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통령 선거

 

1. 개요
2. 절차
2.1. 선거일
2.2. 투표시간
2.3. 선거권
2.4. 피선거권
2.5. 후보자 등록
2.7. 선거인단의 2차 투표
2.8. Contingent election
2.9. 취임식
3. 역대 대통령 선거
3.1. 여담
3.2. 미국 대선 역사

[clearfix]

1. 개요



'''Presidential election of United States'''
미국에서 실시되는 대통령 선거이며 선거인단제에 의해 4년 중임제(최장 8년) 미국 대통령을 선출하는 간선제 선거로 시행된다. 미국은 남북전쟁 이후부터 공화당민주당이 사실상의 양당제를 이루고 있고[1], 녹색당이나 자유당, 이따금 제3 후보도 돌풍을 일으키나[2] 2등을 거둔 경우는 1912년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퇴임 이후 재출마한 진보당의 돌풍을 제외하고는 없다.[3]
전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미국이라는 국가가 세계에 끼치는 영향을 볼 때 미국 대통령 선거는 단순히 미국 국민들의 관심사에서 그치지 않는다. 누가 미국 대통령이 되는가에 대한 문제는 미국의 제1 세계 우방국가들은 물론 한때 적대적 관계였던 제2 세계 국가들과 중동, 제3 세계 국가들 모두에게 전세계의 초미의 관심사다. 전 세계에 가장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미국의 특성상 대통령에 따라 세계가 휘청일 수도, 세계가 안정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2. 절차



2.1. 선거일


  • 선거인단 선출
선거가 벌어지는 해의 11월 첫째 월요일 다음의 화요일이라는 규정을 따른다. 바꿔 말하면 11월 2-8일 중에서 화요일인 날이 선거인단을 결정하는 날이다.
  • 대통령 선출
12월 둘째 수요일 다음 첫 월요일. 12월 13-19일에 중에서 월요일인 날이다. 선거인단들이 찍을 후보는 이미 알려진 상태라 형식적이다. 선거인단이 확정되었을 때 이미 대통령이 확정된 것으로 간주한다. 전국 선거인단의 표 집계와 당선자 발표는 이듬해 1월 6일에 한다.

2.2. 투표시간


  • 각 주별로 개별적으로 정하며, 가장 짧은 주가 12시간의 투표시간을 보장하고 있다. 가장 긴 투표시간을 보장해주는 주는 뉴욕 주로, AM 6:00 ~ PM 9:00으로 15시간의 투표시간을 보장한다.
  • 미국의 모든 주 지역 중 가장 먼저 투표를 시작하는 곳은 뉴햄프셔 주, 그중에서도 딕스빌노치이다. 이곳은 투표 당일 0시부터 시작한다.

2.3. 선거권


'''18세 이상의 유권자 등록을 마친 미국 시민'''으로서 거주하는 주, 카운티 또는 시의 투표 기준에 적합한 사람이 선거권을 갖게 된다.
, 푸에르토리코 등 미국 속령의 시민은 선거권, 정확히는 선거인단 선거권이 없다. 그 지역의 배정된 선거인이 0명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본토로 거주지를 옮기면 선거권이 생기며, 반대로 본토 주민이 속령으로 거주지를 옮기면 선거권이 사라진다. 1964년까지는 같은 이유[4]로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 D.C.의 주민에게도 선거권이 없었다. 다만 민주당과 공화당은 이런 속령들에서도 대통령 후보 경선을 치르기 때문에 이를 통해 속령 주민들의 의견을 반영하기도 한다.

2.4. 피선거권


'''35세 이상의 출생을 통해 자연적으로 미국 시민이 된 최소 14년 이상 미국 내에서 거주한 사람'''이 피선거권을 갖는다.
이는 거의 미국 50개 주 내에서 태어난 사람을 의미한다. 역시 괌 등의 속령 출생자는 피선거권이 없다. 그러나 속지주의를 원칙으로 하되 속인주의를 부분적으로 인정하는 미국 국적법 상 몇몇 조차지 및 군 주둔지에서 태어난 사람에게도 자연적인 미국 시민의 지위를 부여했기 때문에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고 출마한 사례도 있다. 당시 미국의 조차지였던 파나마 운하 지대에 주둔 중이던 군인 가족의 아들인 존 매케인이 그 예. 반대로 선거권은 귀화로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거나, 미국 시민권과 다른 국가 국적을 모두 갖고 있는 경우에도 행사할 수 있다.[5]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역임했던 아놀드 슈워제네거는 미국 태생이 아닌 오스트리아 출생이기 때문에 정치인으로서의 행보가 여기서 끝난 것이다.
후보 중 재선을 노리는 대통령도 있을 수 있는데, 이때 출마 자격은 중임 1회로 한정한다. 즉 4년 임기를 1회 마친 상태일 때만 재선에 도전할 수 있다. 전임 대통령이 사망, 사임 등으로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서 승계했을 경우 전임 대통령의 잔여 임기가 2년 이상 남아서 이 임기를 보내면 4년 임기를 1회 마친 것으로 간주한다. 한번 재선에 실패했다고 해서 중임할 기회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여전히 남아 있다. 이런 사례로 22대 대통령 그로버 클리블랜드는 1884년 처음 대통령에 당선되고 1888년 재선에 실패한 뒤, 4년 뒤인 1892년에 다시 출마해서 재선에 성공했다. 즉 이렇게 임기를 건너 뛰어서 당선되는 게 법적으로 가능하다.

2.5. 후보자 등록



2.6. 선거인단



미국 대통령 선거는 국민이 특정 후보를 지지할 것을 약속하는 선거인단을 선출하고 그 선거인단이 투표하여 이루어진다.
주의 선거인단의 수는 그 주가 가진 상원 의석과 하원 의석의 합으로 결정되며, 주가 아닌 워싱턴 D.C.는 헌법에 따라 가장 선거인단이 적은 주와 동일한 선거인단을 배분받는다(현재는 3명). 현재 선거인단의 수는 총 538명이다.
선거인단 배분 방식은 주에서 결정하며, 대부분의 주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은 후보에게 선거인단을 몰아준다. 이를 흔히 Winner Takes All(승자독식제)라 한다.
미국은 연방제 국가인 만큼 주별로 투표하는 방식도 다르다. 어떤 주는 터치스크린 투표방식인 DRE(Directing Recording Electronic)를 실시하는 데 반해 어떤 주는 전통적인 종이 투표 방식을 한다든지.
선거인단 제도의 특성 때문에 득표 수에서 이기고 선거인단 숫자에 밀려서 패배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이런 경우는 현재까지 58번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5번 있었다.
1. 1824년 선거 (앤드루 잭슨 vs '''존 퀸시 애덤스''' vs 윌리엄 W. 크로포드 vs 헨리 클레이) : 전체 득표 수는 앤드루 잭슨(41.3%)이 1등이었지만, 과반수 미달로 하원에 넘겨졌고, 여기서도 결판이 안나서 애덤스와 클레이의 담합으로 애덤스가 이겼다.[6]
2. 1876년 선거 (새뮤얼 J. 틸던 vs '''러더퍼드 버처드 헤이스''') : 전임 대통령 그랜트 정부의 무능과 부패로 공화당에 등을 돌린 유권자들이 틸던에 투표했고, 틸던은 51%의 지지율과 184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했고, 헤이스는 48%의 지지율과 166명의 선거인단을 가지고 있었지만, 사우스캐롤라이나, 플로리다, 루이지애나 주의(총 19명) 승리자가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재검표를 수십번을 해도 결과가 바뀌었기 때문에 결국 취임식 이틀 전에(...) 미국 상원의원 비율로 계산해(민주 19, 공화 47) 이 세 주가 공화당 우세니까 헤이스에 찍었다고 가정해(...) 19표 헤이스 몰표로 선언해 (184 vs 166+19=185) 헤이스가 대통령이 되었다.[7]
3. 1888년 선거 (그로버 클리블랜드 vs '''벤자민 해리슨''') : 전체 득표수는 클리블랜드가 근소하게(48.6% vs 47.8%) 이겼으나, 선거인단에서 밀려(168 vs 233) 해리슨이 승자가 되었다. 다만, 이 선거는 공화당의 날조로 논란이 되었던 게, 당시 클리블랜드의 텃밭인 뉴욕 주(선거인단 36명)가 공화당에 넘어간 이유가, 유세가 한창일 때 각국 대사관에 누구를 더 선호하는지 물어봤는데, 영국 대사는 "자유무역을 지지하는 클리블랜드인데 왜 굳이?"라고 답변한 것을 공화당이 이걸 부풀려 "영국은 클리블랜드를 지지한다! 그는 친영파다!"라고 선전을 하는 바람에 뉴욕에 이민을 많이 온 아일랜드인들이 대거 등을 돌려 공화당이 차지했다. 만약 뉴욕이 클리블랜드가 이겼다면 204 vs 197명이 되어 재선에 성공했을 것이다.
4. 2000년 선거 (앨 고어 vs '''조지 워커 부시''') : 역대 대통령 선거 중에서도 손꼽을 정도로 치열했던 선거로, 앨 고어가 근소하게(48.4% vs 47.9%) 이겼지만 선거인단으로는 부시가 266명 vs 271명으로 5표 차로 이겼다. 특히 격전지였던 플로리다에서 재검표를(537표 차)하면 결과를 알 수 없었지만 연방대법원이 재검표를 기각시키면서 부시가 대통령이 되었다.[8]
5. 2016년 선거 (힐러리 클린턴 vs '''도널드 트럼프''') : 불과 4년 전에도 있었다. 대부분 트럼프가 당선될 것이라고 생각도 못했고, 실제로 전체 득표율도 48.2% vs 46.1%로 부시 때보다도 격차가 컸지만, 선거인단에서 트럼프가 227명 vs 304명으로 이겼다. 이런 이유는 힐러리가 진 주에서도 근소하게 차이가 났고, 캘리포니아, 뉴욕 등 인구많고 텃밭인 서부와 북동부만 힐러리가 이겼고 나머지 중소규모의 주와 경합주에서는 트럼프가 근소하게 이겼다. 특히 플로리다와 미시간, 위스콘신 등 러스트 벨트는 남편 빌 클린턴이 잘 공략해 이긴 반면 힐러리는 그러지 못했다는 게 흠.[9]

2.7. 선거인단의 2차 투표


선거인단이 2차 투표를 한다. 자기가 출마한 그 주에서 투표한다. 그리고 투표 결과만 워싱턴 D.C.로 보낸다. 모든 선거인이 모이는 일은 없다. 여기서 과반을 얻은 후보가 최종적으로 당선된다.
선거인은 당초 지지하기로 한 후보를 의무적으로 찍도록 규정한 주도 있고, 그렇지 않은 주도 있다. 승자독식인 주의 투표결과에 선거인단 개인의 의견을 반영할 수 있도록 의도되었다. 29개의 주가 법적으로 금지하지만 처벌하는 경우는 드물며 몇몇 주를 제외하면 대부분 유효표로 남는다. 보통 의무적으로 찍도록 규정한 주는 위반 시 주에 따라 다르지만 벌금을 내거나 그 표를 무효로 하고 다른 선거인이 대신 투표하도록 한다. 이러한 선거인단의 '배신'에 대해서는 불충실한 선거인단 참조.
각 주의 선거인단은 대통령 선거를 먼저 하고, 다음에 부통령 선거를 한다. 그래서 미국 대선은 사실상은 러닝메이트 제도지만 명목상으로는 아니다. 정, 부통령 짝을 한꺼번에 뽑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 따로 부통령 따로 뽑는 것이므로. 실제로 일어날 확률은 거의 없겠으나 이론상은 대통령 당선자는 공화당 후보, 부통령 당선자는 민주당 후보인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다만 아마도 특정 당 대통령 후보를 지지하는 선거인은 역시 그 당의 부통령 후보를 지지할 것이다. 그리고 예전에 한 선거인은 대통령 선거 때 부통령 후보를 찍고, 부통령 선거 때 대통령 후보를 찍은 사례도 있다. 오히려 일반 유권자들의 선거인단 선거 때가 러닝메이트제라고 할 수 있다. 그 주에 배정된 선거인이 4명이라고 했을 때 이쪽 4명과 저쪽 4명 중 어느 쪽을 지지할 것인가의 문제니까.
선거인은 대통령 후보와 부통령 후보 모두 자기 주 출신을 찍을 수는 없다. 바꿔 이야기하면 대통령 후보로 자기 주 출신을 찍었다면 부통령 후보는 다른 주 출신을 찍어야 한다는 말. 아예 자기 당 선거인이 자기 당 부통령 후보를 못 찍을 수도 있는 이런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각 정당은 대통령 후보와 부통령 후보의 출신 주를 다르게 한다. 사실 러닝메이트는 대통령 후보의 지지기반이 아닌 집단까지도 끌어오기 위해 보완적으로 선택하는 경우가 많아 자연스럽게 대통령 후보와 출신 주가 달라지는 것이 보통이다.

