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H. W. 부시

 




''' 조지 H. W. 부시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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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제41대 대통령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George Herbert Walker Bush
'''
<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출생'''
1924년 6월 12일[1]
미국 매사추세츠 주 밀턴
'''사망'''
2018년 11월 30일 (향년 94세)
미국 텍사스휴스턴
'''재임기간'''
제11대 CIA 국장
1976년 1월 30일 ~ 1977년 1월 20일
제43대 부통령
1981년 1월 20일 ~ 1989년 1월 20일
제41대 대통령
1989년 1월 20일 ~ 1993년 1월 20일
'''서명'''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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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부모'''
아버지 프레스컷 셸던 부시(1895 ~ 1972)
어머니 도로시 워커(1901 ~ 1992)
'''형제자매'''
형 프레스콧 부시 주니어(1922 ~ 2010)
여동생 낸시 워커 부시 엘리스(1926 ~ 2021)
남동생 조나단 부시(1931년생)
남동생 버키 부시(1938 ~ 2018)
'''배우자'''
바버라 부시(1925 ~ 2018)
'''자녀'''
'''조지 W. 부시'''(1946년생)
로빈 부시(1949 ~ 1953)[35]
젭 부시(1953년생)
닐 부시(1955년생)
마빈 부시(1956년생)
도로시 부시(1959년생)
'''학력'''
필립스 앤도버 고등학교 (졸업)
예일대학교 (경제학 / B.A.)[36]
'''종교'''
개신교 (성공회)[37]
'''신장'''
188cm
'''정당'''

'''상훈'''
헨리 키신저상 (2008)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 (2011)
케네디 용기상 (2014)
'''약력'''
제11대 CIA 국장
미국 제43대 부통령
'''미국 제41대 대통령'''

'''백악관 공식 초상화'''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
2.3. 정계 초기 활동
2.4. 부통령 재직
2.5. 1988년 대통령 선거 당선
2.6. 재임 행적
2.7. 퇴임 이후
2.8. 사망
3. 평가
4. 기타
5. 매체에서
6. 가정
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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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대 미국 대통령 취임 선서'''

1. 개요


'''Read my lips. no more(/new) taxes.'''

제 입술을 보세요. 더 이상의 세금은 없습니다.[2]

미국의 제41대 대통령.
이름이 비슷한 아들 조지 W. 부시와의 구분을 위해 흔히 "아버지 부시(Father Bush / Bush Senior)" 혹은 "HW 부시(HW Bush)"[3]라고 불리며, 아들 조지 W. 부시는 "아들 부시(Bush junior)" 혹은 "W 부시(W Bush)"[4]라고 불린다.
아들 부시와의 혼동 우려 때문에 자주 불리지는 않지만, 그냥 '조지 부시'라고만 칭하면 아버지 부시를 가리킨다. 아들은 반면 조지 W 부시라고 꼬박꼬박 불러주는 편이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1924년 6월 12일에 아버지 프레스콧 부시와 어머니 도로시 워커 부시 가정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손꼽히는 부자 동네이자 뉴욕의 위성도시인 코네티컷 그레니치에서 자랐으며 미국 최고 명문 보딩스쿨[5]로 꼽히는 필립스 앤도버 고등학교를 나왔다. 풀네임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George Herbert Walker Bush)는 외할아버지 조지 허버트 워커의 성명에서 그대로 따왔다
그의 아버지는 투자은행가로 코네티컷주을 대표하여 10여년동안 상원의원을 지내기도 하였다. 예일대에 합격하고 바버라 피어스[6]와 약혼하며 평범한 부잣집 도련님으로 살던중에 18세가 되던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대학 입학을 연기하고 해군에 자원입대하여 전투기 조종사가 되었다.

2.2.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image]
1944년의 조지 부시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다. 미 해군에 입대해 장교로 임관한 그는 TBF(M) 어벤저기의 조종사로 참전했고 자신에 비행기에 약혼녀 바바라 피어스의 이름을 따 바바라라고 불렀다. 오키나와 전투 당시, 오키나와 주변의 섬들을 제압하는 임무를 띄고 출격했다가 일본군 대공포에 격추당했다. 자칫 일본군의 포로 신세가 될 뻔했지만 다행히 가토급 잠수함 핀백(Finback)에게 구조된다.
한편, 그 때 추락한 다른 동료들은 일본군에 포로로 붙잡히고 '''일본군이 이들을 살해한 뒤 시체를 먹은 치치지마섬 식인 사건이 발생한다.'''[7] 조지 부시는 당시 격추 당한 부대원들 중 유일한 생존자였고, 구조되지 못하고 포로가 되었다면 그 자신도 잡아먹힐 뻔했다.[8]
이 일로 사적으로는 일본을 굉장히 싫어했다. 히로히토 덴노의 부고를 들었을 때야 '이제야 일본을 용서할 마음이 조금은 생긴다'고 할 정도. 하지만 사적인 감정과는 별개로 대통령으로서는 대 소련 포위망 때문에 일본을 한국과 함께 비 NATO 주요 동맹국으로 지정할 정도로 일본과의 관계를 중요시했다.
45년 1월에 바바라와 결혼하고 9월에 해군 중위로 전역한 뒤 부시는 대학생이 된다.

