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칭의

 

1. 개요
2. 성서의 근거
2.1. 신약
3. 전개
3.1. 종교개혁 이전
3.2. 종교개혁 당대와 그 이후
3.3. 현대 개신교 교파 간 차이점
3.4. 오해와 의문점
4. 천주교의 입장
5. 이신칭의 합의?


1. 개요


以信稱義 , (a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Faith)
'''오직 주님을 믿음으로써 예수님의 대속을 통해 죄인인 우리에게 값없이 은혜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
영어로는 가톨릭이나 개신교나 Justification 이고 한국어 번역시엔 개신교에선 이신칭의, 가톨릭에서는 의화(義化)라고 번역한다. 법정적인 의미로서 정죄, 유죄선고와 대조되는 뜻을 지닌다. 현대의 무죄선언, 석방, 특별사면과 가깝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모든 죄악은 징벌 받아 마땅한 것이고, 하나님께선 죄악에 대해 무한히 진노하심으로 공의를 나타내신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간들은 일생동안 말과 행동, 생각으로 끊임없이 죄를 지으며 살기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존재이자 진노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죄인들을 여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고자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나게 하셨고, 그로 하여금 죄인들이 받을 모든 심판과 진노를 십자가에서 대신 감당케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으로 그 뜻에 순종해, 지옥의 쓴 잔을 죄인들을 대신해 남김없이 들이키셨고, 결국 비워내셨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이같은 희생을 믿는 자들에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지 않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살리기 위하여 그 아들 예수를 아낌없이 내어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인류의 대표로 삼아 그에게 모든 징벌을 쏟아내셨기에,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겐 징벌이 임하지 않게 된 것.
인간의 입장으로 보면 값없이 죄사함을 받게 된 것이나,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모든 것인 외아들을 희생하셨다. 무한한 사랑의 대상인 외아들을 희생시키고, 무한한 진노의 대상인 인류를 구원한 것이다.
서방교회의 핵심 교리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마르틴 루터와 이후 개신교에서 강조하기 때문에 개신교의 교리로만 알고 있는데, 서방 교회가 공유하는 교리이며 해석과 개념이 다를 뿐이다. 즉, 가톨릭에서도 정통 교리다.
  • 이신칭의에 대한 천주교의 입장은 관련 목차 참조.
'''종교개혁시기 해석을 두고 개신교와 가톨릭의 분리된 가장 큰 계기이며 둘 사이의 가장 큰 신학적 갈등이 있었으며, 도리어 현대에 와서는 교회통합의 구심점이 되기도 한다.''' 마르틴 루터는 가톨릭 교회의 부패상보다 신학이 잘못 되었음을 근거로 교회를 비판했다.[1] 이신칭의가 옳다면 모든 이가 자신만의 사제가 되기에(만인사제설) 고해성사도 필요 없고, 사제계급도 필요 없으며, 로마교회의 수위권도 필요 없고, 선행의 보고를 전제로 하는 면벌부나 성유물도 필요 없으며, 수도원이나 성지순례, 고행 등도 필요 없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루터에 의하면 '''교리들 중 중요한 것들 하나가 아니라, 모든 중요한 것을 떠받치는 유일한 것, 즉 교회를 서게 하고 넘어지게도 하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 교리'''이다.

2. 성서의 근거


예수는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또 하느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곧 마음으로 믿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게 됩니다.

- 로마서 10장 9-10절 (공동번역)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 로마서 1장 17절(개역개정)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베소서) 2장 7절~8절 (가톨릭 번역)

구약에서도 '하나님(하느님)의 의'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다만 '의롭다 함(칭의)'라는 표현은 나오지 않는다. 비슷한 표현이 있다면 '언약 관계에 있다'는 문구이다. 구약에서 하나님(하느님) 부족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고 불러서 관계를 맺는다. 이러한 언약 관계가 신약에서 구체화 된다고 본다[2]
신약에서는 사도바울의 서신에서 의롭다 칭해진다.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는 표현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특히 마르틴 루터의 신학은 로마서의 이신칭의를 토대로 성서 전체의 맥락을 해석한다.

