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개혁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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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formation(영) / Reformation(독) / Reformatio(라) / 宗敎改革'''Sola Scriptura, Sola Fide, Sola Gratia'''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1]
일반적으로, 1517년 마르틴 루터가 당시 가톨릭의 부패와 심각한 타락상뿐 아니라 교황 및 사제들의 심각한 복음훼손을 비판하는 내용의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시작된 '''기독교 내부의 대규모 개혁 운동'''을 일컫는 말이다.[2] 이는 단순히 기독교의 역사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의 역사, 그리고 세계사에 거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으로, 약 천 년간의 중세를 끝내고 근대 유럽을 형성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종교 개혁의 결과, 가톨릭에서 분리하여, 참된 복음을 회복하고자 종교개혁을 일으킨 기독교인들을 개신교라고 한다.
2. 용어 정립
흔히 ‘종교개혁’이라는 용어에 대해서 처음에는 유럽사에서 워낙에 큰 사건이라 '''the R'''eformation처럼 고유명사로 쓰였고[3] , 다른 종교의 개혁에 대해서는 정관사 the가 빠지고 소문자로 reformation으로 쓰였는데 현대에 와서 기독교, 유럽 중심적이란 비판 때문에 가장 좁은 의미의 종교개혁인 개신교의 출현 사건의 경우, Protestant Reformation이라는 중립적 용어가 생겨났다. 그렇다고 기존용어가 완전히 폐기된 것은 아니다. 워낙 오래 관습적으로 쓰였기 때문에 병용하고 있다. 우리 식으로 굳이 번역하면 가톨릭을 포함하는 의미로 쓸 경우'기독교 개혁', 개신교의 출현만을 의미한다면 '프로테스탄트 개혁' 정도로 번역해야겠지만, 그러면 또 번역상의 난제가 생기는 탓에[4] 굳어진 종교 개혁으로 사용하고 있다.
기존의 천주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종교개혁이란 표현을 그대로 써주는 편인데,[5] 그 갈라진 양상을 강조할 때는 '''교회 분열''' 또는 '''종교분열'''이라고도 한다. 즉 소위 "종교개혁"이라고 일컫고 상세한 내용은 분열이라고 언급하는 것이다. 또한 일부 천주교 보수파에서는 개신교의 출현만을 일컫는 경우 '종교개혁'이라는 표현 대신 '종교분열'이라는 표현을 즐겨쓰기도 한다. 이는 교회 역사상 루터 말고도 각종 분열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대표적으로 정교회와의 동서 분열(The Great Schism이라고 한다)이 있고, 그 다음에야 아비뇽 유수, 그리고 루터가 있다. 그리고 천주교 보수파라면 루터 등의 행위를 절대 '개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서일 것이다.
또한 종교개혁에서 프로테스탄트의 태동만을 주목하는 것은 그림의 한쪽 면만을 보는 것이다. 프로테스탄트에 대응하여 대대적인 가톨릭의 쇄신 움직임도 일어났다. 예전에는 독일 역사학자 레오폴트 폰 랑케가 처음 대항 종교개혁으로 명명한 것에서 유래하여 학술적으로 이 개혁을 대항 종교개혁, Counter-Reformation이라고 불렀으나,[6] 현재에 와서는 이 용어가 지나치게 한쪽에 치우친 용어임이 지적되어 '가톨릭 개혁(The Catholic Reformation)'이라고 부른다. 가톨릭의 개혁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다면 트리엔트 공의회 문서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참고하라.
3. 프롤로그
흔히 종교개혁의 시작을 마르틴 루터가 1517년에 면죄부 판매에 반대해서 95개조 반박문을 내걸었을 때로 보는 게 일반인들의 시각이지만 학자들은 프로테스탄트의 종교 개혁, 그에 맞선 가톨릭 교회의 대항종교개혁 모두 시대적 산물이고 내적인 변혁이라는데 견해가 보통이다.[7] 다만 개신교계에서는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한 '''1517년 10월 31일'''을 '''종교개혁 기념일'''[8] 으로 삼고 있다.
다시 말해 지나치게 인물사적인 관점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19세기 토머스 칼라일은 마르틴 루터가 없었더라면 하는 if 떡밥으로 '''루터가 없었으면 프로테스탄트도 없고 독일의 분열도 없고 프랑스 혁명도 없고 미국의 독립도 없었다'''는 식의 책을 써서 유명해지긴 했지만 근대 사학의 입장에서 이러한 영웅주의 사관은 거의 인정받지 못하는 추세였다.
이러한 경향은 19세기부터 두드러졌는데 종교개혁을 다룬책에 루터나 츠빙글리 같은 인물에 대한 연구 자체가 빠져버리고 대략적인 서술만이 남은 경우도 남아서 1970년대부터는 인물사 경시에 대한 반성이 이뤄져서 시대적 사건과 함께 균형적으로 연구하는 추세다. 다시말해, '''오늘날 학자들은 종교개혁을 루터와 츠빙글리와 가톨릭 쇄신가 등 개인들에 맞추는 영웅주의적 사관을 배격함과 동시에, 종교개혁이 어떤 필연성에 의해 촉발되었다는 사관도 배격한다.''' 이는 다른 역사학 분야에서도 유사하다.
신학계 역사 신학의 입장에선 현재 가톨릭이나 개신교나 역시 인물사적 사건으로 보지 않는다. 종교개혁의 이론적 기반이 되었던 고대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와 종교개혁 바로 이전시기 '후기 스콜라 철학'에 대한 연구가 많이 진행 중이다. 종교개혁 시기 수백 년 전 중세 가톨릭 교회 자체는 물론이고 유럽 각지에서 개혁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루터도 이전의 개혁적 분위기나 사상가들에게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종교개혁을 일으킬수 있었다는 것.
'''하지만''' 교회론에 대한 근본적 회의주의 운동이 기존에는 번번히 실패로 끝나고 몇몇은 가톨릭에게 이단으로 찍혀 음지에 숨어있어야 했던 반면, '''루터와 칼뱅 등이 양지로 끌어내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결과가 있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9] 종교개혁가들에 대한 연구 또한 이뤄지는 게 사실이다.
사실 언제부터 종교개혁의 시작으로 봐야되는지는 논란이 있긴 하다. 중세 초기 가톨릭 교회의 성직자들 모습이 오늘날에 비해 상당히 부패하여 있던 것은 크게 이견이 없고[10] , 성직매매, 수도원(수녀원)의 타락, 교회의 세속권력, 가톨릭교회가 사회 현실과 타협한 여러 풍습등의 문제는 이전부터 꾸준히 제기되어온 문제점이기 때문에 15~16세기의 개혁가들이 처음으로 주장한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부패상을 가톨릭 신자들이 손놓고 바라본 것은 아니다. 중세 이전부터 교회 구성원들이 부패와 매너리즘에 빠질 때마다 그런 현상을 타파하기 위해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수도원 운동이 개혁의 모습으로 볼 수 있고, 심지어 루터교회가 출현하던 시기에도 수도회들의 쇄신 운동은 단절되지 않았다. 오늘날 가톨릭에서 존경 받는 쇄신운동가이자 성인들인 아빌라의 데레사, 십자가의 요한(성 후안 데 라 크루즈)은 이 시기 스페인에서 배출한 개혁가들이다. 데레사와 요한은 가르멜 수도회를 개혁했다.
물론 루터의 출현은 순수하게 우발적 사건이라고는 결코 볼 수 없으며, 중세 후기로 가게 되면 개혁을 위해 나타난 수도원들도 조직화되어 가면서 부패의 늪으로 빠지기도 하는 등 상황은 굉장히 복잡하다. 거기에 가톨릭 교회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교황과 교황청도 100여 년간 아비뇽 시절과 분열시기를 겪으며 교황의 권위가 추락하면서 점점 힘을 잃어갔다.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로 분열시기는 마감하였지만 교황청은 잃었던 세속권력을 회복하고 교황령의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세속적 영토다툼에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주교나 대주교는 대체로 왕족이나 귀족들이 독점했고, 추기경들은 대체로 이탈리아 명문가에서 선발되었고 교황선출도 그리했는데 오랜 세월 동안 교회체계가 경직 되면서 교회 조직이 관료화되면서 경직성이 더해져 갔다.
이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 것이 크게 3가지 흐름인데, 첫 번째는 신비주의 운동이라고 볼수 있다. 중세 3대 신비주의자로 불리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 요한 타울러 등은 영성을 갖춘 신비주의자들로 이들은 당시 가톨릭 교회의 부패상을 직접적으로 비난한 것은 아니었지만 개혁적인 성향을 띠고 있었다.
두 번째는 데보티오 모데르나라 불리는 일종의 신도 경건운동으로[* 現 네덜란드 즈볼러(Zwolle) 근처에 위치한 빈데스헤임(Windesheim)을 거점으로 하여 토마스 아 켐피스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아(De imitatione Christi)'''란 책을 쓴 것으로도 유명하다. 수도원이 있던 자리는 종교개혁 이후 대부분의 건물이 철거되었으나 일부는 남아서 [[https://commons.wikimedia.org/wiki/Category:Nederlands_Hervormde_Kerk,_Windesheim ] 수도원적인 경건을 일반 사람들에게 널리 퍼뜨렸다. 이는 마르틴 루터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세 번째는 존 위클리프, 얀 후스, 사보나롤라, 발도파 등의 사상적/윤리적 개혁가, 개혁 공동체들이었다.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는 과감하게 성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가톨릭 교회의 부패상을 비판했다. 사보나롤라의 경우는 피렌체에서 활동하면서 메디치 가문을 쳐바르고 피렌체의 개혁을 이끌다가 화형당한바 있다. 발도파는 청빈을 강조하여 당시 비대해진 가톨릭 교회의 사치와 부의 축적을 비판했다. 다만 이들이 번역이 금지되었던 라틴어 성경을 번역했다는 오해가 있는데, 번역한 것은 사실이지만 라틴어 성경의 번역은 그 이전에도 행해지던 일이며 금지된 것도 아니다. 단지 인쇄술의 발달로 후대에 갈수록 번역이 활발해진 것뿐이다.
또 한편으로 짚고 넘어가야할 것은 중세의 '공의회우위설'(공의회가 교황 위에 있다는 교설)이다.[11] 이는 교황직의 분열 때문에 더욱 발전하게 되었는데, 교황 위에 있는 공의회 외에는 분열을 해결할 길이 없다는 생각과 연결되어있다.
실제로 공의회우위설은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교황의 단일성 회복에 영향을 끼쳤다.
교황을 포함한 모든 사람은 신앙, 교회일치, 머리와 지체에서의 개혁에 관한 문제에 관해 공의회에 복종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비록 이 교령은 비상조치이기는 했으나 아무튼간에 교황이라는 우두머리의 단일성을 회복시키는데 성공했다.이 거룩한 콘스탄츠 시노드는 보편적인 공의회를 구성하고 있다. 분열의 종식과 하느님 교회의 일치 및 머리와 지체에서의 개혁 그리고 전능하신 하느님 찬미를 위해 성령 안에서 적법하게 소집된 이 시노드는 하느님 교회의 일치와 개혁을 더 용이하고 확실하고 훌륭하고 자유로이 성취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규정·정의·결의·선언하는 바이다:
1) 이 시노드는 성령 안에서 적법하게 소집되었고, 보편적인 공의회를 구성하며, 가톨릭 교회를 대표하며, 자신의 권한을 직접 그리스도에게서 받았다. 누구나, 어떠한 신분과 지위를 지녔든, 또 비록 교황이라 할지라도, 신앙과 현재의 분열의 근절 그리고 하느님 교회의 머리와 지체에서의 개혁과 관계하는 사안들에서 이 시노드에 복종할 의무가 있다.
2) 누구나, 어떠한 신분과 지위와 품위를 지녔든, 또 비록 교황이라 할지라도, 이 거룩한 시노드와 향후 위에서 언급한 전제들 아래 적법하게 소집되는 모든 공의회의 명령·결정·규정·지시 들에 순종하기를 고집 세게 거부하는 자는, 만일 그가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을 것이며, 필요할 경우에는 다른 조처들도 사용될 것이다.
