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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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죄부의 예시[1]
'''언어별 명칭'''
'''라틴어'''
Indulgentia
'''영어'''
(Letter of) Indulgence
'''독일어'''
Ablass(Brief)
'''한국어'''
면벌부(免罰符), 면죄부(免罪符), 大赦
1. 개요
2. 종교 개혁시대 무렵의 면죄부
4. 대사에 대한 설명
5. 비유적 용법으로서의 '면죄부'


1. 개요


로마 가톨릭의 대사(大赦, Indulgentia)중 에서도 특히 중세 시대에 발행되었던 '헌금형 대사'와 그 증서를 일컫는 말. 대사(大赦)가 이루어졌음을 증명하는 문서이다.

2. 종교 개혁시대 무렵의 면죄부


대사의 조건으로 헌금을 제시하는 문제는 15~16세기 독일 지방에서 논란이 되었는데, 당시 교황청에서는 15세기초 교회분열을 마감하고, 다시 로마로 교황청이 귀환한 형편에 로마시가 몰락해있었고 따라서 재정상태가 어려운데다가 나머지 로마 재건 사업과 성 베드로 대성당 축조와 교황령의 전쟁 비용 등으로 재정이 어려워지자 교황청에서 15세기경부터 '헌금 받고 대사 주기'에 맛을 들이고 만다. [2]
이러한 조건의 대사는 주로 독일 지역에 많이 선포되었는데 독일지역은 수백여개 영방으로 분리 되어있었고 신성로마제국 내의 성직 제후들은 황제를 제외하면 어느 누구의 봉건적 의무가 면제 되어있었고 성직 임명도 교황청에서 하게 되었다. 다른 나라는 성직 임명권이 국왕에게 귀속된데 반해 신성로마제국은 수세기간 교황-황제의 권력다툼 이후 대공위시기 권력 공백으로 교회 권력이 상당히 강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신성로마제국에서 선출직인 황제를 제외하면 가장 높은 선제후는 7인이었는데 3명이 성직제후인 대주교였다. 신성 로마제국 내에서 성직 제후들은 타국에서 볼수 없는 독특한 위치였는데 일단 대주교나 주교구의 교구의 주교 역할은 당연히하고 해당 대주교령의 세속적 제후직위까지 겸하는 막강한 위치였다. 마인츠 트리어 쾰른 대주교 같은 선제후는 물론이고 리에주 잘츠부르크 마그데부르크 같은 대주교령도 세속제후인 공작이나 백작처럼 영주민을 지배하는 막강한 지역이었고 십일조는 물론이고 세속적인 세금까지 같이 받을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1515년 결정적으로는 당시 신성로마제국 7선제후 중 한명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의 동생 알브레히트 폰 브란덴부르크는 20대 젊은 나이에 할버슈타트 주교와 마그데부르크 대주교를 겸임하고 있었다. 교회법의 겸직금지와 나이제한은 교황청에서도 무시하고 있었는데 교황 레오 10세는 가문빽으로 13세에 추기경이 될 정도였다.
알브레히트는 2개의 교구의 수입에 만족하지 못했는데, 마침 신성로마제국 최고서열 선제후인 마인츠 대주교직[3]이 매물로 나왔기에 2만 9천 두카트의 고액을 입찰해서 낙찰 받았다. 교황 레오 10세는 유력가에서 선제후직을 차지하여 합스부르크 가문을 견제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한편 마인츠 뿐만 아니라 쾰른이나 잘츠부르크 대주교직도 수입이 많고 영지가 넓어서 시가가 2만 두카트가 넘었다.
이 과정에서 알브레히트는 로마에 송금할 현금이 모자랐고, 유럽 최고 사채업자 야코프 푸거에게 2만 1천 두카트를 빌렸다.
교황청에서는 알브레히트를 도와줄 목적으로 1502년 조반니 메디치 추기경 시절부터 레오 10세의 수하였던 도미니코회 수도자 요하네스 테첼을 파견했고[4], 8년치의 대사 선포를 허가하고 수입은 대주교와 교황청이 반땡하기로 합의했고, 알브레히트 대주교는 초입세[5]를 제외한 금액은 푸거에게 갚기로 합의했다.
이런 과정이었으니 대놓고 헌금을 노리는 대사가 선포되게 되었다. 요한 테첼은 초기엔 알브레히트의 영지인 마그데부르크 부근에서만 면죄부를 판매하다가 점점 작센지역 전체로 퍼져나갔는데 어느 정도 팔리고 나자 판매수입을 극대화하기 위해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마저 의심케 만들 막장 발언까지 서슴지 않았다:

성모 마리아를 강간해도 깨끗이 벌을 용서 받을 수 있다.