2.1. 신약


기독교의 중요한 개념 중 하나로 오직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의롭다고 칭함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포인트는 '의롭다고 칭함받는다'라는 부분이다. '''실제로는 상태는 죄인에 불과하지만, 신분은 바뀌어서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선언'''해주시는 것이다.[3] 이 개념은 유대 사회 안에서의 그리스도인들 일부가 이방인들도 예수를 믿기 시작하면 할례를 받아야한다는 주장에 맞서 사용되었다.
바울은 할례나 율법이 아니라 믿음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로마서 4장 2절의 말마따나 절대적인 신 앞에서 인간의 행위로 자랑할 것은 없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죄를 짊어진 화목제물[4]로서 십자가에 못박혀 죄인들 대신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사실이 값없이 의롭다 선언 받을 수 있는 근거가 된다.
화목제물을 통한 설명 이외에도,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서 바울은 "나무에 달린 자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니" 라는 구약 말씀을 십자가와 연결시켜 설명한다. 나무(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다. 그러나 이는 예수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예수 자신은 죄 없는 하나님이기에),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 짊어져서 대신 저주를 받은 것이다. 이처럼 자기 백성을 하나님의 저주로부터 구출해내기 위하여 친히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라고 바울은 설명한다.
어떤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가 사함받고 구원에 이른다는 기독교의 구원교리인 것이다. 이신칭의와 대조되는 사상이 바로 불교, 불교의 구원은 수행을 통한 해탈로 완성된다는 점에서 동서양의 종교에 관한 시각차이를 볼 수 있다.

3. 전개



3.1. 종교개혁 이전



이제 다시 교부들에게로 돌아가 보자. 우선 그들 사이에서는 어떤 그리스도인도, 그가 아무리 중죄를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지옥으로 가지 않는다는 의견이 존재한다. 치프리아노가 이를 암시하고 있고, 힐라리오도 역시 그러하다. 암브로시오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의례적이다. 예로니모는 한 발 더 나간다. "어떤 사람이 온 마음을 다해 그리스도께 의탁하고 살았다면, 그가 비록 죄 때문에 죽었다고 하더라도, 바로 그 신앙 때문에 영원히 살 것이다."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발타사르의 구원이야기, 80p

위와 같이 교부들 사이에서 이신칭의 사상의 맹아가 발견되기는 하지만, 종교개혁 시대 이전 이신칭의를 본격적으로 다룬것은 서방교부 아우구스티누스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 근거하여 '은혜에 의한 구원'을 주장했다.[5] 적어도 3세기 이전에는 바울의 서신의 이신칭의 신학에 대해선 언급이 거의 없다. 동방교회에선 이부분에 대해서 이후에도 별 논의가 없었다.[6]
아우구스티누스펠라기우스와의 원죄, 은혜, 자유의지 등의 논쟁에서 인간의 수동성과 절대적인 하나님의 섭리를 강조했다. (자세한 내용은 전문서 참고) 여기서 칭의를 근거로 신약성서를 해석하면서 아우구스티누스의 논리는 서방교회의 정통이 되었다.[7] 칭의론에 대한 연구는 상당기간 잊혀졌다.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5~6세기 지역 공의회에서 언급된 바는 있지만 그 이후 학자들의 인용빈도가 매우 적고 거의 잊혀져 갔다.
그러나 중세 스콜라 철학 시대에는 철학자들에게는 칭의론은 매우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졌다. 스콜라 철학 시기의 대표적인 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도 당연히 칭의론을 연구한다. 당시 스콜라철학은 그리스 시대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물리학의 영향을 받았기에[8] 칭의 이전에 '''은혜의 주입'''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아퀴나스 신학을 기반으로 삼는 가톨릭 교회의 의화론은 고해성사 등의 성사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3.2. 종교개혁 당대와 그 이후