콘스탄츠 공의회 1415년 4월 6일자 교령 「헥 상타」[12]
이는 후대의 가톨릭 교회에서 다음과 같이 해석되고 있다.
여담으로 이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그 유명한 얀 후스 재판이 발생했다.분열의 과정 그리고 특히 교령 「헥 상타」에 대한 해석은 "로마" 노선과 "갈리아" 노선 사이에서 수백 년간 불화의 원인이자 논쟁의 핵심이었다. 갈리아주의자들은 「헥 상타」를 구속력있는 문헌으로 여겼고 그 안에 교황에 대한 공의회의 원칙적 우위가 명시되어 있다고 보았으며, 그 우위를 분열이라는 특수 긴급 상황에 한정시키는 것을 반대했다. 반면 엄격한 교황주의자들은 그레고리우스 12세까지 포함한 로마계 교황들만이 정통적이며 그레고리우스의 사임과 1415년 7월 4일 그에 의한 공의회의 정식적인 새로운 소집이 비로소 콘스탄츠 공의회에 적법성을 부여했고 그로써 "공의회 방안"을 통한 분열의 종식을 가능하게 했다는 사실에서 출발했다. 이들에 의하면 「헥 상타」는 이미 형식상으로도 무효이며 사실 일종의 이단적 조처이니, 왜냐하면 분열이라는 긴급 상황에서도 공의회가 적법한 교황보다 상위에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거시었다. 그밖에 물론 온건한 교황주의적 입장도 있었다. 이것은 달리는 분열을 제거할 방법이 없는 특수 상항에서는 공의회가 "교황들" 위에 있다는 데서 출발했다. 이 입장은 그러므로 피사 공의회를 부분적으로 인정했고, 1409년부터는 그레고리우스 12세가 아니라 알렉산데르 5세와 요한 23세를 적법한 교황으로 간주했던바, 사실 그리스도교계 대부분이 이들을 교황으로 인정했고 또한 1414년 오직 리미니를 중심으로 한 지역만이 참 교회라는 그레고리우스 측의 주장은 뭐라 해도 현실과 동떨어진 것으로 비쳐갔다. 금세기에 들어설 때까지 로마 교황의 공식 명단은 성 바울로 성당 벽에 그려져 있는 교황 초상화들에서 분명히 드러나듯 이런 관점에 부합한다. 이렇게 「헥 상타」는 분열시의 상황예속적 긴급조치로 인정되었으나, 그 상황을 넘어서까지 공의회의 우위를 통용시키는 것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영향으로 1960년대 이래 특히 가톨릭 교회사학자들 사이에서 다시금 매우 강도높게 진행된 「헥 상타」에 관한 토론은 이 문서가 교의적 결정을 한 것은 아니라는 데 널리 의견이 일치한 것으로 보인다. 문서의 어휘나 역사적 맥락 그리고 바로 공의회우위설 주창자들의 태도 자체가 그런 해석을 배제하고 있다. 교령은 "이 콘스탄츠 공의회"와 그것의 구체적 임무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사용한 어휘는 교회법 용어이지 교의학 용어가 아니다. 촉구된 것은 순종이지 신앙이 아니다. 처벌 대상은 불복종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지 견해가 다르거나 진리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레고리우스 12세 ―그리고 베네딕투스 13세 ―의 추종자들에 대한 공의회의 태도는 사람들이 「헥 상타」를 고집하지 않았음을 뚜렷이 보여준다. 과연 사람들은 그들에게 적법성이라는 무대를 제공했으니, 그들이 참여해야 공의회가 비로소 보편적으로 되고 그리하여 이전의 모든 회합(「헥 상타」를 공포한 회합을 포함하여, 적법성이 결여된 회합들)도 보편적으로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훗날 바젤 공의회의 엄격한 공의회우위설(수위설) 주창자들조차도 적수들을 이단자로 선언하기 위해서는 「헥 상타」로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앞으로 보려니와, 교황에 대한 공의회의 우위라는 "진리"는 1439년 「사크로상타」''Sacrosancta''에서[13]
비로소 명확히 정의되어야 했다.그럼에도 내용적으로 볼 때 「헥 상타」를 그저 분열 상황을 위한 긴급조처로만 이해하기는 힘들다. "머리와 지체에서의 교회 개혁"에 관한 사안들에서도 공의회가 우위를 보유한다는 언명 그리고 처벌 위협과 "이후의 모든 공의회"에 관한 구절들은, 비록 명확히 표현되지 못했고 또 앞뒤가 맞지 않는 면도 있지만, 아무튼 공의회의 우위성의 일반화를 겨냥하고 있다. 덧붙여 말하면, 공의회에 ㅐ한 이 두 가지 관점 사이의 차이는 이미 4월 6일 이전 며칠간의 소동 속에서 양측이 익히 알고 있었다. 자바렐라를 비롯한 추기경들은 다만 분열 상황을 위한 비상非常 교령을 원했고, 반면 다수파 특히 독일과 프랑스 그리고 영국은 거기서 더 나아가고자 했다. 결국 다수파가, 피사 공의회에서 선출된 교황의 두 번째 도망 이후,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켰다.
교회를 위한 「헥 상타」 교령의 항구적 의의의 관한 문제 역시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으나, 아무튼 이 교령은 무류하고 시대를 초월하여 유효한 신앙의 결정도 (지금도 통용되는) 교회법규도 아니라는 것만은 확인되었다. 혹시 당시와 유사한 교황의 극단적 무능과 실패(분열을 야기하거나 이단에 떨어짐 등) 상황이 발생하면, 교회를 위해 이 교령에 일종의 "본보기 역할"이 주어져야 마땅하지 않을까라는 문제도 여전히 남아 있다. 그렇게 된다면 「헥 상타」는 앞으로도 발생할 수 있는 교회의 극한 상황을 위한 범례적 의의를 보유하게 될 것이다: 교황이 자신의 본분을 현저히 거스르는 경우, 공의회가 교황 없이도 최고 심급을 구성한다. 브라이언 티어니가 「헥 상타」는 당시 상황에서 교회의 일치 그리고 바로 교황직의 존립을 가능케 한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교회론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해선 안 된다고 말한 것은 당연하다. 「헥 상타」와 콘스탄츠 공의회 교부들의 조처를 비합법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은 그로써 제가 판 구덩이에 빠지는 셈이다. 왜냐하면 그는 당시 그것이 없었다면 교황이라는 우두머리의 단일성이 회복되지 못했을 바로 그 조처를 부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클라우스 샤츠, 《보편공의회사》, 이종한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2005), 182-184쪽
아무튼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들은, 가톨릭 교회에서 인정 받은 쇄신이든, 인정되지 않은 쇄신이든 간에, 근래의 역사학자들이 종교개혁을 더욱 넓은 범위로 해석하는 단서가 된다.교회의 쇄신이야말로 프라하의 교수 얀 후스Jan Hus가 항상 가슴에 품고 있던 것이었다. 요한 23세 폐위 후 심의 휴지기에 공의회는 후스라는 인물과 그 가르침에 대해 논의했다. 1415년 5월 5일 그의 45개 명제들이 단죄된 영국윈 위클리프Wycliffe는 후스의 모범이었다. 후스도 위클리프처럼, 범죄로 점철된 작금의 교회를 떠나 하느님께 (구원을) 예정받은 자들이 모인 영靈(Pneuma)의 교회로 도피했다. 거기서 사제직과 성사의 질료적 집전이 아니라 오직 영의 소유가 구원을 보장한다. 스스로 흠 없었던 그는, 성직자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으로 그의 보호자였던 프라하 대주교마저 격분시켰으나 귀족과 체코 국민들로부터는 폭넓은 지지를 얻었다. 공의회는 그에 대하여 최후의 판결을 내려야 했다. 지그스문트 왕은 그에게 콘스탄츠 행 통행증을 교부했다. 그에게 내려진 교회의 파문은 철회되었으나 성무 집행 정지 ― 미사 집전과 설교의 금지 ―는 철회되지 않았다. 콘스탄츠에서 후스는 이 금지를 어겼고, 구금되었다. 공의회가 임명한 예심 판사들 앞에서 그는 자신의 주장을 거두어들이기를 거부했다. "나는 어떠한 오류도 가르치지 않았다. 체코인치고 이단자는 없다." 그는 1415년 7월 6일 골수 이단자로 단죄되어, 현행법에 따라 세속 기관이 처형했다. 1년 후, 친구였던 프라하의 히에로니무스도 화형에 처해졌다. 그는 처음에는 주장을 철회하기도 했다. 죽음 앞에서 후스는 의연했다. 형집행을 목도한 인문주의자 포지오Poggio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신앙 문제만 빼면 ― 그는 탁월한 사람이다"(Vir Praeter fidem egregius)
-후베르트 예딘, 《세계공의회사》, 최석우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2005), 84-85쪽
한편, '교회 구성원들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타락했는가?'라는 질문에는 의외로 각 개혁운동들 사이에서, 가톨릭 개혁가와 개신교 개혁가 사이의 논쟁이든 개신교 개혁가 사이의 논쟁이든, 합의된 의견은 없다. 이를테면 재세례파들은 유아세례가 성경에 직접 언급되지 않은 내용을 집어넣은 타락이라 주장했지만 루터와 칼뱅의 관점에서는 전혀 타락이 아니다. 또한 침례회 신자들이 보기에는 교회의 권위있는 교의라는 개념 자체가 타락이겠지만, 역시 루터의 관점에서는 교회의 권위 그 자체가 (가톨릭의 해석보다는 소극적으로 해석되지만) 근본적으로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가톨릭 교회 내부에서도 '무엇이 타락인가'는 합의가 안되어있고 개혁의 방향에 대해서도 다양한 의견이 있다. 이를테면 성 도미니코 데 구스만은 베네딕토회로 대표되는 중세 수도원들이 민중의 삶과는 지나치게 격리되어 있다고 느끼고는, 도시에서 소규모 공동체 위주로 민중의 삶에 적극적으로 끼어드는 도미니코회를 설립했다. 반면 아빌라의 데레사는 수도자들이 세속의 신자들과 너무 심하게 어울려 산다고 느끼고는, 봉쇄수도원이 개혁의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다. 즉 가톨릭 내부의 수도원 개혁운동들 사이에서도 '문제의식'과 '해결'이 다른 방법으로 나타난 것이다. 특히 1571년 10월 6일에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가 엔카르나씨온에서 겪었던 일은 가톨릭 내부에서도 '타락'과 '개혁'에 대한 해석이 근본적으로 달랐음을 보여준다. 교황 성 비오 5세가 특파한 순찰사 베드로 페르난데스는 데레사를 엔카르나씨온의 가르멜 수녀원의 원장으로 임명했는데, 이날 새 원장 데레사에게 수녀들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수녀들은 "어용 원장 물러가라", "선거권 박탈이다"라며 아우성을 쳤다. 수녀들이 보기에는 자치권에 대한 교황청의 간섭이야말로 충격과 공포의 타락이였던 것이다. 반면 데레사는 각 지역의 수도원이 중앙(교황청)과는 격리되어 지역 인사들과 온갖 연줄로 얽혀있는 것이야말로 타락이라고 여겼다.우선 아주 기본적인 질문부터 해보자. 실제로 '종교개혁' 따위가 있었는가? 이 표현이 가리키는 사태가 일어나고 오랜 시간이 지나기 전까지, 오늘날 우리가 공통으로 받아들이는 의미로 '종교개혁'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독교 내부의 '개혁' 요청은 이 종교 자체만큼이나 오래된 것이고, 매 시대마다 기독교를 시급히 개혁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역사가들은 베네딕토회의 수도원 생활 쇄신과 연관되었던 잉글랜드 교회의 '10세기 종교개혁', 교황의 지시를 받아 기독교권 서방 전역에서 성직자의 독신을 강요하는 데 성공한 12세기 종교개혁을 확인했다. 훗날 14세기에 경쟁자 2명(한때 3명)이 교황 성좌에 앉을 권리를 주장한 '대분열'은 다음 세기에 격렬한 레포르마티오(reformatio, 개혁)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15세기 종교개혁에는 공식적인 면과 비공식적인 면이 공히 있었다. 성직자 지도부는 공의회를 통해 교회 정체를 조직화함으로써 지도력 위기를 봉합하고 분열 추문을 예방하고자 했다. 그런 위엄 있는 모임은 피사(1409), 콘스탄츠(1414~1418), 파비아와 시에나(1423~1424) 바젤과 기타 장소(1431~1449)에서 열렸다.
