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미국 대통령 선거

 

'''1984년 미국 대통령 선거'''
[image]
주별 선거인단 선거 결과

1980년 11월 4일
1980 대선

1984년 11월 6일
'''1984 대선'''

1988년 11월 8일
1988 대선
}}} ||
'''선거 일시'''
11월 6일 5시 ~ 11월 7일 6시 (UTC)
'''투표율'''
53.3%
'''선거 결과'''
'''후보'''
'''공화당'''}}}]]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
{{{-2 부통령 조지 H. W. 부시'''
'''민주당'''}}}]]
'''대통령 월터 먼데일
{{{-2 부통령 제럴딘 페라로'''[1]
'''선거인단'''

'''525명'''
13명
'''전국 득표'''

'''58.8%
54,455,472표'''
40.6%
37,577,352표
'''대통령 당선인'''
'''부통령 당선인'''
}}}
1. 개요
2. 경선
2.1. 공화당
2.2. 민주당
3. 본선
4. 결과
4.1. 접전지
5.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당시 선거 요약(...)'''[2]
제40대[3] 내지 제41대[4] 미국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 1984년 11월 6일 ~ 11월 7일까지 실시된 선거.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 후보가 선거인단 과반수를 확보해 당선되었다.
현재의 538명의 선거인단 체제가 확정된 이후 가장 큰 선거인단 차로 승부가 갈린 선거로 당시 높은 인기를 얻고 있던 레이건 대통령이 민주당 후보인 월터 먼데일을 상대로, 득표수/율, 선거인단에서 말 그대로 압승을 하며 재선 되었다. 유이하게 레이건이 졌던 지역은 미네소타 주워싱턴 D.C.였는데 미네소타는 먼데일의 고향이자 정치적 기반인 홈 스테이트였는데도 불구하고 득표율 차이가 거의 없었고[5] 사실상 민주당의 가장 강고한 텃밭인 워싱턴 D.C.에서만 내줬다고 봐도 무방하다. 미국 전역에서 먼데일이 속절없이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워싱턴 D.C.에서는 85%가 넘는 득표로 먼데일이 승리했다.[6]

2. 경선



2.1. 공화당


'''재선 도전 의사를 밝힌 레이건 부부'''
첫 임기 4년간 민권과 사회 문제를 둘러싼 여러 논란에도 불구 대규모 세금 감면을 바탕으로 한 레이거노믹스가 성공적으로 작동하며 거시 경제가 긴 불황의 터널을 뚫고 반등하는 데 성공했고, 대규모 국방비 증가를 통해 강한 미국 이미지를 되찾으려 노력했다. 거기에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을 공산권의 불참에도 불구하고 흥행시키는 데 성공하면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인기는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해롤드 스타센 미네소타 주지사 등이 도전장을 내밀고자 하였으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결국 안정적인 지지율와 탄탄한 당내 입지를 바탕으로 공화당 경선은 사실상 레이건의 재선 도전을 위한 형식적 절차가 되었으며 전체 유효표의 98.8%를 독점하였다. 이어 레이건이 전당대회에서 당의 공식 후보로 지명받아 재선에 도전하게 되었다. 1970년대에 있었던 리처드 닉슨의 불명예스러운 사임 이후 12년만에 다시 현직 대통령이 당내 도전자 없이 대선에 직행하게 된 것.

2.2. 민주당


'''1984년 경선의 승자가 된 월터 먼데일과 제랄딘 페라로'''
반면 민주당에는 레이건의 아성에 도전할 압도적인 주자, 또는 떠오르는 신예가 나타나지 않았다. 1982년 중간선거 시점까지만 해도 지난 경선에서 지미 카터 대통령에게 패배를 경험했던 에드워드 케네디가 당내 여론조사에서 50%에 가까운 지지를 받았으나 가족들의 반대로 불출마를 선언했고 이후에는 지미 카터의 러닝 메이트였던 월터 먼데일 전 부통령, 오하이오 주 연방 상원의원인 존 글렌[7] 정도가 우위를 보이고 있었다.
최종적으로 존 글렌, 조지 맥거번[8] 등이 불참을 선언하면서 월터 먼데일 전 부통령, 게리 하트 콜로라도 주 연방 상원의원, 그리고 인권운동가인 제시 잭슨 목사가 출마를 결심하게 됐다. 특히 제시 잭슨은 세 후보 중 상당히 이질적인 존재였는데 당시까진 제도권 정치인이 아니었고, 남부주를 그 기반으로 했으며 그리고 유일한 흑인이었다.
그래도 경선 전까지 지미 카터 전 대통령 등의 지지를 받으며 월터 먼데일이 30% 후반에서 40% 초반의 지지율을 굳혀가면서 우위를 지켰고 1월 20일 있었던 아이오와 코커스에서도 먼데일이 압승을 거두며 우세를 잡았다. 하지만 게리 하트가 뒤이어 뉴햄프셔 프라이머리, 버몬트, 와이오밍 코커스에서 연승을 거두면서 격차가 좁혀진 상태에서 슈퍼 화요일을 맞이하게 됐다.
슈퍼 화요일에도 먼데일이 앨라배마, 해외 민주당원, 조지아에서 승리했지만 하트가 플로리다, 매사추세츠, 로드아일랜드에서 승리를 거두며 균형추를 맞췄다. 이후 먼데일이 미시간, 미네소타, 뉴욕, 위스콘신 경선에서 노조 등의 지지에 힘입어 승리하면서 차이를 조금씩 벌렸지만 6월까지 승자가 결정되지 않았다.
게리 하트는 먼데일을 '구식' 위대한 사회[9] 민주당원으로 규정하여 비판했고 본인을 그에 대비되는 신선하고 자유주의적인 민주당원으로 규정했다. 하지만 노련한 먼데일은 게리 하트가 큰 아젠다만 가지고 있을뿐 세부적인 정책안이 없다는 점을 집요하게 공격했고 하트는 결국 이를 극복하지 못했다.
결국 6월 5일 열린 세번째 슈퍼 화요일에 게리 하트는 여론 조사에서 15%p나 앞서고 있던 뉴저지에서 패배하는 등 사실상 승리하기 어렵게 되었고 먼데일이 대의원의 과반을 확보하여 전당대회를 통해 당의 공식 후보 지명을 받는데 성공했다. 먼데일은 이 전당대회를 통해 민주당 역사상 5번째로 지명 당시 공직을 맡고 있지 않은 '민간인' 대선 후보가 되었다.
부통령 후보로는 당시 뉴욕 주 연방 하원의원이었던 제랄딘 페라로를 지명했는데 무려 미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부통령 후보가 되었다.