스콜라 철학 시대가 저물어 가고 새로운 길(Via moderna)라는 새로운 사조가 15세기부터 유럽신학계에 퍼지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오컴의 면도날로 유명한 오컴의 윌리엄이 사변적이고 논리적인 스콜라 철학에 반기를 제시하며 이성의 영역과 신앙의 영역의 분리를 주장했는데,[9][10] 이러한 사조를 실재론에 반대되는 개념이라 하여 유명론이라 한다. 처음에 루터도 한때 에어푸르트 대학에서 철학도로 유명론의 영향을 깊게 받고 있었다. 유명론의 대표격인 오컴주의자들의 구원론은 "하나님은 구원받고자 하는 이들에게 은혜를 저버리시지 않는다" 로 요약할 수 있는데 루터도 초기 신학의 입장은 이와 비슷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에 입회하고 수도생활과 사제생활을 하면서 엄격한 계율을 지키면서도 죄인이 스스로 자격을 갖춰 하나님의 의로움에 다가설수 있다는 주장에 점차 회의적이었다. 그러던 중 로마서의 연구와 유명한 '탑 체험'을 통해 인간은 스스로 의로워질 수 없다고 생각했고, 오로지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해서만 의롭다 칭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루터에 의하면 인간은 완전히 타락하여 자유의지는 악으로만 기울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내재적인 의로움이 없으며 믿음을 통해 의롭다 칭해질 뿐이고 속성은 여전히 죄인이다. 의로움은 하나님에게서 인간에게 전가되는 것으로 보았다.
다만 루터는 생애 동안 엄청난 양의 저작을 썼지만 칭의 이후 인간이 어떻게 변모하는지 그 이후의 삶이 어떻게 되는지 어떤 이들이 칭의 받는지에 대해서 저작을 발표하지 않았는데 루터는 그때그때 이슈에 대하여 질문에 응답하고 자신의 견해를 발표하는 짤막한 글들을 많이 썼지, 신학을 체계화고 정리하는 조직신학자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11][12]
그렇기 때문에 같은 시기 남독일 츠빙글리 계열 마르틴 부처와 루터의 동료 필리프 멜란히톤 등은 루터의 견해를 받아들여 독자적인 칭의론을 연구했고 칭의 이후의 성화 단계(의로움 이후 완전해지는 단계)를 제시했다. 한 세대 후 신학자 장 칼뱅이 종합하여 개신교 내부의 여러 신학을 체계화 시킨다. 루터의 기본적인 입장을 온전히 받아들였고 정리하자면
''' * 칭의는 과정이나 변화가 아니라 법정적 판결이다.'''
''' * 칭의를 통해 죄인은 죄를 용서받아 천국에 들어갈 권리를 얻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받아들여진다. '''
''' * 칭의는 과거,현재,미래에 모두 적용되며 반복되지 않는다.'''
''' * 칭의는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만, 믿음을 통하여 이뤄진다.'''
''' * 인간에게 내재적인 의로움이 없기 하나님의 외재적인 의,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이 전가되는 것이다.'''

''' * 칭의와 성화는 구분되나 분리될 수 없다. 칭의는 필연적으로 성화를 동반한다.'''[13]
''' * 칭의는 하나님이 외부에서 개입하시는 일이며, 성화는 사람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시는 일이다.'''
''' * 칭의 후의 삶에서 선행은 필수적이다.'''
이와 같은 견해는 현재 대부분의 개신교회의 입장이다.