(중략)
유럽의 반대편 끝자락에 자리한 보헤미아 왕국에서 또다른 급진적 사제 얀 후스(Jan Hus)는 외국의 대군 주권과 로마의 관할권에 대항하는 민족 봉기를 고무했다. 또한 후스파는 미사 중 성체성사에서 평신도에게도 빵만이 아니라 포도주까지 줄 것을 요구했다. 목표와 우선사항이 각기 다른 개혁 운동들이 항상 양립 가능했던 것은 아니지만(후스는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이단자로 화형에 처해졌다), '''총괄해서 보면 그 운동들은 마르틴 루터 이전 세기에 유럽 종교생활의 두드러진 특징이 무기력과 현실 안주였다는 어떠한 견해도 거짓임을 보여준다.''' 이처럼 루터 이전에 숱한 개혁 시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루터와 연관된 종교개혁에 정관사를 붙이고 'r'을 대문자로 바꾸어 'the Reformation'이라고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게 쓰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밝히는 강력한 논증들이 있다. 단수(單數) 종교개혁에 관한 옛 교과서들은 으레 1517년에 루터가 항의한 시점부터 이야기를 시작했고, 1546년에 루터가 사망하고 길어야 10년 남짓 지난 시점에 이야기를 마무리지었다. 종교개혁은 근본적으로 독일의 사건으로 보였고(잉글랜드 같은 다른 곳에서도 중요한 반향이 일어나긴 했지만), 서사 형태가 깔끔한 운동이었다. 다시 말해 이런저런 이유로 루터가 로마 교회와 결별하고 뒤이어 독일 가톨릭교도 황제의 뜻에 대항해 프로테스탄트 국교회들이 설립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종교개혁은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이었고, 정치적 사건이었으며, (종교개혁 이전 가톨릭교회의 무질서한 상태를 감안하면) 예측 가능했다.
'''이제 이런 단수 종교개혁의 연대기도 지리도 더는 설득력 있게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종교개혁이 '불가피했다'는 가정은 중세 후기 가톨릭교의 유연성과 정신적 활력을 강조하는 새로운 연구를 고려하면 적어도 논박이 가능해 보인다. 가장 중요한 점은, 한때 16세기 종교개혁의 시작이자 끝으로 보였던 것 ―독일에서 전개된 루터의 운동―이 실은 훨씬 더 큰 전체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는 주장을 이제 학계에서 두루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단수 종교개혁은 복수 종교개혁들에, 즉 저마다 고유한 지향과 의제를 추구했던 복수의 신학적·정치적 운동들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 이처럼 뚜렷이 구별되는 국가·지방·지역 단위 종교개혁들이 있었다. 그 운동들이 모두 루터파였던 것도, 모두 성공했던 것도 아니다. 신교의 어느 야심찬 갈래는 루터주의와 경쟁하며 그 뒤를 바짝 쫓았다. 더 정확한 명칭은 '개혁파' 신교이지만, 그 갈래는 흔히 신학적 약칭으로 '칼뱅주의'라 불린다. 유럽 여러 지역에서 구교인 가톨교를 처음으로 대체한 신앙으로서 칼뱅주의를 경험하긴 했지만, 칼뱅주의는 이따금 '제2종교개혁'이라고도 불린다. 당대의 종교 실험자들 모두가 루터와 칼뱅을 비롯해 권한을 가진 위치에서 교리를 가르치고 세속 행정관들과 동맹을 맺은 '관료적' 개혁가들의 선례를 따랐던 것은 아니다. 그들과 별개로 일부 집단과 개인이 시도한 아래에서 위로의 '급진 종교개혁'도 있었다. 그들은 전혀 다른 사회질서를 상상했고, 관료적 개혁가들마저 당연시한 기독교의 기본 전제를 과감히 재고했다. 가장 중요한 개혁들 중 하나는 가톨릭교회 밖이 아니라 안에서 일어났다. 루터와 칼뱅의 도전에 직면하여 로마가 세력을 결집하고 성직 위계를 재정비한 사실은 오래전부터 인식되었다. 19세기에 독일 신교 역사가들이 대중화한 상투적 서술에서 가톨릭의 이런 움직임은 소극적이고 본질적이고 반동적인 대응이라는 뜻으로 '대항―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이라 불렸다. 그 이전가지 종교개혁에 관해 쓴 이들은 (그리고 오늘날에도 놀랄 정도로 많은 이들은) 테베라 강의[14]
이런 견해를 생략하든지 아니면 책 뒤쪽의 부수적인 장에 우겨넣었다. 그러나 점차 '가톨릭 종교개혁' 또는 '가톨릭 쇄신'이라 알려진 것은 단순히 적에 직면하여 방어시설을 보강한 대응책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넓은 운동이었다. 신교 반란에 앞서 가톨릭교 내부에 이미 개혁을 지향하는 새로운 정신적 동향들이 있었다. 그중 일부는 신교 반란으로 방향을 틀었지만, 다른 일부는 그러지 않았다.
「The Reformation」, Peter Marshall[15]
특히 '무엇이 타락인가'라는 논쟁이 가톨릭 개혁운동들 내부 혹은 개신교 개혁운동들 내부를 넘어, 가톨릭 개혁운동과 개신교 개혁운동 사이의 논쟁이 될 경우는 문제가 더더욱 꼬인다. 단적인 예로 대사(면벌부) 논쟁을 살펴보자. 개신교 개혁가들은 성경에 직접 언급되어있지 않은 대사라는 개념이야말로 타락의 증표라고 여겼으나, 가톨릭 개혁가들은 대사라는 개념 자체는 타락이 아니되 신앙의 공로로 받아야 할 대사를 '상품'으로 전락시켜버린 성직자들의 행태를 타락으로 여겼다.[16] 또한 중세 가톨릭교회 특유의 활발한 자선 문화는 가톨릭 개혁가들이 생각하기에는 아름다운 사회였으나, 개신교 개혁가들은 구원을 돈 주고 산다고 여기며 타락의 증표로 생각하였다. 또한 후에 소개할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과로 가톨릭교회가 각 지역의 성직자들을 효율적인 신학교 체계로 교육하려고 한 것 역시도, 시선에 따라서는 타락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바로 네덜란드 지역의 개신교 개혁가들이 그러하였는데, 이들은 신학교야말로 지역 교회에 대한 과도한 간섭이자 폭정이라 여겼다.[17] 교황청에서 성직자의 독신의무를 통해 사제들이 결혼을 하지 못하도록 한 것만 하더라도, 오늘날의 가톨릭 신자들이 보기에는 개혁이지만, 오늘날의 개신교 신자들이 보기에는 성경에 직접 언급되지 않은 것을 교황이 밀어붙인 타락이라고 여긴다. 또한 중세 교회의 초대형 떡밥이던 서임권 논쟁에서도 타락에 대한 관점은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이 논쟁의 중요한 결론 중 하나인 보름스(Worms) 정교조약(1122년)과 제1차 라테란 공의회(1123년)를 살펴보자면, 황제나 봉건영주는 서임식에서 반지와 지팡이 대신에 홀(笏)을 통해 세속재산을 하사하도록 하여 주교직에 내리는 교권과 속권을 구분하였다. 다시 말해, 후대로 갈수록 성직자의 속권은 세속 통치자들에게로 돌아가고 교권은 더 엄밀하게 정의되어가는 경향을 보인 것이다. 이는 가톨릭 신자들이 생각하기에는 역사적인 진보이지만, 개신교 개혁가들이 생각하기에는 세속권력과의 결탁으로 보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종교개혁 시대쯤에 특히 독일 지역이 이른바 경건한 중세 전성기 때보다 타락했다는 오해이다.
물론 당시 사람들이 신앙에서 느끼던 불만은 어느 정도의 진심을 담고 있지만, 그것이 곧 객관적 의미에서 옛날보다 타락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소 경박한 비유를 들자면 요즘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다라는 말이 진심을 담고 있더라도 '아름다운 과거'를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니듯이 말이다.[18] 물론 현대인들이 이 시기의 유럽에 대해 놀랄만한 일들이 많지만 말이다.주교들의 사목적 책임의 효과적 수행을 저해한 또 하나의 요인은 중세 말엽 주교들의 권한이 여러모로 공동화空洞化했다는 사실이다. 사목과 교회 규율을 강력하게 관장하려 시도한 주교들은 온갖 방면에서 장애에 맞닥뜨렸다. 당시 사목적 직책들의 거의 대부분을 좌지우지하고 담당자들을 지명하던 교회 후견인들은 대부분 평신도였으나, 종종 교회 단체들(주교좌 성당 참사회 · 수도원 · 대학) 그리고 외지(타국) 주교들인 경우도 있었다. 게다가 주교좌 참사회 또는 부주교들(실제로는 일종의 영역 주교들이었다)은 종종 교구의 정규적인 공동지배 구조를 형성했고, 매우 독자적인 지위를 보유했으며, 주교의 권한을 사사건건 제한했다. 더 나아가 교황 특면과 유보권들도 온갖 곳에 주교의 권한이 미치지 않는 영역들이 생겨나게 했고, 그리하여 사실상 교회 조직의 뿌리깊은 독소가 되었다. 흔히는 수도원들만이 아니라 (예컨대 후견법을 거쳐서) 수도원에 속하는 본당구들 전체가 면속되었다. 대개의 경우 주교들은 자기 교구 성직자들의 일부에게만 실제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엄격한 개혁을 관철시키고자 했던 주교들은 얼마 안 되어 이 온갖 독자적인 기구들과의 가망없고 진빠지는 게릴라전 그리고 무엇보다도 교황청에서의 끊임없는 소송에 얽혀 들어가게 되었고, 그래서 결국 대개는 체념을 하고 말았다. 사실상 중세 말엽 많은 교구들에서 일종의 무정부 상태 내지 온갖 기구들의 극히 혼미한 대립-병립 통치가 지배했다. 수십 년이나 계속되는 끊임없는 싸움을 피하고자 한다면 대개의 경우 그저 모든 것을 되어 가는 대로 놔두는 수밖에 없었다.
하급 성직자 영역에서는 중세 말엽의 전형적 현상인 "성직자 프롤레타리아"가 나타났다. 도시들 가운데는 사제와 수도자가 전체 주민의 10분의 1에 이르는 곳도 있었다. 그중 대부분은 물질적으로뿐 아니라 정신적 · 영적으로도 극히 수준이 낮았다. 중세 때의 일반적인 시골 신부 또는 도시의 평범한 "교구 소속 신부"는 처지가 가련했고 교육도 거의 받지 못했다. 사제가 된 사람은 대개 한 사목자에게 "견습하러 가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배웠다. 대학에서의 신학 교육은 대개 수도회 소속 사제들만 받았는데, 그것도 항상 그런 것은 결코 아니었다. 게다가 도시의 매우 많은 사제들이 신자들의 영혼을 보살피는 사목 사제가 아니라 "미사 집전 사제"였던바, 이들의 물질적 기반은 미사 예물과 그것에 관련된 부과금이었다.
