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개조 반박문

 

1. 개요
2. 상세
3. 내용
4. 출처


1. 개요


라틴어: Disputatio pro Declaratione Virtutis Indulgentiarum
독일어: Disputation zur Klärung der Kraft der Ablässe
한국어: 고해특전준허증서의 능력과 효용성에 관한 토론
마르틴 루터고해특전준허증서를 뿌리는 교회의 잘못을 고발하기 위해 비텐베르크 교회의 문에 붙힌 반박문.

2. 상세


'''종교 개혁개신교의 시작'''이자, 유럽중세를 끝내고 근대 사회를 연 시발점이라는 해석이 있다.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로의 전환점으로 보는 시작도 존재한다.
이런 해석은 옛날의 해석이며, 종교 개혁 후의 사회는 이성과 합리성으로 대표되는 사회가 아니라 "종교 분열의 사회"라는 해석도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인간을 로마가톨릭으로부터 '해방'시켰지만, 역설적으로 신과 그가 정해놓은 운명에 인간을 종속시켰다는 것이다. 한참 지나야 부르주아 세력이 성장하고 그 전까지는 귀족 중심이라는 것이다.
단순히 종교 내부의 개혁 운동을 넘어서, 로마 가톨릭 교회가 지배하던 유럽 문명을 부르주아가 이끄는 근대 사회로 변혁시킨 사건이다. 만약 종교 개혁 운동이 없었다면, 로마 가톨릭 교회의 유럽 사회는 지속되었을 것이고, 적어도 유럽 문명이 세계를 지배하는 헤게모니를 쥐기는 상당히 어려웠을 것이다.
마르틴 루터가톨릭 신학적 오류에 따른 고해특전준허증서 남용과 같은 행위에 분개하여 학문적 토론과 지적 차원에서[1]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성 교회 대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내걸었다.[2][3] 굳이 대문에 내건 이유는 딱히 비텐베르크 교회에 정치적, 신학적 중요성이 있어서라기보다 당시 교회의 문이 민중들이 세상 돌아가는 일을 알고 싶어할때 모이는 게시판 역할도 했기 때문이다. 루터 본인이 이 반박문을 게시할 당시에는 이것이 장차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고, 어디까지나 '''교회 내부에 만연한 신성모독에 대한 항의'''가 주 목적이었다. 이후 루터는 로마 교황청에서 파문을 받고 맞파문을 날린 뒤 본격적으로 종교개혁가의 길을 걷게 되지만, 당시까지는 가톨릭 교회를 박차고 나올 생각은 없었고 교회 내부에서의 개혁을 바라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95개조 반박문 항목을 읽어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가톨릭 세계관과 질서를 존중하는 뉘앙스를 버리지 않았음에도 교회의 사면 권한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문제의 소지가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가톨릭교회는 예수가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하사한다고 선언하는 장면을 근거로 `교회의 사면권'을 주장하는데, 특히 가톨릭교회의 권력 체계가 공고하던 전근대 시기에는 이 교리가 아주 확고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루터가 제기한 다른 문제를 받아들이더라도 교황청에서 저 대목을 받아주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것이었다.
95개조 반박문 내용 자체는 이전 루터가 썼던 《스콜라 철학에 대한 반박》보다 가톨릭교회에 대한 비판 수위가 낮다. 그러나 이전의 비판은 공론화 되지 않았지만 95개조 반박문은 2주만에 독일어로 번역되어 신성 로마 제국 전역에 퍼지고 1달여 만에 유럽 전체 지역에 퍼지면서 종교개혁의 신호탄이 되었다.
내용 자체는 전반적으로 루터 신학의 가장 중요한 이신칭의(以信稱義)를 바탕으로 서술했다. 그러나 개신교 신자라도 어지간한 신학적인 배경이 없으면 주석과 설명을 참조해도 사실 이해하기 매우 어렵다. 내용의 난이도가 신학생급 정도는 되어야 근접할 수준.

