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 트윈스/1993년
1. 스토브리그
1.1. 코칭스태프 이동
미국에서 지도자 연수를 받다가 삼성과 결별한 천보성이 코치로 부임했다. 김봉기, 정순병, 양승관과 재계약을 포기했다.
투수코치였던 마틴 패튼의 계약이 만료되었다.
1993년 4월 6일 MBC 청룡 투수 출신인 오영일을 투수코치로 영입했다.
코칭스태프 인원이 14명에서 12명으로 축소되었다.
1.2. 선수 이동
1992년 12월 5일 이국성과 빙그레 조양근 간 트레이드가 이루어졌다.
나진균은 1992년을 끝으로 은퇴했다.
12월 23일 자유계약 공시로 트레이드 대상이었던 8명을 방출했다. # (이용철[1] , 김덕근, 문동식, 유동우, 강진규, 김성일, 오인, 최용호)
1993년 1월 27일 해태의 투수 오희주[2] 를 현금을 주고 데려왔다.
1.3. 신인 선수
- 포지션은 지명 당시 기준.
1.4. 기타
1992년 11월 18일 구리 선수단 숙소의 기공식이 있었다.
12월 22일 신임 단장으로 어윤태 상무이사가 임명되었다.
1993년 1월 31일~3월 5일까지 오키나와로 전지훈련을 떠났다.
2. 정규 시즌
2.1. 시즌 전 전망
이상훈의 입단과 김용수의 복귀로 전력이 업그레이드 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2.2. 4월
2.3. 5월
2.4. 6월
2.5. 7월
2.6. 8월
2.7. 9월
2.8. 상대 전적
- 분류 기준
- 남색은 압도(승률 ≥ .800)를 뜻한다.
- 청색은 절대우세(.650 ≤ 승률<.800)를 뜻한다.
- 하늘색은 우세(.550 ≤ 승률<.650)를 뜻한다.
- 녹색은 백중세(.450 ≤ 승률<.550)를 뜻한다.
- 오렌지색은 열세(.350≤승률<.450)를 뜻한다.
- 적색은 절대열세(.200≤ 승률<.350)를 뜻한다.
- 갈색은 압살(승률<.200)을 뜻한다.
2.9. 수상 및 기록
- 김동수 - KBO 골든글러브 포수 부문.
- 김상훈 - 개인 통산 1,000안타 달성(통산 5번째, 5월 19일 잠실 롯데전), 개인 통산 500타점 달성(통산 5번째, 5월 21일 대구 삼성전), 시즌 첫 100안타 달성(8월 6일, 전주 쌍방울전), 개인 통산 1,000경기 출장(통산 8번째, 8월 22일 부산 롯데전)
- 김용수 - 세이브 신기록 수입(101개, 4월 29일 잠실 OB전), 투수 최초 300경기 출장(5월 26일 잠실 OB전)
- 김태원 - 노히트노런 달성.(통산 8번째, 9월 9일 잠실 쌍방울전)
- 박종호 - KBO 최초 좌우타석 홈런 기록(5월 5일 인천 태평양전)
- LG 트윈스 - 팀통산 600승 달성(통산 3번째, 6월 10일, 잠실 OB전), 역대 3연전 사상 최고 입장수입 및 최고 관중동원 기록(4월 30일~5월 2일 잠실 해태전)[3] , 잠실구장 4일 연속 매진 기록(7월 22일)[4] , 잠실구장 시즌통산 최다관중 기록(115만 4,308명)
2.10. 선수별 개인기록
투수 타자
3. 포스트시즌
3.1. 준플레이오프
OB 베어스 1 : 2 '''LG 트윈스'''
3.2. 플레이오프
LG 트윈스 2 : 3 '''삼성 라이온즈'''
4. 총평
억대팔 이상훈의 가세와 노송 김용수의 부상 복귀로 전력 상승이 기대되었고 시즌 중반까지는 해태와 치열한 선두 경쟁을 펼치며 프로야구의 흥행을 주도했다. 해태와의 잠실 시리즈는 연일 만원관중을 이루었고 7월 스윕을 달성했던 삼성과의 잠실 시리즈에는 평일임에도 3경기 모두 매진을 이루는 위업을 이룬다. 8월 중엽까지는 선두 해태를 1경기차로 추격했다.
그러나 시즌 초반 뜨거웠던 박준태의 타격감이 서서히 식어갔고 전반기 맹타에 타점왕 경쟁을 했던 김상훈도 후반기 들어 부진하면서 공격력이 약화되었다. 다승 1위를 달리던 정삼흠도 8월 이후에는 승수를 쌓는데 힘겨운 모습을 보이며 조계현에게 다승왕 타이틀을 내줬다. 김기범, 이상훈, 김태원은 준수한 방어율에도 불운이 겹치며 10승에 실패했다. 결국 8월 중순 이후 LG는 급추락하며 9월 초 대구 삼성 원정을 기점으로 3위로 내려갔고 준플레이오프를 무산시킬수도 있었던 위치였음에도 4위 OB에게 시즌 막판 따라잡혀 3위 자리마저 최종전에서 빼앗기고 정규시즌을 4위로 마쳤다.
준플레이오프에서 주루사와 실책 등으로 자멸한 OB에 2승1패를 거두며 플레이오프에 올랐으나 삼성을 상대로 윤찬의 주루사로 2차전까지 모두 패한게 치명타로 작용하며 대구에서 열린 3,4차전을 모두 잡았음에도 정작 홈에서 열린 5차전에서 1점차로 분패해 한국시리즈 진출에 아깝게 실패했다.[5]
시즌 종료 후 주전 1루수 김상훈과 외야수 이병훈이 한대화와 신동수, 허문회를 상대로 해태로 트레이드되었고 2년 연속 3할을 친 송구홍의 군 입대 소식과 주전 포수 김동수의 방위병 복무로 인해 암울하게 1994시즌을 맞이하는 줄 알았으나...
[1] 삼성으로 이적[2] 1991 신인드래프트에서 해태가 김기태를 거르고 1차지명한 선수[3] 입장수입: 2억 9,351만 2,900원 관중동원 84,399명[4] 프로 최초 홈경기 연속 만원, 평일 3경기 연속 매진[5] 5차전도 김선진의 주루사가 뼈아팠다.