2.3. 정계 초기 활동


[image]
[image]
UN 대사 시절 모습 (1971년)
CIA 국장 시절 모습
1959년 공화당에 입당해 1966년 텍사스 7선거구 하원의원에 당선된다. 이 후 1970년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민주당 로이드 벤슨 상원의원에게 석패하며 잊혀지는 듯했다.[9]
그러나 하원의원 시절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데탕트 정책을 적극 지지한 것을 인정받아 '''UN 주재 미국 대사'''와 '''초대 중국 주재 연락사무소장'''을 지냈고,[10][11] 제럴드 포드 대통령 시절에는 '''CIA 국장'''을 지냈다.[12] 이런 경험들을 통해 국제 정세에 대한 현실적인 판단력을 쌓게 된 것이 후일 대통령 재직 시 냉전 종식, 걸프전, 독일 통일, 소련 해체 등의 격변기를 미국의 승리로 헤쳐나가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1980년에는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했지만 로널드 레이건에게 패배하였다. 부시는 온건 보수주의자로 강경파였던 로널드 레이건의 공급 위주 정책(Supply side policies)를 부두 경제학(Voodoo Economics)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것과는 별개로 레이건이 당내 화합의 목적과 차기 대통령감으로 염두에 두고 그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해 같이 대선을 치뤄줄 것을 제안했을 때 이를 수용했고 부통령에 당선된 이후에 그리고 부통령직 수행 중에도 레이건 대통령을 잘 보좌하여 대통령으로 가는 탄탄대로를 닦아 놓았다. 어떻게 보면 2인자가 차기 1인자로 되는 과정의 좋은 선례를 보여줬다고 볼 수도 있다.

2.4. 부통령 재직


[image]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조지 H. W. 부시 당시 부통령(오른쪽, 1981년)
1981년부터 1989년까지 로널드 레이건 정권의 부통령을 지냈다. 이전의 리처드 닉슨과 훗날의 앨 고어가 그랬듯 그의 대통령 선거는 부통령 선거 때에 비해서 매우 힘들었다.
이 시기 사양길로 접어들 뻔했던 미국의 석유산업을 살리기도 했다. 1985년 하반기부터 1986년 상반기까지 영국과 사우디간의 석유전쟁이 벌어지면서 유가가 폭락하는 사태가 벌어졌는데 원유가격이 배럴당 20달러 후반대에서 10달러 아래로 떨어지자 미국 경제전반적으로 보았을때 유가하락으로 인해 소비자들은 자동차를 마음껏 타고 다닐 수 있었고 업체들이 부담하는 물류비도 싸게 변해서 미국 경제 전반적으로는 이득이기는 했는데, 미국의 석유업체들이나 석유생산으로 먹고살던 텍사스와 알래스카 석유업체 상당수가 파산위기에 내몰리게 되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자유시장 논리에 별다른 조치를 취할려고 하지 않았지만, 조지 부시 부통령은 석유업체가 대거 도산하면 도산하는 대로 문제가 있는데다가 석유 소비량이 급증할 경우엔 에너지 안보에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사우디를 적절하게 압박하고 석유값 하락으로 위기에 처한 OPEC내 여러 나라들과도 의견 조율로 감산합의안을 통과시키게 만들었고 덕택에 석유값은 다시 18달러대로 올라서 미국의 석유업계는 도산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물론 석유로 먹고살았던 소련이나 알제리, 베네수엘라, 멕시코는 못살렸지만.

2.5. 1988년 대통령 선거 당선


1988년 선거 초반 미국 민주당마이클 듀카키스에게 무려 17% 격차로 밀리고 있었고, 당 내에도 밥 돌 상원의원 등 강력한 경쟁자에게 밀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선거 참모인 리 애트워터의 치밀한 선거 전략에 힘입어, 사형제를 이슈로 한 TV토론에서 듀카키스에게 결정타를 입히고 승리하였다. 그야말로 역사에 길이 남을 '''네거티브 선전류 甲.''' 이는 EBS 다큐프라임 "킹 메이커"에서도 소개된 바 있다.
자세한 내용은 마이클 듀카키스 문서를 참고할 것.

2.6. 재임 행적



[image]
걸프전을 앞둔 1990년, 사우디 주둔 미군들을 시찰하는 모습
1991년 1월 17일, 걸프전 시작을 알리는 TV 발표 모습
비록 집권 과정은 긍정적 이미지와 거리가 멀었지만, '''재임 시절의 치적은 분명 긍정적이었던''' 지도자.[13]
4년의 대통령 재임 기간동안 베를린 장벽동유럽의 공산주의 블록이 무너졌고,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이 해체되어 전 인류를 반으로 갈라서 공포에 떨게 했던 냉전이 종식되는 그야말로 '''대격변'''이 도래했다. 구 소련과 공산권의 붕괴로 인한 힘의 공백을 파고든 이라크를 걸프전에서 다른 국가들과는 비교를 거부하는 첨단 무기와 효율적인 운용으로 제압하면서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미국의 위상을 확고히 하였다. 그야말로 '''팍스 아메리카나'''의 시대를 연 것이다. 지지율이 최대 89%까지 치솟았고 92년도 대선 상대였던 빌 클린턴은 부시의 재선이 확실하다고 여기면서 출마를 망설였을 정도였다.
하지만 로스 페로의 등장으로 인한 보수층의 분열과, 끝내 경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점을 파고든 빌 클린턴에 밀렸다. 고작 37.4%를 득표하며 1992년 재선에 실패했다.[14]
재선에 도전할 시기에 터져나온 사건들도 영 좋지 않았는데, 대표적으로 1992년에 테일후크 스캔들이 전미를 들썩였다. 걸프전 참전 군인, 그것도 하필 부시의 먼 후배들이라 할 수 있는 '''해군 항공장교들의 대규모 성폭력 스캔들'''이었던지라 해군 조종사 이력이 있는 부시에게까지 좋지 않은 이미지를 전염시켰다.