2.8. Contingent election


선거인단 중 과반수를 확보하는 후보가 없을 경우에는 최상위 득표자 2명에 대해 하원이 대통령을 결정하게 된다. 이 경우에는 각 주별로 1표씩 행사한다. 정확히는 주별 하원의원들이 투표하여 이 중 가장 많은 득표를 얻은 후보가 그 주의 지지 후보가 되는 것이다. 하원의원 수가 53명인 캘리포니아에서 A후보에 투표한 사람이 27명이고 B후보에 투표한 사람이 26명이면 캘리포니아 전체로는 A후보에 1표를 투표하게 되는 것이다. 이 선거를 미국에서는 Contingent election이라 한다. 이렇게 주별로 행사된 표에서 과반의 득표를 얻은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
부통령의 경우에도 과반 후보가 없으면 상원에서 표결을 진행하는데 이 때는 하원과는 달리 상원의원 1명당 한 표씩 행사해 부통령을 결정한다.
이것이 일어난 경우는 역사상 단 두 번으로, 1800년 미국 대통령 선거와 1824년 미국 대통령 선거가 있다. 전자의 경우 토머스 제퍼슨에런 버가 선거인단에게서 정확히 동수(73표)의 표를 얻어 1801년에 하원 투표로 넘어간 것인데, 35번이나 투표를 치르고도 대통령이 결정되지 않았다가 36번째 투표에서 메릴랜드, 버몬트, 델라웨어, 사우스 캐롤라이나가 입장을 바꿈으로써 제퍼슨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후자의 경우 앤드루 잭슨이 득표 1위였지만 과반이 아니어서 2위였던 존 퀸시 애덤스와 하원 투표에서 겨루게 되었는데 존 퀸시 애덤스가 4위였던 헨리 클레이와 타협했고, 이에 따라 클레이가 애덤스를 지지함으로써 그에게 갔던 표가 애덤스에게로 가서 1번의 투표만을 거쳐 애덤스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1836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버지니아 주 선거인단이 선거 결과에 따라 마틴 밴뷰런을 대통령으로 찍고도 러닝메이트 부통령 후보인 리처드 멘터 존슨(Richard Mentor Johnson)을 찍지 않아 부통령 선거가 상원으로 넘어간 적이 있는데, 상원에서는 리처드 멘터 존슨을 부통령으로 선출했다.

2.9. 취임식


미국은 대통령 임기는 취임선서를 하고 정오부터 시작된다. 취임선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I do solemnly swear that I will faithfully execute the office of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and will do the best of my ability, preserve, protect and defend the Constitution of the United States." So help me god.

저는 미국 대통령직을 성실히 수행할 것이며, 제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미국 헌법을 보존하고 보호하며 지킬 것을 엄숙히 맹세합니다. (번역)


3. 역대 대통령 선거


'''1789년'''

[image]
후보
'''조지 워싱턴
전 대륙육군 총사령관'''
당적
'''무소속'''
출신 주
'''버지니아'''
러닝메이트
''공식 후보 없음''[10]
선거인단
'''69'''[11]
득표수
'''39,624'''
득표율
'''100.0%'''
만장일치로 조지 워싱턴 대통령 당선, 나머지 표는 부통령 선출에 분배. 존 애덤스가 2위로 부통령 당선.
'''1792년'''

[image]
후보
'''조지 워싱턴
대통령'''
당적
'''무소속'''
출신 주
'''버지니아'''
러닝메이트
''공식 후보 없음''[12]
선거인단
'''132'''[13]
득표수
'''28,579'''
득표율
'''100.0%'''
만장일치로 조지 워싱턴 대통령 당선, 나머지 표는 부통령 선출에 분배. 존 애덤스가 2위로 부통령 당선.
'''1796년'''

[image]
[image]
후보
'''존 애덤스
부통령'''
토머스 제퍼슨
전 국무장관
당적
'''연방당'''
민주공화당
출신 주
'''매사추세츠'''
버지니아
러닝메이트
''공식 후보 없음''[14]
''공식 후보 없음''[15]
선거인단
'''71'''
68
득표수
'''35,726'''
31,115
득표율
'''53.4%'''
46.6%
부통령이었던 아슬아슬하게 애덤스가 당선, 이때까지는 득표수 2등이 부통령이 되는 제도에 의해 제퍼슨이 대통령이 되었는데, 제퍼슨은 4년 내내 정책을 비판하고 토를 다는 바람에 이 제도가 거의 유명무실해졌고, 다음 선거에는 당에서 부통령 후보를 같이 선출하게 되었다.
'''1800년'''

[image]
[image]
후보
'''토머스 제퍼슨
부통령'''
존 애덤스
대통령
당적
'''민주공화당'''
연방당
출신 주
'''버지니아'''
매사추세츠
러닝메이트
'''에런 버
전 상원의원'''
찰스 C. 핑크니
전 주 프랑스 대사
선거인단
'''73'''
65
득표수
'''41,330'''
25,962
득표율
'''61.4%'''
38.6%
워싱턴의 리더십과 카리스마에 미치지 못하고 제퍼슨에게 내내 견제당한 애덤스가 재선에 실패하고 쓸쓸히 물러났다.
'''1804년'''

[image]

후보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
찰스 C. 핑크니
전 주 프랑스 대사
당적
'''민주공화당'''
연방당
출신 주
'''버지니아'''
사우스캐롤라이나
러닝메이트
'''조지 클린턴
전 뉴욕 주지사'''
루퍼스 킹
전 주 영국 대사
선거인단
'''162'''
14
득표수
'''104,110'''
38,919
득표율
'''72.8%'''
27.2%
루이지애나 매입과 연방보다는 주의 권리를 우선하는 정책을 펼친 덕분에 2개 주를 제외하고는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고 제퍼슨은 재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후 각종 실책으로 지지율이 급락해 말기에는 쫓겨나다시피 했다.
'''1808년'''

[image]

후보
'''제임스 매디슨
국무장관'''
찰스 C. 핑크니
전 주 프랑스 대사
당적
'''민주공화당'''
연방당
출신 주
'''버지니아'''
사우스캐롤라이나
러닝메이트
'''조지 클린턴
부통령'''
루퍼스 킹
전 주 영국 대사
선거인단
'''122'''
47
득표수
'''124,647'''
62,341
득표율
'''64.7%'''
32.4%
매디슨은 제퍼슨의 정책을 대부분 승계하는 입장을 취했고, 주를 우선하는 정책과 타협과 협상을 강조해 핑크니를 또 이기는 데 성공한다.
'''1812년'''

[image]

후보
'''제임스 매디슨
대통령'''
드위트 클린턴
뉴욕시장
당적
'''민주공화당'''
민주공화당[16]
출신 주
'''버지니아'''
뉴욕
러닝메이트
'''엘브리지 게리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
자레드 잉거솔[17]
펜실베이니아주 법무장관
선거인단
'''128'''
89
득표수
'''140,431'''
132,781
득표율
'''50.4%'''
47.6%
매디슨은 영국과의 관계 악화를 제외하면 국내 정치는 무난하게 했고, 연방주의당에게 뉴욕 주를 빼앗겼지만 그걸 제외하면 비교적 쉽게 이겼다. 하지만 재취임 몇달만에 '''미영전쟁'''이 발발한다.
'''1816년'''

[image]
[image]
후보
'''제임스 먼로
국무장관'''
루퍼스 킹
상원의원
당적
'''민주공화당'''
연방당
출신 주
'''버지니아'''
뉴욕
러닝메이트
'''다니엘 D. 톰프킨스
뉴욕 주지사'''
존 E. 하워드
전 상원의원
선거인단
'''183'''
34
득표수
'''76,592'''
34,730
득표율
'''68.2%'''
30.9%
제임스 먼로는 능력있고, 사교 넘치는 적격자로 평가받고 있었고, 하필 연방주의자들은 영국을 지지했던 터라 미영전쟁 이후 지지도가 확 내려갔는데, 루퍼스 킹을 마지막으로 연방주의자에서 후보를 내는 것을 끝낸다.
'''1820년'''

[image]
후보
'''제임스 먼로
대통령'''
당적
'''민주공화당'''
출신 주
'''버지니아'''
러닝메이트
'''다니엘 D. 톰프킨스
부통령'''
선거인단
'''231'''[18]
득표수
'''87,343'''
득표율
'''80.6%'''
이 시기 연방주의는 거의 사라졌고, 연방주의자당 자체도 1824년에 완전히 소멸한다. 그리고 먼로의 지도력이 뛰어난 덕분에 워싱턴에 이어 선거인단 만장일치로 당선될 뻔하지만, 뉴햄프셔 주에서 존 퀸시 애덤스에 투표하는 반란표 1표 때문에 무산되었다.
'''1824년'''

[image]
[image]
후보
'''존 퀸시 애덤스
국무장관'''
앤드루 잭슨
상원의원
당적
'''민주공화당'''
민주공화당
출신 주
'''매사추세츠'''
테네시
러닝메이트
'''존 C. 칼훈
전쟁장관'''
존 C. 칼훈
전쟁장관
선거인단
84
'''99'''
하원투표
'''13'''
7
득표수
113,122
'''151,271'''
득표율
30.9%
'''41.4'''


[image]
후보
윌리엄 크로포드
재무장관
헨리 클레이
하원의장
당적
민주공화당
민주공화당
출신 주
조지아
켄터키
러닝메이트
나다니엘 메이콘
상원의원
네이선 샌포드
뉴욕주 고등법원장
선거인단
41
37
하원투표
4
-
득표수
40,856
47,531
득표율
11.2%
13.0%
1824년 연방주의자당이 소멸되고, 민주공화당에서만 후보를 등록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로 인해 과반수 득표는 불가능한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선거가 치뤄졌다. 결국 모두 과반수가 되지 않아 의회로 넘어갔고, 여기서도 결판이 안나는 바람에 막판에 애덤스와 클레이가 협상을 했고, 결국 애덤스가 선거인단 121명이 되어 대통령이 되었다. 앤드루 잭슨은 이에 반발해 자신의 지지자와 함께 민주당을 창당했고, 오늘날 미국 민주당의 창업주가 된다. JQA도 이에 대응하여 국민공화당을 만들었다. 이로써 토마스 제퍼슨이 만든 민주공화당은 24년만에 해체가 된다.
'''1828년'''