현세에서 자손들이 낸 동전이 '''헌금함에 쨍그렁 하는 순간''', 조상의 영혼이 연옥에서 천국으로 직행한다.[6]

요한 테첼(1465-1519), 가톨릭독일 지역 면죄부 판매 위원장

그는 신성모독과 살인을 포함한 모든 죄목에 대해서 과거 조상과 현재의 신자들의 죄로 인한 잠벌 뿐만 아니라 '''미래의 저지를 죄의 잠벌'''도 대사를 통하여 용서받을 수 있다고 선전했다.
게다가 이 과정에서 판매원들의 개드립에 합쳐져서, 탁발 수도자와 온갖 추잡한 상인행렬이 성유물을 전시 판매 하였고 '''1점당 100일씩''' 연옥 면제라는 선동으로 돼지 뼈다귀, 쇠스랑, 지푸라기 나무토막 등을 성물이라며 팔아댔다. 물론 이런 성물은 당연히 진품도 아니었다. 알브레히트 대주교는 2만여점의 성물과 40여구의 성유물을 보유했고, 종교개혁을 지지한 작센 선제후 조차 2만9천여점의 성물을 보유했다.
마르틴 루터 등장이전에도 면죄부에 판매 자체와 상설적인 판매에 대해선 이미 교회내부에서도 비판적인 인식이 많았다. 15세기 초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현금형 대사에 대한 경계와 자제의견이 나왔었고 , 마르틴 루터의 비판이 처음 공론화 된것으로 알지만 츠빙글리나 에라스무스 또한 루터와 전혀 상관없이 비슷한 시기에 비판하고 나선것이다. 단, 가장 유명하게 알려진 마르틴 루터는 독일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소속 수도사제이고,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신학교수직을 맡고 있었는데 1516년부터 대사에 대한 비판을 동료 사제, 수도자, 신학교수들에게 강하게 비판하고 있었고 지지까지 받고 있었다.
결국 1517년 10월 근처 교구인 브란덴부르크 주교 제롬, 마그데부르크 대주교 알브레히트에게 '''파렴치한 신성모독을 중지'''하라며 항의를 했고 씹히자 비텐베르크 교회 앞문에 95개조 반박문을 게제하기 이른다.[7] 여러주교들에게 보낸 편지는 대부분 묵살 당했는데 당사자 알브레히트는 정당한 신학적 주장을 공개적으로 비웃었고, 대사판매원 요한 테첼은 루터의 라이벌이었던 프랑크푸르트 데어 오데르 대학 신학교수들에 대필을 부탁하여 이런 항의를 이단이라며 로마에 고소하기 이른다.
일단 마르틴 루터95개조 반박문는 자체는 루터가 교육받은 가톨릭적 세계관과 그를 바탕으로 가톨릭교회의 개혁을 촉구하는 내용이긴 하였으나 교황의 대사 권한과 효력 자체를 부정하고, 그에 따라 행위로 인한 보속과, 사면이라는 제도에까지 의문을 제기했다.
루터를 비롯한 반대자들은 주장하길 면죄부가 십자군 전쟁당시 사지로 향하는 병사나 순례객들에게 특수한 상황에만 있던 것이 이미 사문화 되었는데 15세기 말부터 다시 부활하여 16세기엔 아주 상설화 되어 판매되는것에 많은 교회 인사들이 불만이 많았다. 그리고 반대측의 핵심주장은 면벌이란 것이 죄는 이미 그리스도가 용서해주었는데 이미 가장 중요한 죄의 용서는 그리스도가 하고 찌꺼기만 남은 잠벌에 대하여 가톨릭에서 인간의 제도로 만들어서 돈내면 몸으로 때우는것 면제요 돈 안내면 고통을 받는다는 협박을 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평신도들은 실질적으로 죄의 대가인 연옥에서의 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면벌을 면죄부로 받아들인다'''는 비판[8]이었고, 마르틴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가들은 이에 더 나가서 가톨릭교회에서 면죄부의 근거로 주장하는 '선행의 보고' 개념이란 것을 부정했다.[9] 루터의 입장에서 죄는 어디까지나 죄고, 선행은 선행이다 이것을 통합하여 점수로 나눠서 깎아주고 에누리하는 시장상인과 같은 행위를 교회에서 한다는것은 교회의 권한을 넘어선 월권이라고 생각했다.(95개조 반박문 항목 참조.) 