2.7. 퇴임 이후


1992년 방한했으며 퇴임 후에도 두 차례(2001, 2005) 한국을 방문했고, 특히 2005년에는 아들보다 먼저 안동을 방문했다.
2009년 자신의 85번째 생일 기념으로(...) 스카이다이빙을 했다. 지상에 착지하고 나서 한 말이 '''"90살 생일날 또 할 거다"'''였다고.[15] 그리고 2014년 '''자신의 90번째 생일에 진짜로 또 했다.''' 낙하산에 90세와 자신이 미국 41대 대통령이란 것을 조합하여 "41@90"이라고 썼다고. 그런데 나이가 나이라서 그런지 이번에는 베테랑 다이버의 도움을 받았다.
2012년에는 대통령 재직시절 경호원의 아들이 백혈병에 걸리자 치료비를 대주었을 뿐만 아니라, 아예 자신의 머리도 삭발했다!용기를 주기 위해서라나. 조지 부시는 둘째딸 로빈이 4살 때 백혈병으로 사망한 적이 있다. 이때 기사에 이 사람을 아들 조지 부시로 착각하고 댓글을 단 사람들이 많았다.
2017년 10월~11월에 여배우 헤더 린드, 조던 그론릭을 비롯해 총 10명의 여성이 부시의 성추행 사실을 폭로했다.##이들은 부시가 신체 일부를 움켜잡았으며 이를 합리화하는 말을 했다고 주장했고, 부시는 성추행을 의도하고 한 행동이 아니었다고 해명하며 사과하겠다고 성명을 냈다. 아예 여성의 둔부에 손을 당당히 올린 채 찍힌 사진도 나온 탓에(...) 오해 받을 일을 안 했다고는 주장 못하는 상황.
공화당 출신 대통령이지만 2016년 대선 당시 도널드 트럼프가 공화당 대표로 당선되자 아들인 조지 부시와 마찬가지로 공화당의 선거유세에 동참하지 않은 것은 물론 민주당인 힐러리에게 투표했다고 한다. 반면 아들 부시는 뽑을 사람 없다고 대선에서 기권했다고. 아들 부시처럼 트럼프의 행보를 비판하지는 않지만 이런 행동을 볼 때 그도 트럼프에 대해 마음에 안 들어하는 것으로 보인다. 같은 갑부지만 돈을 버는 방식과 인격이 다르며 자기애의 충족을 위해 대통령을 하는 사람이라며 아들 부시가 비판했던 걸 볼 때 원래부터 가문의 모토가 트럼프 대통령과는 안 맞는 모양.
2018년 4월 17일에 부인 바버라 부시 여사가 폐질환으로 별세하였다.

2.8. 사망


[image]
말년의 조지 H. W. 부시. 세월 때문인지 외모가 많이 변화했다.[16]
2018년 11월 30일 금요일, 밤 10시가 조금 넘긴 시각[17]에 조지 H. W. 부시는 향년 94세에 숙환으로 사망했다. 그가 대통령에 당선된 지 30년 만에, 아내 바바라 여사와 사별한 지 7개월만의 일이었다.
현지 보도에 의하면 '자신의 영원한 사랑이자 인생의 73년을 함께 해온 바바라 부시 여사의 타계 이후 부시 전 대통령은 상심이 매우 컸다'고 알려졌으며 이러한 '상실감으로 인해 이미 안 좋았던 건강이 더욱 악화되어 결국 향년 94세에 서거했다'고 전했다.
공식적인 사망 발표는 사망자의 아들이자 43대 대통령이었던 조지 W. 부시가 가족 재단의 홈페이지와 각종 SNS를 통해 추도문을 개재 하면서 대중들에게 소식이 전해지게 되었다.
그의 사망 소식이 공식 발표된 직후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다른 대표적인 거물 정치인들 또는 정치 기관보다 가장 먼저[18] 트위터를 통해 A4 종이 한 장을 빼백히 채운 애도문을 개재하며 애도를 표했다.[19] 아버지 부시 타계에 애도 물결
같은 시각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미국 백악관은 그 어떠한 매체를 통해 아직도 공식적인 애도를 표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물론 이는 늦은 금요일 밤인 탓도 있고 트럼프 대통령이 G20 회의를 위해 아르헨티나로 가고 있었다 지만, 이는 부시 가문과 트럼프 대통령의 악연으로 인해 늦어지고 있는 것으로 많은 이들이 추측 하기도 했다.[20]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은 그 다음 날 2018년 12월 1일, 토요일 새벽 0시 49분[21]이 되어서야 애도문을 자신의 트위터에 개재하며 애도를 표했다.
얼마 뒤 백악관으로부터 트럼프 대통령이 '12월 5일을 국가 애도의 날로 지정'이 되었으며 워싱턴에 위치해 있는 미 국립 성당에서 국장으로 장례가 치뤄질 것이라는 공문 개재와 함께 트럼프 대통령이 장례식에 참석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유해는 12월 3일 저녁부터 12월 5일 아침까지 미국 국회의사당 중앙 홀에 안치되어 일반인의 조문을 받았다.#
5일 오전 10시부터 시작된 장례식에는 전직 미국 대통령들과 조문을 위해 미국을 찾은 해외 정치 지도자들이 대거 참석했다.# 대한민국에서는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단장을 맡은 공식 조문단을 파견했다.
부시의 사망 이후, 그의 아들인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을 포함한 버락 오바마, 빌 클린턴, 지미 카터 전 대통령과 당내 경쟁자였던 밥 돌,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 버니 샌더스, 조 바이든, 공화당의 폴 라이언, 마르코 루비오, 마이크 폼페이오 등 미국 정치인들과 유명인사들이 소속 당적에 관계 없이 애도의 뜻을 전했다. 또한 청와대에서도 문재인 대통령이 냉전 종식과 동서화합에 기여한 고인의 뜻을 기리며 애도의 뜻을 전했다. 그 외에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수상,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수상, 테레사 메이 영국 수상 등 각국 정상들이 애도의 뜻을 전하였다.
장례식 후 유해를 장지인 텍사스 휴스턴으로 운구하여 12월 6일 휴스턴의 세인트 마틴 성공회 교회에서 추도식을 연 뒤, 텍사스 A&M 대학의 조지 H.W. 부시 도서관-기념관 부지에 안장되었다. 이 곳에는 앞서 세상을 떠난 부인인 바바라 부시와 딸 로빈도 묻혀 있다.

