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케네디
1. 생애
자식들 중 하나라도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여긴 조지프 패트릭 케네디와 로즈 케네디의 9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은행업, 영화 산업, 부동산 사업으로 거부가 된 아버지 덕에 어린시절은 매우 유복하게 자랐다. 큰 형 조지프의 경우 아버지가 장남을 대통령으로 키우기 위해 엄하게 키웠지만, 에드워드는 아버지가 중년이 된 후에 얻은 막내라서 큰 형들과 달리 아버지가 매우 귀여워하며 키웠다고 한다.
버지니아 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한 직후 형 존 F. 케네디의 대선 캠프에 참여했다. 이후 형 존의 지역구였던 매사추세츠주에서 법적으로 상원의원 출마가 가능한 나이인 30세가 되자마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형이 의회 내에 세력 기반 및 커뮤니케이션 채널을 구축하기 위해 에드워드의 선거전을 전폭 지원해주기도 했고, 어차피 메사추세츠주 선거구는 무척 자그마한 규모이고 그의 외할아버지대부터 케네디 가문이 막대한 부을 바탕으로 정치적 기반[2] 을 닦아놓은 곳이어서 에드워드는 대학 졸업 후 사실상 아무런 경력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큰 어려움 없이 당선되었다.
1944년 장남 조지프 패트릭 케네디 주니어가 2차대전 중 전사하고 1963년 둘째 형 존 F. 케네디가 대통령 재임 중에 암살당하고 1968년 셋째 형 로버트 F. 케네디가 1968년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중 암살당하면서 에드워드는 케네디 가의 막내에서 새로운 간판으로 떠올랐다. 불의의 사고로 타계한 형들의 뒤를 이어 대통령의 꿈을 품게 된다.
그러나 1969년 7월 18일 차를 타고 가다가 물에 빠져서 본인은 살아남고 동승한 여비서 메리 조 코페크네가 사망한 차파퀴딕 스캔들로 정치생명에 치명타를 입었다. 본인은 가라앉는 자동차에서 탈출했지만, 이후 10시간 동안 경찰에 신고를 하지 않은게 큰 문제였다. 심지어 이 10시간 동안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했다고 한다. 드디어 신고를 했을 때쯤에는 이미 동네 낚시꾼들이 물 속에 있는 자동차를 발견해서 다이버가 시체까지 건져낸 후였다. 게다가 여비서의 사인은 익사가 아니고 산소부족(...). 가라앉은 자동차 안에 형성된 에어포켓 안에서 4시간 정도는 살아있었지만, 결국 에어포켓 안의 산소고갈로 인해 질식사했다. 즉 에드워드 케네디가 곧바로 신고를 했으면 구해낼 수도 있었다는 말. 이렇다 보니, 에드워드가 여비서와의 부적절한 관계[3] 를 숨기려고 그녀를 고의적으로 구조하지 않고 죽도록 방치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또한 일각에선 무려 10시간 동안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국가지도자라면 필수적인 위기상황에서의 판단력을 문제삼기도 했다. 이런 대형사고에도 불구하고 가문의 후광으로 고작 징역 2개월, 집행유예 1년, 운전면허 정지 1년으로 끝났다. 이 사건은 매사추세츠주 차파퀴딕 섬의 별장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차파퀴딕 스캔들로 불리게 된다.
이 스캔들은 2018년에 영화로도 나왔으며 그보다 한참 전인 1990년대 초반에 조이스 캐럴 오츠가 차파퀴딕 스캔들을 소재로 해서 '블랙 워터'라는 단편을 발표한 바 있다.
이후 1980년과 1988년에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도전했지만, 차파퀴딕 스캔들의 여파로 모두 당내 경선에서 낙선하면서 다선 상원의원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사실상 고의로 인사사고를 내고도 정치생명이 끝나지 않은 게 기적이다.
2008년 미 대선에서 조카딸과 함께 오바마를 지지했고, 이듬해인 2009년 8월 25일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