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미국 대통령 선거

 

'''1980년 미국 대통령 선거'''
[image]
주별 선거인단 선거 결과

1976년 11월 2일
1976 대선

1980년 11월 4일
'''1980 대선'''

1984년 11월 6일
1984 대선
}}} ||
'''선거 일시'''
11월 4일 5시 ~ 11월 5일 6시 (UTC)
'''투표율'''
52.6%
'''선거 결과'''
'''후보'''
'''민주당'''}}}]]
'''대통령 지미 카터
{{{-2 부통령 월터 먼데일'''
'''공화당'''}}}]]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
{{{-2 부통령 조지 H. W. 부시'''
'''선거인단'''

49명
'''489명'''
'''전국 득표'''

41.0%
35,480,115표
'''50.7%
43,903,230표'''
'''대통령 당선인'''
'''부통령 당선인'''
}}}
1. 개요
2. 배경
3. 경선
3.1. 민주당
3.2. 공화당
4. 본선
5. 결과
5.1. 접전지
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1980년 대선 선거방송 (NBC)'''[1]
제39대[2] 내지 제40대[3] 미국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 1980년 11월 4일 ~ 11월 5일까지 실시된 선거.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 후보가 선거인단 과반수를 확보해 당선되었다.
공화당로널드 레이건 후보가 압승을 거둬 공화당이 4년만에 다시 정권을 찾아왔으며 그보다 1년 앞서 총리 자리에 오른 영국마거릿 대처와 함께 신보수주의, 신자유주의가 전성기를 맞이하는 데 기여했다.

2. 배경


'''지미 카터 대통령의 임기 중 지지율'''
1976년, 힘겹게 포드를 꺾고 정권 교체에 성공한 지미 카터였지만 도덕주의 외교의 실패[4], 2차 석유 파동의 여파로 찾아온 스태그플레이션으로 곧바로 위기를 맞이하게 됐다. 여당인 민주당 내에서는 청견동맹으로 대표되는 보수파와 새롭게 당내 주도권을 차지하려는 리버럴계가 극한의 갈등을 보이고 있었고 원래 당내 입지가 단단하지 못했던 카터는 대선 승리에도 불구하고 쉽게 당을 장악하지 못했다.
거기에 데탕트 이후 완화되던 미국과 소련간 갈등이 1980 모스크바 올림픽 보이콧을 계기로 다시 표면화되면서 냉전의 위기감이 다시 강해졌다. 카터는 도덕 외교를 내세워 소련의 2차 아프간 침공에 반발해 올림픽 불참을 지시했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미국의 동맹국들도 모스크바 올림픽에 불참하면서 제1세계를 대표하는 미국의 위상을 다시 한번 보여주기도 했다.

3. 경선



3.1. 민주당


'''1980년 경선에서 맞붙은 지미 카터와 에드워드 케네디'''
보통이라면 현역 대통령이 형식적 경선을 통해 재신임을 받는 모습을 나왔겠지만 연이은 위기 대처 실패로 현역 대통령인 카터의 지지율이 갤럽 기준 28% 수준까지 하락함에 따라 재선 전망이 불투명하다는 당내 분석이 나왔고, 당내에도 정권 재창출을 위해 후보 교체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존 F. 케네디의 동생인 에드워드 케네디가 그 뜻을 모아 카터의 도전자로 나섰다. 1976년 당시에는 차파퀴딕 스캔들 여파로 출마를 고사했지만 가족들과의 상의 결과 드디어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출마를 결심한 것. 인기가 떨어진 현역 대통령당내 비주류 세력의 지지를 받는 강력한 도전자. 마치 1976년 대선 당시 공화당의 모습이 이번에는 민주당에서 나오게 됐다. 실제로 막 노조와 진보 세력의 요구를 받아 에드워드 케네디가 출마를 결심하던 시점만해도 당내 여론조사에서 카터를 60:30 수준으로 앞서고 있었다.
하지만 당내 강경파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던 레이건의 사례와 달리 케네디는 당시 조 바이든 연방 상원의원[5] 등 당내 소장파 세력의 지지를 충분히 받지 못했다. 그렇다고 당내 주류 세력의 지지를 받던 상황도 아니었던데다가 오히려 경선 초반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이 발생하면서 국가적 위기 상황에 따라 현직 대통령 카터의 인기가 올라가 1월 아이오와 코커스와 2월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에서 연달아 패하면서 모멘텀이 넘어가고 말았다.
3월 11일 슈퍼 화요일에도 카터가 6개주에서 전승을 거둬 승기를 잡았고, 케네디가 뒤늦게 코네티컷과 뉴욕, 펜실베이니아 등 동북부주에서 승리하면서 반격을 시도했지만 중남부의 압도적 지지를 받는 카터가 대의원의 절반 이상을 확보하면서 사실상 후보 지명을 확정지었다. 하지만 케네디는 마지막까지 사퇴를 거부했고 결국 8월 11일부터 14일까지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지명 투표를 거쳐 카터가 대의원 중 2,123명(64.04%)의 지명을 획득해 재선에 도전할 수 있게 됐다.
경선이 막 열리던 시점만해도 분명히 카터가 위기였지만, 패기를 내세워 동서 분할 전략을 완벽하게 성공시키며 당선된 존 F. 케네디와 암살이 없었다면 1968년에 후보 지명을 받았을 로버트 F. 케네디라는 두 거물 형과 달리 테드 케네디는 인간적 매력이 떨어진다는 평을 받았고, 선거전 과정에서 일관된 메세지를 내세우지 못하면서 스스로 패배를 자초했다.