3. 평가


퇴임 이후 전체적으로 대통령으로서의 평가는 괜찮은 편이다. 아들 부시가 워낙 문제를 많이 일으켜서 흔히 아들 부시와 비슷한 정책을 편 것으로 생각되곤 하지만, 실제로는 선거 캠페인 방식에서 주로 비판받을 뿐, 대통령으로서는 자질 면에서나 실제 통치나 우수한 인물이었다.
그의 대표적 치적인 1991년 걸프전만 해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시작된 '불가피한' 전쟁이었다. 미국은 이라크의 군사력에 의한 역내 세력균형 변경 시도를 '''저지'''하고 중동에서의 "사활적 국가이익"을 '''방어'''하기 위해 개입한 것이다. 이라크에 "미국적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한다는, '''이상주의적'''이고 일종의 '''혁명적''' 목표를 갖고 전쟁에 뛰어들었다 중동의 세력균형을 뿌리부터 뒤흔든 아들의 이라크 전쟁과는 목적에 있어서 '''완전히 정반대'''다. 목표가 극과 극이니 당연히 방법론도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부시는 공화당의 매파에서 제기한 "바그다드로 진격해서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렸어야 한다"는 주장을 신문 기고를 통해서 공개적으로 반박했다.(#)

... 미국이나 현지 국가들은 모두 이라크란 국가가 쪼개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우리는 페르시아 만 지역 한복판의 장기적 세력균형에 대해 우려했던 것이다.

사담 제거를 시도하려고 지상전을 이라크 점령으로 확대하면, 일을 진행하는 도중에 목표를 변경하지 않는다는 스스로의 정책지침을 어기고, 욕심을 부리다 수렁에 빠져들게 되어(mission creep), 예측 불가능한 인적 정치적 비용을 유발하게 될 것이었다.

그를 체포하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파나마에서 우리는 익히 잘 알고 있던 노리에가도 찾아낼 수 없었다.[22]

우리는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실질적으로 이라크를 통치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연합군은 즉시 붕괴되고, 분노한 아랍 국가들이 전열에서 이탈하며 '''다른 동맹국들 또한 철군하게 될 것이었다.'''