3.3. 현대 개신교 교파 간 차이점


개신교파에선 종교개혁시기 모두 이신칭의를 받아들이고 있다. 종교개혁시기 루터와 칼뱅주의에 날을 세웠던 재세례파마저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개교회주의 성향이 있는 개신교 특성상 같은 교단이라도 목사나 신학자에 따라 갈리기 때문에 각 교단의 입장이 교단에 속한 목사나 신학자의 입장과 동일하진 않다. 대표적으로 알베르트 슈바이처만 하더라도 이신칭의는 바울시대 율법주의를 경계하려는 산물이지 신약성서 복음의 핵심적인 문구와 거리가 멀다고 주장했었다.[14]
대체적으로는, 상대적으로 아르미니우스주의를 받아들인 감리회와 성결교회, 구세군과 성공회 일부[15]는 이신칭의는 받아들이지만 부드러운 편이고 루터와 칼뱅의 영향으로 루터교회와 칼뱅주의 개혁교회(=장로회)에선 종교개혁시기의 바탕한 엄격한 해석을 하고 있다. 감리회에선 루터교회나 칼뱅주의 계열 교단과는 조금 다른게 선행은총을 중요히 여기며 법정적 칭의를 강조하지 않는다. 감리회 성결회의 경우 전자와 달리 '''믿음으로 인하여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는다는 신학에 가깝다.
다만 장로회 내에서도 루터의 이신칭의 구원론을 원리주의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는 드물다. 사실 마르틴 루터의 루터교회에서 조차 종교개혁 시기 순수 루터를 따르는 의견과 수정하는 의견이 대립할 정도였다.
이신칭의 신앙이 강한 교파일수록 예배의 예전성을 덜 신경쓰는 경향이 있다. 예전성을 신경쓰는 로마 가톨릭, 정교회와 성공회 고교회파와 달리 복음주의 개신교 교파들은 '믿음이 중요한 것이지, 형식에 너무 얽매일 필요는 없다'는 의식이 강하기 때문이다.

3.4. 오해와 의문점


종교개혁시기부터 이신칭의 구원관에 대한 오해가 있어왔다. 특히 윤리의 부재에 대해서 비판이 있었는데 마르틴 루터는 이에 대해 구원은 복음으로 하는 것이고 선행[16]은 의인이라 칭해진 결과로 따라온다며 구원관과 윤리관의 분리를 주장했었다. 그래서 칭의 그리고 땡 하면 다음 단계는 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칭의 뒤의 성화도 종교개혁 시기부터 개신교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논제다. 따라서 개신교의 신학에는 윤리가 없다고 비난하는 건 제대로 알지 못한 비난이다. 오히려 성화 교리 때문에 개신교는 세속적 윤리를 엄격하게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은 종교개혁시기부터 오해를 불러오는데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그리스도로 인하여, 믿음을 통해''' 구원 받는다가 정확하다. 믿음이란 '''믿는다라는 행위가 조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믿음 또한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이고 믿음이라는 길을 통해서 구원받는다는 표현이 적합하다. 이는 종교개혁시기 평신도 물론이고 신학자 사이에서도 오해를 불러오기 때문에 루터가 직접 여러번 글을 써서 적극적으로 반박한 내용이다.
또한 구원 받았으면 아무 짓이나 저질러도 되는가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물론 종교개혁시기에도 과격 개혁파와 재세례파에서 율법 폐지를 주장했으나 루터나 칼뱅은 이러한 주장을 단호히 배격했다. 루터는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 (''simul iustus et peccator'') 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설명한다.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로 의인의 옷을 입었을 뿐 죄인의 속성은 그대로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칭의 받은 후에도 죄를 계속 지을 수밖에 없는 상태이다. 즉 칭의 전이나 후에나 인간이 선행을 한다 해도 행동으로는 절대 스스로 의로워질 수 없다. 그래서 루터는 선행보다는 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정욕을 통제할 것을 우선 권한다. 루터에 해석에 의하면 믿음 없이 인간이 간혹 저지르는 선행은 자기숭배로 연결되거나, 열렬한 자기만족 욕구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의 선행은 구원받기 위해 또는 보속의 수단으로 용서받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의로워진 인간이 선하다 인정을 받은 후에 나오는 칭의의 결과로 본다. 즉 선한 행위 자체는 인간의 속성에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
역사적으로 이신칭의 구원관은 당시 유럽에서 만연한 타락의 기조를 바로세우고, 개인의 양심을 회복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17] 왜냐하면 이전에는 개인단위의 양심과 구원을 강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종교개혁 이전 15세기 이전 문맹률이 상당히 높았기 때문에 성서에 접근할만한 식자층이 적었다. 따라서 믿음 보다는 당시 시대상에서 교회에서 가르침에 의존하는 측면이 컸기 때문이다. 반면 현대적으론 의미가 퇴색되어 개인의 구원에만 관심을 가지게 된다는 비판도 있다.
기독교의 칭의와 구원교리는 행위도 중요하다. 야고보서에는 분명히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나와 있다며 행위 없는 개신교 믿음이라고 비판하는 입장도 있는데 개신교 내부에서도 이 토론은 오래된 논쟁이다. 대체로 현재에는 이것이 상충되는 관계라든가 다른 개념으로 보지 않고, 상호보완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18] 일반적으로 장로회 같은 칼뱅파의 경우 선한 행위는 칭의의 증거라고 여기며 웨슬리안 계통 교파들은 칭의 이후 구원에 다다르는 성화의 과정으로 여긴다. 그래도 둘 다 선행을 구원받은 자의 징표 정도로 본다는 점은 비슷하다.