3. 본선


레이건 행정부의 높은 인기 때문에 불리한 입장에서 선거전을 시작한 먼데일이지만 핵동결과 남녀 평등 수정헌법안(ERA) 비준을 공략으로 내세우며 진보적인 선거 캠페인을 펼쳤다. 특히 미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부통령 후보인 제랄딘 페라로의 지명이 화제가 됐는데, 정작 지명 이후 여론조사에서 22%의 여성만이 이 선택에 만족한다는 결과가 나오면서 기대한만큼의 효과는 거두지 못했다.# 정작 페라로의 남편인 잭 자카로에 대해 수많은 의혹이 불거지면서 진보적 선거 캠페인에 큰 피해를 입고 말았다.
레이건 역시 4년전에 비해 생각만큼 쉽게 선거전을 풀어가진 못했는데 가장 큰 문제는 나이였다. 당시 73세였던 레이건은 이미 미국 역사상 가장 나이가 많은 현직 대통령이었고 10월 7일 있었던 먼데일과의 1차 토론회에서 고유명사를 착각하거나, 말의 순서가 맞지 않은 말을 중언부언하는 등 불안감을 더했다. 하지만 2차 토론회에서 미국 선거전 역사에 남은 또 하나의 명장면이 나오면서 상황이 바뀐다.

2차 토론회에서 진행을 맡았던 저널리스트 샌더 바노커가 시작부터 대놓고 레이건의 나이 문제에 대해 질문하자 오히려 "전 나이를 가지고 문제를 삼지 않을 것을 이 자리에서 약속드립니다. 상대 후보가 너무 젊고 경험이 부족하다는걸 절대 정치적으로 공격하지 않겠습니다."라며 재치있게 받아친 것. 토론 상대였던 먼데일도 이 답변에는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고 레이건의 나이 문제는 더이상 선거전에서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선거 직전 양 후보의 여론조사 지지율 격차는 무려 18%p까지 벌어졌고 그대로 선거일로 돌입했다.

4. 결과


'''최종 선거 결과'''
투표 시간
1984년 11월 6일(UTC +9}
투표 결과
[image]
후보자
로널드 레이건
월터 먼데일
'''선거인단 수'''
'''525 / 538명'''
'''13 / 538명'''
전국 득표 수
54,455,472표 (58.8%)
37,577,352표 (40.6%)
당선인
[image]
'''로널드 레이건 '''
현직 대통령이었던 로널드 레이건이 '''전체 득표율에서 18.2%p, 선거인단에서 512명 차이'''로 그야말로 압승을 거뒀다. 월터 먼데일은 충격적인 결과에 아주 빠르게 승복할 수 밖에 없었고 이 패배 이후 사실상 정계를 떠나게 된다. 비교적 진보 성향이 강한 매사추세츠 등 북동부 주들도 이변없이 레이건의 손을 들어줬다. 먼데일은 개표 최후반부 홈스테이트인 미네소타에서 0.18%p 차로 겨우 승리하면서 50개 전체 주에서의 패배라는 대굴욕은 면할 수 있었다. 민주당 후보로서는 무려 1860년 대선 당시 스티븐 A. 더글러스 이후 최악의 성적이고 미국 선거사 전체를 놓고 봐서도 1936년 당시 프랭클린 D. 루스벨트에게 참패한 공화당 알프 랜던[10] 이후 최악의 성적이다.
특히 제랄딘 페라로라는 파격적인 선택에도 불구하고, 유권자 여성 중 55%가 레이건을 지지했으며 오랜 기간 민주당의 전통적 지지층이었던 남부 백인들과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이후 뉴딜 동맹의 한 축을 이루었던 북부 블루칼라 노동자층 역시 이제는 완연한 "레이건 민주당원"으로서 레이건의 완승을 도왔다. 1980년 당시 존 B. 앤더슨을 지지했던 유권자들 역시, 이번엔 앤더슨이 먼데일을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먼데일이 아닌 레이건을 선택했다. 결국 2020년 시점까지도 이 선거가 마지막으로 승자와 패자의 득표율 차이가 두자릿 수까지 벌어진 선거가 되었다. 여담으로 선거가 끝난 12월, 어느 기자가 레이건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무엇을 원하냐고 질문하자 "미네소타가 있었으면 좋았을텐데..."라고 대답하며 웃음을 주기도 했다.
함께 열린 연방 상원 선거에서는 민주당이 2석을 추가했지만 여당인 공화당이 과반 의석을 지켰고[11], 하원 선거에서는 민주당이 16석을 잃었지만 과반에서 35석이 넘는 253석을 확보하면서 공화당이 염두에 뒀던 하원 탈환에는 실패했다. 이로 인해 레이건은 임기 2기에도 의회와 자주 충돌하게 된다.

