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 파리 엑스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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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37년 5월 25일부터 11월 25일까지 프랑스 제3공화국 파리시에서 개최한 엑스포. 엑스포 자체는 당대에 가장 큰 행사로 칭송받았으나, 사실상 이 엑스포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전주곡'''이었다.
관람객 수는 '''3,104만 955명'''이라고 '''일의 자리까지''' 정확히 남아 있다.
2. 상세
1929년부터 1939년까지 10년간 엑스포가 집중적으로 개최되었다. 이 중 1935 브뤼셀 엑스포, 1937 파리 엑스포, 1939 뉴욕 엑스포 3개만이 국제박람회기구(BIE)의 1996년 개정 박람회 협약에서 BIE 공인 등록박람회로 재분류되었다. 1996년 BIE 협약 개정 이전에는 엑스포의 시행 기준같은 것도 없어서 개나 소나 World's Fair(등록박람회), International Expo(인정박람회)라는 표현을 마구잡이로 쓰고 있었다. 당장 제일 위의 사진에 나와있는 로고에서 EXPOSITION INTERNATIONALE, 즉 '''International Expo(인정박람회)'''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1939 뉴욕 엑스포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에 따라 엑스포는 1947 파리 엑스포(!)까지 8년간 개최할 수 없었다.
1927년 프랑스에서 1937년 엑스포를 유치했다. 부지는 에펠탑이 있는 마르스 광장. 2019년 지금도 마르스 광장에는 1937년 엑스포가 개최되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기념비가 있다.
2.1. 참가국
아프리카: 프랑스령 적도아프리카,프랑스령 서아프리카,알제리,벨기에령 콩고,이집트,마다가스카르,모로코,레위니옹,튀니지,남아프리카 연방
아시아/오세아니아: 오스트레일리아,팔레스타인,레반트국,프랑스령 인도,인도차이나,이라크,일본,시암(타이)
유럽: '''나치 독일''',오스트리아,벨기에,불가리아,덴마크,에스토니아,성좌,스페인,핀란드,'''프랑스''',영국,그리스,헝가리,이탈리아,룩셈부르크,모나코,노르웨이,네덜란드,폴란드,포르투갈,루마니아,스웨덴,스위스,체코슬로바키아,'''소련''',유고슬라비아
미주: 아르헨티나,브라질,캐나다,미국,멕시코,과들루프,아이티,마르티니크,페루,우루과이,베네수엘라
총 '''44개국'''이 참여하였다.
2.2. 나치 독일 VS 소련
프랑스에서 엑스포를 유치한 시점까지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물론 소련에서는 이미 이오시프 스탈린이 정권을 잡아서 유럽 전체에 위험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이탈리아 왕국의 베니토 무솔리니는 파시즘을 주창하는 또라이이긴 했지만 엑스포에서 깽판을 칠 수 있는 국력은 아니었다. 문제는 1929년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독일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정권을 잡으면서 터졌다. 히틀러는 알베르트 슈페어를 중용했고, 히틀러는 라인란트 재무장에 성공하여 자신감에 들떠 있었다. 슈페어는 이런 히틀러의 속성을 읽고 1937년 파리 엑스포를 나치 독일이 세계정복을 할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고심했다. 이건 이오시프 스탈린도 마찬가지였다. 공산주의 소련이 세계를 갈아엎을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 스탈린한테 눈에 들어온 것은 파리 엑스포였다. 그래서 그 결과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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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독소전쟁의 리허설'''이라고 불리는 사진이다. 왼쪽이 나치 독일의 독일 국가관, 오른쪽이 소련의 소련 국가관이다.
소련은 '''위를 쳐다보는 노동자'''를 표현했고, 독일은 '''세계를 내려보는 독수리'''를 표현했다. 그리고 이 2개의 국가관이 '''정면 대결하는''' 기묘한 연출이 나오고야 말았다. 원래는 프랑스에서 독일과 소련의 부지를 다르게 설정하려 했으나, 독일과 소련 모두 다 마르스 광장 정 중앙이 아니면 아예 엑스포 불참을 경고하면서 결국 에두아르 달라디에 프랑스 수상이 물러섰다. 소련과 나치 독일 모두 자신의 국가관을 '''더 높이 세워야''' 한다고 경쟁이 불붙었고, 프랑스는 경쟁을 부추기려고 독일과 소련한테 준 부지 크기를 동일하게 설정했다. 국가관이 더 높이 올라가는 경쟁이 벌어진 이유가 프랑스의 조치도 한 몫 했다는 것이다. 결국 소련이 GG치고 물러났다.[1]
소련 국가관을 장식한 "노동자와 콜호스의 여성(Рабо́чий и колхо́зница)" 동상은 일회용으로 써먹기는 아깝다고 생각했는지 소련에서는 박람회가 끝난 후 모스크바로 가져와 베데엔하에 세워놨다. 지금도 베데엔하에 가면 볼 수 있는데, 2009년에 개보수를 하여 기존의 10m 좌대를 34.5m 좌대로 높였다.
호스트인 프랑스 국가관은 에펠탑 옆에 있는데 독일 VS 소련 국가관에 비하면 아주 작았다.
아돌프 히틀러는 파리 엑스포 개막식에 참석하려고[2] 엑스포 조직위원회 측에 여러차례 호소했다. 그래서 조직위원회 측에서 초청장을 히틀러한테 보냈다. 그런데 히틀러한테 초청장이 갔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프랑스 제3공화국 정부 측의 적극적인 견제로 인해 결국 참석을 포기했다. 이 조치에 빡친 '''히틀러는 3년 후에 프랑스를 멸망시켜서 기어이 파리 땅을 밟았다'''.
3. 엑스포 이후
나치 독일과 소련은 철저한 상극이었다. 아돌프 히틀러와 이오시프 스탈린은 놀라울 정도로 역사적 라이벌이었다. 1937년 엑스포에서 한 차례 자존심 대결을 벌린 두 독재자는, 1939년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고 '''제2차 세계 대전을 동시에 일으켰다'''.
프랑스 3공화국은 히틀러의 엑스포 참여를 막아버렸지만, 이에 화가 난 히틀러의 1940년 프랑스 침공에 의해 '''6주만에 프랑스 제3공화국은 멸망'''당하여 1937년 파리 엑스포 회장이었던 마르스 광장이 아돌프 히틀러의 발에 밟히는 역대급 굴욕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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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이 알베르트 슈페어, 가운데 아돌프 히틀러, 오른쪽 아르노 브레커 조각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