4. 천주교의 입장


천주교는 종교개혁시기 마르틴 루터의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주장에 대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성서근거와 가톨릭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은 완전히 인정하지만 루터가 주장한 오직 믿음 에서 '오직 (Sola)'은 틀렸다고 보았다. 중세 가톨릭 성경의 정본 불가타에서 명백히 오직을 뜻하는 구절이 암시가 없는데다가 그런 식으로 해석하면 공관복음서에 적힌 예수님의 말씀과 야고보서와 충돌하기 때문.
그리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개인의 영역이라기보단 교회의 역할이라고 보았다.[19]
천주교는 인간이 단순히 마음으로 믿을 뿐만 아니라 행위를 해서 믿음을 증명하며 성화에 이르러야 한다는 구원관을 갖고 있다. '''물론 행위 자체가 칭의의 요건이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렇게 주장하면 펠라기우스주의나 세미펠라기안이 된다. 본질적으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삶을 사는 것이 믿음을 증명하는 것이기에 참된 믿음을 갖고 있는 자는 당연히 죄에서 멀어지고 사랑을 실천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철저히 하느님 은총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며 인간의 자유의지로만 된다거나 인간의 의지가 하느님의 은총에 협력하여 작용한다는 내용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애초에 개신교처럼 '인간은 원래 의롭지 못한데 하나님이 믿는 자를 의인이라고 칭해 주신다'는 관점이 아니라 세례성사[20][21] 자체가 인간을 하느님의 자녀로 의롭게 만들어 준다는 관점을 교리로 내세운다. 그리고 세례성사를 통해 주입된 하느님의 은총을 보존하면서 지속적으로 의로운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개인적인 노력으로서 선행이 필요한 것이다. 이 일련의 과정을 한국 천주교에서는 의화로 번역한다.
그리고 가톨릭은 개혁주의 개신교와 다르게 구원을 완성형(be saved)이 아닌 진행형(being saved)이라고 본다.
루터나 칼뱅을 비롯한 개신교 신학자들은 믿음으로써 칭의에 다다른 사람이 은혜의 열매로서 선해지고 신의 섭리의 도구로 쓰여서 그로부터 자연스럽게 선한 행위가 나온다고 보는 반면[22], 가톨릭은 마음으로 믿는 것과 몸으로 하는 선행이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기 때문에(다시 말해 개신교의 구원관에 나오는 소위 칭의와 성화는 가톨릭의 교리에서는 서로 구분되지 않는 개념이기 때문에) 선행을 통해서 본인이 세례성사로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 얻은 의를 유지해 가야 한다고 가르친다. 즉 천주교는 현재 선행의 행위주체를 사람으로 보기 때문에 현재 선행의 행위주체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 개신교식 이신칭의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개신교 신학자들은 가톨릭 교회 의화 교리의 '인간의 자유의지'를 상당히 곡해하여 보편교회의 구원관을 세미펠라기안으로 매도하는데 그 '자유의지'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과 대치되는 의미가 아니다. 표현은 다르지만 오히려 가톨릭 의화교리에서의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응답에 대한 설명은 존 웨슬리가 제시한 '선재은총' 개념에 더 가깝다고 해도 무방하다. 개신교 신학자들이 가톨릭 구원관을 세미펠라기안이라 비판할 때 '인간은 은혜의 도움 없이는 죄에서 해방되는 구원은 얻지 못하지만 자유의지로 선행은 할 수있으며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선행과 하느님의 은총이 동시에 병행되어 구원에 이른다는 게 가톨릭의 세미펠라기안식 구원관'이라고 하는데 가톨릭 교회는 이런 구원관을 교리로 삼은 적이 없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악으로 심하게 기울어져 있어서 하느님 은총 없이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교부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창한 것은 그리스도교의 핵심이며 이것은 정통 교파라면 부정하지 못하는 부분이다. 그러므로 자유의지에 따른 선행이 하느님 은총에 병행되어 구원에 이른다는 게 가톨릭 교회 가르침이라는 건 궤변이다.
가톨릭 교회의 의화 교리에서 등장하는 '자유의지'라는 개념은 전적으로 하느님 은총에 뒤이어 등장하는 개념이며 하느님의 은총이 없으면 애초에 아무 의미가 없다. 따라서 선행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로 하느님 은총이 아니라면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 인간의 응답은 무조건 하느님의 은총이 선행되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다만 위에서 설명했듯이 인간의 응답이라는 과정적 측면으로서의 자유의지를 강조하기 때문에 '인간의 전적타락'[23]과 '의의 전가'를 주장하는 개신교식 이신칭의와는 맞지 않는 교리적 설명들이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엄밀하게 따지면 가톨릭 의화교리와 웨슬리 신학과의 차이점은 '자유의지' 개념의 유무와 고해성사를 통한 죄의 용서 등 성사론의 문제 정도인데 웨슬리안이든 칼뱅파, 루터파든 아르미니우스파를 제외한 대다수의 개신교 교파들은 워낙 이신칭의를 강조하다 보니 '자유의지'라는 용어 자체에 극도의 거부감을 보이기 때문에 '인간의 응답'을 강조하는 보편교회의 의화교리를 신인연합설, 세미펠라기안 등으로 해석하는 것으로 보인다.
가톨릭 특유의 교회관이나 교황무류성 그리고 기타 몇몇 사회교리에 회의적인 가톨릭 내 급진파라 해도 개신교식(특히 칼뱅식) 이신칭의를 수용하는 경우는 드물다.