3. 내용


진리에 대한 사랑과 이를 해명하려는 열정을 근거로 비텐베르크의 신부이며, 인문학부 및 신학부 교수 겸 비텐베르크 대학 정교수인 마르틴 루터는 다음과 같은 명제에 논쟁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본인은 구두로 토론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직접 찾아오지 않더라도 서신을 통해서 토론에 참여해 주기를 당부한다.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멘[4]

1. 우리들의 주님이시며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마 4:17)고 말씀하실 때 그는 신자들의 '''전 생애가 참회(깊이 뉘우치는 것)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 이 말씀은 하나님께 드리는 성례전적 참회 곧 사제의 직권으로 수행하는 고백과 속죄로서 이해할 수는 없다. [5]
3. 그러나 이 말씀은 다만 내적인 회개만을 뜻한 것은 아니다. 그럴 수도 없다. 만일 그 같은 내적 회개가 육신의 정욕의 여러 가지 억제를 외부로 나오지 않게 한다면 그 회개는 무가치한 것이다.
4. 그런 고로 사람이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한에는(참 내적 참회) 형벌이 계속할 것이다. 즉 우리들이 하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5. '''교황은 그 직권 혹은 교회법의 위세로 부과된 형벌 이외의 어떤 벌이든지 용서할 힘이나 뜻(意志)을 가지지 못한다.'''
6. '''교황은 하나님께서 죄를 사하였다는 것을 선언 혹은 시인하는 이외에 어떤 죄든지 사할 힘이 없다.''' 기껏해야 그 자신에게 주어진 사건들을 그가 사하는 데 불과한 것이다. 이런 경우에 있어서도 만일 그의 사죄하는 기능이 업신여김을 당하게 될 때 사함 받았다는 죄는 확실히 그대로 잔재(殘在)한 것이다.
7. 하나님께서는 그의 대행자인 사제의 권력에는 전적으로 복종하면서도 그 밖에 다른 모든 일에 대해서는 겸손할 줄 모르는 자의 죄를 결코 사하시지 않으신다.
8. 참회에 관한 교회법은 산(生存) 사람에게만 부과되는 것이며 죽은 자에게는 어떤 부담이든지 그 법(諸罰에 對한 敎會의 規定)에 의하여 부과되어서는 안 된다.[6]
9. 그러므로 교황을 통하여 역사 하시는 성령께서는 교황이 법령에서 죽음과 필연의 경우를 예외로 취급하는 한 우리들에게 자비를 행하신다.
10. 죽은 자에 대하여 연옥을 교회법적 형벌로 유지하려는 사제들의 행위는 무지하고 사악한 짓이다.[7]
11. 교회법 상의 형벌을 연옥의 형벌로 변경시키는 ‘가라지’[8]는 확실히 감독들이 잠자는 동안에 심겨진 것이다(마 13:25).
12. 이전 시대에는 교회법 상의 형벌이 진실한 회개(참회)의 시험으로써 사면(赦免)의 뒤(後)가 아니라 앞(前)에 부과되었다.
13. 죽은 자들은 교회법과 관련하여 이미 죽었으며, 그로 인해 교회법으로부터 해방될 권리를 가진다. 그러므로 죽은 자들은 죽음으로 인해 모든 형벌로 자유롭다.
14. 죄로 말미암아 죽음에 이르는 사람의 심령의 불완전한 건강과 사랑은 반드시 큰 공포를 초래할 것인데 그 불완전성이 크면 클수록 더 큰 공포가 따를 것이다.
15. 이 불안 공포만으로도(다른 것은 말하지 않는다 치고라도) 연옥의 고통을 구성한다. 그 고통은 절망의 공포에 매우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16. 지옥과 연옥과 천국의 다른 점은 절망의 상태와 절망에 이르는 상태와 구원의 확실성과의 차이와 같다고 볼 수 있다.
17. 연옥에 가 있는 영들은 공포의 감소와 사랑의 증가를 확실히 체험할 것이다.
18. 이상의 영들이 공적의 상태나 사랑의 증가 상태 밖(外)에 있다는 것은 이성으로나 성서적 근거로 증명할 수 없는 것 같이 보인다.
19. 구원의 축복의 정확성과 확실성에 관하여서 우리들은 아무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고 할 것이로되 연옥에 있는 영들의 대부분을 위하여서는 증명할 수 없는 것 같이 보인다.