... 우리가 그러한 침공 코스를 밟는다면, 생각건대 미국은 아직도 극도로 적대적인 땅에서 점령세력으로 남아있을 것이며, 이는 극적으로 다른 -그리고 아마도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심지어 이후 방송에서도 본인이 직접 이라크를 침공하지 않은 이유를 정확히 설명하기도 하였다. 10여년 뒤 아들내미의 행보를 생각해보면 거의 예언같은 통찰력이다. 사담 제거에 성공했다는 점을 제외하면 미래로 표현한 것을 과거로 표현해도 문제될 점이 없다. 즉 아들 부시가 이라크전을 일으킨 것은 흔히 말하듯이 아버지 부시의 정책을 이어받은 게 아니라, 뒤집어 엎은 것이었다. 아버지 부시는 아들 부시가 일으킨 이라크전과 같은 전쟁이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지 이미 예측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걸프전 당시에는 이라크를 점령해도 명분상으로는 문제가 없었으며[23] 이라크에서 가장 거대한 권력을 가진 시아파가 준 우방이었다. 게다가 미국에 대한 평판도 그리 나쁘지 않았던데다가, 미국과 사이가 나쁘다는 이란도 후세인 정권 축출에는 적극적으로 동참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음에도 그랬다. 반면 이라크전 때는 이미 미국의 일방주의로 인해 평판이 바닥으로 추락한데다 시아파도 수니파와 같은 미국의 적이었으니 더욱 그렇다.
전쟁 이전의 외교적 노력 수행 단계에서도 두 행정부의 차이는 극명하다. 걸프전 당시 H. W. 부시 행정부는 군사력을 직접적으로 사용하기 전에 치밀하고 광범위한 외교전을 수행했다. 이때 미국의 외교적 역량이 어떠했느냐면, 당장 이라크의 위협에 직면한 역내 동맹국과 우방국은 물론이고 역외 동맹 및 우방, 심지어 '''적대국인 시리아'''까지 전쟁에 동의하고 참전하도록 만들 정도였다. 그야말로 다자적 접근의 모델. 정당성을 확고히 하기 위해 국제연합의 결의 아래에서 군사력을 사용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24] 반면 이라크전은 미국의 역내/역외 동맹과 우방을 가릴 것 없이 맹렬한 반대에 직면했으며, 국제연합의 승인조차 받지 못했다. 물론 미국은 동맹국과 우방국도, 국제연합도 알 바 아니며 미국의 압도적인 군사적 역량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일방주의적 행동방식을 보였다.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외교안보정책에는 '''외교정책이 실종되어 있었다.'''
[image]
걸프전 당시 부시의 외교안보팀. 왼쪽부터 미합중국 공군 퇴역 장군 출신인 브렌트 스코우크로프트 국가안보보좌관, 딕 체니 국방장관, 부시 대통령, 콜린 파월 합참의장
물론 딕 체니(국방장관 → 부통령)나 콜린 파월(합동참모의장 → 국무장관)과 같은 인사들은 아들 부시때까지 중임되긴 했지만, 파월은 아버지 부시 때건 아들 부시 때건 늘 전쟁을 내켜하지 않은 온건파에 가까웠고 H. W. 부시 행정부 당시 대외정책을 주도한 것은 대통령 본인과 스코우크로프트 안보보좌관이었다. '''UN 대사, 국무부 중국 연락사무소장으로 외교판에서 잔뼈가 굵다 못해 CIA 국장까지 지낸 대통령이 딕 체니에게 외교안보적 사안으로 자문을 구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1991년 우크라이나에서 행한 연설도 유명하다. 당시 소련은 1991년 화폐개혁의 실패와 민족주의의 발흥으로 호흡기만 겨우 달고 있는 상태였고 우크라이나에서는 독립의 열기가 점차 높아지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런 시절에 우크라이나에 가서 "미국은 멀리 있는 폭군(소련)을 없애자고 현지(우크라이나)의 독재자를 내세우지도 않을 것이고 인종적 증오에 뒷받침된 자기파괴적인 민족주의를 지원하지도 않을 것이다"라는 내용. 이 내용은 당시 높아져가는 우크라이나 독립열기에 찬물을 끼얹은 연설로 유명하다. 소련으로부터의 즉각적인 독립을 원하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이 연설에 매우 실망했고 소련에 반대하던 우크라이나에 심정적인 동조를 보내던 미국내 보수주의자도 이 연설을 크게 비판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치킨 키예프'라는 이름의 우크라이나 닭고기 요리가 널리 퍼진 때였고[25] 미국의 보수 평론가는 치킨이라는 단어가 미국에서 겁쟁이를 상징한다는 사실에 착안해 이 연설을 '치킨 키예프 연설(Chicken Kiev speech)'로 부르게되고 곧이어 정식 네이밍으로 굳혀졌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소비에트 연방은 공식적으로 해체되고 우크라이나는 독립을 얻었다.
2004년 부시는 우크라이나 독립열기에 찬물을 끼얹은 이 연설에 대해 해명하기를, 만약 당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이 무모한 행동을 벌였다면 모스크바로부터 강력한 저항이 있었을테고 결국 대참사가 벌어졌을 거라 언급했다. 당시에는 긴가민가했으나 이후 2008년 미국(아들 부시)과 서유럽의 지지를 믿은 조지아(그루지야)가 남오세티야 전쟁을 벌이다가 재앙을 불러왔고 2014년우크라이나에서 유로마이단 반러시아 시위의 성공(?)에 취한 과도정부가 우크라이나 극우 민족주의자를 정권에 참여시키고 러시아어를 제2외국어에서 폐지하는 등 브레이크 없는 폭주기관차의 모습을 보이다가 결국 러시아계가 밀집해 살고 있는 크림 반도가 독립하자고 나서고 러시아군이 개입하며 사실상 동서 분할된 상황(크림 반도는 아예 러시아 연방으로 편입)이 되자 1991년 당시 부시의 혜안이 타당했다는 평가가 점점 지지를 얻고 있다. 실제로 당시 소련의 당과 군을 비롯한 보수파들을 가장 자극한 문제는, 캅카스와 발트에서 독립하겠다고 민족주의자들이 궐기하는 상황이었고, 리투아니아 독립 사태는 고르바초프를 중심으로 결집하여 소련을 강화하자던 KGB 등의 초강경파의 입장을, 배신자 고르바초프를 축출하고 반동들을 때려잡자는 더욱 극단적 방향으로 기울게 했다. 동독에서의 철수 시작, 통일 독일의 나토 가입 등 계속 실추되는 소련의 국제적 위상에 분노하던 보수파들인데, 만약 앞마당처럼 여기던 우크라이나까지 떨어져나갔더라면 분노의 폭발성은 더욱 높아졌을 가능성이 높다.
경제 문제도 사실 레이건 때의 설거지를 맡은 판이라[26][27] 그다지 큰 비판을 받지 않는다. 아들과는 달리 공부해서 명문대 갔고 전쟁에도 참여했으니 애시당초 능력치나 마음가짐이 달랐을 것이다.
대단한 것은, 부시 이전까지의 CIA는 한창 미국 내부의 정치인들과 여론에게 털리던 시기라서 CIA 국장으로 가는 것은 정치 경력의 마지막 줄을 쓰는 것과 다름 없었고, 털리기 전에도 CIA라는 부서의 특성상 양지에서 큰일을 맡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부시는 사상 처음으로 CIA 출신으로 권력의 핵심에 올라섰고, 대통령이 되었다.[28][29] 포커 쳐서 CIA 국장 자리를 따낸 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 셈. 또 부시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는 CIA가 정치계나 언론에 의해 털리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고 한다. 뭐 그 이전에 이미 그럴 여지도 없을 정도로 꽉 조이고 있었지만.
파나마 침공에도 내정간섭 침공이다 하여 비난을 받는데, 아들부시가 대량살상무기 생산에 대한 증거도 확실치 않고 무작정 이라크를 침공한 경우와는 다르다. 일단 노리에가가 마약밀수하는 증거가 확실했던데다가 마약밀수범을 잡으러온 미군을 총살하는 도발을 했음을 감안해야 한다.