5. 이신칭의 합의?


앞서 서술했던 대로 현대에 와선 이신칭의론으로 갈려졌던 서방교회 중 일부 교파들이 이신칭의 합의를 통해 대화에 나서고 있다. 그 결과 가톨릭교회에선 1999년 루터교회, 2006년 감리회와의 이신칭의(의화) 일치선언을 통하여 어느 정도 일치를 이뤘는데 대략 다음과 같다.
  • 원죄의 결과 모든 인간은 칭의가 필요하다.
  • 하나님(하느님)의 은총은 값없이 주어지고, 칭의(의화)는 전적으로 하나님(하느님)의 은혜이다.
  • 우리는 칭의를 받으므로 하나님(하느님) 앞에 의롭다고 선언 받는다
  • 의롭다 하심 받은 자들은 모두 성령에 의해 계속 새롭게 세워지고 선행할 수 있는 동기와 능력을 제공받는다.
자세한 것은 '루터교 세계 연맹'과 '교황청 그리스도교 일치 촉진 위원회'의 《의화 교리에 관한 합동 선언문》등을 참조 바람.
칭의론에서 아직 신학적으로 갈리는 문제는 인간론 부분에서 가톨릭과 개신교의 차이이다. 가톨릭에서는 인간안에 내재적인 의로움이 있기 때문에[24] 하나님의 은혜가 주입된다고 보는 측면이라면 개신교[25] 에서는 완전히 타락하여 내적인 의로움이 없고[26] 오로지 하나님의 의로움이 전가(Imputation)되어야 한다고 본다.
또 하나는 칭의의 법정적 의미로 해석하는 개신교는 칭의를 사건(event)로 보는 측면이 강하다. 가톨릭 입장에 차이가 있는데 가톨릭에서는 죄인인 인간이 다시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관계회복 측면으로 바라보는 점이 다르다.
일부 교파들은 성화단계에 있어선 많은 부분의 일치를 이루었는데 트리엔트 공의회 이전 온건 가톨릭 신학자(콘타리니 추기경)와 이미 온건 개신교 신학자(필리프 멜란히톤) 이래 거의 동일한 개념을 완전히 서로 다른 개념으로 오해를 했던 측면이 크다고 본다. 현재는 가톨릭교회에서도 '성화'라는 개념을 들어 설명하지만 16세기 당시에는 개신교 신학자 마르틴 루터, 멜란히톤, 장 칼뱅 등의 견해를 전혀 인정치 않았기에 가톨릭에선 의화(Justification)의 개념만을 사용하여 개신교 신학에 반박했기 때문인데, 가톨릭 의화 개념은 개신교의 칭의와 성화 개념을 모두 포함한다고 보면 비슷하다. '''단, 가톨릭 온건파와 개신교 에큐메니즘 세력이 교파와 교단 전체의 의사를 대변하지는 않으므로 섣불리 통합되었다고 착각하는 것은 금물이다.'''
양측의 이신칭의에 대한 관점을 정확히 따져 정리한다면 가톨릭은 세례성사, 성당출석, 고해성사라는 행위가 없는 믿음은 곧 죽은 믿음이므로 구원에 이르지 못하며 특히나 가톨릭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당연히 이런 행위들을 믿음으로 하지 않을것이니 그 상태로는 천국에 갈 수 없는 것으로 본다. 반면 개신교는 세례와 교회출석과 특정교단 가입이라는 행위가 없어도 온전한 믿음의 성립과 구원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는 만큼 양자의 입장차이는 그러한 어휘의 문제로 일축할 수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1] 작센지역 면벌부종교개혁의 직접적 계기이기는 하지만 마르틴 루터는 교회의 부패를 직접 비판하는 것 뿐만 아니라 중세 스콜라 철학이 교회를 잘못 이끌었다고 봤다. 