독신제의 준수는 이 성직자 프롤레타리아의 대부분에게 문제 밖의 일이었음이 확실하다. 독신제가 실제로 어느 정도나 준수되었는지는 확실히 말하기가 어렵다. 나라마다 사정이 매우 달랐다. 15세기 독일(쾰른 또는 콘스탄츠)의 시찰 보고서들에 의하면 교구 사제의 3분의 1이 내연관계를 맺고 있었다. 정확한 통계는 나와 있지 않지만 그 정도만 해도 비교적 양호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이 문제에서 그리고 민중들의 종교생활에서는 더더욱, '''중세 말과 종교개혁 직전의 상황이 이른바 건전한 중세 전성기 때보다 나빴다고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된다. 사실은 그 반대였다. 1500년 전후의 시기는 특히 독일에서 그 이전 어느 시대보다 "경건"했고 신앙이 뜨거웠다.''' 그러나 바로 그런 시기에 이상과 현실 사이, 종교적 이상과 당시의 사회 현실을 반영한 교회구조들 사이의 괴리는 더욱 터무니없게 느껴졌다. 그러므로 당시 개혁에의 외침은 전반적인 쇠락의 증거가 아니라 종교적 활력의 증거였다.
-클라우스 샤츠, 《보편공의회사》(이종한 옮김), 분도출판사 2005, 212-213쪽
4.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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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들은 대체로 종교개혁을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다음 기술된 분류 가운데 첫 3가지(루터파, 칼뱅파, 잉글랜드국교회)는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 받았으나, 그 외(과격혁명론자, 재세례파, 반삼위일체파, 가톨릭)는 거의 독자적으로 움직였다.
- 북독일과 북유럽의 마르틴 루터 와 루터주의 (마르틴 루터, 필리프 멜란히톤, 유스투스 요나스, 요하네스 부겐하임, 게오르크 슈팔라틴 등)
- 스위스와 남독일에서 시작된 개혁주의 (츠빙글리, 하인리히 불링거, 마르틴 부처, 외콜람파디우스, 장 칼뱅 등)
- 과격혁명론자 (토머스 뮌처, 라이덴의 얀, 한스 뎅크 등)
- 재세례파 운동[22] (후터파, 스위스 형제단, 메노나이트 등)
- 반삼위일체파 (이들은 예수가 도덕적으로 우수했기 때문에 신적 능력을 받았다고 보았다. 삼위일체를 부정하고 일위일체론을 주장했다. 후에 유니테리언으로 이어졌다.)
- 가톨릭교회의 개혁운동
4.1. 마르틴 루터와 95개조 반박문
이런 상황 속에서 한 사람이 등장하는데 바로 마르틴 루터였다.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소속이었던 루터는 스승인 요한 스타우피츠의 권유를 받아들여 중세 가톨릭의 스콜라 철학 최신 분야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신약성서 자체로 돌아가 연구를 시작하기에 이른다. 이때 루터는 사도 바오로의 발언으로부터 '''이신칭의''', 즉 하나님을 믿음으로서 의롭게 된다는 사상의 실마리를 발견하고 정립하기 시작한다.
이미 루터가 이런 결론에 도달한 지 오래된 가운데 1517년, 한 가지 사건이 일어난다. 신성 로마 제국의 선제후 중 하나인 마그데부르크 대주교 겸 할버슈타인 주교인 알브레히트가 면벌부를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알브레히트가 면벌부 판매에 나선 이유는 '''마인츠 대주교직에 오르려고 빚을 내서 샀기''' 때문이었다. 구체적으로 알브레히트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의 동생[23] 인데 교회법을 위반하여 20세 이전에 주교 서품을 받았고, 이후 겸직을 금지하는 교회법을 어기고 할버슈타트와 마그데부르크 대주교구를 패키지처럼 돈으로 사모았는데, 마침 신성로마제국 최선임 선제후 직위인 마인츠 대주교 자리가 매물(?)로 나오자 다소 무리를 하여 빚을 내서 선도 구매해버렸다. 이 과정에서 교황청에서 파견한 도미니코회 수도자인 요한 테첼[24] 을 브로커로 고용하여 당시 독일서 가장 큰 사채업자(?) 푸거 가문의 야코프 푸거에게 2만 1천 두카트의 빚을 졌고[25] 8년간 면벌부 판매수입을 보장받았으며 판매수입의 절반과 초입세[26] 를 교황 레오 10세에게 바치기로 합의했다.
사실 성직 매매 문제를 파고들자면, 16세기 초에만 있는 게 아니었고 그냥 이전부터 자주 있던 일이라 딱히 고대의 교회보다 이 시절이 더 심했다고 보긴 어렵다. 오히려 1215년에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무려 공의회 차원에서 다루는 등 중세의 교회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해결하려고 노력한 편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유야 어찌되었든 이 문제는 루터의 시대인 16세기에도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던 것이 중요하다.[27] 그리고 독일에서 그간 교회의 경제적 수탈로 인하여 반로마 감정이 폭발하자 전유럽에 순식간에 파급력이 미치게 된다.
독일 작센지방의 마르틴 루터는 이신칭의의 결론에 도달하였고, 그런 그가 보기엔 면벌부에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이에 루터는 면벌부에 대한 학문적 토론의 차원에서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성 교회 대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내걸었다. 이때 루터가 하필 교회 대문에 내건 이유로 '루터가 가톨릭 교회에 정면으로 도전하기 위해 대문에다가 박아놨다'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으나, 실제로는 종교적인 의미는 없고, 단순히 교회 대문이 일종의 '게시판' 역할을 했기 때문에 대문에 내걸었을 뿐이다.
당시 종교개혁의 파급력을 최대한 작게 해석하는 입장의 가톨릭 교회사가들은 루터가 비텐베르크성 교회 대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인 게 아니라 교구 주교들에게 면벌부에 대한 토론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루터가 직접 쓴 건 사실이고 이전부터 동료 신학교수나 학생들에게 공개적으로 비판하였으며, 브란덴부르크와 마그데부르크 주교 등에게 항의편지를 보내고도 답변이 없자 직접 내건 걸로 본다. 이러한 주장은 1960년대 가톨릭 교회사가가 주장한 것인데 1540년대 필리프 멜란히톤의 루터파 신학자의 서술에 의문을 제기했을 뿐이지 개신교나 일반역사가들은 그냥 뭐 어쩌라는 반응(날짜는 별 중요치 않다)이다. 어쨌든 95개조 반박문은 루터의 작품이며 공론화 되었을 때 마르틴 루터가 자신의 저작임을 부인하지도 않았고, 루터의 신학적 입장을 대변하고 있었으며, 이 주장이 가톨릭 내부적으로 대단한 센세이션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사실 루터는 이 시점에서 가톨릭교회와 완전히 등지려는 생각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대사제도의 남용과 면벌부의 효력에 대해서 "교회가 그럴 권한이 있는가?"라는 본질적인 의문제기였다. 루터는 로마 교황청이 면벌부의 원리로 내세운 수많은 성인들의 공덕이 쌓여서 그것으로 죄인들의 죄를 사면해줄 수 있고, 그 공덕의 관리는 교황이 담당하며 이 공덕을 면벌부로 판매한다는 이론을 반박했던 것이다.
애초에 면벌부에 대한 논쟁은 루터가 혼자 말하던 것도 아니고, 루터가 속한 아우구스티노회와 도미니코회에서 이미 신학적 논쟁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면벌부를 둘러싼 신학적 논쟁이 가열되었고, 내부자로서 교회의 비리와 부패를 비판하던 루터는 점점 교황청과 대립을 하게 된다. 당시 교계에서는 루터의 주장을 억누르려는 입장이었고, 루터는 자신의 소신을 굽힐 마음이 없었다. 교황청에서는 처음에는 루터의 사상을 신학적인 차원에서 공개적으로 반박하고자 1518년에 하이델베르크에서 열린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모임에서 그의 사상을 공개적으로 발언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도리어 이는 루터의 사상을 널리 퍼트리는 데에 일조하였고, 교황청은 이제 루터를 막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1517년 10월 31일, 루터는 작센의 수도 비텐베르크의 성 근처에 자리한 교회의 문에 반박 조항들을 길게 열거한 문서―95개 논제―를 붙였다. 장차 역사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킬 순간,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태어나고 중세가 급사한 날이었다. 그렇지만 실상은 생각보다 무미건조했다. 일부 학자들은 95개의 논제를 붙였다는 것마저 부인해왔다. 반박문을 게시한 것은 진실일 가능성이 커 보이지만, 경천동지할 행위는 결코 아니었다. 당시 루터는 얼마 전에 설립된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였고, 신학부 내에서 학구적 논쟁을 시작하는 관례적인 방법은 사전에 논제를 게시하는 것이었다. 접근하기 편한 위치에 있었던 까닭에 성채 교회(Castle Church)의 문은 비텐베르크 대학의 게시판 역할을 했으며, '''루터의 행위는 오늘날 대학에서 강의 목록을 공지하는 행위보다 별반 극적일 것이 없었다.''' 95개 논제 자체는 딱히 혁명적이지 않았다. 교황의 권위를 부인하거나 새로운 교회 창설을 요청하지 않았고, 신학에서 그리 대수롭지 않은 모호한 문제를 제기했다. 1517년에는 교회를 개혁하려는 청사진도, 예측 가능한 결과도 없었다. (중략) 면죄부를 둘러싸고 도미니코회와 아우구스티노회가 반목하기도 했다. '''교황 레오 10세는 두 수도회가 논쟁한다는 소식을 처음 듣고는 대수롭지 않은 "수사들 간의 다툼"으로 치부했다.'''
Peter Marshall, 「종교개혁」
4.2. 신성로마제국의 혼란
결국 1520년에 루터는 가톨릭교회로부터 파문당했다. 다음해 신성로마제국 제국의회는 루터를 불러 신앙 검증을 요구한다. 그곳에서도 루터는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의회는 루터를 제국 밖으로 쫓아내도록 결의한다. 이는 당시의 황제였던 카를 5세가 가톨릭을 수호하는 입장에 있었던 것과 관련이 깊다.
비록 카를 5세의 시대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권위가 교황의 권위를 초월한 지 오래였지만, 가톨릭의 수호자라는 명목상의 정통성은 당시의 시점에서도 유지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28] 이후 루터는 암살자를 염려한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에게 중도에 납치당하고,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이는 프리드리히 3세가 루터의 신학은 별로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루터를 보호해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29] 신성로마제국에서 황제 바로 다음 가는 서열을 누리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선제후가 루터를 보호한다는것은 제국의 분열을 일으킬 수 있는 중요한 문제였다.
하지만 반로마 감정과 민족 감정에 따라 루터를 열렬히 지지한 독일 민중들의 열망과는 달리, 정치적으로 황제와 교황을 나란히 적으로 돌릴 만한 독일 제후들은 몇 없던 게 사실이고 1526년 슈파이어 제국회의까지조차 300여 개 영방군주와 60여 개 제국 도시 중에 루터의 입장에 따라 새로운 신앙을 믿는다고 고백한 건 고작 6개 제후와 14개 제국도시 뿐이었다. 그나마도 선제후는 7명 중에 작센 선제후 달랑 한 명이었다.
그러나 루터파에게 행운이라면 당시의 카를 5세는 몸이 10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빴다는 것.(…) 이 즈음 스페인에서 반란이 일어나서[30] 카를 5세는 이를 진압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하필이면 이 무렵부터 이탈리아를 둘러싸고 프랑스와 본격적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524년에 제국 전역에서 중세 봉건 질서에 반발하는 농민 반란이 일어난다. 이는 후에 '농민 전쟁'이라고 불릴 정도로 규모가 거대하여 독일 중, 남부 전역을 휩쓸었다.
단, 루터는 여기에서 농민들이 아닌 기존 질서를 지지하였고[31] 이는 후에 루터가 농민들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잃고 훗날 좌파들에게 까이는 계기 중 하나가 된다.[32] 이후 루터는 1522년에 비텐베르크에 귀환하여 이러한 민중 운동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한다. 이는 기존 가톨릭 질서에 정치적으로 루터를 지도자감으로 본 농민들에겐 실망으로 다가왔다.[33] 결국 지금까지 거의 루터 본인의 힘만으로 진행되던 개혁은 이 시점부터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얽히기 시작한다.