4.1. 접전지


'''1984년 미국 대통령 선거 접전지'''
'''주 이름'''
'''선거인단수'''
'''승자 득표율'''
'''패자 득표율'''
'''득표율 차이'''
'''지난 승리자'''
'''이번 승리자'''
'''결과'''
'''미네소타'''
'''10명'''
49.72%
49.54%
0.18%
'''지미 카터&
월터 먼데일'''

'''월터 먼데일&
제랄딘 페라로'''

'''민주당 유지'''
'''매사추세츠'''
'''13명'''
51.22%
48.43%
2.79%
'''로널드 레이건&
조지 H. W. 부시'''

'''로널드 레이건&
조지 H. W. 부시'''

'''공화당 유지'''
'''로드아일랜드'''
'''4명'''
51.66%
48.02%
3.64%
'''지미 카터&
월터 먼데일'''

'''로널드 레이건&
조지 H. W. 부시'''

'''공화당 탈환'''
'''메릴랜드'''
'''10명'''
52.51%
47.02%
5.49%
'''지미 카터&
월터 먼데일'''

'''로널드 레이건&
조지 H. W. 부시'''

'''공화당 탈환'''
'''펜실베이니아'''
'''25명'''
53.34%
45.99%
7.35%
'''로널드 레이건&
조지 H. W. 부시'''

'''로널드 레이건&
조지 H. W. 부시'''

'''공화당 유지'''
'''아이오와'''
'''8명'''
53.27%
45.89%
7.38%
'''로널드 레이건&
조지 H. W. 부시'''

'''로널드 레이건&
조지 H. W. 부시'''

'''공화당 유지'''
'''뉴욕'''
'''36명'''
53.84%
45.83%
8.01%
'''로널드 레이건&
조지 H. W. 부시'''

'''로널드 레이건&
조지 H. W. 부시'''

'''공화당 유지'''
'''위스콘신'''
'''11명'''
54.19%
45.02%
9.17%
'''로널드 레이건&
조지 H. W. 부시'''

'''로널드 레이건&
조지 H. W. 부시'''

'''공화당 유지'''

5. 관련 문서



[1] 미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부통령 후보'''이다.[2] 개표 방송 시작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워싱턴 DC를 제외한 미국 전역이 레이건의 손을 들어주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나마 먼데일이 이긴 미네소타도 막판까지 접전이 벌어진 탓에 승자 예측이 늦어졌기 때문. 2분 11초 즈음 아나운서가 DC를 버지니아 위 블루 닷(파란 점)으로 표현하는게 백미.[3] 현직 대통령인 로널드 레이건 승리 시[4] 도전자인 월터 먼데일 승리 시[5] 고작 3,761표 차이였고, 득표율 차이는 '''0.18%'''였다. 약 1,800표만 레이건에게 더 갔으면 워싱턴 D.C.에서만 먼데일이 이겼을 것이다.[6] 워싱턴 D.C.는 1964년 처음으로 선거인단이 배정된 이래로 2020년 현재까지도 민주당의 가장 확실한 텃밭이다. 어느 정도냐면, 한국에서 호남 지방에서의 민주당계 정당 득표율과 유사하다. 공화당의 득표율이 아무리 높아도 20% 근처로 간 적이 없다.[7] 무려 미국 역사상 최초로 우주 궤도를 비행한 우주 비행사 출신 정치인이다.[8] 1972년 대선에서 리처드 닉슨에게 참패했던 당시 민주당 후보였다.[9] 린든 B. 존슨 때 주창된 슬로건으로 공립 교육 지원, 의료보험 시스템 확충(메디케이드, 메디케어 제도 도입), 민권법 제정 등 경제, 사회분야를 포괄하는 사회보장제도의 확대를 의미한다.[10] 36.5% 득표, 선거인단 8명 확보[11] 53석, 47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