[image]
[image]
후보
'''앤드루 잭슨
전 상원의원'''
존 퀸시 애덤스
대통령
당적
'''민주당'''
국민공화당
출신 주
'''테네시'''
매사추세츠
러닝메이트
'''존 C. 칼훈
부통령'''
리처드 러시
재무장관
선거인단
'''178'''
83
득표수
'''642,553'''
500,987
득표율
'''56.0%'''
43.6%
사교적이었던 먼로에 비해 아들 애덤스는 아버지와 성격이 비슷해 꼬장꼬장해 인기가 없었고, 포퓰리즘을 추구한 앤드루 잭슨의 선거전략에 밀려 재선에 실패한다.
'''1832년'''

[image]
[image]
후보
'''앤드루 잭슨
대통령'''
헨리 클레이
상원의원
당적
'''민주당'''
국민공화당
출신 주
'''테네시'''
켄터키
러닝메이트
'''마틴 밴 뷰런
전 주 영국 대사'''
존 서전트
전 하원의원
선거인단
'''219'''
49
득표수
'''701,780'''
484,205
득표율
'''54.2%'''
37.4%



후보
존 플로이드
주지사
윌리엄 위르트
전 법무장관
당적
무효당
안티메이슨
출신 주
버지니아
메릴랜드
러닝메이트
헨리 리
경제학자
에이모스 엘메이커
펜실베이니아주 법무장관
선거인단
11
7
득표수
-
100,715
득표율
-
7.8%
대중정치, 엽관제, 서부 백인 적극 등용 덕분에 앤드루 잭슨은 인기가 높았고, 그 당시 젊은 이미지를 추구했던 헨리 클레이를 여유롭게 제치고 재선에 성공했다.
'''1836년'''

[image]
[image]
후보
'''마틴 밴 뷰런
부통령'''
윌리엄 헨리 해리슨
전 주 콜롬비아 대사
당적
'''민주당'''
휘그당
출신 주
'''뉴욕'''
오하이오
러닝메이트
'''리처드 멘터 존슨
하원의원'''
프란시스 그레인저
하원의원
선거인단
'''170'''
73
득표수
'''746,176'''
550,816
득표율
'''50.8%'''
36.6%




후보
휴 L. 화이트
상원의원
다니엘 웹스터
상원의원
와일리 P. 맹검
상원의원
당적
휘그당
휘그당
휘그당
출신 주
테네시
매사추세츠
노스캐롤라이나
러닝메이트
존 타일러
전 상원의원
프란시스 그레인저
하원의원
존 타일러
전 상원의원
선거인단
26
14
11
득표수
146,109
41,201
-
득표율
9.7%
2.7%
-
부통령 때의 업적, 잭슨의 후광을 입은 밴 뷰런은 분열된 휘그당을 가볍게 이기고 당선이 되었다. 이 때의 선거를 마지막으로, 미국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3선 도전까지 양당 체제가 거의 확립이 된다.
'''1840년'''

[image]
[image]
후보
'''윌리엄 헨리 해리슨
전 주 콜롬비아 대사'''
마틴 밴 뷰런
대통령
당적
'''휘그당'''
민주당
출신 주
'''오하이오'''
뉴욕
러닝메이트
'''존 타일러
전 상원의원'''
''공식 후보 없음''[19]
선거인단
'''234'''
60
득표수
'''1,275,390'''
1,128,854
득표율
'''52.9%'''
46.8%
노예제 미온 대처와 서부 주들의 연방 가입 거부 등 잭슨과 달리 우유부단했던 밴 뷰런에 대한 이미지가 나빠지고, 상대 후보 해리슨은 자기를 통나무 집에 살고 사과술을 마시는 친숙한 서민이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해 신승을 거두었다. 상대 후보 폄하와 이미지 선전은 잭슨이 처음 만들었지만, 그걸 본격화한 것은 해리슨이다.[20] 하지만 돈과 시간을 퍼부어 대통령이 되었지만 취임식 때 겨울 비 오는 날에 코트도 안 입고 2시간 가까이 연설하다가 무리한 나머지 1개월 만에 병사하고 말았다(...).
'''1844년'''

[image]
[image]
후보
'''제임스 K. 포크
전 주지사'''
헨리 클레이
전 상원의원
당적
'''민주당'''
휘그당
출신 주
'''테네시'''
켄터키
러닝메이트
'''조지 M. 댈러스
전 주 러시아 대사'''
시어도어 프레일링하이젠
전 상원의원
선거인단
'''170'''
105
득표수
'''1,339,494'''
1,300,004
득표율
'''49.5%'''
48.1%
대통령직을 승계한 타일러의 이미지가 안 좋아진 마당에 휘그당은 또 헨리 클레이를 후보로 지명했고, 민주당의 후보 포크는 전쟁을 불사한 영토확장[21]을 공약으로 내세워 거물 클레이를 겨우 이겨 대통령이 된다.
'''1848년'''

[image]

[image]
후보
'''재커리 테일러
육군 소장'''
루이스 캐스
전 상원의원
마틴 밴 뷰런
전 대통령
당적
'''휘그당'''
민주당
자유토지당
출신 주
'''루이지애나'''
미시간
뉴욕
러닝메이트
'''밀러드 필모어
뉴욕주 재무감사관'''
윌리엄 O. 버틀러
전 하원의원
찰스 프란시스 애덤스
전 매사추세츠 주상원의원
선거인단
'''163'''
127
0
득표수
'''1,361,393'''
1,223,460
291,501
득표율
'''47.3%'''
42.5%
10.2%
휘그당은 어떻게든 선거를 이기기 위해 미국-멕시코 전쟁의 전쟁영웅 재커리 테일러를 후보로 추대했고, 민주당은 기존 영토확장 공약 이행과 더불어 자신이 있었지만 8대 대통령 마틴 밴 뷰런과 자유토지당이 다시 한번 대권에 도전하면서 민주당이 분열되었고, 어부지리로 대통령에 당선되는데 성공한다.
'''1852년'''

[image]

후보
'''프랭클린 피어스
전 상원의원'''
윈필드 스콧
육군 총지휘관
당적
'''민주당'''
휘그당
출신 주
'''뉴햄프셔'''
뉴저지
러닝메이트
'''윌리엄 R. 킹
상원의원'''
윌리엄 A. 그레이엄
전 해군부 장관
선거인단
'''254'''
42
득표수
'''1,607,510'''
1,386,942
득표율
'''50.8%'''
43.9%
테일러의 급사 이후 승계한 필모어의 실정과 더불어 또 다시 전쟁영웅 윈필드 스콧을 후보로 추대한 휘그당에 분노한 유권자들, 그리고 그 당시 꽤 젊고 잘생긴 이미지를 가진 피어스에게 표가 몰려 압승을 거둔다. 이후 테일러 이후 대통령들이 당적과는 상관없이 남부의 눈치를 보면서 노예제를 옹호하자, 휘그당 개혁파들은 이에 반발해 공화당을 창설했고, 남북전쟁 종전 이후 민주당 vs 공화당의 양당체제가 계속된다.
'''1856년'''

[image]

[image]
후보
'''제임스 뷰캐넌
전 주 영국 대사'''
존 C. 프레몬트
전 상원의원
밀러드 필모어
전 대통령
당적
'''민주당'''
공화당
미국당
출신 주
'''펜실베이니아'''
캘리포니아
뉴욕
러닝메이트
'''존 C. 브레킨리지
전 하원의원'''
윌리엄 L. 데이턴
전 상원의원
앤드루 잭슨 도넬슨
전 주 프러시아 대사
선거인단
'''174'''
114
8
득표수
'''1,838,169'''
1,341,264
873,053
득표율
'''45.3%'''
33.1%
21.6%
남부 눈치보기에 불구하고 민주당이 다시 한번 이긴 이유가, 뷰캐넌이 펜실베이니아 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남부에서 인지도가 꽤 있었을 뿐더러, 휘그당이 공화당과 13대 대통령인 필모어의 미국당으로 쪼개지면서 어부지리 승을 거두었다. 필모어의 득표수가 꽤 높았기 때문에 나중에 공화당은 필모어 욕(...)을 좀 했다고 한다.
'''1860년'''

[image]
[image]
후보
'''에이브러햄 링컨
전 하원의원'''
존 C. 브레킨리지
부통령
당적
'''공화당'''
남부민주당
출신 주
'''일리노이'''
켄터키
러닝메이트
'''해니벌 햄린
상원의원'''
조셉 레인
상원의원
선거인단
'''180'''
72
득표수
'''1,866,452'''
847,953
득표율
'''39.8%'''
18.1%


[image]
후보
존 벨
전 상원의원
스티븐 A. 더글러스
상원의원
당적
입헌연합당
민주당
출신 주
테네시
일리노이
러닝메이트
에드워드 에버렛
전 상원의원
허셜 V. 존슨
전 조지아 주지사
선거인단
39
12
득표수
592,906
1,382,713
득표율
12.6%
29.5%
1860년 선거는 민주당에 완전히 분열되는 사태에 이르러 노예제에 중립적인 스티븐 더글라스가 후보로 지명되자 남부 대부분이 이에 불복하고 남부민주당을 창설하고 뷰캐넌 때 부통령이었던 브레킨리지를 후보로 등록한다.[22] 그리고 입헌연합당도 단독으로 등장하는 등 민주당에 악재만 겹친 덕분에 링컨의 공화당은 40%도 안 되는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에 남부는 반발해 사우스캐롤라이나부터 시작된 연방탈퇴를 시작으로 남북전쟁이 시작된다.
'''1864년'''

[image]

후보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
조지 B. 맥클레런
전 육군 총지휘관
당적
'''국민연합당'''
민주당
출신 주
'''일리노이'''
뉴저지
러닝메이트
'''앤드루 존슨
테네시 군정 주지사'''
조지 H. 펜들턴
하원의원
선거인단
'''212'''
21
득표수
'''2,218,388'''
1,812,807
득표율
'''55.0%'''
45.0%
1864년 대선은 남북전쟁 중이라 링컨이 민주당과 연합해서 선거를 치르자고 제안하여 북부민주당(남부민주당은 아예 다른 나라로 떨어져나갔고...)이 이에 동의, 앤드루 존슨을 부통령 후보로 보낸다. 이 때문에 단독 후보로 링컨이 출마하여 조지 워싱턴 때처럼 '''무투표 당선'''되나 했는데... 조지 맥클레런 장군이 후보 등록 마감 30분을 앞두고 후보 등록하여 단독 후보로 출마하려던 링컨을 엿먹였다. 남북전쟁 중이라 남부 11개 주에서는 투표가 실시되지 않았다. 또 이 선거 직후 링컨이 암살되면서 대통령직은 민주당 출신인 앤드루 존슨이 맡게 된다.
'''1868년'''

[image]

후보
'''율리시스 S. 그랜트
육군 총지휘관'''
호라시오 시모어
전 주지사
당적
'''공화당'''
민주당
출신 주
'''일리노이'''
뉴욕
러닝메이트
'''스카일러 콜팩스
하원의장'''
프랜시스 프레스턴 블레어 Jr.
전 하원의원
선거인단
'''214'''
80
득표수
'''3,013,650'''
2,708,744
득표율
'''52.7%'''
47.3%
남북전쟁이 종식되었지만 링컨은 암살당했고 존슨은 상원 탄핵 직전까지 몰리는 바람에 인재가 없던 공화당은 남북전쟁 영웅 그랜트를 후보로 추대했고, 인기와 리더십 선전에 힘입어 무난히 대통령이 된다. 그래도 민주당이 꽤 높은 표를 얻었는데, 이는 상대 후보 시모어가 당시 민주당의 요구로 마지못해 후보직을 받았지만 막상 유세전에서는 열심히 하고 다녀 어느정도 지지율을 끌어모은 것도있다.
'''1872년'''

[image]