결국 독일 농민 전쟁 후에 독일 땅에서 정치적 문제는 루터의 손을 넘어갔고 스위스에서 츠빙글리 노선이 원동력을 이어받게 된다.
4.3. 스위스의 개혁가들
루터가 열심히 활동하던 무렵, 스위스는 당대 최고의 병사들인 스위스 용병들의 나라였다.[34] 이들은 여러 곳에서 용병으로 근무하면서 수입을 냈고, 이는 스위스 지역의 경제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정도였다. 한편, 당시의 스위스는 아직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한 채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 사이의 주도권 다툼에 계속 희생되고 있었고, 스위스의 자주적인 독립을 원하는 목소리는 갈수록 커져만 갔다.[35]
이러한 시대에 취리히에는 울리히 츠빙글리라는 또 다른 개혁가가 있었다. 그도 동시대의 루터처럼 면벌부와 가톨릭의 부패를 비판하였으며, 성경에 종교의 근본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단, 루터와 그의 차이점이 있다면 그는 실제로 그가 머물던 취리히를 본인의 손으로 개혁시키는 데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취리히는 그의 손에 의해 성공적으로 탈바꿈하였다.
이후, 츠빙글리는 이러한 개혁을 스위스의 다른 곳에도 전파시키려 노력했으나, 가톨릭 도시들, 그리고 신학적인 해석에 차이를 보이던 루터회를 믿는 도시들과 반목하게 된다. 이러한 대립은 결국 내전으로 확산되게 된다.
그리고 결국 스위스에서의 영향력을 잃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한 카를 5세는 스위스의 가톨릭파를 도와 진압군을 보내고, 이 과정에서 츠빙글리는 전사한다. 자세한 전개 과정은 울리히 츠빙글리 항목을 참조할 것. 그리고 이러한 내전은 스위스 용병이 몰락하는 데에 일조하게 된다.
한편, 제네바에는 종교적 탄압을 피해 프랑스에서 망명 온 루터와 츠빙글리보다 한 세대 아래의 법학자가 있었다. 그가 바로 종교개혁의 2번째 불씨를 당긴 '''장 칼뱅'''이다. 그의 사상[36] 은 신학 외적인 부분에서는 철저히 보수적이던 루터회보다도 진보적이었고, 그 덕에 신성로마제국의 선제후들이 주로 채택한 루터교회[37] 와 달리 일반 민중들이나 상공업자들에게 그 사상이 널리 퍼지게 된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는 루터보다 능력있는 개혁가여서 츠빙글리처럼 제네바를 자신의 손으로 탈바꿈시켰으며[38] 법학과 고전 문학을 전공한 그의 경력을 바탕으로 '기독교 강요'라는 자신의 사상을 정리한 책을 펴냈고, 대중들을 대상으로 한 연설에도 능력이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칼뱅의 교리는 안 퍼지려야 안 퍼질 수가 없었고, 1530년대에 이르면 칼뱅의 교리를 신봉하는 세력도 상당히 커지게 되어 단순한 탄압만으로는 이들을 누를 수 없게 되었으며, 루터회와는 달리 독일을 넘어서 프랑스와 영국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프랑스의 위그노와 영국의 청교도의 출발점이 바로 칼뱅이며, 1534년에는 영국의 헨리 8세가 영국 교회를 로마 치하에서 독립시켜 영국 국교회로 국가교회화했고[39][40] 그리고 결국 칼뱅파는 1550년대 무렵에 스위스 전역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다.
4.4. 중간 체크: 개신교는 얼마나 퍼졌는가?
이 무렵 가톨릭의 교세는 그야말로 궁지에 몰렸다고 할 수 있다. 튜튼 기사단국은 기사단장이 루터회로 개종하여 프로이센 공국으로 변신했으며, 가톨릭의 보호자로 여겨지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홈그라운드인 오스트리아는 귀족 대부분이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1560년 무렵 신교는 사실상 저지할 수 없는 불가항력처럼 보였다. 원호를 그리는 북부 왕국들 ─스웨덴, 덴마크, 스코틀랜드, 잉글랜드─이 모두 신교로 넘어갔고, 한때 신실했던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가톨릭 도시들에서 이단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었다. 동유럽 도처에서 가톨릭교는 소수파 종교가 되어가고 있었고, 합스부르크 군주정은 자기 뒤뜰에서마저 가톨릭 신앙을 지킬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오스트리아 귀족층 대부분이 16세기 3분기에 신교도가 되었던 것이다. 독일은 인구의 약 80퍼센트가 신교로 개종한 재해 구역으로, 중요한 가톨릭 국가들 가운데 변하지 않은 곳은 바이에른 공국 하나뿐이었다. 가톨릭교의 지중해 심장부─포르투갈, 에스파냐, 이탈리아─에서만 심지에 불이 옮겨붙기 직전에 당국이 가까스로 신교의 불길을 잡을 수 있었다.
Peter Marshall, 「종교개혁」
독일은 전체가 개신교로 개종할 기세였고, 영국을 비롯한 북유럽 국가들 역시도 가톨릭의 교세에서 이탈했다. 이 시점에서만 보자면 개신교가 교황령 정도만 예외로 할 시 유럽 대부분에 퍼지는 것은 시간 문제처럼 보였다고 할 수 있다.
4.5. 분열된 제국
사태가 이쯤 되자 카를 5세는 대립을 중재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다. 황제 본인도 교회 개혁파 아드리안 신부(훗날 하드리아노 6세)가 가정교사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가톨릭 교회가 이대론 안된다는 생각으로 교황청에 공의회를 강요했으나 교황청에선 황제 위주의 공의회를 미적거렸고 이런저런 이유가 겹쳐 빡친 황제가 로마로 군대를 보내자 그제서야 공의회를 시작했는데, 20몇년 간 교회 개혁 문제엔 거의 비협조적으로 진행하여 본인 생전에 끝을 못 봤다.
당시 신성로마제국 내에선 아직은 루터파 제후는 몇 없고 작센 선제후와 헤센 방백 정도를 빼면 거의 이름 없는 인물인데다가 세력도 미약했는데 1526년 기준 당시엔 5개제후 14개 제국도시들이 루터의 주장에 지지했다. 신성로마제국 내에서 교회령만 1/3~1/4정도에 합스부르크 가문 세력 하나만으로도 신교도들 쳐바르기엔 충분했다.
당시 합스부르크 영지 오스트리아는 오스만 제국의 위협을 직접 쳐맞고 있었기 때문에 루터와 그 추종자들 추방령을 당분간 유임하고 간을 보다 1529년 다시 제국 추방령을 때리자 루터파 제후들은 약속 번복과 제국법위반을 들어 1531년이 되면 신교도 제후들이 아예 슈말칼덴 동맹을 결성하여 황제에 대항한다. 아마 이 무렵의 카를 5세는 스페인 반란 진압, 프랑스 견제, 오스만 제국의 견제만 해도 정신없는데 여기저기서 들고 일어나는 도시들 때려잡으랴, 제후들 때려잡는건 동생이자 후임 황제로 선출된 로마왕 페르디난트 1세에게 위임했는데 페르디난트는 독일 사정에 대해서 형보다 비관적으로보고 신교도들과 타협하려는 모양이었다.
결국 1547년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 영국의 헨리 8세, 그리고 마르틴 루터가 연달아 세상을 떠났고, 오스만 투르크와 잠시 평화협정이 맺어지자 황제 카를 5세는 생애 최대의 유감이었던 독일 내 종교 일원화를 추진한다. 공의회는 20년 넘게 배가 산으로 갈 지경으로 거의 노답 상태였고 앞서 황제 위주의 공의회 추진에 로마 교회 내부에서도 반발이 컸고 프랑스에서는 로마 교황청에 자금을 끊어버렸다.
어쨌건 로마 약탈로 교황이 거의 포로로 잡히자 열리긴 했는데 교황청의 체면을 고려하여 교황령도 아니고 합스부르크가 영지가 아닌 트렌트에서 열렸으나, 그곳은 거의 오스트리아 앞마당이었다. 이런 공의회는 신교도들은 거부했고 교황청에서는 돌림병 핑계대면서 거의 비협조적이었다.(카를 5세가 루터파 주장을 받아들여서 사제독신 제도 폐지, 평신도 양형영성체를 요구했기 때문에 충공깽이었다.) 카를 5세가 죽고 나자 활기를(?) 띄고 처음 의제였던 교회 개혁은 번복되고 기존교리 재확인으로 끝났다.
기다리다 지친 카를 5세는 스스로 공의회 노릇을 하며 독일 전체에 루터파 의견을 약간 받아들인 자신이 직접 수정한 교리를 강요하고 반대자는 제국추방령을 때리고 신교도 제후들은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때리면서 내전이 발생했다.(자세한건 카를 5세, 마르틴 루터 참조) 결국 황제의 구상은 실패했고 반란군에 쫓기던 황제는 모든 것에 염증을 느끼고는 황위를 동생에게 물려준 뒤 스페인으로 갔다.
후임 황제 페르디난트 1세는 파사우 합의(1552), 아우크스부르크 화의(1555)를 통해 루터파는 공식적으로 공인받았고, 루터교회를 믿는 지역은 가톨릭교회를 용인하는 조건으로 종교의 자유를 누렸다. 이 당시에는 독일왕이며 로마왕 자격 으로 체결한 것이다. 1547년 황제가 스페인으로 도망가서... 카를 5세는 이를 승인하고 1556년 퇴위했다. 이는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 제국회의 때 루터파 기존 제안이었다.
하지만 이 화의에는 2가지 치명적인 결점이 있었다. 하나는 신앙을 결정하는 주체가 일반 민중이 아닌 그 지역을 다스리는 제후라는 것("Cuius regio, eius religio") 이었다. 1547년 종교전쟁시 대부분의 제후가 신교도였다는 건 사실무근이다. 작센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와 헤센 방백 필리프 1세는 나란히 황제군에 체포되어 제국 추방령을 맞았고 나머지 소제후 10여개 제국도시들도 굴복한다. 훗날 대표적인 신교도 제후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령은 1560년대에 종교개혁에 나섰고, 제후들도 개인적 신앙은 신교도에 호의적인 사람도 있었지만 황제 카를 5세와 교황청이 무서워서 신교도 세력은 크지 않았다.
따라서 제후의 신앙과 다른 견해를 가진 자는 재산을 팔고 이전해야 했다. (알다시피 이 시대는 문맹율이 90%라 농부들을 종교개혁이 뭔 소린지 신학적인 이해가 불가능했기에 별 상관없지만...) 그리고 부르주아들이 시민자치 정치를 벌이는 제국도시들[41] 는 이 조치에서 예외라 개신교 우세지역의 가톨릭 신자나 반대의 경우는 도시에서 자신의 신앙대로 예배를 했다간 위협을 받았다.
다른 하나는 이 화의가 루터파와 가톨릭만의 화의였으므로 이미 상당한 세력을 이루고 성장하고 있던 칼뱅 파에 대한 논의가 아예 없었다는 것. 합의 이후 팔츠 선제후령은 가톨릭에서 루터파, 루터파에서 다시 칼뱅파로 개종했는데 이 조치가 유효한 것인지.. 또한 합의전에는 개신교세가 미약하였다가 16세기 후반 바이에른을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이 개신교로 넘어간 상황에서 쾰른이나 뮌스터 주교구등 지역주민 다수가 가톨릭 에서 개신교로 전향한 지역의 처리는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 극심한 반발이 터져 나왔다.
어쨌거나 결과적으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 더 이상 신성로마제국은 하나의 제국으로 묶일 수 없게 되었으며, 황제의 권위는 추락하기 시작하고 제후 각각의 힘이 점차 강해지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강해진 제후들은 신나게 자기들끼리 계속 치고받게 되었고, 이는 결국 1618년에 30년 전쟁으로 대폭발하게 된다.