다른 문제는 부차적이라는 셈[2] <이신칭의> (알리스터 맥그래스)[3] 이는 개신교의 해석으로 이와 달리 가톨릭에서는 세례성사를 통해 실제 의인으로 변화가 이루어진다고 본다.[4] 유대의 제사 중 한 종류로, 죄를 지었을 때 정해진 몇가지 동물 중 하나에 죄를 전가시켜 죽인다.[5] 이신칭의는 루터 이후에 본격적으로 쓰였는데, 루터와 아우구스티누스는 지칭하는 개념은 똑같지만 그 표현방식이 달랐다. 예를 들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의가 주입된다고 본 반면에 루터는 전가된 의로 보았다. 무슨차이냐고 물어본다면 일단 어느 해석이 맞느냐에 따라 대사의 효력 존재 여부가 갈린다[6] 인간의 지위에 대해 신성화(신화)의 관점이라 서방교회 해석과 다르다고 한다. 동방에선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관부터 해석상 틀리다 여겼으며 10세기 이후 아우구스티누스의 라틴어 서적이 그리스어로 역번역 되었지만 역시 인정받지 못했다.[7] 가톨릭에서 펠라기우스 주의는 이단으로 선언되었고, 변형된 펠라기우스 (반半펠라기우스주의) 또한 역시 이단으로 선고된다.[8] 이교도 철학의 개념을 받아들이는 문제에 있어 교부시대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교도의 지식이라도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적합하다면 무방하다. 오히려 비유를 들어 하나님께서 금은 재화를 이교도에 맡겨두신 것으로 기독교인이 찾아서 써야한다며 적극적으로 장려한 반면 역시 이전의 교부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런 접근에 반대했다. 이교도의 신앙이 결핍된 지식은 성경과 관련이 없다는 반박.[9] 그리하여 현재 근대 철학의 선구자로 꼽힌다.[10] 실제로 그의 유명론은 그가 활동했던 옥스퍼드 대학의 학풍이 되었고 그러한 사조는 현대의 영미분석철학으로 이어진다. 보편성을 강조하던 가톨릭 스콜라철학과 달리 개별성에 초점을 두게 된 것.[11] 마르틴 루터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신학교수, 저술, 설교, 목사 양성, 각지 교회와 신학자들의 문답 등으로 엄청난 격무에 시달렸다. 그리고 예정에 대해 크게 언급하지 못한 건 재세례파들이 자신들을 선택받은 백성, 기존 가톨릭교회와 지배세력들을 가나안 백성이라며 쳐죽이는 걸 정당화했기 때문이다.[12] 또 하나의 이유로는 정치적인 이유와 더불어 루터가 에라스무스와의 자유의지론 논쟁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루터가 심혈을 기울여 저술한 것은 노예의지론과 평신도 교육용 교재인 소요리문답이다.[13] 가톨릭 교회는 성화 역시 의화에 포함되는 개념으로 둘이 구분되지도 않는다고 주장한다.[14] 사실 20세기 들어서 목소리를 내는 유대교 랍비들(19세기 이전에는 거의 금기시 되었기에)들은 바울의 서신내용에 반발하며 유대교는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에도 율법주의에 얽매인 고리타분한 종교가 아니라고 주장한다.