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6U

 



[image]
미 해군의 초기 함상 제트전투기로, 제식 명칭은 Vought F6U Pirate이다.
1. 개발 배경
2. 진행
3. 구조와 특징
4. 후연기가 달린 엔진
5. 초기 테스트에서
6. 함대의 구박덩이


1. 개발 배경


내부에 함대파와 항공파가 항상 나뉘어 알력을 품고 있던 미 해군은 항공기에 있어서 새 지평을 열어준 제트 엔진을 도입하는 일에도 한발 뒤쳐질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더해 초창기 터보제트 엔진의 느린 응답성과 저속에서 뚝 떨어지는 안정성은 비좁은 항공모함 갑판에서 이착함하는 극히 어려운 비행이 일상화된 함재기로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전쟁 중 대량으로 건조된 에식스급 항공모함에서는 제트기의 발착함 작업이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해군 항공요원들은 해군의 높은 자리를 주로 꿰어차고 있던 함대파 장교들에게 항모의 고속화와 거대화를 주장했으나 이미 오랫 동안 갈라진 골이 깊어 쉽게 이해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제트 엔진과 피스톤 엔진을 동시에 갖춘 라이언 파이어볼 전투기를 통해 처음 제트 시대에 발을 내딛기 시작해서 최초의 함상 제트 전투기 FH 팬텀으로 차차 제트 함재기의 가능성을 깨달아간 해군은 장차 항모 탑재용 전투기의 미래는 제트기여야만 한다는 엄연한 사실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적기를 제압해 제공권을 얻고 함대를 호위할 함상 전투기가 이미 모두 제트 엔진을 단 육상용 전투기들에 뒤쳐지는 것은 용납될 수 없었기 때문에, 장차 해군의 함상 전투기는 모두 제트화의 길을 걸어가게 된다.

2. 진행


이렇게 해서 해군​용으로 개발된 함상 전투기 F6U는 해군기의 명문 보우트(Vought) 사가 기종을 막론하고 처음으로 만들어본 제트기였다. 해군은 이 기체를 심사에 통과시킨 후 '해적'이라는 의미를 담은 파이렛(Pirate)이란 별칭을 주었다. 이리하여 보우트 사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4년 12월 29일에 미 해군으로부터 제트 전투기 XF6U-1의 주문을 받았다. 전시 발주로 즉시 개발이 시작되어 완성된 시제기는 전쟁이 끝난 1946년 10월 2일에야 처음 비행했고, 양산형인 F6U-1은 1947년 2월 5일에 30대가 발주되었다. 이 항공기는 미국에서 개발된 제트 전투기로서는 처음으로 애프터버너를 부착한 기종이었으며, 처녀 비행에는 성공했지만 불량한 성능에 실망한 미 해군은 주문 물량을 대폭 줄여서 33대 밖에 생산되지 않았다.

3. 구조와 특징


F6U는 시가를 닮은 동체에 직선익을 낮게 배치하고, 에어 인테이크는 주날개 밑에 배치한 전통적인 기체 형상이었다. 고정 무장은 기수에 20mm M3 기관포 4문을 탑재하고 각각 150발 탄창이 제공되어 600발을 수용하고 있었다. 이는 12초동안 연사 할 수 있는 양으로 많지도 적지도 않았다. 새로운 추진기관인 터보제트 엔진은 연료소모율이 지극히 높아 많은 연료를 탑재해야만 했는데, 파이렛의 경우는 조종석 후방에 자리잡은 기관포 탄창과 항법장비실 뒤의 공간과 양 날개안에 220갤런, 그리고 중앙 동체 위쪽 공간에 150갤런의 연료를 채울 수 있었고 날개 끝에는 각각 140갤런들이 낙하식 보조 연료탱크를 장착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이 전투기는 모두 합쳐 2,460리터의 연료를 채운 날으는 연료탱크 같은 기체였다. 이것은 태평양 전선에서 긴 항속거리로 유명했던 제로센의 3배에 달하는 연료탑재량이지만, 파이렛의 실제 항속거리는 그 절반에 불과했을 정도로 연비가 좋지 못했다.
짤뚱한 기수에는 4문의 기관포 외에도 라디오 콤파스용 안테나와 항법을 위한 전파 수신기, 그리고 건 카메라가 수납되어 있었고, 에비오닉스 작동을 위한 배터리와 착륙등도 여기에 설치되었으며 대개 기수에 붙기 마련인 피토관은 수직 미익으로 옮겨졌다. XF6U의 개발이 시작될 때만 하더라도 아직 사출좌석이 실험 단계여서 원형기에는 폭발 볼트로 투기되는 캐노피가 대신 준비되었다. 또한 함재기는 보통 날개가 접히게 마련이었으나, 해군은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고속의 기류와 G-포스가 걸리는 상황에서 새로 도입한 얇은 층류익이 버티지 못할 것을 우려하여 고정식을 고집하고 있었는데, 이는 초기 함상 제트전투기들의 특징이기도 했다.
그밖에 양산 단계에서는 수평 미익에 수직 안정핀이 추가되었고 중량을 줄이기 위해 알루미늄 합금과 발사 목재를 샌드위치시키고 도료를 발라 굳힌 메탈라이트(Metalite)라는 신소재가 사용되었다.