4. 기타



일본에 갔다가 식중독에 걸려서 일본 총리 미야자와 기이치 앞에서 구토를 한 적이 있다. 만찬에서 일어난 일인데, 경호원들이 질식사를 막기 위해 책상을 뛰어넘어 기도를 확보하느라 잠시 소동이 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일본이 잘나가던 끝물이라 유약한 부시가 일본의 기세에 질려 토한 건 아니냐고 비아냥대는 반응도 있었다. 경호원들이 응급처치를 하고 나서 벌떡 일어나 어퍼컷 세레모니를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20세기의 대통령 중에서 전임자가 사망하지 않고 부통령을 거쳐 바로 다음 대선에서 대통령이 된 유일한 인물이다[30].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39대 지미 카터, 45대 도널드 트럼프와 마찬가지로 재선에 실패한 미국 대통령으로, 조지 H. W. 부시 이후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모두 재선에 성공했다. 또, 마지막으로 재선에 실패한 미국 대통령이었으나 28년만에 사이가 좋지 않았던 어느 공화당 출신 아웃사이더 대통령에 의해 깨진다.
존 애덤스에 이어 역대 미국 대통령들 중 두 번째로 대통령 아들을 둔 대통령으로, 묘하게도 애덤스 부자도 아들인 존 퀸시의 미들네임을 빼면 이름이 동일하다.
보통 미국 대통령의 대통령 이전 경력으로는 (하원, 상원)의원, 주지사 출신이 많은데 드물게도 CIA 국장 출신이다.
아시다시피 우호관계에 있던 국가 중 하나인 대한민국의 시기로서 본다면 노태우 시절 그 자체.(김일성은 근 말년에 가까웠다.)
식성이 매우 까다로웠다고 하며, 편식도 굉장히 심했다. 좋아하는 음식은 돼지껍데기 스낵이었다. 심지어 백악관에 입주하자마자 요리사를 불러서 식단에 삶은 당근브로콜리콜리플라워를 몽땅 다 빼버리라고 요구했다. 브로콜리는 어지간히 싫어했는지,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짜증을 냈다고 한다. 영양학자들은 대통령의 이러한 공식 행동이 아동들의 편식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고 우려했으며, 농부들이 집단 항의를 하기도 했다. 2018년 그의 장례식에서 아들 조지 W. 부시는 추모사를 할때 이런 아버지의 편식을 언급하며 자신도 그 식성을 물려받았다는 작은 유머를 하여서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또한 걸프 전쟁 이후 암살당할 뻔하기도 했다. 배후는 물론 당시 이라크의 지도자였던 사담 후세인으로 이 영향 때문인지 그의 아들이였던 조지 W. 부시는 사담 후세인에 대해 '''"한때 우리 아버지를 죽이려고 했던 자."'''라고 언급하는 등 적개심을 드러냈고 결국 이 악연이 이라크 전쟁이라는 헬게이트를 연 대에 일조한 것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
지미 카터와 동갑인데 사실 카터보다 4개월 정도 생일이 빠르다.[31] 2017년 11월 25일을 넘겨 생존하고, 2018년 6월 12일(본인 생일)로 94세가 되면서 역대 미국 대통령 중 가장 장수한 대통령 타이틀을 제럴드 포드 대통령에게서 가져오게 됐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30일 향년 9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할리우드에서 만드는 영화들이 경찰을 너무 죽이고 문제되는 게 많다고 비난하다가 공화당 지지자인 아놀드 슈왈제네거까지 비난하라는 역반격에 처해 경솔했다고 꼬리를 내린 적도 있다. 자세한 건 터미네이터(영화)를 참고할 것.
인생의 동반자 바버라 부시와 함께 최초이자 유일하게 동년에 사망한 대통령이 되었다.(전직 신분으로)[32]
한국에 대해서는 '''"내가 죽기 전에 반드시 통일될 것"'''이라는 말을 한 적도 있다. 2018년에 사망함으로써 그 예언은 성취되지 못했으나 그래도 2017년 11월 26일부로 제럴드 포드의 기록을 깨고 전직 미국 대통령 중 최장수 대통령의 기록은 세웠다. 그러나 4개월 늦게 태어난 동갑내기 지미 카터가 2019년 이후 부시의 기록을 깨다보니 지금은 2번째 장수 대통령이 되었다.
이라크 내전 개입을 검토중인 미군이 걸프 지역으로 '''USS 조지 H. W. 부시''' 항공모함[33]을 배치한다고 발표하여 호사가들이 이라크를 능욕하는 거냐며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아들 조지 W. 부시과는 다르게 동성결혼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메인 주의 동성결혼식에 부인 바바라 부시와 함께 참석함으로서 사실상 확인.
재임 당시 한국에서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반미 시위가 자주 있었는데 그 때 사용되던 구호는 '조지 부시, '''조지'''고 '''부시'''자'였다. 물론 아들 부시에게도 같은 말이 쓰였다.
휴스턴 조지 부시 인터컨티넨털 공항은 그의 이름을 딴 공항이다.
휠체어와 스쿠터를 많이 이용했기 때문에 발목이 다 보여 다양하고 화려한 양말을 신었다. 장례식에도 전투기 양말을 신어 화제가 되었다.
한국의 전임 대통령인 김대중과 같은 년도에 태어났다. 김대중은 1924년 1월 6일생이다.[34]
미국의 화물철도 회사 유니언 퍼시픽은 조시 부시를 기념하는 특별도장을 한 기관차를 운용하고 있다. 전체적인 도색은 에어포스 원에서 유래했으며 차량열번은 4141 번으로 41대 대통령을 의미한다.
해당기관차는 2018년 12월 6일 조지 부시의 장의열차를 견인하여 그의 마지막 여정을 함께했다.