30년 전쟁이 끝난 뒤에야 유럽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전쟁을 마무리짓는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서 비로소 개인의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었고, 칼뱅파도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는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썼던 시기에서 100년이 더 지난 뒤였다.
4.6. 가톨릭의 반격: 대항종교개혁
한편 가톨릭교회에서도 드디어 반격을 하기 시작한다. 개신교에 대항하기 위해 쇄신운동을 펼친 것으로 '가톨릭의 종교개혁' 또는 '대항종교개혁'이라고도 한다. 영어로는 counter-reformation 이라고 표현하는데, 영단어로는 '반격'의 성격을 가진 개혁임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한국에서는 과거 그 의미를 적절하게 표현하는 한국어 번역이 없어 반종교개혁, 반동종교개혁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으나 원래 의미를 온전히 전달하지 못하며 가톨릭을 폄하하는 번역이라는 평가를 받아 위의 용어로 대체되어가고 있다.이 시점에서[42]
60년 후로 넘어가면 상황이 사뭇 달라 보일 것이다. 프랑스에서 위그노들은 패배하여 수가 줄어들고 있었다. 네덜란드 남부는 구교에 의해 수복되어 재차 가톨릭화되었다. 독일 남부 대부분은 가톨릭의 수중에 있었고, 활기찬 가톨릭 부흥이 오스트리아, 폴란드, 헝가리를 휩쓸고 있었다. 신교는 막다른 골목에 몰렸고, 그것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을까? 냉소적인 답변으로 제시할 후보가 있긴 하다. 바로 군사력이다. (중략) 그러나 무력이 전부였던 것은 결코 아니다. 가톨릭교는 자체 종교개혁을 추진하는 가운데 유서 깊은 위력에 의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것의 충격에 자신을 노출하기도 하면서 스스로를 뜯어고쳤다. 그 과정은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중략) 트리엔트 공의회의 제1차 회기(1545~1547)에는 주로 가톨릭의 견해와 신교의 견해를 분명하게 구별하는 식으로 가톨릭 교리(예컨대 성서와 전승의 상보적 위상에 관한 교리)의 정의를 공식화했다. 제2기(1551~1552)와 제3기(1562~1563)에는 제도를 개혁하는 문제와 씨름하여, 주교들에게 한가한 귀족이나 정부 관료처럼 유유자적 돌아다니지 말고 신자들의 목자로서 각자의 교구에 상주하라고 명령하는 교령을 도출했다. 가장 중요한 개혁은 모든 교구에 성직자 양성―중세에는 명백히 마구잡이 과정이었다―을 위한 신학교를 설립하라는 교령이었을 것이다. 규율에 충실을 기하는 교육받은 사제를 길러내려는 열망은 가톨릭 개혁의 주춧돌이었다.트리엔트 공의회는 가톨릭 교도로 존재하는 새로운 방식을 개시했다. 라틴어화된 형용사 '트리엔트식(Tridentine)'은 그 방식을 나타낸다. 공의회가 마무리될 무렵, 아직 갈 길이 멀기는 했지만 가톨릭 개혁은 부인할 수 없는 성과를 거둔 터였다. 우선 논란이 분분한 거의 모든 쟁점에 관한 가톨릭 교리를 명료하게 밝힘으로써 단일한 로마의 정치적 가톨릭교회―종교개혁 이전 유럽에서 공존했던 더 엉성한 표현인 '가톨릭교들(Catholicisms)'을 대체했다―의 통일된 기반을 마련했다. 또한 평신도를 위한 표준화된 교리문답서(종교 교육서)를 공인했고, 미사 집전의 균일한 순서를 정했다 ― 트리엔트식 전례는 지금도 가톨릭 전통주의자들의 사랑을 받는다. 공의회는 '악폐'를 척결하고자 사제와 주교가 교회의 사목에 정력을 쏟게 했다. 그리고 15세기 공의회들과는 반대로 교황직의 권한을 약화하지 않고 오히려 강화했다. 연이은 교황들은 트리엔트 공의회의 진행을 면밀히 감시했고, 비오 4세(1559~1565)는 교령을 승인하면서 그것을 해석할 권한을 자신에게 남겨두었다. 트리엔트 이후 교황의 권위는 제도적으로만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강화되었다. 보르자 가문의 불명예스러운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예증하는 르네상스기 로마의 퇴폐적인 분위기로 돌아가는 일은 없었다. 16세기 후반 비오 5세(1566~1572), 그레고리오 13세(1572~1585), 식스토 5세(1585~1590) 같은 후계자들은 높은 수준의 금욕생활로 교황직의 명예를 회복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중략)
트리엔트식 성성들 중 하나는 (1622년 설립된) 포교(Propaganda fide) 성성이었다. 여기에 쓰인 프로파간다(Propaganda)가 현대에 정치적 기만과 조작을 뜻하는 용어로 쓰였다는 사실은 어원에 때때로 문화적 편견이 파고든다는 것을 보여 준다. 포교 성성은 로마 교회가 더이상 유럽에만 국한된 교회가 아님을 깨달은 교황청이 뒤늦게 공인한 기구였다. 포르투갈 무역상들과 에스파냐 정복자들에 뒤이어(때로는 그들에 앞서) 가톨릭교는 세계 종교, 남극 대륙과 아직 유럽인이 발견하기 전이었던 오스트레일리아를 뺀 모든 대륙에 신봉자를 둔, 진정으로 지구를 아우르는 최초의 신앙이 되었다.
Peter Marshall,「종교개혁」
예수회의 등장과 트리엔트 공의회 등으로 대표된다. 개신교계에서는 결과적으로 당시의 사회상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고, 내부의 부패를 완전히 뿌리뽑지도 못했고, 단지 일부 제후들을 다시 가톨릭으로 돌리는 데 성공했을 뿐이라 하지만, 실제로는 상당한 성과가 있었다.
가톨릭교회의 주요 교리와 윤리를 간단하고 명료하게 담고 있는 교리문답서가 발간되었고, 성직자와 수도자가 사용할 새로운 성무일도서가 개정되었으며, 세계 모든 서방 가톨릭교회가 로마 전례로 통일하여 사용하게 될 개정판 미사경본이 간행되어 트리엔트 미사가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불가타 라틴어 성경의 개정판이 발간되었으며, 지역교회의 주교들은 임지에 상주하는 의무를 다하면서 주일과 축일에는 강론을 하고 본당을 방문하는 사목활동에 충실하였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사제양성을 위하여 모든 교구에 신학교를 세우라고 선언했는데, 중세기에는 사제 교육이 현대인들에게 마구잡이라는 평을 들을 정도였지만, 신학교는 이런 현상을 해결해줬으며 주교들은 신학교육과 영성지도를 받은 사제 지망자를 전보다 더욱 엄격하게 심사하여 사제로 서품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서 기존에는 기사와 귀족들에 가까웠던 봉건적 성직자들이, 장교와 관료들에 가까운 근대적 성직자들로 변화하게 되었으며, 전체 가톨릭교회가 체계화되고 일원화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다만 신학교 시스템에는 기존 지역사회의 기득권층이 교황청의 과도한 폭정이라며 아우성을 치기도 하였다.
또한 가톨릭 종교개혁의 일환으로 도입된 새로운 영성운동은 바로크 예술과 결합되어 가톨릭교회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가톨릭 종교개혁은 그저 단순한 반격 수준이 아니라, 가톨릭교회에서 중세 내내 꾸준히 되풀이되던 쇄신 운동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4.7. 번외: 오스만 제국
대체로 개신교 신자들도 무슬림을 가톨릭에 대항하는 동맹군으로 환영하지 않았다. 실제로 1571년 가톨릭의 신성동맹이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을 무찌르자 개신교 신자들도 기뻐했다.
대체로 오스만은 제국 내의 개신교 신자들에게 개종을 강요하지 않았고, 서유럽의 분열상을 흥미진진하게 관람했다. 대체로 무슬림들은 그리스도교 안에서는 개신교 신자들의 논리에 더 공감을 했는데, 이는 성상과 성화 등 이미지에 대한 공경에서 개신교와 논리가 유사했기 때문이다.
국가적으로는 이 시기의 프랑스가 오스만 제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기는 하였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합스부르크 왕조를 타도한다는 공통의 정치적 목적이 있어 맺은 동맹이었다. 당장 프랑스도 30년 전쟁 중 오스만이 직접적으로 참전하는 것을 바라진 않았고[43] , 일정 수준의 견제만을 바라는 정도였다.
오스만 제국은 이 역할에는 프랑스가 원하는 대로 행동해주어서 독일 개신교 신자들에게 대응하려던 카를 5세의 주의를 돌려놓고, 펠리페 2세가 저지대(네덜란드)의 반란에 주력하지 못하게 했다. 물론 오스만도 아무 이득 없이 맺은 동맹은 아니어서, 이 동맹을 통해 오스만은 발칸 반도와 헝가리에 자신들의 영향력을 굳게 다질 수 있었다.
서유럽에서 루터파-칼뱅주의자-가톨릭 신자들에게 다굴을 당하던 재세례파는 오스만 제국에서 그 어떤 유럽 국가에서도 누리지 못하는 안전을 보장받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제국 내의 그리스도교 지역에서 복수의 종파가 공존하게 되었다.
5. 종교개혁이 남긴 것들
종교개혁이라는 큰 폭풍이 지나간 100년 사이에 유럽은 그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바뀌어 있었다.
개혁이 시작되었던 신성 로마 제국은 폭풍이 지나간 뒤 후대의 볼테르의 말마따나 더 이상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도 아니고, 제국도 아니게 되었다'''. 교황의 속권과 황제의 힘이 세트로 약해지면서 교황이 주는 황제의 권위라는 것 자체가 무색하게 되었고, 제국을 구성하던 제후들은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통해 종교의 자치권을 얻은 것을 시작으로 점차 거의 완전한 자치권을 얻어 더 이상 하나의 제국이 아닌 일종의 연방과 비슷한 형태가 되었다.
여기에 30년 전쟁의 폭풍이 지나가면서 독일 인구의 상당수가 죽었고, 결국 독일은 이후 프로이센이 부상할 때까지 유럽의 무대에 등장하지 못하게 되고, 제국을 다스리던 합스부르크 왕조는 독일 내지(특히 중/북부)에 점점 미련을 버리고 신성로마제국 테두리 밖으로의(주로 동쪽) 영토확장을 가속화하면서 '오스트리아'로서의 독자노선을 걷기 시작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프로이센이 등장할 수 있던 배경이 신성 로마 제국의 몰락에 있었다는 것.
또한 종교개혁은 근대 독일어를 만들었다시피 할 수 있는 사건이기도 하다. 이에는 마르틴 루터의 공헌이 컸는데, 루터 본인이 번역한 성경은[44] 독일 전역에 퍼지면서 그 자체로 근대 독일어의 기반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와 달리 르네상스 시대에 처음 등장한 인쇄술에 힘입어 막대한 파급력을 갖고 있었고, 결과적으로 루터라는 한 사람에 의해 근대 독일어가 완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게 되었다.
개신교 개혁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것은 독일 지역이었지만, 다른 나라에도 개신교 개혁은 큰 영향을 미쳤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영국은 칼뱅파의 교리를 일부 빌려 성공회를 만들어 독립하였고[45] , 프랑스도 위그노가 중요한 사회 세력으로 떠올라 위그노 전쟁이라는 홍역을 앓게 되고, 결과적으로 발루아 왕조가 몰락하고 부르봉 왕조가 등장하게 되는 기원이 되었다.
다만 영국과 프랑스는 직접적으로는 큰 30년 전쟁에 휘말리지 않았기에 영국은 엘리자베스 1세 치세에서 중흥을 맞았고, 프랑스는 한 세대 일찍 국내의 갈등을 봉합한 뒤, 30년 전쟁을 정치적으로 잘 이용한 루이 13세와 리슐리외를 통해 절대왕정을 완성하고 한동안 유럽의 최강국으로 자리매김한다.