후보
'''율리시스 S. 그랜트
대통령'''
호레이스 그릴리
<뉴욕 트리뷴> 편집장
당적
'''공화당'''
자유공화당[23]
출신 주
'''일리노이'''
뉴욕
러닝메이트
'''헨리 윌슨
상원의원'''
벤저민 G. 브라운
미주리 주지사
선거인단
'''286'''
66[24]
득표수
'''3,598,235'''
2,834,761
득표율
'''55.6%'''
43.8%
1872년 대선은 북부민주당과 남부민주당 통합 직후(1870년 통합)라 민주당 당내 내분이 심각했고, 공화당은 공화당대로 그릴리가 그랜트의 부패를 비판하며 공화당에서 탈당, 자유공화당을 창당하고 대선에 뛰어들었다. 그래서 민주당은 자유공화당 후보이자 '''노예제 철폐론자''' 그릴리를 지지하여 대선 후보를 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릴리가 투표 직전 갑자기 사망해버리면서 그릴리한테 가야할 표가 일부 붕 떠버렸다. 그래서 그랜트가 부패 대통령이라는 오명에도 지난번 선거보다 더욱 높은 지지율로 재선에 성공한다.
'''1876년'''

[image]
[image]
후보
'''러더퍼드 B. 헤이스
주지사'''
새뮤얼 J. 틸던
주지사
당적
'''공화당'''
민주당
출신 주
'''오하이오'''
뉴욕
러닝메이트
'''윌리엄 A. 휠러
하원의원'''
토머스 A. 헨드릭스
인디애나 주지사
선거인단
'''185'''[25]
184
득표수
4,036,572
'''4,284,020'''
득표율
47.9%
'''50.9%'''
1876년 선거는 미국 대통령 선거 역사상 가장 논란이 되는 선거였다. 그랜트 8년 집권 동안 넘쳐나는 부패 스캔들로 인해 공화당의 지지도가 확 떨어졌고, 헤이스 또한 청렴하다 외에는 도저히 선전할 거리가 없었다. 그래서 전체 득표율에선 틸던이 한참 앞섰고 선거인단도 184명을 확보해 1명만 더 얻었으면 되었는데, 선거인단 득표에서 185:184 '''단 1표 차이'''로 당선인이 갈렸다. 승리자 결정이 안된 3개 주 19명의 선거인단이 헤이스에게 몰표된 이유였는데, 자세한 것은 러더퍼드 B. 헤이스 문서 참조.
'''1880년'''

[image]

후보
'''제임스 A. 가필드
하원의원'''
윈필드 스콧 핸콕
육군 소장
당적
'''공화당'''
민주당
출신 주
'''오하이오'''
펜실베이니아
러닝메이트
'''체스터 A. 아서
뉴욕주 공화당 대표'''
윌리엄 H. 잉글리시
전 하원의원
선거인단
'''214'''
155
득표수
'''4,446,158'''
4,444,260
득표율
'''48.3%'''
48.2%
미국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선거 중 하나. 득표차는 '''1,898.''' 다만 선거인단 수는 꽤 차이났는데, 이는 승자독식제와 공화당이 쥐고 있던 북부의 선거인단이 많았기 때문. 선거전은 꽤 복잡했는데, 대통령 후보 가필드는 당시 뉴욕을 쥐고 있었던 부패 거물 콩글링과 협상을 했는데 콩글링 파였던 아서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 콩글링 파 몇몇을 장관에 앉히는 것을 약속하고 뉴욕 주는 공화당 지지를 하는 것으로 협상했다. 만약 뉴욕 주(당시 선거인단 35명)가 민주당 승리로 끝났다면 190 vs 179로 민주당이 승리가 될 뻔했다. 하지만 가필드는 부패를 걱정해 아서를 제외한 콩글링 파를 배제하기 시작했고, 이에 분노한 콩글링 파 중 하나인 찰스 기토의 총에 맞아 숨지게 된다.
'''1884년'''

[image]

후보
'''그로버 클리블랜드
주지사'''
제임스 G. 블레인
전 국무장관
당적
'''민주당'''
공화당
출신 주
'''뉴욕'''
메인
러닝메이트
'''토머스 A. 헨드릭스
전 인디애나 주지사'''
존 A. 로건
상원의원
선거인단
'''219'''
182
득표수
'''4,874,621'''
4,848,936
득표율
'''48.5%'''
48.2%
뉴욕 주지사 때의 반부패 정치로 인기를 얻은 클리블랜드는 대통령 후보로 직행을 했고, 몇만 표 차이로 블레인을 겨우 이기면서 24년 만의 공화당 독식 체제를 종결시킨다. 이 당시 분위기는 남북전쟁 참전이 정치인의 필수 이력이었지만, 클리블랜드는 돈을 내 대리인을 보내[26] 논란이 됐지만, 나중에 블레인도 똑같이 대리인을 보낸 것이 확인돼서(...) 별 타격을 입지 않았다.
'''1888년'''

[image]
[image]
후보
'''벤저민 해리슨
전 상원의원'''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
당적
'''공화당'''
민주당
출신 주
'''인디애나'''
뉴욕
러닝메이트
'''리바이 P. 모턴
전 주 프랑스 대사'''
알렌 G. 서먼
전 상원의원
선거인단
'''233'''
168
득표수
5,443,892
'''5,534,488'''
득표율
47.8%
'''48.6%'''
노동 운동과 관련해 노동자들에게 미움받던 클리블랜드였지만 그래도 무난하게 정무를 봤기 때문에 국민들은 클리블랜드를 선택했지만, 선거인단 수에서 꽤 밀려 손자 해리슨에게 백악관을 내준다. 진 이유는 자신의 텃밭이던 뉴욕 주 때문이었는데, 공화당의 근거없는 친영파 선전으로 아일랜드 이주민들이 대거 클리블랜드에게 등을 돌렸기 때문.
'''1892년'''

[image]
[image]

후보
'''그로버 클리블랜드
전 대통령'''
벤저민 해리슨
대통령
제임스 B. 위버
전 하원의원
당적
'''민주당'''
공화당
민중당
출신 주
'''뉴욕'''
인디애나
아이오와
러닝메이트
'''애들레이 E. 스티븐슨 1세
전 하원의원'''
화이트로 리드
전 주 프랑스 대사
제임스 G. 필드
전 버지니아주 법무장관
선거인단
'''277'''
145
22
득표수
'''5,556,918'''
5,176,108
1,041,028
득표율
'''46.0%'''
43.0%
8.5%
매킨리 법 때문에 물가 조절 실패로 인해 지지율이 떨어졌고, 해리슨 또한 이미지가 그렇게 좋지 않았기 때문에 전망이 좋지 않던 판에 또다시 시작된 흑색선전에 이번에는 유권자들이 반응하지 않으면서 꽤 높은 격차로 민주당이 다시 가져 온다. 임기를 4년이나 나눠서 재임한 대통령은 클리블랜드가 유일.
'''1896년'''

[image]
[image]
후보
'''윌리엄 매킨리
전 주지사'''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전 하원의원
당적
'''공화당'''
민주당
출신 주
'''오하이오'''
네브래스카
러닝메이트
'''개릿 A. 호바트
전 뉴저지 주상원의장'''
아서 시월
메인 센트럴 철도공사 이사
선거인단
'''271'''
176
득표수
'''7,104,779'''
6,502,925
득표율
'''51.0%'''
46.7%
노동 쟁의가 극렬했던 19세기 말 클리블랜드의 실패로 윌리엄 J. 브라이언이 대안으로 떠올랐는데, 브라이언은 대놓고 연설에서 친노동자 정책과 기업 증세를 공약했고, 이에 반발한 대기업들은 공화당에 천문학적인 선거비용을 대면서 매킨리의 유세에 크게 도움이 되면서 대통령에 당선이 된다.
'''1900년'''

[image]
[image]
후보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전 하원의원
당적
'''공화당'''
민주당
출신 주
'''오하이오'''
네브래스카
러닝메이트
'''시어도어 루스벨트
뉴욕 주지사'''
애들레이 E. 스티븐슨 1세
전 부통령
선거인단
'''292'''
155
득표수
'''7,228,864'''
6,370,932
득표율
'''51.6%'''
45.5%
미서전쟁의 승리와 당시 서양의 대세였던 제국주의와 자유무역에 동참하면서 많은 미국인들의 동의를 받았고, 4년 전 선거보다 격차를 벌려 재선에 성공한다. 하지만 매킨리는 재취임 얼마 뒤 제국주의에 반대했던 무정부주의자 레온 촐고츠의 총에 맞아 암살당하고, 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승계를 한다.
'''1904년'''

[image]

후보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앨턴 B. 파커
전 뉴욕주 상소법원장
당적
'''공화당'''
민주당
출신 주
'''뉴욕'''
뉴욕
러닝메이트
'''찰스 W. 페어뱅크스
상원의원'''
헨리 G. 데이비스
전 상원의원
선거인단
'''336'''
140
득표수
'''7,630,457'''
5,083,880
득표율
'''56.4%'''
37.6%
20세기 초 격동의 시대에서 셔먼 독점금지법의 활용, 제국주의 합류 등 여러 업적[27]을 해낸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남부 골수 민주당 지지세력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고른 지지를 받았고, 최초로 300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약칭 TR은 아직도 미국 대통령 존경 순위 중에서 언제나 최상위권에 있다.
'''1908년'''

[image]
[image]
후보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전 전쟁장관'''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전 하원의원
당적
'''공화당'''
민주당
출신 주
'''오하이오'''
네브래스카
러닝메이트
'''제임스 S. 셔먼
하원의원'''
존 W. 컨
전 상원의원
선거인단
'''321'''
162
득표수
'''7,678,395'''
6,408,984
득표율
'''51.6%'''
43.0%
7년의 임기를 마치고도 TR의 인기는 여전히 높아서, 한때 3선 출마도 거론됐지만 워싱턴부터 이어진 2선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 후임 태프트를 지명했고, 태프트는 TR의 후광 덕분에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민주당의 브라이언이 다시 한 번 후보가 되어 대권에 도전하지만 그가 16년 전부터 주장한 진보적 과제는 이미 TR과 국무위원 시절 태프트가 어느정도 이뤘기 때문에 인기가 식은 것도 있었다.
'''1912년'''

[image]
[image]
후보
'''우드로 윌슨
주지사'''
시어도어 루스벨트
전 대통령
당적
'''민주당'''
진보당
출신 주
'''뉴저지'''
뉴욕
러닝메이트
'''토머스 R. 마셜
인디애나 주지사'''
하이럼 존슨
상원의원
선거인단
'''435'''
88
득표수
'''6,293,454'''
4,119,207
득표율
'''42.5%'''
27.8%

[image]
[image]
후보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대통령
유진 V. 데브스
전 인디애나 주상원의원
당적
공화당
사회당
출신 주
오하이오
인디애나
러닝메이트
니콜라스 머리 버틀러
컬럼비아 대학교 총장
에밀 사이델
밀워키 시장
선거인단
8
0
득표수
3,483,922
901,551
득표율
23.5%
6.1%
태프트가 TR의 기대와는 다르게 TR의 조언을 무시하고 측근마저 해고해 버린데다 독단적으로 몇몇 상원의원하고만 정무를 보자 분노한 루스벨트는 3선 선언을 했고, 이때는 2선 전통을 지키라는 내부 불만과 태프트에 대한 동정 덕분에 공화당 경선에서 태프트가 후보가 되자, 루스벨트는 자신의 지지자들과 함께 공화당을 탈당해 진보당을 창당한다. 공화당이 쪼개져 민주당의 우드로 윌슨이 손쉽게 대통령이 되었지만, 이때까지는 루스벨트의 영향력이 강해서 공화당을 이기고 제3당이 2위를 한 유일한 선거가 되었다.[28]
'''1916년'''

[image]