3.2. 공화당


'''후보 지명 수락 연설 중인 로널드 레이건'''
4년전 지미 카터에게 일격을 맞아 정권을 내줘야했던 공화당이지만 스태그플레이션,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촉발된 냉전 구도의 부활 등 여러 위기로 카터 행정부의 지지율이 1979년 말에는 20% 수준까지 추락하면서 정권 탈환의 호기를 잡게 된다.
로널드 레이건은 1976년 경선 패배 이후 줄곧 공화당의 가장 유력한 차기 후보로 손꼽히고 있었고, 그 역시 선거 캠페인 전략가인 존 시어스의 조언을 받아 '싸움 위에서(above the fray)' 전략을 고수하며 여러 행사나 후보 토론회 등에 참석을 거부하며 우위를 유지하며 본선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빈틈을 노린듯 제럴드 포드 행정부 시절 CIA 국장을 지냈던 조지 H. W. 부시가 레이건이 자리를 비웠던 수많은 행사와 토론회에 적극적으로 참석해 자신을 어필했고 경선을 앞둔 1980년 1월 갤럽 여론조사에서는 두 후보간 격차가 1%p까지 좁혀지는 등 생각지 못한 대항마로 떠올랐다.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근소한 차이로 부시가 레이건을 누르면서 이변이 현실화되는듯했다. 하지만 푸에르토리코 경선을 건너뛴 레이건이 전략을 바꿔 부시와 양자 토론회 자리에 참석해 정견을 밝히는 등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에 집중해 큰 차이로 이기면서 균형의 추를 맞췄다. 하지만 이번엔 온건주의 공화당원들의 지지를 받은 존 B. 앤더슨이 매사추세츠와 버몬트, 일리노이 등 북동부주에서 선전하면서 레이건의 대세론에 또다른 도전자로 등장했다.
하지만 압도적인 남부, 그리고 캘리포니아의 지지를 받은 레이건은 이후 대다수의 경선에서 승리하며 51개 중 44개 주에서 승리, 5월 26일에 후보 지명을 확정지었다. 특히 부시의 정치적 기반인 텍사스에서도 레이건이 승리했다. 존 B. 앤더슨은 경선 중이던 4월 24일, 사실상 승리가 힘들어졌다고 판단해 독자 후보 출마를 선언했으며 부시는 패배를 받아들이는 대신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전당 대회에서 부통령 후보 자리에 지명되면서 레이건의 러닝메이트가 되었다.