20. 그런고로 교황이 “모든 죄의 완전한 사면”을 말할 때 그는 단순히 모든 죄의 용서를 뜻하는 것이 아니며 다만 그 자신에 의해서 부과된 죄의 사면을 의미하는 것이다.
21. 그러므로 교화의 대사로써 인간은 모든 형벌로부터 해방되며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선전하는 대사 설교자들은 모두 오류에 빠져 있는 것이다.
22. 사실상 교황은 연옥에 있는 영혼에 대해서 어떤 형벌도 사할 수 없다. 이 형벌은 교회 법에 의하여 현세에서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23. 만일 누구에게든지 모든 형벌의 전적 사면이 허락된다면, 그러한 사면은 확실히 가장 완전한 사람 즉 극소수의 사람에게만 주어진다.
24.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형벌로부터 해방된다는 무제한 되고 어마어마한 약속에 의하여 드러내놓은 사기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25. 교황이 연옥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가진 것과 같은 권위를 모든 감독과 특히 교구 목사는 자기의 감독구나 교구 안에서 가지고 있는 것이다.
26. 교황은 열쇠(천국)의 힘으로서가 아니고(사실 그와 같은 힘이란 것이 당치도 않지만), 대도(代禱)의 방법으로 영혼들에게 사죄를 허락한다것은 아주 잘하는 일이다.
27. 연보궤 안에 던진 돈이 딸랑 소리를 내자마자 영혼은 연옥에서 벗어 나온다[9]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학설을 설교하는 것이다.
28. 돈이 연보궤 안에서 딸랑 소리를 낼 때 이득(利得)과 탐욕이 증가한다는 것은 틀림없다. 동시에 성직자의 대도(代禱)[10]의 응답 여부는 하나님의 선한 뜻에만 달려 있는 것이다.
29. 마치 성 세베리누스(St. Severin)과 파스칼리스(Paschalis)에 관한 전설에 있는 것과 같이 연옥에 있는 모든 영혼이 그 곳으로부터 구원받기를 원하는지 어떠한지를 그 누가 알 것인가![11]
30. 누구든지 자기 참회의 진실성에 대해서도 확신을 못 가지는데 하물며 남의 죄가 완전한 사면을 받았는지를 어떻게 밝힐 수 있을 것인가.
31. 진실로 회개한 사람이 드문 것 같이 고해특전준허증서을 진심으로 사는 사람도 드물다. 말하자면 그러한 사람은 거의 없는 것이다.
32.고해특전준허증서에 의하여 자신의 구원이 확실하다고 스스로 믿는 사람은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들과 함께 영원히 저주를 받을 것이다.
33. 교황의 사면을 가르쳐서 인간이 하나님과 화해되는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특별히 경계하지 않으면 안된다.
34. 왜냐하면 이 사면의 은총은 인간에 의하여 정해진 예전적인 사죄 행위의 형벌에만 적용되기 때문이다.
35. 연옥으로부터 영혼을 속량한다거나 고백장(즉 참회師-고백을 받는 신부-를 자기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는 허가)을 사는 사람은 참회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는 자는 비 기독교적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이다.
36. 어떠한 그리스도인이고 진심으로 자기 죄에 대하여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은 고해특전준허증서 없이도 형벌과 죄책에서 완전한 사함을 받는다.
37. 참다운 그리스도인은 죽은 자나 산 자나 고해특전준허증서이 없이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모든 영적 은혜에 참여하는 것이다.
38. 그러나 교황이 주는 면죄와 그의 관여를 결코 무시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미 말한 대로(제6논제 참조) 그것은 하나님의 사면의 선언이기 때문이다.
39. 고해특전준허증서에 대한 관대한 생각과 참다운 회개의 필요성을 동시에 사람들에게 권장한다는 것은 박식한 신학자에게 있어서도 매우 어려운 일이다.
40. '''참다운 회개는 형벌을 달게 받는다.''' 그러나 고해특전준허증서에 대하여 관대한 것은 형벌을 등한시하게 하고 슬퍼하게 하며 혹은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그와 같은 기회를 주는 것이다.