후보
'''우드로 윌슨
대통령'''
찰스 에반스 휴즈
전 대법관
당적
'''민주당'''
공화당
출신 주
'''뉴저지'''
뉴욕
러닝메이트
'''토머스 R. 마셜
부통령'''
찰스 W. 페어뱅크스
전 부통령
선거인단
'''277'''
254
득표수
'''9,126,868'''
8,548,728
득표율
'''49.2%'''
46.1%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이 시기 미국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했는데 이 시기 윌슨은 루시타니아 호 사건 등 추축국 때문에 미국 상선과 민간인 피해가 몇 번 일어났는데도 전쟁을 하지 않았고 공화당에서는 이걸 파고들었지만, 민주당은 전쟁을 하지 않아 미국은 안전하다는 슬로건을 내세워 어렵사리 이긴다.[29] 하지만 대선 직후, 치머만 사건이 터지고 이걸 계기로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다.
'''1920년'''

[image]

후보
'''워런 G. 하딩
상원의원'''
제임스 M. 콕스
주지사
당적
'''공화당'''
민주당
출신 주
'''오하이오'''
오하이오
러닝메이트
'''캘빈 쿨리지
매사추세츠 주지사'''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전 해군부 차관
선거인단
'''404'''
127
득표수
'''16,144,093'''
9,139,661
득표율
'''60.3%'''
34.1%
1차 세계대전 이후 실업 문제, 국제연맹 가입 논쟁 등 수많은 문젯거리 때문에 공화당의 우세가 눈에 보여서, 공화당 내부에서는 서로 대통령 후보를 하겠다고 나섰지만, 9번이나 경선을 치렀는데도 후보를 뽑지 못했고, 거물 정치인들은 타협으로 인지도 1도 없는 상원의원 워런 G. 하딩을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 하지만 무명임에도 선거에서 아주 크게 이겼는데, 유권자들이 하딩이 잘 언급이 되지 않아서 부패 정치인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이 선거를 기점으로 미국 전역에 여성 참정권이 보장되면서 그 당시 기준으로 잘생겼던 하딩에게 표가 많이 갔다고 한다.[30]
'''1924년'''

[image]


후보
'''캘빈 쿨리지
대통령'''
존 W. 데이비스
전 주 영국 대사
로버트 M. 라폴레트
상원의원
당적
'''공화당'''
민주당
진보당
출신 주
'''매사추세츠'''
웨스트버지니아
위스콘신
러닝메이트
'''찰스 G. 도스
전 예산국장'''
찰스 W. 브라이언
네브래스카 주지사
버튼 K. 휠러
상원의원
선거인단
'''382'''
136
13
득표수
'''15,723,789'''
8,386,242
4,831,706
득표율
'''54.0%'''
28.8%
16.6%
하딩이 1923년 8월 건강 악화로 급사하자, 부통령이었던 캘빈 쿨리지가 평소 짧은 사이다 발언으로 유명했던 쿨리지는 2년도 안되는 짧은 기간 하딩이 방관한 부패 정치인 해리 도허티와 알버트 폴 등을 쫓아내면서 큰 인기를 얻었고, 1년 3개월이라는 짧은 기간만 있었기 때문에 기회를 더 주자는 여론 덕분에 넉넉한 차이로 연임에 성공한다.
'''1928년'''

[image]

후보
'''허버트 후버
전 상무장관'''
앨 스미스
주지사
당적
'''공화당'''
민주당
출신 주
'''캘리포니아'''
뉴욕
러닝메이트
'''찰스 커티스
상원의원'''
조셉 테일러 로빈슨
상원의원
선거인단
'''444'''
87
득표수
'''21,427,123'''
15,015,464
득표율
'''58.2%'''
40.8%
이 선거 뒤 1년도 안 돼서 대공황이 터지지만, 이 당시는 아직은 경기가 상승세라서 공화당의 인기가 여전히 강했고, 후버댐의 창시자이자 경제통이라 불렸던 허버트 후버가 "모든 차고에 차를! 모든 냄비에 치킨을!"이라는 슬로건으로 압도적으로 당선한다. 반대로 앨 스미스는 가톨릭 교도라는 치명적 약점을 가지고 있어 압도적으로 패배했지만, 대통령 후보 중 최초의 가톨릭 교도로 이름을 올렸고, 이는 28년 뒤 케네디가 당선됨으로써 한을 푼다.[31]
'''1932년'''

[image]
[image]
후보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주지사'''
허버트 후버
대통령
당적
'''민주당'''
공화당
출신 주
'''뉴욕'''
캘리포니아
러닝메이트
'''존 낸스 가너
하원의장'''
찰스 커티스
부통령
선거인단
'''472'''
59
득표수
'''22,821,277'''
15,761,254
득표율
'''57.4%'''
39.7%
후버의 취임 9개월 만에 대공황이 터지고, 비록 뒤늦게 막으려고 노력은 했지만 대공황의 원흉으로 찍힌 후버와 공화당은 당연히 참패할 거란 예측이 나왔고,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뉴딜 정책'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공화당을 손쉽게 발라버리고 당선, 12년 만에 백악관을 되찾는 데 성공한다.
'''1936년'''

[image]
[image]
후보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
앨프 랜든
주지사
당적
'''민주당'''
공화당
출신 주
'''뉴욕'''
캔자스
러닝메이트
'''존 낸스 가너
부통령'''
프랭크 녹스
<시카고 데일리 뉴스> 발행인
선거인단
'''523'''
8
득표수
'''27,747,636'''
16,679,543
득표율
'''60.8%'''
36.5%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은 1937년 초까지는 꽤 효과를 보아서 실업률도 어느정도 내려가고 안정세를 찾자, 민주당과 루스벨트의 지지도는 상승했고 최다 선거인단 표차로 대승한다. 상대후보 랜든은 버몬트 주(3명)와 메인 주(5명)만 이겼다.[32]
'''1940년'''

[image]
[image]
후보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
웬델 윌키
C&S 전력회사 회장
당적
'''민주당'''
공화당
출신 주
'''뉴욕'''
뉴욕
러닝메이트
'''헨리 A. 월리스
전 농업부 장관'''
찰스 맥내리
상원의원
선거인단
'''449'''
82
득표수
'''27,313,945'''
22,347,744
득표율
'''54.7%'''
44.8%
루스벨트의 3선 선언에 공화당은 강력히 비판했고 민주당 내부에서도 머뭇거렸지만, 당시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진데다 1차 뉴딜의 부작용으로 또다시 실업률이 상승하자 뉴딜 정책 2기를 외치며 급박한 정세에 지도자를 바꿀 수는 없다고 주장했고, 1차대전 때의 후폭풍 재발 방지와 뉴딜 정책 유지라는 대승적 차원에서 유권자들이 워싱턴 이래의 2선 전통을 깨고 루스벨트를 지지, 최초의 3선 대통령이 되었다.
'''1944년'''

[image]
[image]
후보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
토마스 E. 듀이
주지사
당적
'''민주당'''
공화당
출신 주
'''뉴욕'''
뉴욕
러닝메이트
'''해리 S. 트루먼
상원의원'''
존 브리커
오하이오 주지사
선거인단
'''432'''
99
득표수
'''25,612,916'''(54.7%)
22,017,929(45.9%)
득표율
'''54.7%'''
45.9%
2차대전 참전으로 인해 전시 체제로 돌입한 미국, 루스벨트는 전쟁 중에 지도자를 바꿀 수 없다고 4선에 도전했고, 공화당은 영구집권하냐고 맹렬히 비판한 토마스 듀이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 당시는 상황이 상황인지라 변화보다는 전시 체제 유지를 위해 루스벨트를 선택했지만[33], 몸도 안 좋았던 데다 격무에 시달렸고 4선 취임 두 달 뒤 사망한다. 종전 후 루스벨트의 4선은 온갖 비판을 받고 결국 헌법이 개정되어 대통령을 8년만 하도록 바뀌었다.
'''1948년'''

[image]
[image]
[image]
후보
'''해리 S. 트루먼
대통령'''
토마스 E. 듀이
주지사
스트롬 서먼드
주지사
당적
'''민주당'''
공화당
주권 민주당
출신 주
'''미주리'''
뉴욕
사우스캐롤라이나
러닝메이트
'''앨번 W. 바클리
상원의원'''
얼 워런
캘리포니아 주지사
필딩 L. 라이트
미시시피 주지사
선거인단
'''303'''
189
39
득표수
'''24,105,695'''
21,969,170
1,169,021
득표율
'''49.8%'''
45.3%
2.5%
2차대전 이후에도 1차대전과 똑같이 전후 문제가 여럿 터졌다. 실업률, 국제연합, 그리고 냉전이라는 새로운 체제 하에서 트루먼의 정책은 보기에는 지지부진했고, 이때에는 민주당 장기집권으로 말이 많았을 때였다.[34] 언론들도 트루먼의 재선보다는 듀이의 승을 예견하고 있었고, 트루먼 스스로도 질 것으로 예상하고 개표 결과도 안 보고 일찍 잠들었는데, 재선 성공소식을 다음날 들었다고 한다. [35]
'''1952년'''

[image]
[image]
후보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전 육군참모총장'''
애들레이 E. 스티븐슨 2세
주지사
당적
'''공화당'''
민주당
출신 주
'''캔자스'''
일리노이
러닝메이트
'''리처드 닉슨
상원의원'''
존 스파크맨
상원의원
선거인단
'''442'''
89
득표수
'''34,075,529'''
27,314,992
득표율
'''55.2%'''
44.3%
한국전쟁이 장기전으로 접어들자 미국에서는 반전 여론이 강했고, 공화당 후보이자 전쟁영웅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한국 방문과 종전을 공약으로 내세우며 압도적인 표차로 이기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민주당 20년 장기집권으로 인한 두 번의 전쟁 참전이 유권자들의 분노로 표출된 것도 컸다.
'''1956년'''

[image]
[image]
후보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
애들레이 E. 스티븐슨 2세
전 주지사
당적
'''공화당'''
민주당
출신 주
'''캔자스'''
일리노이
러닝메이트
'''리처드 닉슨
부통령'''
에스티스 케퍼버
상원의원
선거인단
'''457'''
73
득표수
'''35,579,180'''
26,028,028
득표율
'''57.4%'''
42.0%
이 시기 미국 경제가 꽤 성장하고, 냉전 체제 속에서도 안정과 번영을 이룬 아이젠하워의 지지도는 더욱 상승했고, 카리스마까지 갖춘 그는 당연히 재선출마했고 4년 전보다 더 크게 승리를 거둔다. 그래서 공화당 지지자들은 20세기 대통령 중 레이건과 아이젠하워를 가장 존경한다고 한다.
'''1960년'''

[image]
[image]
후보
'''존 F. 케네디
상원의원'''
리처드 닉슨
부통령
당적
'''민주당'''
공화당
출신 주
'''매사추세츠'''
캘리포니아
러닝메이트
'''린든 B. 존슨
상원의원'''
헨리 캐벗 로지 Jr.
전 유엔대사
선거인단
'''303'''
219
득표수
'''34,220,984'''
34,108,157
득표율
'''49.7%'''
49.6%
아이젠하워의 후광을 받고 경험을 쌓은 부통령 리처드 닉슨은 대통령 후보가 되었고, 민주당에서는 '뉴 프론티어'를 내세운 젊은 후보 존 F. 케네디를 후보로 지명한다. 선거전은 엄청 치열했지만, 케네디의 젊고 활기찬 이미지가 TV 토론회에서 결정적으로 작용하면서 닉슨을 이기는데 성공한다.[36], 이 선거부터 TV 토론회가 시작됐는데, 케네디가 이를 잘 활용해 대통령이 되었다는 평이 대다수.
'''1964년'''