[15] 성공회는 기본적으로 칼뱅주의의 영향을 받아 온건한 예정론 구원관을 취한다고 하지만(성공회 39개 신조), 특정 구원관을 신자에게 강요하지 않으며 감리교식 구원관이나 천주교식 구원관을 취하는 성공회 신자들도 존재한다. 따라서 저교회파 일부는 온건파 장로교와 흡사한 구원관을 지닌다면, 고교회파 일부는 천주교와 흡사한 구원관을 지닌다는 얘기.[16] 세속적인 선행과 다르다. 이 부분에 대해서 가톨릭은 교회에서 인정한 선행, 루터는 하나님 보기에 합당한 행동이라 본다.[17] 하인리히 하이네 ≪독일의 종교와 철학의 역사에 관하여(Zur Geschichte der Religion und Philosophie in Deutschland)≫[18] 다만 루터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비하하며 정경 목록에서 빼려고 시도한 바가 있었다. 현대 개신교에서는 당연히 이러한 행보를 비판한다.[19] 중세 가톨릭 신학자들도 개인도 가능하다고 보는 학자도 있었지만 소수설이었다.(다만 당시에도 이단 소리 들은 것은 아니다.)[20] 가톨릭에서는 세례를 받음으로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며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제대로 형성된다고 가르친다. 이런 교리도 세례 여부에 관련 없이 믿음 그 자체로 칭의된다는 개신교와 다르다.[21] 여기서 infused righteousness(의로움의 주입)라는 개념이 등장하는데 가톨릭교회의 의화 교리는 의화가 한 번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세례성사를 시작으로 지속적으로 지속적인 성사와 고백, 속죄, 그리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주입된다는 것이다. 칼뱅파는 의로움의 전가를 주장한다.[22] 다시 말하지만 ''''사람이 선행하는게 아니다. 신이 사람을 통해 선행하시는 거다.'''[23] 아우구스티누스도 인간의 타락을 주장했지만 아예 루터처럼 여지도 안 남긴 정도는 아니었는데 개신교 주류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와 루터의 주장이 동일한 것으로 여긴다. 여기서 결국 자유의지에 대한 보편교회와 개신교의 해석차가 나오는 것이다.[24]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대로 자유의지속에 선과 악이 있지만 악으로 균형추가 심하게 기울어있어 악을 행할수 밖에 없다고 본다.[25]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지만 또는 본래의 모습이 왜곡되었지만 하나님의 선행은총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다는 감리교는 절충안에 가깝다.[26] 루터와 칼뱅은 인간은 악으로 완전히 타락하여 자유의지는 죄를 짓는 방향만으로 간다고 본다. 결론은 비슷하지만 신학전제와 개념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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