41. 사도 계승의 면죄(교황의 사면을 의미함)는 사람들이 결코 그것을 사람의 다른 선한 일(선행)보다 더 중요한 것 같이 오해하지 않도록 신중하게 설교하지 않으면 안된다.
42. 면죄증의 속죄를 자선사업과 비교하여 생각한다는 것은 교화의 의도가 아니라는 것을 그리스도인에게 가르쳐야 한다.
43.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필요한 사람에게 꾸어 주는 것이 면죄증을 하는 것보다도 선한 일이라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44. 왜냐하면 사랑은 사랑을 베푸는 일로써 성장하고 그 인간은 선을 행하는 사람보다 선하게 되지만, 면죄증으로써는 인간이 보다 선하게 되지 못하고 다만 형벌로부터 보다 자유롭게 되는 것뿐이다.
45. 가난한 사람을 보고도 본 체 만 체 지나버리고(요 3:17 참조) 면죄를 위해서 돈을 바치는 사람은 교황의 면죄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자는 것이라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46. 풍부한 재산의 여유를 가지지 못한 자라면 자기 가족을 위하여 필요한 것을 저축할 의무가 있으며(딤전 5:8) 결코 면죄증 때문에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47. 면죄증을 사는 것은(사고 안 사는 것은) 자유로운 일이요 결코 그렇게 하라고 강요되어진 것이 아니하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48. 교황은 면죄증을 주는 일에 있어서 가져오는 돈보다도 오히려 자기를 위해 경오한 기도를 드리는 것을 필요로 하고 바란다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49. 교황의 면죄증은 사람들이 만일 그것에게 신뢰를 두지 않는다면, 유용하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잃는 일이 있다면 매우 해로운 일이라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50. 만일 교황이 면죄증 설교자들의 행상 행위를 안다면, 자기 양의 가죽과 살과 뼈로써 성 베드로 교회당이 세워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것을 불태워 재로 만드는 것을 좋아할 것이라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51. 어떤 면죄증 설교자들에게 돈을 빼앗긴 많은 사람들에게 교황은 필요하다면 성 베드로의 교회당을 팔아서까지라도 그 자신의 재산으로 갚아 주려고(당연하기는 하나) 한다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52. 면죄증서로 구원받을 것을 신뢰하는 것은 헛된 것이다. 비록 판매위탁자가, 아니, 교황 자신이 그 증서에 대해서 자기 영혼을 걸고 보증한다 하더라도 그렇다.
53. 면죄증 설교로 인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다른 교회에서 아주 잠잠하여지도록 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교황의 적이다.
54. 설교하는 데 있어서 면죄증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시간 또는 보다 더 긴 시간을 쓰는 것은 그 말씀에 대하여 부정을 행하는 것이다.
55. 만일 매우 적은 가치만을 지닌 면죄증이 하나의 ‘방울’과 행렬과 의식으로써 축하하게 된다면 가장 큰 가치를 지닌 복음은 백개의 방울과 백의 행렬과 의식으로써 찬양해야 된다는 것이 교황의 의사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56. 그것으로써 교황이 면죄를 주는 교회의 장보(藏寶)[12]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충분히 표시되어지지도 않았고 알려지지도 않았다.
57. 그것이 현세적인 보화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왜냐하면 많은 대사설교자들이 이와 같은 보화를 쉽사리 분여(分與)하지 않고 도리어 쌓아 두려고만 했기 때문이다.
58. 또 그 장보(藏寶)는 그리스도나 성자들의 공로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을 교황의 고움과 전혀 독립적으로 항상 속 사람에게는 은총을 주고 겉 사람에게는 십자가와 죽음과 지옥을 주기 때문이다.
59. 성 로렌티어스(St. Laurentius)는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의 보배라고 말했지만, 그는 그 시대 그 당시에 사용된 어의에 따라 말한 것이다.
60.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주어진 교회의 열쇠[13]가 바로 그 장보(藏寶)라고 우리가 말해도 합당할 것이다.
61. 왜냐하면 형벌의 면죄와 교황 관리의 보유사건을 위해서는 교황의 권능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 명백한 일이기 때문이다.