[image]
[image]
후보
'''린든 B. 존슨
대통령'''
배리 골드워터
상원의원
당적
'''민주당'''
공화당
출신 주
'''텍사스'''
애리조나
러닝메이트
'''휴버트 험프리
상원의원'''
윌리엄 밀러
하원의원
선거인단
'''486'''
52
득표수
'''43,127,041'''
27,175,754
득표율
'''61.1%'''
38.5%
케네디의 암살 후 대통령을 승계받은 존슨은 위대한 사회를 내세우며 실질적 평등을 추구했고 이 시기 흑인들의 인권이 크게 개선되어, 백인우월주의자들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역대최다 득표율을 차지한다. 재밌는 것은 50년대까지는 텃밭이었던 동남부 주들이 이 선거를 기점으로 공화당 텃밭이 된 것. 반대로 민주당은 남북전쟁 이전부터 공화당 텃밭이었던 캘리포니와 북동부 주들을 얻는 데 성공, 양당의 텃밭의 위치가 서로 바뀌어버린다.
'''1968년'''

[image]
[image]
[image]
후보
'''리처드 닉슨
전 부통령'''
휴버트 험프리
부통령
조지 월리스
전 주지사
당적
'''공화당'''
민주당
미국독립당
출신 주
'''캘리포니아'''
미네소타
앨라배마
러닝메이트
'''스피로 애그뉴
메릴랜드 주지사'''
에드먼드 머스키
상원의원
커티스 르메이
전 공군참모총장
선거인단
'''301'''
191
46
득표수
'''31,710,470'''
30,898,055
9,906,473
득표율
'''43.7%'''
42.6%
13.7%
베트남 전쟁이 장기화되고 미군의 피해가 속출하자, 반전 여론이 한국전쟁보다 더욱 심해지고 히피 문화까지 창궐한 미국 사회는 상당히 혼란스러었다. 이를 막지 못한 존슨의 책임론이 두드러졌고, 닉슨은 이를 비판하며 대권 재도전을 했고, 부통령 험프리가 민주당 후보로 나섰고 치열한 대결을 펼쳤지만 조지 월리스가 단독출마해 험프리에게 찬물을 끼얹었다. 이때는 이미 남부가 보수화되어 공화당 쪽에 기울어진 것도 있지만, 당시 스윙보터였던 버지니아, 노스캐롤라이나, 플로리다 주를 민주당과 표를 갈라먹기해 닉슨에게 졌다.
'''1972년'''

[image]
[image]
후보
'''리처드 닉슨
대통령'''
조지 맥거번
상원의원
당적
'''공화당'''
민주당
출신 주
'''캘리포니아'''
사우스다코타
러닝메이트
'''스피로 애그뉴
부통령'''
사전트 슈라이버
전 주 프랑스 대사
선거인단
'''520'''
17
득표수
'''47,168,710'''
29,173,222
득표율
'''60.7%'''
37.5%
베트남 전 종전, 소련과의 우주 경쟁 승리, 데당트로 인한 냉전 분위기 완화 등 여러 치적을 세운 닉슨은 역대 선거 최다득표차를 기록한다. 민주당은 겨우 매사추세츠 주와 워싱턴 D.C만 승리했다. 하지만 이 선거 이후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지고, 닉슨은 유일한 중도사임한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남기고 말았다.
'''1976년'''

[image]
[image]
후보
'''지미 카터
전 주지사'''
제럴드 포드
대통령
당적
'''민주당'''
공화당
출신 주
'''조지아'''
미시간
러닝메이트
'''월터 먼데일
상원의원'''
밥 돌
상원의원
선거인단
'''297'''
240
득표수
'''40,831,881'''
39,148,634
득표율
'''50.1%'''
48.0%
이때는 워터게이트 사건의 여파로 인해 닉슨의 이미지가 아직 나빴던 것도 있고, 닉슨 사임 후 1달 만에 사면한 제럴드 포드에게 비판이 가해졌고, 게다가 1차 오일 쇼크로 인해 민주당 쪽으로 여론이 기울어졌고, 땅콩 농장주 출신이라는 이력을 가진 지미 카터가 동부 상당수와 마지막으로 남부 주를 석권하는데 성공해 당시 무뚝뚝한 이미지를 가진 포드를 어렵사리 이긴다.
'''1980년'''

[image]
[image]
후보
'''로널드 레이건
전 주지사'''
지미 카터
대통령
당적
'''공화당'''
민주당
출신 주
'''캘리포니아'''
조지아
러닝메이트
'''조지 H. W. 부시
전 CIA 국장'''
월터 먼데일
부통령
선거인단
'''489'''
49
득표수
'''43,903,230'''
35,480,115
득표율
'''50.7%'''
41.0%
2차 오일 쇼크, 이란 콘트라 사건 등 악재만 겹친 카터 정부는 무능한 정부라고 낙인찍히고, 당시 로널드 레이건이 등장해 강대한 미국 세우기라는 슬로건으로 카터를 압도적으로 이긴다. 그리고 이 선거는 여성 유권자의 투표율이 남성 유권자를 따라 잡은 최초의 선거이기도 하다.
'''1984년'''

[image]
[image]
후보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월터 먼데일
전 부통령
당적
'''공화당'''
민주당
출신 주
'''캘리포니아'''
미네소타
러닝메이트
'''조지 H. W. 부시
부통령'''
제럴딘 페라로
하원의원
선거인단
'''525'''
13
득표수
'''54,455,472'''
37,577,352
득표율
'''58.8%'''
40.6%
레이건의 외교 정책은 소련을 확실히 압도하는데 성공하고, 2차 오일 쇼크 여파를 확실히 해결하면서 80년 경제 호황을 누린 미국은 레이건을 압도적으로 지지했고, 역대 최고 선거인단을 얻는데 성공한다. 먼데일은 겨우 자기 고향 미네소타와 워싱턴 D.C만 승리를 한다. 그리고 먼데일은 최초 여성 부통령 후보 제럴린 페라로와 러닝메이트를 맺었다.[37]
'''1988년'''

[image]
[image]
후보
'''조지 H. W. 부시
부통령'''
마이클 두카키스
주지사
당적
'''공화당'''
민주당
출신 주
'''텍사스'''
매사추세츠
러닝메이트
'''댄 퀘일
상원의원'''
로이드 벤슨
상원의원
선거인단
'''426'''
111
득표수
'''48,886,597'''
41,809,074
득표율
'''53.4%'''
45.6%
레이건의 인기는 높았지만 말년의 이미지가 안 좋았고 채무가 엄청나게 쌓여 후임 후보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가 떠맡을게 될 숙제가 많았다. 그리고 여론도 마이클 듀카키스로 기울고 있었지만 부시 캠프의 전략가 리 애드워터가 듀카키스를 선동과 조작을 일삼으며 공격했고, 듀카키스는 이 네거티브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는데 실패해 부정적 이미지만 쌓인 채 패하고 말았다.
'''1992년'''

[image]
[image]
[image]
후보
'''빌 클린턴
주지사'''
조지 H. W. 부시
대통령
로스 페로
페로 시스템즈 CEO
당적
'''민주당'''
공화당
무소속
출신 주
'''아칸소'''
텍사스
텍사스
러닝메이트
'''앨 고어
상원의원'''
댄 퀘일
부통령
제임스 스톡데일
전 해군 중장
선거인단
'''370'''
168
0
득표수
'''44,908,254'''
39,102,343
19,743,821
득표율
'''43.3%'''
37.7%
18.9%
냉전 승리, 걸프전 승리 등 부시의 지지율은 89~91%를 상회하고 있었지만, 90년대 초 일시적인 경제 침체가 발목을 잡았고 민주당 후보 빌 클린턴이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라고 집중공격했지만 여론은 아직은 부시가 이길 것이라고 봤지만, 갑자기 로스 페로라는 사업가가 대선 출마하면서 꼬여버린다. 로스 페로는 명목상 정치관은 중립이였지만 주요 공약 내용이 공화당과 비슷해 보수표 갈라먹기가 발생했고, 무려 19%나 잠식을 해버렸다. 그래서 미국 역사상 최초의 3자 TV 토론이 있었고, 지금까지도 마지막 3자 TV 토론이다. 공화당의 텃밭이라던 중부와 남부 절반이 클린턴에게 뺏기면서 백악관을 내주게 되었다.
'''1996년'''

[image]
[image]
후보
'''빌 클린턴
대통령'''
밥 돌
상원의원
당적
'''민주당'''
공화당
출신 주
'''아칸소'''
캔자스
러닝메이트
'''앨 고어
부통령'''
잭 켐프
전 주택도시개발부 장관
선거인단
'''379'''
159
득표수
'''47,401,185'''
39,197,469
득표율
'''49.2%'''
40.7%
90년 IT 산업으로 경제 호황을 누린 미국은 투표율이 50%도 안되는 상황 속에서도 빌 클린턴이 무난히 재선에 성공한다. 이 시기부터 서부-동부 민주당 텃밭과 중서부-남부의 공화당 텃밭이 공고히 유지하게 되고, 러스트 벨트와 중부, 플로리다 지역이 경합주로 바뀌면서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2000년'''

[image]
[image]
후보
'''조지 W. 부시
주지사'''
앨 고어
부통령
당적
'''공화당'''
민주당
출신 주
'''텍사스'''
테네시
러닝메이트
'''딕 체니
전 국방장관'''
조 리버만
상원의원
선거인단
'''271'''
266
득표수
50,456,002
'''50,999,897'''
득표율
47.9%
'''48.4%'''
112년 만에 전체 득표는 이겼지만 선거인단, 그것도 '''5명'''차로 진 경우가 발생했다. 앨 고어와 부시 두 후보 모두 텃밭과 경합주를 반반씩 갈라 먹었지만, 마지막 경합주 플로리다에서 재검표 진행이라는 문제가 발생했다. 인구 수 4위 주 플로리다 전체 재검표에 시간이 걸리고, 일일이 따지려고 들면 클린턴 퇴임 이후에도 해결될 기미가 안보이자, 연방대법원은 재검표 중단을 선언하고 최초우세였던 조지 워커 부시의 손을 들어주었다. 당연히 이 선거 이후 선거인단, 승자독식주의의 현 선거제도를 재검토를 하자는 여론이 생겼다.
'''2004년'''

[image]
[image]
후보
'''조지 W. 부시
대통령'''
존 케리
상원의원
당적
'''공화당'''
민주당
출신 주
'''텍사스'''
매사추세츠
러닝메이트
'''딕 체니
부통령'''
존 에드워즈
상원의원
선거인단
'''286'''
251
득표수
'''62,040,610'''
59,028,444
득표율
'''50.7%'''
48.3%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 등 지금 와서는 욕을 엄청 먹지만 그 당시에는 승승장구했고 진상이 드러나지 않아 꽤 평판이 좋았고 9.11 테러 당시의 공포가 아직 있었던 국민들은 안전한 미국을 선호했다. 그리고 당시 화젯거리였던 동성 결혼은 부정적 여론이 많았는데, 존 케리가 지지를 하자 경합주 상당수가 동성 결혼에 반대했던 부시에게 몰렸던 것이 컸다. 부시는 재선에 성공해 아버지 부시가 못한 한을 이룬다.
'''2008년'''

[image]
[image]
후보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
존 매케인
상원의원
당적
'''민주당'''
공화당
출신 주
'''일리노이'''
애리조나
러닝메이트
'''조 바이든
상원의원'''
사라 페일린
알래스카 주지사
선거인단
'''365'''
173
득표수
'''69,498,516'''
59,948,323
득표율
'''52.9%'''
45.7%
이라크 전쟁의 진상, 그리고 2008년 금융 위기 등으로 역대 최악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받은 부시와 공화당의 패배가 눈에 보였고, 변화를 추구하며 "Yes, We can!" 슬로건을 외친 버락 오바마는 경합주 대부분을 싹쓸이하며 존 매케인을 여유롭게 이긴다. 매케인은 여성표 흡수를 위해 사라 페일린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지만, 오히려 악수가 되어 되려 텃밭 몇 곳을 민주당에 바치는 실책만 저질렀다. 그리고 오바마는 미국 최초로 유색인종 대통령이 되었다.
'''2012년'''