5.1. 개신교의 출현
마르틴 루터 신학은 바울로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재발견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근대적이라기 보단 중세적이고 중세적이라기 보단 고대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어디까지나 가톨릭 교회를 박차고 나가서 새로운 교회를 설립한다는 주장이 아니라 진정한 초기교회를 회복한다는 모토 였기 때문이다.
루터의 개혁 운동은 덴마크와 스칸디나비아, 독일에 큰 영향을 끼쳤으나, 다른 유럽 지역에서는 상술한 가톨릭의 대항종교개혁 때문에 그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미약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츠빙글리와 그를 이은 칼뱅의 신학 역시 루터와 차별된 독자적인 종교개혁을 시도했고 세계주의적인 시도를 했다. 당대에서는 북유럽, 네덜란드, 영국, 스위스 정도에 머물렀다. 물론 그 이후에도 꾸준히 영향권을 넓혀갔기에 지금 한국에도 개신교가 존재하고 있다. 16세기 중후반 한때 가톨릭교회의 존립을 위태롭게 할 정도였지만 가톨릭교회에서도 새로운 반격에 나섰고, 17세기 종교전쟁을 겪으면서 강제력이 따르긴 했지만 유럽의 개신교도는 전체 인구의 20%선에 그치게 되었기에 결론적으로는 유럽 내에서 개신교의 영향력이 가장 큰 곳이 독일, 스위스, 네덜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북아일랜드를 비롯한 게르만 및 북유럽 문화권 정도로 한정되었다. 이후 유럽에서의 종교적 갈등은 마무리되고 19세기 말까지 유럽(및 북아메리카[46] ) 외의 선교는 예수회를 비롯한 가톨릭교회에서 주도하게 된다.
그러나 개신교의 출현을 통해 유럽의 서방교회의 영향권에 속하는 각 나라에서 가톨릭과 개신교의 대립이 일어나게 되고, 이는 멀게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건국으로 이어진다. 또 20세기부터 개신교에서도 해외 선교에 힘쓰기 시작하면서 개신교의 영향권과 영향력도 상당히 강해지고 넓어졌고, 20세기 중반에 가톨릭에서 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서 그 이전보다 상대적으로 해외 선교에 힘을 빼기 시작하면서 오늘날 개신교는 기독교에서 가장 해외 선교에 열성적인 종파가 되었다. 그렇기에 20세기 후반 이후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아시아 등 비유럽권에서 영향력이 계속해서 강해지고 있다. 북한 등의 공산권, 타 종교가 국교화된 지역, 이란등 이슬람권처럼 기독교가 제한된 곳에서는 지하교회 형태로 성장하고 있다.
5.2. 근대의 출현
가톨릭이든 개신교이든 개혁자들은 개개인의 신앙을 넘어서, 공동체 전체를 개혁하기를 원했다. 그들이 지향한 것은 더욱 균일한 사회, 더욱 경건한 국가였다. 그러나 이 목표와 달리 유럽의 복수 종파들이라는 결과를 산출한 아이러니를 낳았다.
극단적인 예외들을 제외하면, 개혁자들은 국가의 권력을 열렬히 옹호하여 국가 자체를 복음화하려고 했으나, 국가의 권위에 도전할 온갖 논리를 산출했다. 개혁자들은 사회를 신성화하려 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전의 유럽인이라면 상상하는 것조차 거북해할 정도의 세속화된 유럽을 산출했다. '''개혁자 그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근대라는 사생아가 태어난 것이다.'''
종교개혁은 잉글랜드 왕의 지배를 받는 가톨릭 신자, 프랑스 왕의 지배를 받는 개신교 신자 등 사회에 용인되지 않는, 그렇다고 해서 무슬림이나 유대인과는 달리 이방인은 아닌, 수많은 소수자들을 낳았다. 이러한 소수자들의 탄생은, 속권에 대한 복종의 한계를 전례없이 이론화시켰고, 소수 집단의 저항에 관한 세련된 논리들이 발견되기에 이른다. 가톨릭, 루터회, 칼뱅주의, 재세례파를 막론하고 말이다.
왜냐하면 본래 중세에 군주의 속권이란 '그리스도인의 보호자'라는 명목에서 옹호된 것으로, 군주의 속권은 하느님으로부터 보장된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이것이 바로 왕권신수설이다. 그런데 잉글랜드의 가톨릭 신자 등에게는 국왕이 '그리스도인의 보호자'일 수 없다.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의 보호자'가 아닌 필부(匹夫) 헨리, 동네 아낙 엘리자베스 등이 왕을 참칭하는 것일 뿐이며, 이들은 국왕이 아니라 참주일 뿐이다. 이를 참주 살해론(폭군 살해론)이라고 한다. 물론 비슷한 개념은 중세에도 있었다. 교황이 군주를 파문하여 권위에 타격을 준 개념은, 참주 살해론과 연결될 구석이 있다. 그러나 종교개혁기 이후로는, 이전 시대와는 비교도 될 수 없는 세련된 논리들이 등장하여 군주들의 권위를 박살내기 시작한다.
루터와 칼뱅은 속권을 부정하는 인물들은 결코 아니였으나, 가톨릭 군주에 대한 불복종을 권유하였다. 잉글랜드인 로버트 퍼슨스(Robert Persons) 등 예수회 신학자들은 참주 살해를 정당화하였고, 이러한 논리에서 1534년에 아일랜드에서는 킬데어 백작의 주도로 헨리 8세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다. 또한 영국의 개신교 신자들 사이에서도 이런 개념은 퍼져갔다. 영국의 왕은 잉글랜드 국교회(성공회)의 보호자이면서도, 동시에 스코틀랜드 국교회의[47] 보호자라는 2개의 자리를 겸직했는데 이는 "영국의 개신교는 어떠한 개신교여야 하는가?"라는 개신교 내부의 투쟁인 영국 내전을 부른다.
또한 종교개혁을 통해 비로소 유럽 역사에서 교권과 속권이 본격적으로 구분되기 시작했다는 점이 중요하다.[48] 비록 종교개혁 이전에도 교회의 권위는 추락하고 있었고 사코 디 로마와 같은 막장 사태까지 일어나는 상황이었지만, 그 사건을 직접 일으킨 카를 5세조차도 권위를 위해 교황이 내려준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가 필요했다. 하지만 종교개혁을 통해 등장한 프로테스탄트는 이러한 권위에서 자유로웠고, 제국의 제후들은 이를 잘 이용하였다. 결과적으로 종교개혁의 폭풍이 지나간 뒤에는 교황의 속권은 호소력을 점차 잃어갔다. 다만 권위를 뺏기지 않고자 시작되었던 예수회로부터 시작된 가톨릭 내부의 자정 노력은 아이러니하게도 교회가 정치에서 멀어진 덕에 오히려 가속되어 이후 그럭저럭 성과를 거두게 된다. 또한 교황의 속권은 15세기 이후 낮아졌지만, 반대로 교황의 교권은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더욱 엄밀하게 정의되고 옹호되어 훨씬 강화되었다. 종교개혁 이후로 추기경들은 교황과 반목하는 귀족적 성격이 사라져갔고 교황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 관료적 성격을 띠어 갔다.
다소 논쟁적인 주제로는, 개신교와 근대 자본주의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 특히 칼뱅주의자와 청교도의 윤리가 '자본주의 정신'을 고무했다는 영향력 있는 이론을 내놓은 바가 있지만, 근래 역사가들은 대체로 이 테제에 설득력이 없다고 보면서 거리를 두고 있다. 잉글랜드와 네덜란드의 경제적 번영은 이 이론을 뒷받침하는 근거처럼 보일 수 있지만, 스코틀랜드의 경제가 낙후되었던 사실이나 벨기에, 이탈리아 지역 등의 반대 사례들 때문에, 종교적 차이보다는 지정학적 차이가 자본주의적 번영에 대한 훨씬 강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49] 비슷한 이야기로는 개신교가 가톨릭보다 과학에 호의적이였다는 설이 있는데, 명확하게 규명하기는 어렵다. 가톨릭이든 개신교이든 과학에 대한 적대자와 기여자가 혼합되어있었으며[50] 이미 중세때도 실험하고 추론하는 활기찬 전통들이 있었다.
근대 자본주의와 개신교의 관계에 대하여, Davide Cantoni는 AD 1300~1900년 동안 독일 내부의 272개 도시들을 비교한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또한 비슷한 주제에 대하여 19세기 유럽 국가들을 비교한 연구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Many theories, most famously Max Weber’s essay on the “Protestant ethic,” have hypothesized that Protestantism should have favored economic development. With their considerable religious heterogeneity and stability of denominational affiliations until the 19th century, the German Lands of the Holy Roman Empire present an ideal testing ground for this hypothesis. Using population figures in a dataset comprising 272 cities in the years 1300–1900, I find no effects of Protestantism on economic growth. The finding is robust to the inclusion of a variety of controls, and does not appear to depend on data selection or small sample size. In addition, Protestantism has no effect when interacted with other likely determinants of economic development.
Overall, these results show that Protestant (Lutheran and Calvinist) and Catholic cities followed very similar growth trajectories in the period 1300–1900. These findings are robust, hold in a series of subsets of the data, and are unlikely to be due to selection into the dataset, or small sample size.
-Davide Cantoni, 〈The Economic Effects of the Protestant Reformation: Testing the Weber Hypothesis in the German Lands〉
한편 가톨릭의 쇄신 운동은 트리엔트 공의회를 통해 포교 성성을 출범시키고 남극을 제외한 지구의 구석구석까지 선교사를 보낸다.[51] 이를 통해 가톨릭은 서유럽의 지역적 종교를 넘어, 오대양 육대주를 아우르는 초거대 종교로 성장한다.We investigate the thesis widely credited to Max Weber that Protestantism contributed to the rise of industrial capitalism by estimating the associations between the percentage of Protestants and the development of industrial capitalism in European countries in the mid- to late nineteenth century. Development is measured using five sets of variables, including measures of wealth and savings, the founding date of the principal stock exchange, extension of the railroads network, distribution of the male labor force in agriculture and in industry, and infant mortality. On the basis of this evidence, there is little empirical support for what we call the "Common Interpretation" of Weber's The Protestant Ethic, namely the idea that the strength of Protestantism in a country was associated with the early development of industrial capitalism.
우리는 개신교가 산업 자본주의의 성장에 기여했다는 막스 베버에게 크게 빚지고 있는 논지를 조사했다. 프로테스탄트 비율과 19세기 중후반 유럽 국가의 산업 자본주의 발달을 비교하면서. 발달은 5개의 변수를 이용하여 측정되었다. 이 변수는 부와 저축, 주요 주식 거래의 설립 데이터, 철도 네트워크의 확장, 농업과 산업에서의 남성 노동력 분포, 유아 사망률을 포함한다. 이 증거를 기반으로 할때,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에 대한 "공통 해석"(곧 국가에서의 개신교 세력이 산업 자본주의의 초기 발달과 관련되었다는 아이디어)이라고 우리가 부르는 것에 대한 실증적 증거는 거의 없다.