62. 교회의 참 장보(藏寶)는 하나님의 영광과 은총의 가장 거룩한 복음이다.
63. 그렇지만 이 장보(藏寶)가 먼저 된 것을 나중 된 것으로 하기 때문에 매우 증오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마 19:30, 20:16 눅 13:30).
64. 그와 반대로 고해특전준허증서의 장보(藏寶)가 나중된 것을 먼저 된 것으로 하기 때문에 매우 애호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65. 그러므로 옛날에 있어서 복음의 장보(藏寶)는 돈 많은 사람들을 낚던 그물이었다.
66. 고해특전준허증서의 장보(藏寶)는 오늘날도 그것을 가지고 사람의 재산을 낚는 그물이다.
67. 대사설교자들이 ‘가장 큰 은총’이라고 소리 높이 부르짖는 고해특전준허증서은 이익을 증가시키는 한에서는 사실인 것처럼 보인다.
68. 그렇지만 하나님의 은총과 십자가의 경건에 비하면 그것(고해특전준허증서)은 참으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69. 감독들과 교구 교사들은 사도계승의 면죄의 대리자들을 전적인 경의를 가지고 받아들일 의무를 가지고 있다.
70. 그러나 일층 더 큰 의무는 눈을 활짝 뜨고 귀를 바짝 기울여서 교황의 위임한 것 대신에 자기들의 꿈을 설교하지 않도록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71. 사도계승의 대사의 진리에 반대하여 말하는 자는 추방과 저주를 받을지어다.
72. 그러나 다른 한편 고해특전준허증서 설교자들의 해롭고 뻔뻔스런 말에 대항하는 자는 복이 있을 지어다.
73. 어떤 방법으로든지 고해특전준허증서 발급을 방해하고자 하는 사람에 대해서 교황이 책망할 것은 당연하다고 하지만!
74. 고해특전준허증서을 구실 삼아 거룩한 사랑과 진리를 방해하려고 기도하는 사람에게 대해서 교황은 한층 더 심한 분노로 임할 것이다.
75. 교황의 면죄증에도 굉장한 능력이 있어 -불가능한 말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어머니를 능욕한 인간까지라도 용서할 수 있다[14]고 생각하는 것은 정신 빠진 생각이다.
76. 그와 반대로 교황의 면죄증이 가장 작은 죄라 할지라도 그 죄책에 관하여서는 없이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들은 주장한다.
77. 만일 성 베드로가 교황이었다 할지라도 면죄 이상의 큰 은총을 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성 베드로나 교황에 대한 모독이다.
78. 그와 반대로 현 교황이나 또는 다른 어떤 교황이라도 면죄보다 큰 은총. 즉, 고린도전서 12장에 가르치는 복음과 여러 가지 능력 또는 병 고치는 은사 등을 가지고 있다고 우리들은 주장한다.
79. 교황은 팔로 장식된 십자가상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똑같은 능력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모독이다.[15]
80. 이와 같은 가르침이 사람들 가운데서 선포되는 것을 묵인하는 감독과 교구 목사들과 신학자들은 이에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81. 이와 같은 뻔뻔스러운 면죄 설교로 비방과 또는 일반 세인의 의심 없는 날카로운 반대로부터 교황에 대한 존경을 수호하기란 제아무리 박식한 사람에게 있어서도 쉬운 일이 아니다.
82. 예로서 만일 교황이 베드로 교회당에 소비될 썩어질 금전으로 인하여 수없이 많은 영혼을 구원한다고 할 것이면(이것도 구실에 불과하지만) 어찌하여 가장 정당하다고 볼 수 있는 이유 즉 거룩한 사랑과 영혼들의 최고의 필요를 위하여 연옥을 비우지 않는가?
83. 또한 이미 구속받은 사람을 위한 기도는 부당한 일인데 무엇 때문에 죽은 사람의 장례식이나 연기제(年忌祭)를 계속하는가?[16] 또 무엇 때문에 교황은 그런 목적으로 교회에 바친 기부금을 돌려주지 않으며 혹은 그것(기부금)의 취소를 허락하지 않는가?