4. 본선



'''카터와 레이건이 맞붙은 유일한 토론회가 된 2차 토론회'''
1980년 대선은 1932년 대선 이후 양당 후보가 가장 대비되는 대선 캠페인을 펼친 것으로 평가받는다. 레이건이 국방력 강화를 외치면서도 "다시 미국을 위대하게 만듭시다."(Let's Make America Great Again)을 구호 삼아 낙관주의적인 캠페인을 펼친데 비해 카터는 레이건에 대한 네거티브에 힘쓰며 레이건이 대통령이 될 경우 뉴딜 정책이 후퇴하고 시민권과 사회보장제도가 위협받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레이건은 경제 정책에 있어서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이후 가장 큰 변화를 몰고 올 공략을 내세웠는데 세의 법칙을 바탕으로 한 공급주의 경제정책으로의 복귀를 통해 재정 건전성을 회복하고 세율을 낮춰야 스태그플레이션을 탈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레이건이 이때 한 말 중 "불경기란 당신의 이웃이 실직할 때를 말합니다. 불황이란 당신이 실직할 때를 말합니다. 경기회복이란 지미 카터가 실직할 때를 말합니다."는 지금도 미국 선거사를 돌아볼때 자주 회자는 말이기도 하다. 또한 그와 더불어 미국의 국방력을 회복해야 한다면서 국방 예산을 대폭 증가시킬 것을 약속했다. 반면 카터는 레이건의 경제 공략을 비판하면서도 본인이 대안이 될만한 공략은 내놓지 못했고 이것이 오늘날에는 대선 패배의 단초가 됐다고 평가받는다.
사회 정책에 있어서는 각 주의 권리를 강조하면서 연방 정부의 역할을 축소해야한다면서 지난 대선에서 카터를 지지했던 남부주의 유권자들을 흔드는데 성공했지만 언론으로부터는 주권(States' rights)이라는 도그 휘슬을 통해 남부주에 잠재된 혐오와 인종차별을 자극한다며 비판받았다. 또한 공화당을 탈당해 무소속으로 독자 출마한 앤더슨 역시 1차 토론회[6]에서 레이건에게 맹공을 퍼부었다. 하지만 오히려 레이건이 성공적으로 토론회를 마무리하면서 앤더슨의 지지율만 떨어져 2차 토론회 참석 자격을 잃는 결과를 만들고 만다.
여론조사에서는 카터의 실정에 대한 반발로 레이건이 근소하게 우위를 잡고 있었고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에서 열린 2차 토론회에서도 레이건이 선전하면서 우위를 굳혔다. 당시 토론회 직후 여론조사에서 레이건의 의견에 동감한다는 의견은 무려 66%에 달했다. 당시 토론회를 무려 8060만명이나 시청했는데 2016년 대선에서 기록이 경신될때까지 무려 36년이나 최고 시청자 수 기록으로 유지되었다.
하지만 앤더슨의 지지율이 빠지면서 카터의 지지율이 상승해 두 후보 지지율이 다시 오차범위 이내로 줄어들었고 투표일 직전 마지막 여론 조사에서는 레이건이 47%, 카터가 44%를 기록하며 레이건이 3%p 차의 아슬아슬한 리드를 잡고 당일을 맞이하게 됐다.

5. 결과


'''최종 선거 결과'''
[image]
투표 시간
1980년 11월 4일(UTC +9)
투표 결과
후보자
로널드 레이건
지미 카터
'''선거인단 수'''
'''489 / 538명'''
'''49 / 538명'''
전국 득표 수
43,903,230표 (50.7%)
35,480,115표 (41.0%)
'''대통령 당선인'''
'''부통령 당선인'''
}}}
결국 전직 캘리포니아 주지사였던 로널드 레이건이 여론조사보다 더 큰 차이로 카터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공화당으로서는 4년만의 정권 교체로 공화당과 민주당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던 남부 주를 완전히 공화당의 몫으로 돌리고 대부분의 주에서 승리를 거두는 압승을 거두며 민주당에 1972년을 생각나게 하는 굴욕을 선사했다. 실제로 텍사스와 딥 사우스인 앨라배마, 미시시피, 사우스캐롤라이나는 이 시기부터 2020년 대선까지 쭉 압도적으로 공화당을 지지하게 된다.
카터로서는 공화당의 존 B. 앤더슨이 독자출마한 것이 뼈아프게 작용했는데, 카터 행정부에 실망했지만 차마 레이건을 찍지 못하던 북부주 유권자들에게 제3의 선택지가 되어준 바람에 표가 분산되어 레이건이 북부에서도 압승을 거두게 된 것. 카터는 전임 제럴드 포드를 1932년 허버트 후버의 재선 실패 이후 44년만에 첫 단임 대통령으로 만든 굴욕을 선사한지 4년만에 본인 역시 단임 대통령이 되고 말았다. 거기다 조지아 주를 제외한 모든 남부 주가 본인에게 등을 돌리면서 카터만이 아니라 이후 민주당이 1992년 빌 클린턴이 나타날때까지 12년간 매우 심한 어려움을 겪게 된다.
함께 열린 연방 상원 선거에서도 공화당이 워싱턴, 아이다호, 앨라배마, 플로리다, 조지아[7], 인디애나, 아이오와를 포함해 총 12개의 선거구에서 승리하며 상원 다수당 지위도 탈환했다. 하원에서도 공화당이 34석을 뒤집었지만 결국 민주당이 243석을 지켜 다수당 지위를 유지하면서 레이건이 임기 초반 하원과의 관계 설정에 어려움을 겪게 됐다.