-Jacques Delacroix and François Nielsen, 〈The Beloved Myth: Protestantism and the Rise of Industrial Capitalism in Nineteenth-Century Europe〉
이 과정에서 근대로 진입하는 중요한 발견이 있었는데, 이는 예수회가 중국 선교를 하면서 일어났다. 동아시아는 고도의 문화를 갖춘 지역이였고, 따라서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문화가 유럽인들보다 뒤떨어진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때문에 마테오 리치를 비롯한 예수회원들은 중국인들이 유럽의 문화까지 받아들일 필요는 없으며, 다만 그리스도교 신앙만 받아들이면 된다고 호소했다. 그래야 중국인의 중화사상 자존심을 넘어서서 신앙이 퍼질 수 있으리라 여긴 것이다. 예수회원들은 중국인들에게 접근하기 위해서 중국인 고관처럼 차려입었으며, 그리스도교는 생소한 외래 종교가 아니라 유교적 논리의 완성이라고 주장하였고, 때문에 유교식 제사가 '미신적 요소가 없다'며 허용할 수 있었다. 심지어 예수회원들은 중국어로 교회의 전례를 행할 수 있도록 로마에 요청하여, 1615년에 바오로 5세로부터 성경의 중국어 번역 및 중국인 사제들의 중국어 미사를 허용받았다.[52] 유럽인들이 모두 라틴어 미사를 참례하고 있던 시절에 말이다(!) 사실 안 그랬으면 동방에 천주교가 퍼지는 게 불가능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러한 적응주의적 선교는 다른 지역에도 적용되었는데, 예수회원들은 인도에서는 브라만처럼 입고 먹었고, 인도인 출신 개종자들을 위해 시체 태운 재를 뿌린 강물에서 목욕하는 '사회적' 관습 등을 허용하였다.
이러한 예수회의 선교 노선은 가톨릭 내부에서도 많은 반대에 부딪혔으나(특히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의 비판이 격렬했다) 이는 선교에 효과적인 방법임이 역사적으로 점점 증명되어갔다. 조선에서 선교사가 들어오지 않고 청나라로 간 유학자들로부터 자연적인 신앙이 꽃필 수 있었던 요인도 예수회사 만든 여러 서적에서 기원했으며, 교황청으로 온 선교사 요청과 조선교구 수립 요청은 이들의 노력이 옳았다는 가장 큰 증거였다.
문제는 유럽이다. 이방인들이 유럽의 문화가 아니라 그리스도교만 받아들일 수 있다면, '''똑같은 원리로 유럽에서도 문화와 종교의 분리가 가능하지 않을까?'''
그야말로 역설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역사가 진행될수록 예수회뿐만이 아니라 유럽인 전체에서도, 어느샌가 "유럽의 문화와 그리스도교는 분리될 수 있다"라는 생각이 암묵적으로 혹은 명시적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전교의 목표를 위해 낯선 사회의 관습과 의례를 존중한 태도가 유럽 지식인들 사이에서 문화적 종교적 상대주의를 촉진하고 결국 기독교 자체가 그 상대주의의 제약을 받게 되는, 예상치 못한 장기적 결과를 가져온 것인지도 모른다.
「종교개혁」, Peter Marshall
이렇듯 종교개혁의 시기에 각 종파들은 각각의 방법으로 근대라고 하는 반항적인 사생아를 낳기 시작했다.
현대 자유민주주의 헌법 내 종교의 자유, 양심의 자유 원칙도 종교개혁 이후 신구교 간 유혈분쟁이 빚어낸 역사적 부산물이라 할 수 있다."대관절 종교개혁이 우리를 위해 무얼 했는가?"라는 수사적 의문을 제기하는 회의론자는 종교개혁의 기념비적인 성취 ─근대 자본주의, 정치적 자유 개념, 과학의 발전, 마술과 미신의 쇠퇴─를 열거하는 장황한 답변을 들을 공산이 크다. 이 모든 성취는 오래전부터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낳은 조숙하고 다루기 힘든 자식으로 여겨졌다. 그렇지만 실상은 그리 명확하지 않으며, 종교개혁이 근대성의 어머니 역할을 했다는 생각은 혈통과 양육에 관한 골치 아픈 물음을 불러일으킨다. 종교 운동으로서 종교개혁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문제들이 아니라 해묵은 문제들과 씨름했으며, '''루터는 만약 근대가 그를 상대로 친자 확인 소송을 제기한다면 격렬히 부인할 것이다.'''
「종교개혁」, Peter Marshall
5.3. 이단심문과 마녀사냥
한편 종교개혁 시기에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로, 마녀사냥과 종교재판의 이야기가 있다. 스페인에서는 유대인 출신의, 혹은 무슬림 출신의 개종자에 대한 과도한 의심으로 종교재판이 폭주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스페인식 종교재판은 교회와 국가의 제대로 된 통제를 받게 되면서 1530년대 이후 급격히 희생자가 줄어들게 된다. 그리고 비극적이게도, 가톨릭권과 개신교권은 모두, 서로의 신심의 상대방보다 경건함을 증명하기 위해 마녀사냥이라는 명목으로 생사람들을 잡게 된다. 다만 마녀사냥에 상대방 종파를 고발했다는 통념은 사실은 아니다.
마녀를 가장 맹렬하게 박해한 1570~1630년은 신교 국가들과 가톨릭 국가들이 교파화되고 이데올로기 전쟁이 가장 격렬하게 벌어진 기간이기도 했다. (중략) 가톨릭교도들과 신교도들 중에 어느 쪽이 박해에 더 열을 올렸느냐는 것은 이견이 분분한 문제다. 박해자들 중에서도 최악은 대게 독일의 작은 영역을 통치한 가톨릭 주교들이었다. 일례로 뷔르츠부르크의 주교 율리우스 에히터 폰 메스펠브루니(Julius Echter von Mespelbrünn)은 가톨릭 개혁의 강경파로서 1616~1617년에 마녀를 300명 넘게 화형시켰다. 그러나 가톨릭 남유럽은 처형률이 가장 낮은 축에 들었고, 에스파냐 종교재판소는[53]
로마 종교재판소와 마찬가지로 마녀들이 저지른다는 소행에 회의적이었다. 칼뱅의 제네바에서는 화형당한 마녀가 거의 없었고, 신교권 네덜란드와 칼뱅파 팔츠에서는 사실상 마녀 재판이 열리지 않았다. 그러나 스코틀랜드를 비롯한 다른 칼뱅파 지역들은 1660년대까지 계속하여 마녀를 가장 혹독하게 박해했다. 17세기 중반부터 전반적으로 마녀 재판이 줄어들었지만, 잉글랜드 이스트앵글리아에서 내전 막바지에, 루터파 스웨덴에서 1668~1647년에, 그리고 유명한 사례로서 미국으로 건너가 메사추세츠 주 세일럼에 정착한 청교도 공동체에서 1692년에 추악한 마녀재판이 발생했다. 마녀재판을 종식하는 데는 다수 요인들이 함께 작용했다. 다양한 법률 체계들이 도입된 더욱 엄격한 증거 기준, 고문 제한, 과학적 회의주의, 비열한 마을 주민이 광분해서 제기하는 고발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를 꺼리는 엘리트주의적 태도 등이 그런 요인들이었다. 그러나 더 넓게 보면 이 이야기의 중요한 부분들은 종교 전쟁의 종결과, 다원주의를 향해 절뚝거리며 나아간 발걸음이었다. 우럽 사회들이 실제 "타자들"을 마지못해 받아들이고 통합함에 따라 상상 속 타자들은 더이상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게 되었다. 이것은 종교개혁이 엄밀하게 균일한 기독교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데 실패하고 다른 무언가를 우연히 낳아주는 데 성공했음을 말해주는 또다른 증거다.
「종교개혁」, Peter Marshall
'''가톨릭교와 신교는 과격한 종교적 수사법을 곧잘 구사하면서도 좀처럼 서로를 마녀술 혐의로 고발하지 않았다.''' 마녀들의 주된 죄목과 종교개혁의 주요 논쟁 사이에 직접적 연관성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예전부터 마을 주민들은 반사회적인 늙은 여자들이 주술을 걸고 고약한 저주를 내린다고 항상 의심했지만, 공식 박해에 시동을 건 동력은 마녀들이 악마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악마의 명령에 따라 기독교 사회와 전쟁을 벌이는 대규모 배교자 군단이라는 의심을 굳혀간 신학자들의 확신이었다.
「종교개혁」, Peter Marshall
Both Catholics and reformers tended to hunt witches, as they hunted Anabaptists, to demonstrate their doctrinal purity and fervour. With the exception of Zwingli, the German reformers accepted the mythology of witchcraft. Luther thought that witches should be burnt for making a pact with the Devil even if they harmed no one, and he had four of them roasted at Wittenburg. The Protestants relied on Exodus 22:18: Thou shalt not suffer a witch to live.' As Calvin said: 'The Bible teaches us that there are witches and that they must be slain ... this law of God is a universal law.' The Calvinists, in fact, were much fiercer against witches than the Lutherans. On the whole, Anglican Protestants were not keen witch-hunters, and during the whole period 1542-1736 many fewer than 1,000 were executed (by hanging) in England, against 4,400 in Calvinist Scotland during the ninety years beginning in 1590. The worst year in England was 1645, when the Calvinist Presbyterians were in power. Where English Calvinists could, they propagated witch-hunting. Bishop Jewel, who had lived in exile in Geneva, brought the craze with him on his return in 1559; and in the 1590s, the Calvinist William Perkins lectured on the subject at Emmanuel College, Cambridge, a Puritan institution where some of the Founding Fathers of New England were educated. Wherever Calvinism became strong, witches were systematically hunted. Equally, on the other side of the religious barriers, it was the followers of Loyola, the puritanical Catholic, who now popularized the witch-hunt.
재세례파를 사냥한 것 처럼, 가톨릭 교도들과 개혁자들 모두는 자신들의 교리적 순수성과 열정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마녀사냥에 열을 올렸다. 츠빙글리를 제외한 거의 모든 독일의 종교개혁자들은 마법의 신화를 받아들였다. 루터는 마녀들이 그 어느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았다 하더라도 마귀와 협정을 맺은 존재들이기에 화형을 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실제로 4명의 마녀를 비텐부르크에서 화형에 처했다. 프로테스탄트들은 "마녀를 살려두어선 안 된다"라는 출애굽기 22장 18절에 의존했다. 칼뱅은 "성경은 마녀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들을 없애야 한다고 우리에게 가르친다. ······ 하느님의 이 법은 보편적 법이다"라고 말했기에, 칼뱅주의자는 사실 루터파보다 마녀들을 훨씬 혹독하게 다뤘다. 이에 비해 잉글랜드 국교회는 마녀사냥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1542~1736년 동안 잉글랜드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된 사람들은 1천 명 미만이었지만 칼뱅파가 지배했던 스코틀랜드에서는 1590년부터 90년 동안 4,400명이나 처형당했다. 잉글랜드에서도 칼뱅주의자들은 가는 곳마다 마녀사냥을 선전했다. 잉글랜드에서 최악의 해는 칼뱅파 장로회가 지배한 1645년이다. 잉글랜드 칼뱅주의자들은 그들의 능력이 되는 곳에서는, 마녀사냥을 선전했다. 제네바에서 유배 중이었던 Jewel 감독은[54]
1559년에 돌아오면서 그 대유행(the craze, 마녀사냥)을 가져왔다. 그리고 1590년대에, 뉴 잉글랜드의 아버지들이(Founding Fathers) 교육 받은 퓨리턴 기관인, 케임브리지 대학의 임마누엘 칼리지에서 칼뱅주의자 William Perkins가 그 주제를 강의했다. 칼뱅주의자들이 힘을 얻는 곳 어디에서든, 마녀들은 체계적으로 사냥당했다. 마찬가지로, 신앙적 장벽의 다른 곳에서, 퓨리턴적 성격이 있는 예수회원들이 마녀사냥을 대중화시켰다.
「A History Of Christianity」, Paul Johnson[55]
6.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 늑대와 양피지가 다루는 스토리의 큰 줄기가 바로 종교개혁이다.
- 고성소의 슈베스터 후반부에 가톨릭과 신교의 대립이 묘사되며 마지막화에서 파사우 조약이 언급된다.
- 크루세이더 킹즈 3에서 충분한 신앙과 헌신 레벨을 획득한 군주는, 즉 대중에게 충분히 경건한 사람으로 간주되는 군주는 기존의 민간 전통 신앙을 개혁해 체계화된 다른 기성종교들에 도전할 수 있는 종교로 만들거나, 천주교와 같은 기존 신앙을 '개혁'해 말 그대로의 개신교(천주교나 정교회 입장에서는 이단)을 만들어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