84. 또한 돈 때문에 불 경건한 자와 하나님의 원수들로 하여금 그의 사랑을 받는 경건한 영혼을 구하도록 허락하면서, 그 경건한 영혼 자신의 필요를 위하여서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를 구해내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교황의 어떤 새로운 신성함인가?
85. 또한 참회에 관한 교회의 법규는 사실상 오랫동안 사용치 않았기 때문에 폐지되고 사문화되었는데[17] 왜 아직 돈으로 인한 면죄증 부여를 통하여 구속해 내는 것 같이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86. 또한 오늘날 제일 부자의 재산[18]보다도 더 많은 재산을 가진 교황이 가난한 신자의 돈으로 행하는 대신 차라리 자기의 돈으로 성베드로 교회당쯤은 세울 수 있지 않는가?
87. 또한 완전한 참회로 충분한 사면과 속죄에 대한 편리를 가진 사람들에게 무엇을 사하려 하고 무슨 영적 은혜에 참여를 주려는가?
88. 또한 교황이 각 신자에게 사면과 은총의 참여를 지금 하루에 한번 주는 것을 만일 하루에 백 번 준다고 한다면 교회는 얼마나 더 큰 축복을 얻게 되겠는가? (고해특전준허증서에는 그것으로써 한 번만 사죄된다는 것이 표시되어 있다)
89. 만일 교황이 고해특전준허증서으로써 돈보다도 영혼의 구원을 생각하였다고 본다면, 무엇 때문에 그는 오래전부터 주어 오던 증거나 고해특전준허증서을 정지하는가? 똑같은 효력을 가졌음에 틀림없지 않는가?
90. 일반 세인이 열거한 반론에 대하여 떳떳한 이유를 들어 해결하지 않고 다만 권력으로만 억압하는 것은 교회와 교황을 원수의 조롱거리가 되게 만드는 일이요 또 그리스도인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다.
91. 그러므로 만일 고해특전준허증서이 교황의 정신과 의도에 따라 선전된다면, 이 모든 문제(Bedenken)는 쉽사리 해결되었을 것이다. 아니 그것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92. 그런고로 그리스도의 백성을 향하여 평안도 없는데 “평안, 평안”하고 부르짖는 예언자들은 다 물러가라. (갤 13:10 16 렘 6:14, 8:11 살전 5:3)
93. 그러나 그리스도의 백성을 향하여 “십자가, 십자가”하고 부르짖는 모든 예언자들은 축복을 받을지어다. (사실) 십자가는 없는 것이다.
94. 그리스도인은 형벌이나 죽음이나 지옥을 통하여서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부지런히 따르도록 훈계 받아야 한다.
95. 이같이 하여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위안에 의해서보다 오히려 많은 고난을 통하여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데 더욱 깊은 신뢰를 가지게 하라.(행 14:22).

4. 출처


번역 출처 :루터의 “95개조 논제” (지원용[19] 저, 말틴 루터, 컨콜디아사, 1987.)