5.1. 접전지


'''1980년 미국 대통령 선거 접전지'''
'''주 이름'''
'''선거인단수'''
'''승자 득표율'''
'''패자 득표율'''
'''득표율 차이'''
'''지난 승리자'''
'''이번 승리자'''
'''결과'''
'''매사추세츠'''
'''14명'''
41.90%
41.75%
0.15%
'''지미 카터&
월터 먼데일'''

'''로널드 레이건&
조지 H. W. 부시'''

'''공화당 탈환'''
'''테네시'''
'''10명'''
48.70%
48.41%
0.29%
'''지미 카터&
월터 먼데일'''

'''로널드 레이건&
조지 H. W. 부시'''

'''공화당 탈환'''
'''아칸소'''
'''6명'''
48.13%
47.52%
0.61%
'''지미 카터&
월터 먼데일'''

'''로널드 레이건&
조지 H. W. 부시'''

'''공화당 탈환'''
'''앨라배마'''
'''9명'''
48.75%
47.45%
1.30%
'''지미 카터&
월터 먼데일'''

'''로널드 레이건&
조지 H. W. 부시'''

'''공화당 탈환'''
'''미시시피'''
'''7명'''
49.42%
48.09%
1.33%
'''지미 카터&
월터 먼데일'''

'''로널드 레이건&
조지 H. W. 부시'''

'''공화당 탈환'''
'''켄터키'''
'''9명'''
49.07%
47.61%
1.46%
'''지미 카터&
월터 먼데일'''

'''로널드 레이건&
조지 H. W. 부시'''

'''공화당 탈환'''
'''사우스캐롤라이나'''
'''8명'''
49.57%
48.04%
1.53%
'''지미 카터&
월터 먼데일'''

'''로널드 레이건&
조지 H. W. 부시'''

'''공화당 탈환'''
'''하와이'''
'''4명'''
44.80%
42.90%
1.90%
'''지미 카터&
월터 먼데일'''

'''지미 카터&
월터 먼데일'''

'''민주당 유지'''
'''노스캐롤라이나'''
'''13명'''
49.30%
47.18%
2.12%
'''지미 카터&
월터 먼데일'''

'''로널드 레이건&
조지 H. W. 부시'''

'''공화당 탈환'''
'''델라웨어'''
'''3명'''
47.21%
44.87%
2.34%
'''지미 카터&
월터 먼데일'''

'''로널드 레이건&
조지 H. W. 부시'''

'''공화당 탈환'''
'''뉴욕'''
'''41명'''
46.66%
43.99%
2.67%
'''지미 카터&
월터 먼데일'''

'''로널드 레이건&
조지 H. W. 부시'''

'''공화당 탈환'''
'''메릴랜드'''
'''10명'''
47.12%
44.18%
2.94%
'''지미 카터&
월터 먼데일'''

'''지미 카터&
월터 먼데일'''

'''민주당 유지'''
'''메인'''
'''4명'''
45.61%
42.25%
3.36%
'''제럴드 포드&
밥 돌'''

'''로널드 레이건&
조지 H. W. 부시'''

'''공화당 유지'''
'''미네소타'''
'''10명'''
46.50%
42.56%
3.94%
'''지미 카터&
월터 먼데일'''

'''지미 카터&
월터 먼데일'''