5. 매체에서



심슨 가족에 찬조 출연해서 호머 심슨 옆집으로 이사를 오는 에피소드가 있다(1996년 7시즌 13회). 명대사는, 자서전 집필 도중 중얼거리며 한 말인 '''재선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 안 했다'''. 결국 호머와 바트 심슨의 등쌀에 시달려서 스프링필드를 떠나버린다. 마지막에 호머와 영혼의 맞다이(...)를 뜨면서 호머가 이기며 말하는 '''세금 네 멋대로 올린거 사과해!!!'''가 가히 압권. 그리고 그 자리에 이사 오는 것은 제럴드 포드 전 대통령. 그는 호머와 매우 죽이 잘 맞아 순식간에 친구가 되며 끝난다. 이 에피소드에서 바바라 부시 여사는 굉장히 온화한 할머니로 나온다. 바트가 조지 부시의 집안에서 사탕 찾는답시고 다 어지르자 바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노인들은 사탕을 잘 안 먹는다며 쿠키를 구워주겠다고 한다. 그리고 조지 부시는 이걸 바라보면서 "나한테는 쿠키 안 구워줬는데"라고 중얼거린다. 이후 21시즌의 심슨 20주년 스페셜 영상에도 출연했다. 재미있는게, 대통령 시절 1990년에 조지 부시는 심슨 가족에 대해 '미국의 가족상을 훼손한다'고 비판한 적이 있었는데, 제작진들은 Stark Raving Dad'(3시즌 1회)에서 부시를 까면서 응수했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검프와 탁구를 치는 장면이 나올 뻔 했으나 제작진이 포기하고 삭제했다. 원래 장면은 부시가 중국 주재 대사로 활동하던 시절 중국 선수와 탁구를 치는 장면이었다. 제작진들은 힘들게 탁구 장면을 합성 제작했지만, 완성하고 보니 영화의 전체 흐름과 맞지 않아서 결국 뺐다고.
마이클 무어식코에 등장해서 캐나다의 의료체계를 마구 비난하는 장면으로 한컷 등장한다.
바이스에서 부통령 시절 모습이 묘사된다. 공화당 하원의장 체니를 방문하여 지지를 청하는데 이때 등장한 아들의 깽판에 뒷수습하기 위해 퇴장한다. 딕 체니의 꼭두각시 정도로나 묘사되는 아들 부시와 달리 능력은 있는 인물로 묘사된다. 미국 배우 존 힐너가 분했다.