이런 입장은 가톨릭교회의 기존 입장과 섞일 수 없었고, 1518년 카예탄 추기경의 이단심문, 1519년 요하네스 에크와의 논쟁중 루터는 교황의 수위권과 공의회의 무류성을 부정했기 때문에 가톨릭교회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비판이 되었고, 이는 종교개혁을 통한 교회의 분열로 이어진다. 이후 종교개혁마르틴 루터의 행보는 해당항목을 참조.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대사판매원, 판매자 요하네스 테첼이라는 두 단어는 당시 독일에서 욕 자체가 되었고 교회의 비합리적 비성경적 관습에 실망한 지식인층과 영토의 경제적 수탈에 질린 영주와 제후, 가톨릭 성직자들의 과세와 성사시 과중한 요구로 불만이 많던 농민까지 등을 돌리면서 독일 전역이 종교개혁 열기로 들끓었다.
후일담으로 마그데부르크 대주교 알브레히트는 신성로마제국 최선임 선제후 직위인 마인츠대주교직과 마그데부르크 대주교, 할버슈타트 주교직을 겸직하며 죽을때 까지 유지했고, 마르틴 루터 사건 와중에 1518년 4월 레오 10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서임된다.
다만, 대사판매원 요하네스 테첼은 1518년 교황청 대사 밀티츠 추기경에 의하여 라이프치히 도미니코회 수도원으로 연금되었는데 면죄부 판매 과정에서 '일부' 신성모독성 발언과[10], 면죄부 판매금 착복, 예전에 사생아 둘을 둔 죄가 이유였다. 사생아를 둔 것은 아주 오래 전 일로 별로 문제 삼지 않았고 교회의 비호로 유부녀와 간통죄로 구속되었다가 풀려난 경험이 있었으며 사생아는 루터 잡아오려한 교황청 대사인 알레안더 추기경, 전후임교황인 알렉산데르 6세, 율리오 2세, 바오로 3세, 알브레히트 추기경도 사생아를 버젓히 두고 살았다. 판매자금 착복도 비록 라이프치히 시장 연봉의 10년치나 떼먹었다곤 하는데 떼돈을 번 알브레히트 추기경이나 레오 10세가 주범인 것은 명백했고 콩고물 줏어먹은 이만 처벌한것이다. 가톨릭에서 버림당한 테첼은 분노로 몸져 누워서 죽어갔고 감금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마르틴 루터가 위로 편지를 보낼 정도였다. 루터는 과격한 자신의 추종자들이 테첼을 암살하려는 시도를 여러번 말렸고 테첼은 그저 가톨릭의 하수인으로 봤기 때문에 위로한 것이다.
1518년 교황 레오 10세는 대사의 판매 권한과 면죄부의 효력에 대해서는 당시 교회에선 토론 자체를 인정치 않고 거론할 경우 파문한다 선언했다.
독일에서 면죄부 사건의 여파가 지속된지 몇년 후 1524년 알브레히트 추기경은 면죄부 판매가 막히자 이를 대신할 목적으로 기가막힌 계획을 세우는데 이번엔 면죄부가 아니라 성유물 판매였다. 역시 성유물을 구입하거나 참배하면 면벌이 있다고 인정하여 다시 돈을 주고 팔아서 몇달만에 마그데부르크 대주교구에서 390만년치 연옥면제권을 팔았다. 이 당시 판매한 성유물에는 '''최초의 인간 아담을 빚고 남은 흙, 본시오 빌라도가 손을 씻은 대야'''같은 어처구니 없는 것이었고 마르틴 루터가 분노하여 다시 '''당장 그만두지 않을 경우 모든 비난을 당신에게 돌리는 글을 독일 전역에 뿌리겠다'''라는 협박 편지를 보내어 항의하자 가톨릭교회에서 파문 당한 인물에게 존경하는 박사님께 사과한다며 다시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그만 두었다.

3. 명칭 논란


위와 같은 역사적 배경과 교파 별(개신교 및 천주교) 신학적인 관점 차이로 인해 명칭에 대한 논란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


4. 대사에 대한 설명


대사는 면죄부가 성립할 수 있었던 신학적 근거이다. 천주교에서만 인정하며 개신교에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면죄부를 '헌금형 대사'라 부르기도 한다.