'''민주당 유지'''
'''웨스트버지니아'''
'''6명'''
49.81%
45.30%
4.51%
'''지미 카터&
월터 먼데일'''

'''지미 카터&
월터 먼데일'''

'''민주당 유지'''
'''위스콘신'''
'''11명'''
47.90%
43.18%
4.72%
'''지미 카터&
월터 먼데일'''

'''로널드 레이건&
조지 H. W. 부시'''

'''공화당 탈환'''
'''루이지애나'''
'''10명'''
51.20%
45.75%
5.45%
'''지미 카터&
월터 먼데일'''

'''로널드 레이건&
조지 H. W. 부시'''

'''공화당 탈환'''
'''버몬트'''
'''3명'''
44.37%
38.41%
5.96%
'''제럴드 포드&
밥 돌'''

'''로널드 레이건&
조지 H. W. 부시'''

'''공화당 유지'''
'''미시간'''
'''21명'''
48.99%
42.50%
6.49%
'''제럴드 포드&
밥 돌'''

'''로널드 레이건&
조지 H. W. 부시'''

'''공화당 유지'''
'''미주리'''
'''12명'''
52.16%
44.35%
6.81%
'''지미 카터&
월터 먼데일'''

'''로널드 레이건&
조지 H. W. 부시'''

'''공화당 탈환'''
'''펜실베이니아'''
'''27명'''
49.59%
42.48%
7.11%
'''지미 카터&
월터 먼데일'''

'''로널드 레이건&
조지 H. W. 부시'''

'''공화당 탈환'''
'''일리노이'''
'''26명'''
49.65%
41.72%
7.93%
'''제럴드 포드&
밥 돌'''

'''로널드 레이건&
조지 H. W. 부시'''

'''공화당 유지'''
'''코네티컷'''
'''8명'''
48.16%
38.52%
9.64%
'''제럴드 포드&
밥 돌'''

'''로널드 레이건&
조지 H. W. 부시'''

'''공화당 유지'''
'''오레곤'''
'''6명'''
48.33%
38.67%
9.66%
'''제럴드 포드&
밥 돌'''

'''로널드 레이건&
조지 H. W. 부시'''

'''공화당 유지'''
결과적으로는 레이건과 공화당의 압승으로 끝났지만, 남부주에서 펼쳐진 레이건과 카터의 맞대결은 치열했다. 테네시, 아칸소, 앨라배마, 미시시피, 켄터키, 사우스캐롤라이나가 모두 2%p 내 접전이었던 것. 그래도 이 시점까지는 남부 유권자들 사이에서 블루독(전통적 민주당원)의 세가 적지 않았다는걸 방증하면서 동시에 바이블 벨트 내 복음주의 기독교도들의 활약으로 남부주 패권이 공화당으로 크게 이동했음을 나타낸다. 이 선거를 마지막으로 남부는 온전하게 공화당의 텃밭이 된다.
반면 북부주에서는 공화당 탈당파인 존 B. 앤더슨의 활약(...)으로 레이건이 아니라 카터의 득표율이 크게 내려가면서 레이건이 비교적 쉽게 이길 수 있었다. 특히 선거인단 41명이 걸린 뉴욕을 탈환한 것이 카터에게는 결정타가 됐다. 레이건은 일리노이에서 승리하면서 당선을 확정, 일리노이가 이번 선거의 Tipping point state가 되었다.

6. 관련 문서



[1]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사실상 모든 주가 푸른 색으로 채워진다(...) 시청 중 한가지 착각하면 안되는게 당시 NBC에서는 공화당의 상징색으로 푸른색, 민주당의 상징색으로 붉은색을 사용했다. 현대의 상징색(민주당=파랑, 공화당=빨강)이 정착되는 건 2000년 대선 무렵.[2] 현직 대통령인 지미 카터 승리 시[3] 도전자인 로널드 레이건 승리 시[4] 특히 이란 혁명과 대사관 인질 사건이 결정타였다.[5] 조 바이든은 당시 연방 상원의원 중 가장 이른 시점에 카터에 대한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6] 지미 카터가 불참을 선언하는 바람에 레이건과 앤더슨의 맞대결이 됐다.[7] 지미 카터가 주지사를 지냈던 주로, 대선에서는 민주당 카터가 승리를 거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