[1] "95개조 반박문은 좀 더 정확히는 '95줄로 요약한 논제'라고 할 수 있는데, "지금부터 이 주제에 대해 토론해보자!"라는 일종의 제안서와 같은 것이다." 출처.[2] 훗날 개신교에서는 이 날짜를 종교개혁기념일로 삼게 된다.[3] 아이러니하게도 다음날인 11월 1일은 가톨릭에선 모든성인대축일이다.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 모든성인대축일 전날 밤이 그 유명한 할로윈이다.[4] 숭실대학교 인문학부 사학과 교수 박은구 번역(스티브 오즈멩의 종교개혁에서 발췌함), 나머지 본문은 번역출처가 확인되면 써주기 바람[5] 앞서 "회개하라"는 성경 문구는 불가타에서는 고해하라 였는데 이를 두고 가톨릭 교회에서는 고해 '''성사'''란 용어의 근거로 쓰였던 구절이 이었다. 그러나 1516년 에라스무스판 헬라어 원본 성경에서는 외적인 고해가 아닌 내적인 속죄에 해당하는 회개 또는 참회가 원문에 부합한다는 견해가 나왔다. 종교개혁 시기 당연히 다른 구절의 오역이던 혼인'성사'와 더불어 루터가 성사임을 부인하는 근거로 활용 되었다.[6] 후손에게 파는 죽은자에 대한 면벌부, 과거행위에 대한 통째 면벌부는 15세기 각각 갈리스토 3세와 식스토 4시절 부터 새롭게 등장한것으로 성경은 물론 교회 전통과도 거리가 멀다.[7] 중세시대 종부성사(병자성사)시에 사제들이 지옥이나 연옥에 떨어지는것을 두려워하는 신도들에게 마귀를 쫓아준다며 장엄구마 의식을 하고 신도의 가족들에게 돈을 받는 풍속이 있었다.[8] 우리말로 잡초. 성서에서 가라지와 알곡의 비유를 인용함[9] 독일지역에서 면죄부를 팔던 도미니코회 수사 요한 테첼의 명언(?).[10] 중보기도[11] 교회에서 가르친바에 의하면 성 세베리누스, 성 파스칼리스는 연옥에서 바로 구원 받을 수 있었으나, 스스로 연옥에서 죄과를 다 하기를 청원했다. 이런 내용은 일반인 신도중에서도 알고 있는 이가 많은데 교황청이 이렇걸 장려하는게 옳지, 돈으로 대충 때우려는걸 조장한다는걸 비판한 것이다. [12] 말 자체는 이 세상의 보물이 아닌 하늘나라의 보물이란 뜻인데, 교회에서 인정한 선행공덕을 뜻한다. 당시 가톨릭 교회는 선행은 축적이 되며, 그 사용권한은 교회가 갖는다는 이론을 배경으로 면벌부를 팔았다. 성인의 공덕이 재화처럼 쌓여서 교회에 저장되고 이를 베푼다고... 구체적으로 라테라노 성당 5만 7천 점의 순교자의 유골은 한 점당 6천 년씩 면벌효과가 있다고 선포했다.[13] 가톨릭 교회에선 성경을 근거로 사도 베드로가 천국의 열쇠를 받았고, 이세상의 메이고 풀 권한까지 받았다고 한다. 후임 로마 주교(교황)가 사도전승을 통해 권한을 이어받는다는다고 보았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는 천국의 열쇠는 물론 메이고 푸는 권한은 베드로 개인 1인이 아니라, 믿는 자 모든 신도에게 준 것으로 해석한다.[14] 독일지역에서 면죄부 판매 시 살인과 신성모독을 제외한 모든 죄목에 대하여 면죄부를 팔았고, 성모마리아를 강간해도 깨끗이 용서 받는다는 광고를 했다.[15] 면죄부 판매원 요하네스 테첼의 마케팅(?) 발언으로 이건 교황청에서도 판단하기에도 빼도박도 못하게 신성모독성 발언이라 결국 테첼이 처벌 받는다. 1518년 밀티츠 추기경에 의해 라이프치히에 있는 도미니코회 수도원으로 감금된다. [16] 중세시대엔 가톨릭 교회에서 종부성사시 헌금을 내지 않으면 교회에서 관리하는 묘지에 묻히지 못하게 압력을 넣었고 죽은이의 재산의 1/3정도를 세금으르 걷었으며, 특히나 환자가 죽음의 문턱에서 괴로워할 때 악마에게 끌려가 지옥에 빠지지 않게 한다며 가족에게 돈을 요구하거나, 죽고나서 약 50일간의 죽을 이를 위한 미사를 요구하며 거액을 탕진시켰기 때문에 지역을 가리지않고 큰 비판 대상이었다. "가난한 이는 죽을 수도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17] 십자군 전쟁시기 성지 순례자나 참전자는 사실상 사지로 가는 거나 다름없기 때문에 특별히 발행했던 것인데 수백 년 후 사문화 된것을 이제 금전 목적으로 다시 팔았다.[18] 원문에서는 로마 시대 삼두정치의 일원으로 대부호의 대명사였던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를 비유로 든다.[19] (1924~2012) 한국루터교회 목사, 신학박사(조직신학), 루터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