireland로 표기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FIFA에서는 아일랜드 팀이 스스로 이 표기를 쓰고 있다.[12] 불법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냥 법적으로 정당 취급을 못 받는다는 의미이다. 이 '당'의 구성원들 스스로가 영국과 아일랜드 정부를 인정할 수 없어서 정당 등록 자체를 안 하고 있기 때문에 이렇다.[13] 영어명 윌리엄 토마스 코스그레이브(William Thomas Cosgra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