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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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51'''
1. 개요
2. 제원
3. 파생형
4. 개발
5. 실전과 평가
6. 전후
7. 둘러보기


1. 개요


'''제식 명칭'''
99식 습격기 (九九式襲撃機(きゅうきゅうしきしゅうげきき) / 99식 군정찰기(九九式軍偵察機(きゅうきゅうしきぐんていさつき)
'''제식 기호'''
키51 (キ51) / Ki-51
'''영문명'''
Japanese Army Type 99 Assault Plane Mitsubishi Ki-51
'''연합국 코드명'''
소니아(Sonia)
일본군 육군 항공대가 태평양 전쟁기간에 사용한 공격기[1]/정찰기. 당시 개발 및 제조는 미츠비시에서 담당했다. 파생형으로 99식 군 정찰기가 있다. 이것도 역시 Ki-51이라는 같은 제식 기호를 가지고 있다.

2. 제원


습격기형 기준[2]
'''운용 국가'''
[image] '''일본 제국'''
'''운용 집단'''
일본 제국 육군 항공대
'''제조사'''
미츠비시 항공기
'''개발 연도'''
1937년
'''초도 비행 시기'''
1939년 6월
'''생산 시기'''
1939년 6월
'''승무원 수'''
2명
'''전장'''
9.21 m
'''전폭'''
12 m
'''전고'''
2.73 m
'''주익 면적'''
24 m²
'''익면 하중'''
117 kg/m²
'''자체 중량'''
1,873 kg
'''전투 중량'''
2,798 kg
'''최대 중량'''
2,920 kg
'''엔진'''
하26-II(Ha-26-II)[3] 공랭식 엔진, 950마력
'''프로펠러'''
가변 피치 3엽 프로펠러
'''최대 속도'''
3,000 m에서 424 km/h
'''항속 거리'''
1,060 km
'''상승률'''
5,000 m까지 9분 55초(습격기형)/8분 47초(군정찰기형)
'''실용 상승 한도'''
8,270 m
'''무장'''
주익 양측에 7.7 mm 89식 고정기관총(전기형)/12.7 mm 호103(Ho-103) 기관총(후기형) 2정
콕핏 후방 총좌에 7.7 mm 테4(Te-4) 선회기관총 1정
'''폭장'''
12 kg 폭탄 12개
50 kg 폭탄 4개
250 kg 폭탄 1개(특공용)
'''생산수'''
2,385대

3. 파생형


  • 키51(キ51) - Ki-51: 시제기.
  • 99식 습격기[키51](九九式襲撃機[キ51]) - Ki-51: 습격기형. 후기형에선 주익 양측 기총을 12.7 mm 호103(Ho-103)으로 교체한다.
  • 99식 군정찰기[키51](九九式軍偵察機[キ51]) - Ki-51: 정찰기형. 방탄판을 제거하고 카메라를 장착했다.
  • 키71(キ71) - Ki-71: 만슈 비행기에서 만든 시제 급격기/정찰기, 하112(Ha-112) 엔진을 장착하고 착륙장치를 인입식으로 바꿨다. 하지만 기대한 성능만큼 나오지 않았기에 생산이 취소된다. 시제기 3대만 만들어졌다.

4. 개발


'습격기(襲擊機)'란 것은 적 지상 시설(비행장이나 건물) 및 지상 부대에 대해 저공으로 폭격 및 기총 소사를 가하는 목적으로 개발된 일본 육군의 군용기로, 전투기폭격기의 중간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기준으로 보자면 급강하폭격기, 현대의 기준으로 보자면 근접항공지원공격기에 해당하는 특성을 지니는 것이 특징이다. 당시의 다른 국가들의 군용기와 비교하자면 독일Ju87소련IL-2에 비교할 수 있다.
단 본 기종 외에는 습격기란 말이 쓰였던 것은 Ki-93과 Ki-102을 뿐이었는데 Ki-93은 설계 중 종전을 맞이했고 Ki-102을은 야간전투기로서 방공 역할만을 행하였기에 오리지널의 습격기는 99식 습격기 뿐이었다.
1937년 육군성은 지상 부대와의 전투 협력용 항공기의 필요성에 의해 미츠비시에 키 51 시제기 제작을 명령하여 오오키 하시노스케(大木喬之助) 기사를 중심으로 한 미츠비시의 개발진들은 피스톤 엔진인 미츠비시 하26 2형을 채용한 단발복좌 형식의 단엽기를 설계하였다.
시제기는 고정각을 가진 양 날개에 7.7mm 기총 2정 및 뒷 좌석에 선회식 7.7mm 기총 1정이 배치되었다. 그러나 날개 내부의 7.7mm 기총은 실전투입 후에 위력이 떨어진다는 점이 지적되어 이는 전쟁 후반기에 12.7mm 기총으로 교체되었다. 폭탄은 당초 200kg까지 탑재가 가능했지만 그 무게한도를 넘길 경우 비행성능이 저하되는 점 때문에 한도중량을 달지는 않았다. 폭탄은 양 날개 아래에 탑재했다.
또 저공비행 임무의 특성상 지상부대로부터 반격을 받을 가능성에 대비해 당시 일본항공기로는 보기 드문 6mm 방탄장갑을 엔진 밑, 조종석 하단, 동체 아랫부분에 장착하였다.[4]
시제기의 비행 심사 결과, 성능 및 취급에서는 양호한 판정을 받았지만 기체의 진동과 착륙시 불안정한 문제로 양산형에는 주익 전방에 슬랫을 달아 문제를 해결하였다. 또 일부 기체는 생산과정에서 장비를 약간 변경하여 군용 정찰기로도 개조되었는데 이를 99식 군정찰기라고 불렀다. 이는 시계를 넓히기 위해 기체에 비해 캐노피가 크게 설계되었고 방탄장갑이 제거되어 카메라가 장착되었다.
당초 생산은 미츠비시가 맡아서 1,472기를 생산했지만 1944년 이후부터는 타치카와 육군비행공창에서도 1,000기가 생산되어 개조된 군 정찰기를 포함해 총 2,385기가 생산되었다.
1941년에 미츠비시 하112 엔진[5]으로 교환하고 랜딩 기어를 고정식에서 인입식으로 바꾼 99식 습격기의 변형인 키 71이 만슈 비행기에서 만들어졌지만 기대에 부응할 만큼의 성능향상을 보이지 못해 채용되지 못했다.