4. 후연기가 달린 엔진


오직 3대만 만들어진 시험제작기 단계에서는 엔진으로 웨스팅하우스 J34-WE-22 터보제트 엔진을 장비하고 있었지만, 양산기는 애프터버너를 추가한 J34-WE-30으로 환장되었다. 그러나 이 엔진에 달린 애프터버너는 사용하기 전에 30초 동안 미리 예열하는 과정이 필요했기 때문에 실제 근접 공중전이 벌어지면 그 실용성은 거의 없었다고 하겠다. 그 대신 추력은 3,000파운드가 넘었고, 일단 후연기가 제대로 점화되면 4,300파운드에 달하는 추력을 낼 수 있어 나중에 수평 비행에서 음속을 돌파하는데 성공한 최초의 제트 엔진이 되기도 했다.
미국이 처음으로 자체 설계한 이 엔진은 제트 엔진을 먼저 실전에 투입했던 독일의 Jumo 004 엔진보다 약간 늦게 개발이 시작되었으나 추력과 신뢰성면에서 훨씬 앞서 있었고. 수명도 경이적으로 길었다. 심지어 제작사가 프랫&휘트니로 바뀌고 제작된지 40년 이상 지난 J34-48 엔진 2개를 단 셰비 트럭 "쇼크웨이브"는 지금도 에어쇼와 카 레이싱 대회에서 불꽃을 뿜으며 시속 600 km로 달려나가는 장관을 보여준다.
http://pan.best/sZZ2rhjM

5. 초기 테스트에서


사출좌석이 설치되고 수평미익에 스태빌라이저를 덧붙이는 개량이 더해진 양산 기체는 1949년 6월 29일에 처음 비행했지만, 그즈음 해군의 오랜 단골이었던 그루먼 사가 개발해 테스트를 개시한 F9F 팬서가 더 우수한 성능을 보여주었던데다, 레시프로 전투기보다 눈에 띄는 성능 향상이 없다고 판단되어 실전 부대에는 배치되지 않고 실험 및 평가 부대인 VX-3에 의해 해군 비행시험센터인 파툭센-리버 기지에서 사용된 것이 전부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함상 운용 테스트조차 하지 못한 33대의 기체가 비행한 시간을 모두 합쳐도 불과 945시간에 지나지 않는데, 이것은 1대당 28시간 밖에 날지 않은 꼴이며, 어떤 기체는 고작 6시간의 비행도 못채우고 창고에 처박히는 신세가 되었다.

6. 함대의 구박덩이


해군 승무원들도 이 전투기를 가리켜 아무도 파이렛이라는 근사한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이들은 못생기고 연료를 엄청나게 퍼먹는데다 둔하기까지 한 F6U를 가리켜 "땅돼지(groundhog)"라는 자조적인 별명으로 불렀다. 1대의 파이렛은 기수에 카메라를 갖추고 정찰형 F6U-1P로 개조되었지만, 물론 채용에는 이르지 않았다. 해군 항공국장 알프렛 프라이드 제독은 공식적으로 1950년 10월 30일에 F6U를 퇴역시키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로 인하여 이 전투기는 '''미 해군 역사상 가장 짧게 운용된 함재기'''라는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안게 된다.
771만 달러[1]나 되는 막대한 예산만 축낸 이 전투기가 그래도 해군의 시험 비행에서 공헌한 점이 있다면, 항모에 새로 설치될 제트기용 어레스팅 기어와 배리어의 육상 테스트에 잠시 쓰였다는 정도가 다다. 탄생과 동시에 시험과 테스트 비행만 거듭했던 파이렛은 이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텍사스에 있는 보우트 항공유물재단은 오랜 시간을 들여 탐문하고 추적한 끝에 두번째로 생산했던 2호기(122479)의 동체를 2012년에 한 고물 집적소에서 찾아냈다. 복원 팀이 달라붙어 재생하고 있는 No.122479는 작업을 마치면 일반에 공개될 예정이며 그것이 F6U의 유일한 현존 기체가 될 것이다.

[1] 계산해보면 대당 233,636달러로, 이보다 나중에 생산되고 훨씬 고성능인 F-86이 대당 15만달러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