[image]
[image]
후보
'''버락 오바마
대통령'''
밋 롬니
전 주지사
당적
'''민주당'''
공화당
출신 주
'''일리노이'''
매사추세츠
러닝메이트
'''조 바이든
부통령'''
폴 라이언
하원의원
선거인단
'''332'''
206
득표수
'''65,915,795'''
60,933,504
득표율
'''51.1%'''
47.2%
오바마케어 논쟁, 월가 금융위기 대처 미흡 등을 놓고 다시 공화당의 지지율이 올랐으며, 여기서 확실한 신자유주의 공약을 내세운 밋 롬니가 후보가 되면서 오바마와 붙는다. 9월까지는 호각세였지만, 막판에 터진 '''47% 발언'''[38] 때문에 롬니의 지지율이 확 내려간다. 하지만 TV 토론회에서 오바마 정부의 실책들을 맹렬히 비판하면서 어느정도 회복했지만, 3차 토론회에서 말한 '''총검과 군마 사건'''[39]으로 다시 열세로 회귀했다(...). 그리고 선거날 경합주 2/3이 오바마에게 넘어가서 오바마는 재선에 성공한다.
'''2016년'''

[image]
[image]
후보
'''도널드 트럼프
트럼프 기업 회장'''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
당적
'''공화당'''
민주당
출신 주
'''뉴욕'''
뉴욕
러닝메이트
'''마이크 펜스
인디애나 주지사'''
팀 케인
상원의원
선거인단
'''304'''
227
득표수
62,984,828
'''65,853,514'''
득표율
46.1%
'''48.2%'''
최초의 여성 대통령 후보 힐러리 클린턴과 예능인이라고 불렸던 사업가 도널드 트럼프의 대결이었다. 트럼프는 유명한 '''"Make America Great Again!"'''이라는 과거 레이건 시절의 슬로건을 내세웠고, 이를 통해 보수층을 단결시키는데 성공하면서 자신이 원하던 대통령이 된다. 민주당의 패인은 힐러리의 자충수가 크게 작용했는데, 공약이나 현안보다는 '여성'이라는 프레임만 강조했고[40], 러스트 벨트와 펜실베이니아 등 경합주를 제대로 공략하지 않고 자만하는 모습을 보여 실망한 유권자들이 트럼프에게 투표했다. 전체 득표는 힐러리가 더 높았는데, 인구가 많았던 서부와 동부에서는 압도적 지지를 받은 반면, 경합주에서는 죄다 아쉽게 졌기 때문. 이때는 득표율 격차가 생각보다 커서 재검표도 요구할 명분이 없었다.
'''2020년'''

[image]
[image]
후보
'''조 바이든
전 부통령'''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적
'''민주당'''
공화당
출신 주
'''델라웨어'''
플로리다
러닝메이트
'''카멀라 해리스
상원의원'''
마이크 펜스
부통령
선거인단
'''306'''
232
득표수
'''81,283,485'''
74,223,744
득표율
'''51.4%'''
46.9%
미국 우선주의로 인한 외교악화, 코로나 19 대처 실패,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으로 인한 인종 간의 갈등으로 인해 정세가 상당히 불안해진다. 민주당 후보 조 바이든은 정상적인 외교 회복, 코로나 위기 극복, 인종갈등 해소를 공략으로 내걸었고, 트럼프는 북한 문제 해결, 중국 견제, 미국 우선주의를 공략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트럼프가 우편투표 부정, 참전용사 비하, 마스크 미착용 등 막말과 비정상적인 행동으로 분노한 유권자들은 바이든을 지지했고, 보수층은 트럼프를 지키기 위해 트럼프에게 올인해 사상 최고의 투표율을 갱신한다. 하지만 러스트 벨트[41]와 조지아[42], 애리조나 주[43]에서 바이든이 이겼고, 4년전 비슷한 스코어로 트럼프에게 승리를 거뒀다.

3.1. 여담


  • 대선에서 재선, 삼선해 당선되는 경우가 흔한 한국과 달리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는 대선에서 떨어진 사람은 거의 바로 정계은퇴하는 것이 반쯤 관례화되어있다. 대선에서[44] 한번 패한 뒤 재도전하여 당선된 대통령은 리처드 닉슨이 유일하다. 16대 대선 이전으로 보면 토머스 제퍼슨, 앤드루 잭슨, 윌리엄 헨리 해리슨도 있다.
  • 오하이오 징크스 - 오하이오 주의 승리자가 대통령이 된다는 전통. 사실 20세기에 들어와서 생긴 전통으로, 50여 년 전 존 F. 케네디에 의해 한 번 깨진 적이 있으나 그를 제외하고는 거의 사실이 되었다. 2016년 대선때도 오하이오를 차지한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되었다. 이는 우연한 징크스라고만 치부하기엔 어느 정도 합리적인 근거도 있는 편인데, 오하이오 그 자체가 가지는 선거인단의 규모도 꽤 큰 데다 공화당과 민주당 양당이 골고루 지지를 얻는 스윙스테이트 지역이기 때문. 즉, 오하이오가 미국 전체의 선거 판도를 가늠할 수 있는 잣대가 될 수 있는 것. 그러나 이 징크스는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오하이오에서 승리하고도 낙선하여 징크스가 생긴 이래 다시 깨져버리고 말았다.
  • 오하이오 출신 대통령은 율리시스 S. 그랜트부터 워런 G. 하딩까지 7명이나 되는데, 남북전쟁 이래 선거로 당선된 공화당 대통령은 모두 오하이오 출신인 시절이 있었다.(...) 정계에서 오하이오주 출신의 정치인들이 실세이다 보니까 이들을 오하이오 갱단이라고 불렀다. 다만 하딩 때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다가 말아 먹은 후에 사실상 몰락했다.

  • 다선 연방상원의원은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징크스도 있었다. 실제로 2020년까지 미국 대통령은 연방상원의원 경력이 있을 경우 재선의원 이상 한 경우가 없었다. 미국 시민들의 직업정치인 불신을 나타내는 하나의 현상이었다. 2020년 연방상원 7선의원 출신인 조 바이든이 당선되어 이것이 깨졌다.
  • 하필이면 하계 올림픽과 같은 해에 미국 대선을 치른다. 그러니 올림픽 덕후들에게는 올림픽 후광 잡아먹는 철천지 원수로 보이기도 한다.[45]
  • 선거 전에 후보가 사망한 경우 정당에서는 사망한 후보를 대신할 새로운 후보를 내세운다.
  • 1800년1900년은 미국 역사상 평년에 대통령 선거를 치른 단 두 가지 경우이다. 다음 평년 대선은 2100년에 가서 한다.
  • 2월 29일이 월-토-목-화-일-금-수 순으로 순환하므로 대선일은 11월 8일-11월 3일-11월 5일-11월 7일-11월 2일-11월 4일-11월 6일 순으로 순환한다. 28년마다 반복되므로 1988년과 2016년은 동일하다. 그러나 2100년에는 깨져서 11월 2일에 치르고 22세기에는 금-수-월-토-목-화-일 순서대로 순환하기 때문에 11월 4일-6일-8일-3일-5일-7일-2일로 순환하다가 2200년에 깨져 2200년 11월 4일에 선거를 치른 뒤 23세기에 수-월-토-목-화-일-금 순서대로 순환해서 11월 6일-8일-3일-5일-7일-2일-4일-6일 순으로, 2300년에 깨져 2300년 11월 6일에 선거를 치른 뒤 24, 25세기는 다시 월-토-목-화-일-금-수 순으로 순환한다.
  • 1월 20일이 대통령 취임식을 하는 날이지만, 이날이 일요일과 겹치면 1월 21일 월요일에 취임식이 열린다. 1985년과 2013년이 이에 해당된다.
  • 앞서 언급했듯 미국의 속령들은 대선 선거권 및 피선거권이 없지만, 괌은 대통령 선거날에 자체적으로 대통령 선거를 치른다. 물론 이 선거는 아무런 효력도 없지만(...) 괌 주민들의 여론을 알려준다. 이 선거는 1980년부터 시행해오고 있으며 그동안 모든 선거 결과를 맞췄지만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틀렸다. 2016년 괌에서는 힐러리 클린턴이 71%, 도널드 트럼프가 25%의 득표를 얻었다.

3.2. 미국 대선 역사


19세기 남북전쟁 이전까진 민주당vs휘그당 체제에서 민주당이 더 주류 정당이었지만, 1860년대 남북전쟁 이후부턴 상황이 바뀌어서 북부군을 이끈 공화당이 상대적으로 인구가 더 많은 (이 당시까지만 해도 공화당 텃밭이던) 북부(+중부)를 끼고 패전 세력이 된 남부를 텃밭으로 둔 민주당을 대선에서 따돌리는 형국이 지속된다. 덕분에 1920년대까지 민주당은 뉴욕의 지지를 받은 그로버 클리블랜드나 1기 땐 후보 분열로 승리한 우드로 윌슨을 제외하고는 대권을 공화당에 내줘야 했다.[46]
이 판도를 단숨에 바꾼 것이 1930년대 등장한 프랭클린 D. 루스벨트였다. 그는 대공황과 2차세계대전이란 위기 속에서 자그만치 4선을 달성했으며, 의회도 압도적인 다수당을 이루게 된다. 대선으로 치면 민주당이 해리 S. 트루먼까지 20년간 연속집권했으며, 총선으로 치면 90년대까지 몇번의 선거를 제외하곤 쭉 우위를 유지한다. 이는 민주당이 기존의 텃밭인 남부 + 북부의 서민 중산층 + 흑인 등 소수민족까지 끌어들인 소위 "뉴딜 동맹"을 형성하는 데 성공해 막강한 힘을 발휘했기 때문이였다.[47] 그 힘은 강력해서 50년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역시 뉴딜 정책 자체는 거의 계승했다.
그러나 4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불거지기 시작한 민주당의 민권운동 지지 기류와 베트남전 등이 겹쳐 60년대 들어 민주당 텃밭이던 남부(딕시크랫)는 점차 이탈, 독자 출마나 팀킬 행위가 잦아지게 되고, 이 과정에서 공화당은 극우 + 백인 우월주의를 내걸고 적극적으로 "남부 전략(Southern Strategy)"을 펼치게 된다. 즉 민주당의 텃밭이지만 보수성이 두드러졌고 이 때문에 동부, 리버럴이 주류인 민주당에서 이탈하려는 남부 민주당 세력을 공화당이 품에 안겠다는 일종의 텃밭 맞바꾸기 전략이었던 것이다.
그 징후는 이미 1948년부터 드러났다. 남부는 여러 차례(1960년, 1968년) 독자 출마나 선거인단 이탈 등으로 제3 세력화를 꾀했는데, 당장 남부의 보수파인 골드워터에 대한 존슨의 대승으로 끝난 1964년 선거에서 공화당은 여섯 주에서만 승리했는데, Deep South에 속하는 주 중 다섯(사우스캐롤라이나, 조지아, 미시시피, 앨라배마, 루이지애나)과 골드워터 본인의 출신 주인 애리조나에서만 승리를 거두었다. 존슨이 텍사스 출신이었는데도 말이다.[48] 그리고 기어이 1968년 민주당의 대선 패배에선 혁혁한(?) 공로를 남겼다.
이후 닉슨을 거치면서 공화당은 남부에서 상당한 지지를 뽑아내게 되며, 1980년대1990년대를 거치며 남부는 명실상부한 공화당의 텃밭이 되었다. 닉슨 이래로 레이건, 부시 부자는 대선에서 남부(이념적 친밀성) + 서부(지역적 친밀성)[49] + 기독교 근본주의(낙태 이슈 등) + 백인 + 신자유주의 지지층을 결집시키는데 성공했고, 총선에서도 남부를 야금야금 갉아먹다가 1994년 60여 년 만에 기어코 하원 다수당을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민주당은 캘리포니아 등 다인종들이 모여사는 서부 해안지대 지지를 얻어내는데 성공했으며, 결국 부시의 실정 크리와 함께 흑인 오바마는 케네디 이후 최초로 북부인 일리노이에 지역구를 둔 민주당 대통령이 되며 재선에도 성공했다. 또한 인구 3위의 플로리다에서도 두 번 모두 승리하면서 고어 vs 부시 때의 설욕을 확실히 했다.
하지만 2016년 대선 때는 민주당이 너무 자만한 나머지 한때 자신들의 지지기반이었'''던''' 러스트 벨트를 공화당에 모조리 뺏기는 대참사를 맛보게 되었다. 덧붙여 도널드 트럼프의 경우 본진(?)은 일단 뉴욕시의 퀸즈 구와 트럼프 타워가 있는 맨해튼이지만 공직 경력이 하나도 없는 아웃사이더여서 그가 어느 주 출신인지는 구별의 실익이 사실상 없다.
2020년 대선 때는 반대로 공화당이 자신의 텃밭이라 여겼'''던''' 조지아, 애리조나를 민주당에게 뺏겼다. 각각 도널드 트럼프의 존 메케인과의 갈등과 애틀란타 근교의 인구 증가가 영향을 주었다. 공화당 지지주 중 가장 많은 선거인단을 가진 텍사스에서도 격차가 현격하게 좁혀졌다.