5. 비유적 용법으로서의 '면죄부'


'헌금형 대사'라는 삽질의 여파는 여전히 남아있어서, 21세기에도 면죄부라는 말은 매우 부정적인 뉘앙스로 쓰인다. 이를테면 TV프로 중에서도 이미지가 안 좋거나 무언가 잘못을 저지른 연예인토크쇼 TV프로에 출연해서 자신이 받는 오해나 사연이라든가 상황을 구구절절 말하고 난 뒤 까임이 평소보다 확실히 줄고, 몇몇 연예인은 이것을 발판으로 다시 연예계 활동을 시작하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을 보고 이 프로는 잘못이 있는 연예인에게 면죄부를 준다고 일부 네티즌들이 표현한다. 이때 TV프로 이름을 면죄부도사, 면죄부캠프, 병심장 등이라고 비꼬기도 한다.
돈 많고 빽좋은 누군가의 악행 및 비행들을 미화하려고 하거나, 혹은 가벼운 솜방망이식 처벌만 내리려고 하면 '''면죄부를 준다'''고 한다.[11]
스포츠에 경우 특정 선수나 팀이 경기 안팎에서 구설수가 나와도 성적만 좋으면 면죄부를 주자는 팬덤과 여론의 어이없는 헛소리가 당연시하게 나오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게임스탑 주가 폭등 사건으로 공매도 문제가 불거지면서 면죄부가 중세에서 기독교가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한 공매도라는 우스갯소리가 돌았다.

[1] 1500년대 종교개혁 직전 스웨덴에서 발행된 것이다. 다만 발행자는 이탈리아 출신 고위 성직자인 조반니 아르침볼디(Giovanni Angelo Arcimboldi)이다.[2] 다만 헌금을 내고 대사를 얻는 행위가 이 때에 처음 나타난 것은 아니다. 이 시기에 돈독이 오른 교황청에서 선을 넘어서 남발해서 문제가 된 것이다.[3] 신성로마제국 최선임 제후로 황제 선거시 마지막 투표로 동수시 결정권한이 있으며 독일왕국 재상직이란 명예와 알프스 이북의 교황의 대리인이라는 수식을 들을 정도의 권력자였다.[4] 폴란드에서 이단심문관을 지냈고 오스트리아 티롤 지방에서 간음 등의 엽색행각으로 막시밀리안 1세에게 사형을 선고 받았으나 교회빽으로 석방된 전적이 있는 문제가 심각한 인물이었다.[5] 십자군 시기 전비 마련을 목적으로 성직제후에게 부과된 세금으로 첫해 수입을 몽땅 바친다. 이후 십자군 전쟁이 없어졌어도 관례적으로 계속 부과 됨.[6] 정상적인 기독교인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발언이다. 이후 종교개혁이 불붙은 건 이러한 가톨릭의 막장 행각들 때문이다.[7] 반박문을 게시한게 아니란 주장은 1960년대 가톨릭 교회사가의 주장으로 통설이 아니다. 기존 통설은 1548년 루터의 제자이며 동료 필리프 멜란히톤의 책에서 "1517년 10월 31일 직드접 교회 문짝에 박았다"였고, 현재 개신교 교회사가들 중에서도 "항의편지를 쓴 게 10월 31일이고, 교회 문짝에 붙인건 11월 중순"이라는 의견도 있다.[8] 16세기 초반 독일지역 농촌의 문맹률은 95%였고, 도시지역은 7~80%였다. 테첼이 과장선전을 하지 않고 문서대로만 팔았어도 대부분은 이해할 만한 지성이 없었다.[9] 여기서 일부 학자들은 루터와 북유럽의 언어적 죄의 개념과 로망스어 사용권의 언어적 개념을 들기도 하는데, 북구어에선 죄는 나눌 수 없는 개념이 강하다는 것.[10] 교황청 인장의 위력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동일하다는 발언[11] 현행법상 한번 처벌을 받은 죄목에 대해서는 다시 처벌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권력이나 금력을 이용해 뒷거래를 하거나, 일부러 판결에 악영향을 미칠만한 디테일한 부분들을 감추고 자백하여 최대한 약하게 처벌받고 넘어가 버리면, 나중에 무겁게 처벌하려고 해도 불가능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