6. 가정



7. 관련 문서



[1] "지미 카터 前 대통령"과 생년은 똑같지만 미국의 9월에 입학하는 커리큘럼상 조지 부시 前 대통령이 1학년 더 일찍 취학했다"라고 오해하는데 사실 지미 카터 前 대통령은 이보다 더 빨리 졸업하여 '''1941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근데 부시 前 대통령은 1942년에 해군장교로 입대하고 카터 前 대통령은 1943년에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했느냐면 카터 前 대통령은 2년 동안 조지아 공대에서 대학생활을 하고 편입했기 때문이다.[2] 1988년 8월 부시가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에서 한 말이다. 이 때 부시는 민주당이 세금을 올리면 자신이 막겠다면서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가리키며 이 말을 했다고 한다. 세금 인상이 더 이상 없다는 말로 한 공약이었지만, 그는 걸프 전쟁으로 인한 재정적자로 이 말을 지키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상당한 증세를 하게 된다.''' 이에 빌 클린턴과 앨 고어 캠프는 "입술을 보지말고, 기록(record)을 보세요. 진짜 감세는 우리가 합니다."라며, 이를 대놓고 1992년 대선 캠페인에 활용하기도 했다.[3] 이 쪽이 더 많이 쓰인다.[4] 역시 이 쪽으로 더 많이 부른다.[5] 부유층 자제들이 주로 다니는 기숙사형 사립학교.[6] 이사람이 훗날 부시와 결혼해 아들 조지와 잽 등을 낳는 바버라 부시다.[7] 일본군의 식인 사례중 하나로 유명한 사건. 다치바나 요시오 부대장이 마시다가 '''안주에 고기가 없다'''는 이유로 포로를 죽여서 먹었다. 나중에 전범 재판에서 사형 선고.[8] 만일 그렇게 되었다면 전후에 태어난 아들 부시도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고 이 결과로 미국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란 농담이 있다.[9] 이들은 1988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대통령 후보와 민주당 부통령 후보로 다시 만나게 된다.[10] 당시에는 아직 미국과 중국이 정식으로 수교하기 전이어서 대사관이 아닌 연락사무소를 운영했다. 말하자면 비공식 주중 대사를 맡았던 것.[11] 타국의 UN 대사와 달리 UN 주재 미국 대사는 단순한 특명전권대사직이 아니라 국가안보회의에도 상시 참석하는 요직이다. UN 본부가 미국 뉴욕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 그리고 '연락사무소'는 미수교국들이 수교를 추진하는 상대 국가에 설치하는 외교공관이다. 공관장은 특명전권대사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다.[12] 현재 버지니아에 위치한 CIA 본부 청사도 1999년부터 그의 이름을 딴 '조지 부시 정보센터'(George Bush Center for Intelligence)로 명명되었다.[13] 이 점에서 조지 허버트 부시를 '재선에 실패한 미국 대통령들 중에서는 최고'(best one-term President)로 평가하는 시각도 있다.[14] 당시 빌 클린턴의 '문제는 경제야, 이 바보야!(It`s economy, stupid!)' 구호가 유명하다.[15] 이때 아내인 바바라 여사가 '''"언제 철이 들려는지"'''라고 말했단다. [16] 사실 이렇게 외모가 변한 것도 2015년 이후로, 2014년 스카이다이빙(...) 할때까지만 해도 비교적 동안이었다.[17] 미국 중부 현지 날짜 및 시각. 동부 기준으로 밤 11시.[18] 2018년 12월 01일, 토요일 00시 36분, 미국 동부 날짜 및 시각[19] 이는 정치적 사상은 다르면서도 실제로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부시 가와 오바마 가의 관계도 있지만, 그 만큼 오바마 대통령 또한 부시 대통령을 인간적으로 존경하고 아끼던 마음에서 비롯된 걸로 볼 수가 있다.[20] 구체적으로는 지난 2016 미국 대통령 공화당 후보 선출 과정에서 트럼프가 역시 공화당 내 경선 후보였던 젭 부시와의 경쟁에서 지나친 감정싸움을 벌였다는 것. 하지만 그 외에도 부시 가족들은 트럼프의 여러 논란과 구설수들로 인해 트럼프를 수차례 공식적으로 질타하였다. 그리고 심지어 대통령 선거일에 타계한 H.W. 부시를 포함하여 가족의 몇몇 구성원들이 힐러리 클린턴에게 투표를 한 점이 알려진 것과 트럼프의 대통령 취임식에 아버지와 아들, 즉 살아있는 전직 대통령이 2명이나 참석하지 않아 관계가 극도로 악화된 것도 있다.[21] 미국 동부 현지 날짜 및 시각[22] 1989년파나마 침공을 말한다. 콜린 파월이 지휘봉을 잡은 첫 전쟁. 파나마의 독재자 마누엘 노리에가마약 밀수에도 관여하여, 미국이 체포하기 위해 병력 2만 4,000명을 파병하여 선거를 통해 새 대통령을 옹립했다. 노리에가가 '''자수'''한건 1990년 1월이었다.[23]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인한 '쿠웨이트 해방'이라는 명분이 있었고 아랍 국가들 역시 '같은 아랍 형제국가를 다른 아랍 국가의 침략은 용납할 수 없다'란 의견이 강했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미국의 군사작전 또한 쿠웨이트에서 이라크 군을 몰아내는 것으로만 촛점이 모여있었다. 그 반미국가 시리아가 미국 편을 들었으며, 눈치없이 끝까지 이라크 편을, 그것도 상당히 온건한 자세로 들었던 예멘은 걸프전 이후 중동의 왕따가 되어서 예멘 외노자들이 추방당하는 등 경제적 보복까지 당했다.[24] 대신 이슬람의 성지가 있는 사우디아라비아미군을 주둔시키면서 먼 훗날 아들과 미국의 대외정책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 테러리스트들의 대부를 분노하게 만들게 되지만. 물론 이건 부시의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다. [25] 소련에서 치킨 키예프가 외식메뉴로 흔히 먹은 음식으로, 안에 버터가 들어간 치킨가스라고 보면된다.[26] 이 점은 오바마도 마찬가지. 현재 오바마를 공화당이 까는 건 공화당의 이념적인 성향이 티파티 등의 영향력으로 인해 부시 시절보다도 더 우향우, 자유의지주의로 간 게 크다.[27] 그리고 90년대 초반의 불황은 그렇게 오래가지도 않았고, 강도도 대침체에 비하면 약과였다.[28]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두번째로 현직 부통령의 저주를 깬 인물이다. 여러모로 나름 입지전적인 인물. 음모론이 돋기도 하고...(예컨데 리처드 닉슨은 현직 부통령으로서 출마했을 때는 패배했고, 이후에야 당선되었다. 앨 고어의 패배야 말할 것도 없고. FDR의 3기 부통령이었던 월리스도 대선에서 참패를 당했다.) 첫번째는 앤드루 잭슨의 부통령이었던(1833~1837) 마틴 밴 뷰런. 존 애덤스와 토머스 제퍼슨의 경우는 차점자가 부통령을 하던 시대라 제외.[29] 동시에 카터와 함께, 루즈벨트 이후 대통령 중 재선에 실패한 대통령이기도 하다. 참고로 밴 뷰런도 재선에 실패했다.[30] 이 기록도 본래는 앨 고어가 당선 됐다면 고어에게 넘어갔겠지만, 부시 이후 부통령 경력을 마치고 대선 치러서 당선한 사례가 없어 현 기준으론 부시가 최신. 조 바이든은 2020년 대선에서 당선되었지만, 2016년 대선을 건너뛰었기 때문에 바로 다음 대선은 아니다.[31] 미국은 9월생을 기준으로 학년을 끊으므로 아버지 부시는 1923년 9월 1일 ~ 1924년 8월 31일 생과 같은 학년, 카터는 1924년 9월 1일 ~ 1925년 8월 31일생과 같은 학년이 되므로 학년은 아버지 부시가 한 학년 위다. [32] 즉 역대 미국 대통령 & 영부인 중에 최초이자 유일.[33] 니미츠급 항공모함의 최신형이자 마지막 항모다. 이후 항모 시리즈는 제럴드 R. 포드급 항공모함으로 계승된다.[34] 이 외에도 대통령이 많이 태어난 해는 1946년을 들 수 있는데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 도널드 트럼프, 노무현이 이 해에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