[1] 이전에는 국민공화당(1825~1833)과 휘그당(1833~1856)이 공화당의 위치를 대신했고, 사실상 계보도 공화당으로 이어진다. 유일하게 무소속으로 임기를 마친 조지 워싱턴의 임기가 끝나자마자 연방파와 공화파가 경쟁하기 시작했으니, 미국의 양당제 역사는 사실상 미국 전체의 역사와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2] 1992년 대선의 로스 페로.[3] 당시는 1955년 추가된 수정헌법 22조 3선 금지 조항이 들어가기 전이라 3선 시도가 가능했다. 그래서 재임한 루스벨트가 1912년 대선에 출마할 수 있었던 것. [4] 미국의 50개 주 가운데 어디에도 속하지 않음. 워싱턴 D.C.는 의회 직할령이다.[5] 자연적으로 미국 시민이 된 사람이라는 것이 "Natural American" 이라고 표기되어 있어서, 이것이 명확하게 미국 출생자를 지칭하지 않는다. 공화당 티파티의 유력한 대선 주자들 중 한 명인 테드 크루즈의 출생지가 캐나다라는 것이 밝혀져서 2016년 대선 당시 논란이 되었고 앞으로 테드 크루즈가 대통령에 나올 때마다 논란이 될 것으로 보인다.[6] 이 대가로 헨리 클레이는 국무장관으로 임명되었고, 잭슨은 4년 내내 애덤스와 클레이를 비판했다.[7] 당연히 민주당과 남부는 대폭발했고, 폭동 직전까지 갈 기세를 보이자 헤이스는 남부 군정 종식과 민주당 인사 내각 임명을 약속으로 겨우겨우 대통령에 취임할 수 있었다.[8] 사실 고어가 부정선거를 주장한 것도 뭐한게, 르윈스키 스캔들로 인한 클린턴의 거짓말로 인해 지지율이 하락한 것도 있고, 고어의 이미지가 젊긴 했지만 엘리트주의도 짙었기 때문에 호불호가 갈린 반면, 부시는 부모의 긍정적 후광과 텍사스 주 출신의 순박한 이미지 덕분에 남부의 표를 싹쓸이했다. 그리고 고어보다 겨우 2살 많아서 고어쪽이 젊은 이미지 운운하기가 뭐했다. [9] 반면 4년 뒤 선거에서 조 바이든은 러스트 벨트에서 승리해 당선인이 되었다는 걸 보면 힐러리의 선거전략은 실패했다는 것을 증명한다.[10] 존 애덤스 34, 존 제이 9, 존 러틀리지 6, 로버트 해리슨 6으로 존 애덤스 당선[11] 만장일치[12] 존 애덤스 77, 조지 클린턴 50으로 존 애덤스 당선[13] 만장일치[14] 비공식적으로 찰스 C. 핑크니[15] 에런 버, 새뮤얼 애덤스, 조지 클린턴 3파전[16] 연방당의 공식 후보 지명 포기로 대다수 주 연방당 조직의 개별적 지지 확보.[17] 연방당원[18] 총 232명 중 존 퀸시 애덤스에게로 간 반란표 1명 제외 모든 선거인단을 얻었다.[19] 비공식적으로 리처드 멘터 존슨 부통령[20] 사실 해리슨은 상당한 부유한 엘리트 가문이었다. 자기 아버지는 독립선언서에 이름을 서명한 네임드 정치인이었고, 그 자신은 가정교육을 받고 의대를 입학한 당시 꽤 잘 나가는 엘리트였다. 물론 그 이후의 전쟁무공은 순수 본인 능력이었지만, 통나무 집과 사과술은 엄연한 이미지 조작.[21] 대표적인게 54도 40분 요구였는데, 포크가 요구한 북위 54도 40분은 당시 러시아 영토였던 알래스카와 맞닿은 면적으로 캐나다의 태평양 진출이 불가능해졌고, 영국이 반발하자 49도 밴쿠버를 기준으로 잡아 겨우 협상을 했다.[22] 이는 당시 대통령 뷰캐넌이 더글라스를 극도로 싫어해 브레킨리지를 밀었던 탓이 큰데, 민주당 대통령이 후임 후보를 지지하기는커녕 다른 후보를 지지해버리니 콩가루 집안이 따로 없었다.[23] 민주당 지지 확보.[24] 선거인단 투표 직전 그릴리의 사망으로 66명 모두 타 후보들이 확보.[25] 이 중 플로리다, 루이지애나, 사우스캐롤라이나, 오리건 1명 등 총 20명의 선거인단은 공화당과 민주당의 야합으로 공화당이 확보했다.[26] 당시 미국 법에 독자나 자기 외에 가족을 부양할 사람이 없으면 돈을 지불해 대리인을 전쟁에 보내면 징집령을 면제받는 조항이 있었는데, 클리블랜드와 블레인 둘 다 이 혜택을 보았다.[27] 다만, 한국인 입장에서는 가쓰라-태프트 밀약 때문에 일본의 한반도 합방을 묵인했기 때문에 업적이라고 볼 수가 없다. 그의 먼 친척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한국을 독립시키려고 했던 걸 보면 더더욱.[28] 만약 루스벨트가 후보가 되어 윌슨과 1:1로 붙었다면 윌슨이 질 확률이 높았다고 점쳐지지만, 3선을 해서 독점이라는 비판을 받았을 것이고 그로 인해 더 일찍 헌법이 개정돼서 먼 친척인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4선을 못 했을 수도 있었다.[29] 이 시기는 아직 먼로 독트린이 미국 국민들에게 아직까지 영향이 있었던 것이 크고, 유럽에서는 참호전과 전선 유지로 인해 수백만명의 젊은이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들은 미국인들이 안정을 추구한 면이 크다. 그리고 이 시기 몇몇 주를 제외한 상당수 주에서 여성의 참정권을 허용했는데, 남편 또는 아들이 전쟁에 가는 걸 원치않았던 여성들이 윌슨에게 투표한 영향도 있었다.[30] 상대방 후보 콕스도 꽤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고 능력도 있었지만, 전임 윌슨의 막판 이미지가 워낙 안 좋아서 텃밭 지지층에게만 표를 받았다.[31] 당시 미국은 2차 대전 이전까지는 현재 생각하는 자유롭고 활기찬 나라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고, 청교도적 보수 시각이 강했고, 남부 지방에서는 KKK단이 대놓고 흑인을 무시하고 죽이는 등 비윤리적인 일들이 횡횡했다. 실질적인 평등과 종교적 자유를 누린 시기는 1960년대 이후이다.[32] 최다 선거인단 득표는 레이건의 525명이지만, 그때는 선거인단 주가 3개( 알래스카, 하와이. 워싱턴 D.C.) 추가되어 9명이 늘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최다 득표자는 루스벨트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33] 그리고 1944년 후반은 미국과 연합국이 연전연승해 나치 독일을 거의 무너뜨렸고, 일본군을 오키나와와 이오지마로 밀어붙여 승기를 확실히 잡았기 때문에 루스벨트의 지지도가 높았던 것도 있었다.[34] 그리고 골수 민주당 텃밭이었던 동남부 주에서 주권민주당이 민주당에서 분리된데다 전임 부통령 헨리 월리스까지 대선 출마까지 선언하니 민주당은 1860년의 상황과 거의 똑같이 직면하게 되었다.[35] 시카고 트리뷴 신문이 작성한 '듀이가 트루먼을 이기다!'라고 적혀있는 오보 1면을 들면서 활짝 웃는 모습은 역사에 남게 되었다.[36] 닉슨도 이 당시 47세로 젊은 축에 속했지만, TV 토론회에서 무뚝뚝하고 수동적인 이미지로 찍히면서 패배의 원인이 된다.[37] 여성의 정/부통령 후보 진출은 2008년 사라 페일린(부통령), 2016년 힐러리 클린턴(대통령)이 나왔으며, 2020년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후보가 당선되면서 최초의 여성 부통령이 되었다.[38] 롬니 왈, "오바마는 세금을 내지 않으면서 스스로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47%의 미국인에 의존하고 있다... 나는 이 사람들에게 의존하지 않을 것이다."[39] 롬니의 목적은 비용 절감으로 인한 함선 규모 축소를 비판하면서 군인 지지율을 모으려 했지만, 오바마는 '함선 뿐만 아니라 총검과 군마도 줄어든다. 항공모함, 원자력 잠수함으로 전투의 패러다임이 바뀐다.'로 역공, 롬니는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현대 전투를 이해하지 못하는 군대무식자로 놀림받는다.[40] 이 선거전략이 완전히 실패한게, 그렇게 원했던 여성 투표는 트럼프에게 더 많이 갔다.[41] 해외에 있는 미국 기업 공장들을 모조리 돌려놓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극히 일부만 성공했고 도시 침체화는 여전히 막지 못했다.[42] 애틀랜타 등 대도시 지역의 인구증가가 원인이다. 실제로 애틀랜타와 사반나, 아우구스타 등 도시 지역은 바이든 우세였다.[43] 거물 정치인 존 매케인의 고향이다. 원래는 공화당 텃밭이었지만, 트럼프가 매케인을 겁쟁이라고 비난하면서 애리조나 주민들이 트럼프에게 등을 돌렸다.[44] 경선 제외[45] 2020년 한정으로 2020 도쿄올림픽이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연기되면서 해당하지 않게 되었다.[46] 다만 총선에선 이정도까지 차이가 벌어지진 않아 민주당도 꽤 승리를 했다. 사실 미국인들이 행정부와 입법부 간 세력 균형을 제법 잘 맞추는 편이다.[47] 원래 링컨의 공화당에 우호적이던 흑인층은 이 시기를 전후해 민주당 우위로 성향이 바뀌게 되고, 후술된 60년대 민권운동 이후부턴 민주당에 압도적 지지를 보내게 된다.[48] 텍사스는 존슨의 고향이어서 존슨이 손쉽게 승리를 거두었다.[49] 닉슨과 레이건 모두 캘리포니아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닉슨은 아예 고향이 캘리포니아, 레이건은 주지사를 지냈다.) 부시는 그렇지 않았는데 그것이 1992년 대선의 패배 원인이 아니냐는 농반진반 얘기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