5. 실전과 평가


99식 습격기는 중일전쟁 말기부터 태평양전쟁 초반기에 이르기까지 사용되었으며 중국대륙과 남방전선에서 널리 활용되었다. 99식 습격기는 D3A 99식 함폭처럼 고정식 랜딩 기어여서 밀림에서도 튼튼했고 주익에 집중된 기총 덕에 정비 및 실용성이 뛰어나 불시착하거나 황무지에 긴급착륙해도 안정된 착륙성능 때문에 육군의 진귀한 보배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전쟁 말기에 이르자 일본군 병기의 전형적인 문제인 구식화를 피할 수 없게 되었는데 적 전투기에 비해 속력이 낮아 피해가 속출했다.[6] 또 다른 항공기에 비해 폭장량이 적고 항속거리가 부족하여 전면적인 전투에는 어려움이 뒤따랐다. 그래도 그 신뢰성 탓에 종전때까지 육군의 주력기로 활약하였지만 전황의 악화로 인해 동체 하부에 폭탄 250kg씩을 달아 카미카제로 소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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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카운티급 중순양함 HMS 서섹스(Sussex)에 들이 받아 먼지만 남은 Ki-51(...). 하필이면 때려 박은 곳이 방어력이 가장 튼실한 흘수선 부위였다.[7] 아무런 피해를 못준 허무한 공격이었다.
99식 습격기가 유명해진 것은 미국의 비행가 찰스 린드버그가 탄 P-38 라이트닝기와 싸웠던 것으로 린드버그의 윙맨 2기의 P-38을 상대로 선회전으로 빅엿을 선사하던 99식 습격기 1대가 린드버그의 공격으로 격추되었던 일이 있었다.린드버그의 교전에 대한 이야기

6. 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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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임시 공군에서 사용한 Ki-51
전후 99식 습격기는 해외에서 활용되기도 했는데 특히 국공내전 당시의 중국인민해방군과 인도네시아 독립전쟁때의 인도네시아 인민군에서도 이용하였다.[8] 심지어는 '''북한 공군이 이 기체를 운용하기도 했는데,''' 소련이 만주 작전으로 노획한 Ki-51을 북한에게 공여한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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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공항에 버려진 Ki-51들.[9] 1945년 10월에 촬영된 사진이다.

7. 둘러보기




[1]일본군 육군공격기 겸 경폭격기를 '''습격기'''라 불렀다. 이 개념에 대해선 후술한다.[2] 출처: Japanese Aircraft of the Pacific War, 저자: Francillon, Ph.D., René J[3] 해군명 '즈이세이 15형'[4] 이와는 대조적으로 태평양전쟁 초기 해군기는 방탄 등 방어력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후반가면 저 6mm 장갑으로도 부족하지만 아예 없는 것보다는 쬐~금 낫긴 하다.[5] 해군명 킨세이 62형. 혜성의 후기형이 장착한 그것[6] 슈투카도 이런 문제 덕분에 이미 영국 항공전에서 뼈아픈 대가를 치른 바 있었다.[7] 카운티급은 조약형 중순이라 깡통으로 유명했지만, 흘수선만은 튼튼한 함이었다(...)[8] 특히 인도네시아 공군 중앙 박물관에는 이 기체와 전투기 하야부사도 함께 보존, 전시중이다.[9] 이 기체들은 이후 남한의 북침을 우려한 미군이 전부 폐기시켜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